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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4. 15:10 Writer : 김홍덕

사람은 원래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기본적인 본성이 있다. 그것을 성경에서 <양심>이라고 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그런데 그런 마음을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면 옳은 것 처럼 보이지만, 다 가인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은 지금의 교리를 낳았다.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을 정하고 그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다 같은 부류의 생각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안에서 한편으로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보기도 하고 때로 자신도 연약하다는 것을 느낄 때, 다른 사람도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세상의 법이라는 세계에 들어가면, 사람이 더 강해져야 하고, 더 성공해야 인정하는 그런 모습에 매몰되어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는 그런 삶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늘 있다. 그래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 늘 숙연해 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최대한 감추려고 양을 치는 아벨과 같은 마음인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늘 억제하는 것이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라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는 교회 안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런 모든 생각들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려는 가인의 마음이고, 사람들은 이 마음을 크게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약해지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스스로 감추고자 하는 부끄러운 것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람에게 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것이다.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고,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53장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양은 그 연약함이 그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양의 운명이고, 그리스도의 운명이며, 사람의 연약함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함이나 강함으로 드려진 제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정말 초라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영원한 제사(히 10:12)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제사라고 말한다는 것은 이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어 온전한 제사가 되었기에 제사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는 어린 양과 같이 드려진 제사(사 53장)이고, 아담이 부끄러워 몸을 가린 것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벗겨진 체로 드려진 제사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양을 제물로 드린 아벨의 제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연약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연약한 모습으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가인의 제사요 가인의 마음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많은 교회가 그런 제사를 드리고 있다. 즉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예배의 제물로 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중앙에 선악과를 두셨을 때 부터, 육신 가진 연약함에 대한 두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그것은 부인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것을 부인하는 마음은 가인의 제사고, 그것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벨의 제사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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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3. 15:26 Writer : 김홍덕

그런 가인에게 있어 죽이고 싶은 대상이 있었는데, 그것은 같은 배에서 난 동생 아벨이었다.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양을 친다는 것은 우리가 다 아는 것 처럼 목자라는 것이고, 특별히 양은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가축이다. 그런 아벨의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으셨다는 것이다.


아벨에 대한 이러한 설명은 사람 안에 있는 양의 본성, 곧 사람 안에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서 나온 가인과 아벨이라는 두 아들은 선을 행하고자 하는 마음과 악을 좇는 마음이 사람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한가지 주의할 것은 여기서 말하는 선과 악은,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착한 행동과 악한 행동과 같은 행동이나, 법이나 도덕이나 규범을 기준으로 선하고 악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가인과 같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진 악함과, 하나님을 표현하려는 선함을 말한다.


이것에 대하여는 로마서 7장, 8장에서 바울 사도도 아주 깊이 있게 말씀하였는데, 바울이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쫓는다고 하였다. 이는 아담 안에서 "이것은 이렇게 해야 해"라는 기준으로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가인과 같은 아들과, 양을 치는 아벨이라는 아들이 나옴과 같은 것이다.


아담은 온 인류의 처음이고 상징이다. 아담이라는 말의 뜻이 '붉다'는 뜻이고, 이는 흙인 사람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아담은 모든 사람이다. 그 아담에게서 가인과 아벨이 나왔듯, 모든 사람은 하나님을 좇는 마음과 이를 죽이려는 마음이 그 안에 함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은 것은 선악과를 먹은 다음인데, <"선악과를 왜 만드시고 에덴에 두셨는가?"> 할 때, 선악과를 에덴 동산에 두셨다는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했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이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니 이것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에 합당한 선이고, 저것은 하나님의 진노하게 하는 악이라고 육신을 구분한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포스팅 했었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선악과 (35) - 선악과의 본질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선악과 (36) - 육신을 가진 것, 선악과를 만드신 것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선악과 (37) - 에덴동산과 선악과



그리고 사람들이 "이래서는 하나님처럼 될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바로 육신이 가진 연약함이었고, 그런 연약함에 대하여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보니, 그것이 부끄러워 가렸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결과이고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려 할 때 나타나는 반응인 것이다.


그런 반응의 뿌리가 "이것은 이래야 해"라고 스스로 기준을 세우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가인 역시 그런 뿌리에서 비롯되어 자기의 제사에 대한 의미를 스스로 부여했기 때문에 하나님의 결정에 항거하여 양을 치는 아벨을 죽인 것이다. 즉,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주신 양과 같은 인간의 연약함을 죽인 것이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육신이 죄의 법을 좇는다"고 고백했다. 즉 죄는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연약함을 가진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것을 죽여 없애고, 절제하고, 억제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을 바울이 말하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는 많은 경우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사람이 가진 본성, 특별히 연약하고 어쩔 수 없는 것을 절제하고 그것을 삶에서 죽여 없애듯 축출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데, 잠 자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먹지 않으면 안되는 육신인데, 먹지 않고 기도해야 신앙이 좋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이 바로 그런 죄를 말하는 것이고, 그렇게 육신의 연약한 본성을 통제하고 제어하는 것이 가인이 아벨을 죽인 것과 같은 마음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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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3. 12:15 Writer : 김홍덕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 그들이 선악과를 먹고자 한 마음인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처럼 되기 위해서 선과 악을 알아야겠다고 생각한 마음이 육신으로 표현된 것이 바로 두 아들 가인과 아벨이다. 왜냐하면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은 다음에 낳은 그들의 속심령 곧 본성이 성육신 된 존재가 아들이기 때문이다.



cain & ab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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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은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온 인류를 대표하는 대명사이기도 하다. 그렇다는 것은 오늘 우리가 까마득한 옛날의 한 살인 사건이 오늘 나의 이야기로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도 나도 모두가 다 인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람이라서 성경을 볼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역사 이래 모든 사람은 그 마음에 선과 악을 구분하는 마음을 가지고 나면 그 마음 안에서 가인과 같은 마음도 있고, 아벨과 같은 마음도 생긴다는 것이다. 이것은 스스로를 돌아보면 분명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우리 안에는 누구나 가인이 제사는 받아져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 처럼 "이것은 이래야 한다"는 마음이 있고, 그것은 돌아서서 후회하기도 하는 자아의 뜻을 아벨을 죽이듯 무시하고 "이래야 한다"는 의를 표출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오늘 우리에게 가인과 아벨이 주는 교훈인 것이다.


그렇듯 사람 안에 누구나 가인과 같은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가인은 농부라고 했다. 아담이 에덴에서 쫓겨날 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도 "자기의 근본인 토지를 갈게 하니라(창 3:23)"이라고 하셨는데, 이 또한 농사를 지어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서 재미 있는 것은 토지를 보고 하나님께서 <아담의 근본>이라고 하신 부분인데, 이것은 아담이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이기도 하고, "사람이 무엇을 먹을 것인가?" 할 때, 땅에서 나는 것, 즉 사람에게서 나는 것을 먹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은 사람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으로 부터 인정을 받아야 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과 가인은 농부였는데, 이는 사람이 사람을 경작하는 것, 즉 사람이 인정을 받기 위하여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의 세계에 충실하는 모습을 보이고 살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인데, 오늘 날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너무나 분명하게 설명하시는 말씀이신 것이다.


그런 사람, 사람에게 인정 받기 위하여 사람을 경작하는, 그러니까 사람이 좋아하는 것을 하고, 사람이 만든 법과 규칙에 열심인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이 가인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자신의 그런 수고가 하나님께서 열납하셔야 한다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자세히 보면 지금의 교회들이 보여 주는 모습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교회 안에 있는 논리들이 얼마나 사람이 경작하는 법에 따라 운영되고 있는지 모른다. 그 모든 것을 대표하는 것이 바로 <큰 교회>라는 단어라고 생각한다. 교회의 규모가 크다는 것이 아니라, 세상 사람들이 인정하는 화려함과 위대한 모습을 갖추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큰 교회고, 사람의 법을 경작하는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명제가 얼마나 오염된 것인지, 또한 세상에서 세상의 법을 따라 살아서 그들의 기준에 따른 성공해 놓고 하나님께서 기뻐 받으신다고 예배를 드리는 것은 바로 가인의 제사인 것이다. 그리고 그 제사는 가인의 제사와 같이 받아질리가 없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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