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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수가 끝나고 가장 먼저 한 것은 제사


홍수가 끝나고 나서 노아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제사(창 8:20)를 드린 일이다. 노아는 방주에 있던 정한 짐승과 새로 번제를 드렸다고 했다. 이것이 노아가 하나님 앞에 의인으로 여김을 받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개인의 신앙에서 본다면 이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만나서 자신이 세상의 것으로는 자신의 정체성을 채울 수 없다는 고백을 한 사람이 고백 다음에 하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세례 따로 제사 따로가 아니라는 것이다.



Noah offering sacrifice
Noah offering sacrifice by Lawrence OP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수동 운전을 배울 때 가장 핵심은 등반이다. 미끄러지지 않게 브레이크에서 발을 떼면서 바로 악셀을 밟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동작이 다르다고 다른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등반이라는 것은 이 두가지 하나로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세례와 제사는 같은 연장선 상에 있는 것이다. 세례를 받은 사람이 하나님께 자신의 삶을 드리지 않는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분리되어 있지만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


사람들은 제사를 하나님께 자신을 바치는 것이라는 것이라 알고 있다. 그렇다면 사람을 하나님께 바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사람을 죽여서 제단에서 불 태워야 제사인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니 소를 대신해서 드리는 것인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원하신다. 몸을 원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 존재감을 표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존재와 또한 성품을 표현할 형체가 필요하신 분이다.


로마서 12장에서 바울 사도는 <"너희 몸을 산 제사로 드리라">고 했는데, 우리의 몸을 산 제사로 드린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하나님의 존재와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아라는 것이다. 즉 영이신 하나님의 형상이 되어라는 것이다. 그것이 제사이고 사람을 만드신 목적인 것이다.


제사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그 성품과 존재를 드러내실 수 있게 우리가 하나님께 자아를 개방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회개고 회개의 증거가 세례이며, 세례를 받고 제사로 드려진 상태를 구원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채워지는 성전인 질그릇 같은 사람


사람은 늘 뭔가를 하려하고 자기 안에 무엇이라도 채우려 한다. 하다 못해 감각적 유희라도 채우려 한다. 그것은 사람은 그릇과 같이 속이 비었고 무언가를 채워야 하는 존재이다. 그것을 우리는 갈급함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질그릇 같다고 한 것이다.


예전에 태권도를 하는 로봇인 로보트 태권브이라는 만화영화가 있었다. 그 태권브이가 태권도를 하는 로봇이 되기 위해서 그 안에 태권소년 훈이와 태권 소녀 영희가 탑승할 수 있는 자리가 있고, 반드시 훈이와 영희가 탑승을 해야 비로서 <태권>브이가 되는 것 처럼,



로보트 태권브이
로보트 태권브이 by Steven Ha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태권브이는 태권소년 훈이가 조정해서 태권브이가 된다>


사람도 사람을 하나님께서 만드실 때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으로 지으셨고, 그렇게 하나님께서 거하심으로 창조의 목적인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산제사로 드리라 했고,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성전이라고 한 것이다.


즉 사람의 끝 없는 갈급함은 하나님의 성품이 채워져야 비로서 해갈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그치지 않는 갈급함을 학문과 부와 명예와 쾌락으로 채우려 하는 것이다. 그것은 홍수가 난 물을 마시는 것이고 바닷물을 마시는 것이다.


그렇게 세상의 것으로 자아 정체성을 채우는 것은 세상의 것이 좋아 보이기 때문이다. 마치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았던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위대함을 낳고 넘쳐나는 물을 만들었지만 그것은 우리를 살리는 것이 아니라 죽이는 것이다.


즉 육신으로 목숨이 살아 있다고 해도,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보면 가지 않는 시계와 같은 존재일 뿐이다. 바로 그런 상태에서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세례이다. 즉 넘쳐나는 물과 같은 세상의 학문과 철학과 부와 명예와 쾌락으로는 인간으로서의 정체성이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세례인 것이다.


바로 그것을 알게 하시는 말씀이 노아의 홍수에 관한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그 홍수에서 피할 수 있는 방주가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서 성공하고 화려하고 좋은 건축자재가 필요한 곳이 아니라, 부정한 상태로도 늘 홍수를 피할 수 있을 때 비로서 교회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홍수가 끝나고 노아가 제사를 드렸다는 것은 세상의 것으로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제사를 드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비로서 노아의 홍수를 믿는 신앙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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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숨 vs. 생명


세례가 물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을 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 까지는 이해가 어렵지 않지만, 여기서 말하는 물이라는 것이 세상의 지식과 명예와 부와 쾌락이라는 것으로 가면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그런 말을 우리의 육신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공부를 한다는 것이 죽은 것인가?'와 같은 의문을 가지게 된다. 공부든 돈을 모으는 것이든 심지어 쾌락도 다 살아 있어야 가능한 것인데, 그것을 한다는 것이 물 속에 잠기는 것과 같이 죽을 곳이라고 하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육신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이는 성경이 말씀하는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이 목숨에 관한 것이 아니라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말씀을 하실 때도 목숨과 생명이 분명히 구분이 되어 있다.


목숨은 그야말로 육신의 생명, 곧 생물학적으로 살았는가 아닌가의 기준이 되는 관점으로 볼 때 사용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이 말하는 생명은 다른 개념이다. 이것은 생물학적으로 또한 의학적으로 살았는가 죽었는가 하는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존재 목적을 잘 나타내고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에 대한 개념이다. 그러니까 시계는 시간을 가르키지 못하면 죽었다고 하고, 흔한 말로 '맛 갔다'고 한다. 이는 심지어 스포츠 안에서도 흔히 이야기 하기도 하는 그런 개념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살았다 죽었다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기록하여 사람들에게 읽게 하신 목적이자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그 사람 안에 있으면 살았다고 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그 목적을 벗어난 상태의 삶을 살면 목숨은 붙어 있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세례라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세우신 하나님의 규례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데, 그 목적을 이루려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학문과 부와 명예와 쾌락을 추구하고 누리는 것이 인간의 본질이고 삶의 목적이라고 여기는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례는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세상의 것을 추구하고 이루는 것에 있다고 여기며 살다가 그것은 마치 물에 빠진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내가 죽게 된다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떠나는 깨달음을 기반으로 하는 신앙고백이 세례라는 것이다.




삶이 허무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생명이 없는 것


사람들은 평생을 살고서 나이가 들면서 허무함을 느낀다. 다시 말해서 갈증이 해갈되지 않았고 배 고프다는 것이다. 더 이상 육신의 힘으로 뭔가를 도모하지 못할 나이가 되어서 삶을 돌아 보면 그저 허무하다고 깨닫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을 <공수래 공수거>라고 하기도 한다.


사람이 사는 동안 셀 수도 없을만큼 많은 순간 "죽겠다"하고 또 죽고 싶은 마음 드는 순간이 얼마나 많았는데, 그렇게 살아낸 삶의 끝에 그냥 <빈 손으로 왔으니 빈 손으로 간다>라고 한단 말인가! 그것이야 말로 인식 세계 안에서 더할 나위 없는 허무함인 것이다.


그것이 바로 죽은 것이다. 그렇게 죽도록 연명하고 살아 낸 인생의 끝에 아무것도 없다니! 그럴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이 그렇게 힘들게 살아야 하는 목적과 이유는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만든 어떤 기계도 만든 목적이 있어서 엄청난 열을 내고 소리를 내면서 움직이는 것이다. 하물며 그렇게 목적을 가지고 기계를 만드는 사람이겠는가?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그렇게 살 수는 없다고 깨닫는 것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세례를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고백은 하나님께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 이전의 방식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다는 것, 세상을 좇아 살 수 없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아주 특별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열심하 수고한 결과를 신께 또한 세상에 바쳐서 그 소산을 얻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과 나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존재의 하나님을 섬기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존재의 하나님이라는 것은 사람이 수고한 결과를 받으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나는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람 또는 존재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아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 세상에서 수고한 결과물인 박사 학위나 돈과 명예를 들고 가서 하니님께서 주셔서 감사하다고 드리는 것은 하나님을 잘못 알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하나님께 갈 때, 인간이라는 정체성 그것 하나만 가지고 가면 된다.




살았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 인간이라는 정체성만 드리는 것


하나님께 인간이라는 정체성 하나만 가지고 간다는 것에는 신앙도 필요없다. 그러니까 신앙생활 잘했다는 성과도 필요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장 귀하게 여기시는 것은 그저 하나님 앞에서 나는 죄인이고, 연약한 인간이며, 선악을 판단하던 존재였으며 스스로를 구원하거나 스스로 존재 목적을 알 수 없는 존재였다는 고백 그것이다.


그런 고백이 바로 세례의 고백이다. 그런 고백이 바로 홍수와 같은 세상의 모든 것, 그리고 세상이 추구하는 것, 또한 세상이 귀하게 여기는 명예와 부귀와 쾌락으로는 나의 정체성을 알 수 없었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전에 그것을 하나님께 드리려 했으나 그것이 아님을 알았다는 고백이라는 것이다.


바로 그것이 세상에 빠져서는 죽을 것 같다고 고백하는 것이고, 그렇게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존재의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로서 행위와 소유를 드리려 했던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볼 때 죽은 것이었다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죽은 것이다. 천지를 만드시고 그것을 표현하고자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께서 사람의 수고를 원하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손수 만드시고 주관하시는 세상에서 수고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아이폰을 스티브 잡스에게 갤럭시S를 이건희 회장에게 선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주셨지, 세상의 소산을 다시 가져오라고 사람에게 명하시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고 산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 아래서 보면 생명이 없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이고 그것이 홍수와 같은 물이다.


그러므로 그것에서 인간의 정체성을 찾을 수 없고, 나의 갈급함을 채울 수 없다고 고백하는 것이 바로 물 속에서 살 수 없음을 깨닫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세례요, 홍수가 나에게 의미가 있어지고 노아 홍수를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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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15) - 홍수의 핵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7. 17. 11:48 Writer : 김홍덕

성경을 믿는다는 것


지속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성경에 기록된 믿기 힘든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것은 다 사실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시기 위하여 육신이라는 형이하학적 실체를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현상계 내에서 분명한 사건을 주관하시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가진 상식이나 사람이 만든 학문 세계에서 성경에 기록된 초 자연적인 사건을 의심 없이 믿는 믿음이 아니라, 왜 하나님께서 그런 일을 사람에게 보이셨는지를 아는 것이다.


노아의 홍수도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바가 있다. 그것은 '범죄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심판하시니 행동에 조심해라'는 경고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행함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시고 존재의 하나님이기시 때문이다.


사람들은 다 지동설을 믿는다. 그건 대단한 것이다. 지구에 먼지보다 더 작은 덩치로 붙어 사는 인간이 지구가 돈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은, 오래 전 홍수가 났다는 것을 믿는 것 만큼이나 힘든 것이다. 그래서 옛날에는 눈에 보이는대로 태앙이 돈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과학이 발달해서 사람이 우주에도 가고 하니 지동설이 사실이라고 알려졌지만 정작 사람들이 지동설을 믿는다는 것은 계절에 따라 다른 옷을 입기 때문인 것이지, 지구가 도는 모습을 봤기 때문이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계절에 따라 옷을 바꾸어 입는 것과 아침에 일어나고 밤이 되면 잠드는 생활이 지동설을 믿는 믿음이지, 과학자들의 말을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이와 같이 노아의 홍수도 성경 말씀을 읽는 사람들이 자기 안에 노아와 같이 홍수를 겪고 그것에 맞는 신앙 여정이 있어 삶의 변화와 자신의 사건으로서의 고백이 있을 때 그것을 믿는 것이 되는 것이지, 홍수의 기록들을 상식을 넘어 무조건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홍수 때와 같이 모든 것이 죽어야 하는 것인데, 우리 자아 안에 어떤 것이 죽어야 하기에 하나님께서 노아의 홍수를 통하여 그것을 깨우치시려고 홍수를 일으키시고 또한 기록하여 오늘에 이르게 하셔서 우리가 읽고 묵상하게 하셨는가? 그것이 노아 홍수의 핵심인 것이다.




진정한 세례의 고백이 있어야 홍수를 하나님의 역사로 믿는 것


앞에서 우리는 이 홍수가 개인 신앙의 여정에 있어 <세례>와 같은 것이라고 했다. 세례라는 의식이 사람을 물에 잠궜다가 건져내는 종교적 규레인데, 왜 이것을 사람에게 행하게 하셨고, 지금은 기독교 계통에 있어 신앙인의 증서로 까지 활용되는가를 안다면 홍수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례 의식과 같이 사람이 물 속에 들어가면 숨을 쉴 수가 없어서 죽게 된다. 그래서 사람들은 물에 빠지면 나오려 하고 또 나와야 한다. 그것은 사람이 물 속에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그것이 세례의 목적이다.


사람이 물 속에서 살 수 없듯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은 세상의 온갖 학문과 쾌락 속에서 살 수 없다.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세례다. 물 특히 큰 물은 성경에서 늘 세상을 가르키고 있다. 그것은 홍수도 마찬가지이다.


이 홍수는 세상을 뒤덮는 큰 물이다. 사람은 물이 필요하지만 자신이 빠지는 큰 물에서는 죽게 된다. 그 자신이 빠지는 큰 물, 곧 홍수는 하늘의 창이 열리고 땅의 깊음이 터져서 넘쳐나는 물이었다. 그것이 노아의 홍수에 나오는 큰 물이다.


사람들은 "왜 사느냐?" 또는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끝 없는 정체성의 갈증과 배고픔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비단 그런 갈증 뿐 아니라, 돈과 명예와 같은 세상적인 것에 대한 갈증과 배고픔도 늘 넘쳐난다. "나는 아직도 배 고프다"라고 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의 물, 즉 신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간구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세상의 철학과 학문 그리고 쾌락에서 자신을 찾으려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마음은 결국 그 두 가지를 만나게 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섬기는 것에 세상에서 좋다고 하는 돈이나 좋은 시설이나 좋은 이론이나 좋은 즐거움을 더하는 것이다.


그것이 돈으로 치장한 좋은 교회를 건축하고, 또한 세상에서 성공해서 교회에서 장로가 되고, 또 교회는 그것을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으로 여기고, 그래서 또 다시 헌금하는 악순환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위대함이고 네피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위대함이란 그런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아 네피림을 낳았다고 했다.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또한 하늘의 창이 열리고, 땅의 깊음이 터져서 만나게 된 큰 물로 표현된 것이다. 그것이 홍수다. 그리고 그 홍수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위하는 세대의 모든 생명이 죽은 것이다.


그리고 그 홍수 안에서 방주와 같이 살아나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그것은 당대의 <의인> 노아와 그의 가족, 그리고 그가 태운 짐승들이었다. 이것이 세례인 것이다. 그리고 그 세례가 있는 교회인 것이다. 


이는 방주가 사람은 홍수 속에서는 사람이 살 수 없으므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사람이 홍수 속에서 살 수 있다면 방주는 필요 없다. 그러므로 방주는 개인의 신앙에 있어 세례와 같은 것이다. 방주를 만들었다는 것은 홍수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세례가 바로 그런 것이다. 사람이 자아 정체성에 대한 갈급함을 채우기 위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세상의 것이 합하여져서 범람하듯 넘쳐나는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유흥과 심지어 종교들 안에선 하나님께서 살았다는 호흡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세례인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이 세상이 주는 것으로는 살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과정을 거친 사람은 자기 안에 홍수를 거친 사람이고 그것이 바로 세례를 받은 삶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은 지동설을 믿기에 계절따라 옷을 바꾸어 입듯이, 자신의 삶도 다른 삶을 살게 되고, 당연히 삶을 다르게 하는 가치관도 다르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세례를 받은 믿음이고, 노아의 홍수가 하나님의 역사라는 것을 믿는 믿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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