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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정론에 대하여..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7. 11. 18:10 Writer : 김홍덕

예정이라는 것을 하나의 논제로 해서 예정론이라는 것을 교회 안에서 많이 말하고 있다. 이른바 하나님께서는 일어날 일을 다 알고 계신다는 의미인데, 어떻게 보면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심을 나타내는 것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면?' 이라는 질문들을 양산하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선악과와 타락도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것인가? 말라기에서 하나님께서는 에서는 미워했다고 하셨는데, 이와 같이 에서와 야곱과 같이 하나님께서 이미 그 일을 다 알고 계시다면 사람이 뭐하러 힘들게 애쓰고 살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발생하게 된다.


그럴 경우 사람들은 자신의 문제로 가져와서, 어차피 구원 받을 사람 정해져 있다는데... 와 같은 태도를 보일수도 있다.


하지만 예정이라는 것은 살아가는 육신의 문제들에 대하여 어떤 일들이 일어날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신 것이라고 보면 시야가 좀 좁아진다. 


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이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이나 <행동>인가 하는 문제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행동이나 행위의 결과 자체가 아니라, <너는 누구냐?>하는 문제다.


그러므로 사건에 대한 예정을 가지신 하나님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예정, 그리고 존재에 대한 목적을 가지셨다는 의미로 봐야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개를 만드셨다면, 개는 짖을 것이라는 것을 예정하셨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행위가 아니라 존재를 정하신 것이다.


그것이 뭐가 다른가 싶겠지만, 개가 어쩐 존재인가는 빼고, 하나님께서 '조금 있으면 너희 집 개가 짖을 것이다'하시는 것이 예정이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개에 대하여 어떤 일이 있으면 짖도록 만드셨다는 것이 개에 대한 예정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예정하신 모든 것은 사람을 하나님의 품성대로 될 것이기 때문에 그 창조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하신 뜻이고 예정인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예정은 하나님의 생명의 법과 섭리가 정해져 있기 때문에 정해진 것이지, 하나 하나의 사건에 대하여 일일이 정하시는 것이 주 목적은 아니라는 것이다.(물론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바를 이루기 위해서 개별적인 사건들을 관여 하시기도 한다. 그것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예정이라는 것은 한편으로 보면 하나님의 섭리 안에서 경륜을 거쳐낸 사람의 고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아직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이 일에 대하여 어떤 생각을 가지셨는지 알려고 하는 것이 많은데 그것은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면 큰일 난다고 할 수 있지만, 그것은 종의 신앙이다. 아들은 그렇지 않다. 아들은 어떤 행동이 좀 불미스럽다고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사라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반대로 종은 행위의 결과로 어필하는 것이기 때문에 결과에 종의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 그런 생각을 하게 된다.


그리고 말라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태어나기 전에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는 미워했다는 말씀이 있는데,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님께서 이미 정하신 것 처럼 기록되어 있다. 이 말씀을 가지고 예정을 한번 이야기 해 보자.


기본적으로 에서와 야곱은 쌍둥이다. 그것은 같은 유전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나 안에 둘이 있는 것, 둘이 하나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것을 알기 위해서 로마서를 한번 보자. 로마서 7장에서 바울사도가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나를 건져낼까?' 하는 부분이 있다. 이것은 육신으로는 사망의 법을, 영적으로는 생명을 법을 좇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탄식한 바울의 모습이다.


그런데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바울의 마음은 완전히 바뀌게 된다. 그런데 잘 읽어보면, 바울의 마음이 그렇게까지 급변할 만한 사건이 그 사이에 없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난데없이 바울의 마음이 바뀌어서 "예수 안에 있는 나에게 정죄함이 없다"고 선언하면서 기뻐하게 된다.


이것은 모든 사람이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에서의 마음과 반대로 사랑하시는 야곱의 마음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바울 자신이 그것을 솔직하게 고백한 것이다. 


이는 에서와 야곱이 태어나기도 전에 하나는 미워하고 하나는 사랑했다는 표현과 사건을 통하여 모든 사람들의 본성 안에는 하나님께서 미워하실만한 죄의 법과 또한 하나님의 법이 동시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예정된 내용인 것이지, 에서는 미워하는 것이 예정된 것이고, 야곱은 사랑하기로 예정되었다고 보는 것은 나무만 보는 것이다.


여기서 볼 수 있는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예정은, 한 사람 안에 그런 두가지가 다 있다는 것을 하나와 같은 쌍둥이를 들어서 그 마음을 나타내신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에서는 미워했고, 야곱은 사랑했다는 것으로 표현하신 것이다.


실제로 이 두 형제는 나중에 큰 갈등을 겪게 되지만 막판에 야곱이 에서를 볼 때, 하나님을 보는 것 같다고 했다. 하나님께서 미워한 에서를 하나님께서 사랑한 야곱이 하나님을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에서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라기 보다, 에서를 통해서 하나님의 섭리를 깨달았다는 의미이다. 이런 깨달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는 말씀 안에서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렇다면, 왜 바울은 자기 육신이 곤고한 사람이라는 그것이 그렇게도 기쁨이 되었는가 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성경에서 별다른 공로 없이 가장 무난하고 평안한 축복을 받은 이삭에게서 난 자식 중에서 하나님께서 왜 미워하는 것이 있겠는가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는 블로그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포스팅하는 내용 중의 하나인데,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이 포인트 이다. 바울도 자신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그 육신은 늘 사망의 법을 좇고, 또한 자기 안에 하나님을 아는 영이 있는데 이 영은 또 반대로 늘 하나님을 사모한다고 했다.


이것은 비단 바울이나, 또 쌍둥이 에서와 야곱의 문제가 아니라,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을 믿는 모든 사람의 문제이고 주제이기도 한 것이다. 육신을 가졌다는 것은 늘 그렇다는 것을 예정하신 것, 즉 그렇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정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정은 사람에게 일어날 사건이나 일을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인간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 그리고 운명을 예정하신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그 뜻을 따라 사람을 경영하시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필요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 뿐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그 목적으로 인하여 사람들에게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이지, 사람에게 일어나는 일들을 예정하신 분은 아니라는 것이다.[각주:1]



결론적으로 예정이라는 것은 어떤 행동이나 결과를 예정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목적을 정하셨다는 것이고, '예정하셨다'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정하신 섭리를 거쳐낸 사람의 고백이라는 점이 예정에 관한 정확한 관점이다.

  1. 물론 하나님께서는 사람에게 일어나는 사소한 일들도 다 아시지만 그것은 목적하신 바가 아니다.
    그것은 목수가 대패로 나무를 깍으면 나무가 일어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경영하시면 어떤 일이 일어난다는 것을 아신다는 것이지, 연관 없는 일이 일어날 것을 아신다고 하는 것이 아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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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먹는 것에 대한 말씀이 많다. 먹어도 되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이 대표적이다.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 한국인 숙소에 현지인 아줌마가 아이를 데리고 식모를 하고 있었다. 



먹고살기
먹고살기 by 만박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그런데 어느날 돼지고기 두루치기가 나왔다. 그래서 저 아줌마는 이슬람교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맞다고 했다. 그럼 돼지고기 만지지도 못할텐데 어떻게 이렇게 요리를 했내고 물었더니, 고무장갑을 끼고 하면 용인된다고 했다.


어떻게 보면 유머 같지만 우리 많은 기독교인들도 이렇게 해석한다. 안식일이나, 먹는 것 같은 것들이 다 그렇다.


우리가 성경을 인도네시아에서 이슬람 사람들이 돼지고기에 대하여 해석하려고 하는 것과 같이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단호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한마디로 정의하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고, 또한 사람이 살아가는 행위에 대한 행위 규범으로 보기 때문에 그렇다.


흔히들 사람들이 구약은 율법이고, 신약은 복음이라고 하지만, 신약의 말씀도 행위 규범으로 또 문자 그대로 행애야 하나님께서 인정하신다고 믿는다고 생각한다면 서기 3,000년에 살아도 그 사람은 구약시대를 살고 있고, 신약도 복음이 아닌 율법인 것이다.


흔히들 문학에서 행간을 읽어라는 말이 있다. 심청전이 있는데, 심청전에는 효라는 말이 거의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심청전은 효에 관한 소설이다. 저자가 읽는 사람들이 효심을 가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쓴 소설이라서 그렇다.


성경도 그렇다. 예수님께서 부모를 두고 나를 좇으라 했다고 부모를 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도 사람 앞에서 아버지로 나타나신 마당에 부모를 버려야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부모로 부터 온 유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따르라는 말씀)


먹는 것도 마찬가지 이다. 지금이 신약 시대라고도 하는데, 지금 돼지고기를 먹지 않아야 신앙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구약시대의 신앙이고, 신약도 율법이고 행위 규범인 사람의 신앙일 뿐이다.


자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심청전을 읽고서 부모님에 대하여 효도해야겠다고 깨닫고 그렇게 살았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바다에 몸을 바쳐야할까? 그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심청전을 기록한 목적이 그 사람 안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성경을 기록한 목적은 육신으로 오신 예수께서 그리스도라는 것과 예수님과 동일하게 육신을 가진 인생들도 그렇게 살수 있고,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때로는 먹는 것으로, 때로는 예식과 규례로, 또 때로는 법으로 말씀하신 것이다. 결국 그런 모든 것은 성경을 기록하신 목적을 아는 사람에게는 자유가 되는 것이고, 목적을 모르는 사람을 알때까지 그 모든 것을 문자로 지켜야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십일조를 반드시 내어야 한다고 말하려면 돼지고기도 먹지 않아야 하는 것이다. 어느 것은 문자대로 어느 것은 의미로 그렇게 맘대로 해석하면 안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이루어진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든 말든 상관없지만, 성경 말씀의 목적이 아직 이루어지지 않아서 문자적으로 또 행위로 지키는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으면 안되는 것이다.


성경에서 먹는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먹는 것과 먹는 사람은 같은 존재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유월절을 보이신 것이다. 예수님의 피와 살을 먹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이 되라는 것이지 실제로 피를 먹으라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자기 안에 없다면 포도주 먹는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먹는 것에 대한 설명을 간략하게 한다면, 굽이 갈라진 것은 신앙에 구분이 있다는 의미고, 되새김질은 말씀을 묵상하는 것이며, 지느러미는 방향성을 가진 것이며, 비늘은 세상과 같은 바닷물과 자신이 구분되어야 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모든 것은 다 방향성이 있다. 다시 말해서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음식을 금한다고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성품인 그리스도의 삶이 있으면 그렇게 그 말씀을 주신 목적을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즉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자기 안에서 발견한 사람들은 이미 자기 안에 행위로 신앙 생활을 하는 것과 아닌 것에 대한 구분이 있고, 또한 늘 말씀을 묵상하고 있으며, 또한 늘 하나님을 향하는 방향성이 있고, 또한 세상에 살지만 세상과 다른 삶을 사는 것(요17) 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이러한 것들에 대하여 해도 되고 안해도 되는 것으로 말씀하시고, 자신의 행위로 인하여 사람이 시험에 들게 된다면 하지 않겠다고 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성경의 말씀을 읽을 때, 이것이 지금 우리에게 돼지고기 먹는 것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려 하시는 것인지를 아는 것이 말씀을 주신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러므로 목적을 아는 사람은 그것에 대하여 자유하고, 해도 되고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자기가 먹고 싶다면 삼겹살을 먹어도 되고, 그것이 아니라 누군가 나의 그런 모습을 보고 하나님 믿는 기회를 잃을 것 같다면 먹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이런 맥락이다. 우리에게 말씀은 하나님께서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알았다면 심청이 처럼 굳이 바다에 빠지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즉 먹는 것을 가리신 하나님의 목적이 자기 안에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먹는 것에 대하여 규례를 주신 이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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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배에 대하여...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4. 7. 11. 17:21 Writer : 김홍덕


notre-dame
notre-dame by paul bica 저작자 표시



예배는 제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뭐 이견이 없는 것이 아닌가 싶다. 예전에는 접촉신앙이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제사의 제물에 손을 대고 그 제물이 대신해서 제물로 드려지는 것이다.


십일조에 대하여 이야기 하면서 설명한 바와 같이,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하나님은 영이시므로 그 존재와 성품을 표현하실 것이 없기 때문에, 이를 표현할 존재가 필요해서 만드신 것이 바로 사람이다. 


그래서 창세기 하나님의 형상(image)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신 것이다. 즉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게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미지라는 것이 그런 것이다. 실체가 없는 것을 어떤 것을 보았을 때 연상이 될 수 있고 알 수 있는 것이 이미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사람이 제물이 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인생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사용된다는 것이다. 즉 그 사람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발견하고 알 수 있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삶이 되는 것이 바로 제사이다.


이런 개념을 깊이 묵상하면, 예수님께서 요17장에서 저희가 우리와 하나가 되게 해 달라고 하신 것을 알 수 있다.


그런 제사가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초대교회를 거쳐서 예배가 되었다. 지금은 사람들이 예배에 많은 순서를 넣고 이상하게 많은 격식을 넣었는데, 그렇게된 이유는 다 내용은 없고 형식에 기울어져 있기 때문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현상인듯 하다.


초대교회의 예배를 보면, 모여서 떡을 떼며, 기도하기를 힘썻다고 했는데, 여기서 떡은 물론 음식물이기도 하겠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을 떡이라 표현하신, 그 떡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는 예수님의 육신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이 아니라, 유월절을 통하여 제자들이 예수님의 몸을 상징하는 떡을 먹은 것은 제자들과 예수님의 정체성이 하나가 되었다는 것이고, 제자들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며 살게 되었다는 것이므로


초대교회에서 떡을 떼었다고 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으로 삼은 사람들이 그 삶을 나누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로 인한 삶의 변화를 나누었다는 것이다.


또한 기도에 전혀 힘썻다고 하는 것이 있는데, 이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구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7장에 예수님께서 구하라, 찾으라 하실 때 무엇을 구하고 찾으라는 것이 없다. 다시 말해서 목적어가 없는데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구하라는 것이다. 


즉 너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그 정체성을 구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기도이다.


그러므로 예배는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삶을 나누고, 또한 그 나눔 속에서 자신에게 더 그리스도의 생명이 넘쳐나기를 바라는 기도를 하는 것이 예배이다. 그렇다는 것은 지금과 같이 예배 때 뭐 각종 형식이 있고, 기구가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예배 혹은 제사는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과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도록 드리는 것이고, 그 예배의 구성은 그리스도를 나누고 바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지금의 모든 예배들이 온전해지려면, 형식을 강화하고 교회의 건물을 거룩(?)하게 좋은 것으로 짓고, 좋은 음향시설을 갖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본성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나누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예배이고 제사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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