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9

스승의 날 생각해 보는 복음을 전하는 삶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5. 16. 10:25 Writer : 김홍덕

스승의 날이었다. 이제는 스승의 날이라는 것이 삶의 임펙나 기념일 조차 아닌 나이(?) 그리고 또한 삶의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 그런데 스승의 날이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지난 날 얼마나 스승이나 선생이 되어 보려 했는지, 차마 웃지 못할 세월들이 생각이 나서일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았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웃기 조차 민망한 짓거리들을 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선생이 되려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의 생각이나 신앙에 대하여 굳이 비판이 아니더라도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 조차 "이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 생각했었다.


이런 말들을 한다.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다"고. 스승은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네이버 사전에 되어 있다.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 그 대상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게다.


즉 스승이라는 것은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제자들을 어떤 자리에서 이끌어 다른 자리로 가게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스승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로운 자리로 가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는 것이다.



Red carnation
Red carnation by perlaroques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말하는 것이 옳도다"(요 13:13)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선생이 되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인도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선생이라 호칭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신을 <선생>이라 또한 <주>라 칭하는 것이 옳다고 하신 자리는 우리가 흔히 <세족 의식>이라고 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자리에서 하셨던 말씀이었다. 선생이라는 것, 교육하고 훈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절묘한 자리가 아닐까 싶다.


사람을 훈계하고 교육하는 것에 있어 가장 저급한 방법은 <꾸중하는 것>이다. 꾸중하는 것이 독존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채찍만 있고, 당근이 없다면 그건 아무리 변명을 해도 죄인 다루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적어도 수레를 끄는 나귀도 채찍과 당근을 병행해서 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그렇다.


교육이라는 것의 정의에 "피교육자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니 사실 그것이 가장 제대로 된 교육의 정의라고 생각이 된다. 이건 다시 말해서 스승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교육이라는 것은 생선의 뼈를 발라내듯 그 사람 안에 있는 요소를 강제로 끄집어 내고, 보기에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꾸중하고 압박하여 제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보고, 특히 스승의 삶을 보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뼈를 발라내듯 토해 내는 것이 아니라, 육수가 우러나듯 스스로 각성하고 버릴 것 버리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참 스승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부족하고 부족하며, 답답하고 답답하였을 것이지만 꾸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러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모습을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또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스스로 고백하게 하신 삶은 참 스승의 삶이다.


오래 전에 스승이 되고 싶은 마음에 대중 앞에서 내가 선생이 되었다고 글을 써서 읽은 일이 있다. 참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정도의 일조차 되지 않는 것인데, 스승이 된다는 것, 그 의미는 모르면서 욕심만 가득할 때 그랬다. 그리고 그 마음 한번 인정 받고 싶어 안달나게 살기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그 사람은 이래서 그렇다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회의를 느꼈다. 그건 그 사람을 위하는 것도 사랑도 교훈도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신앙에 관한 것이라고 달라질 건 없다. 더하면 더했지.(그렇게 위한답시고 평했던 사람들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잘 가시질 않는다.)


결국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한 그 사람이 변하고 좋은 것을 얻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란다면 꾸중도 필요는 하겠지만, 그것만 하고 싸매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우치고 우러나듯 각성할 수 있는 본을 보이며 살 수 없다면, 그건 다 소리 나는 꽹과리 그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며, 또 이렇게 큰 영향력 없는 인터넷의 한 공간에서 이렇게 복음에 대하여 전해보고자 하는 나의 마음과 삶에 대하여 이렇듯 어떻게 전해가야 할 것인지를 지난 날의 무식한 과오를 돌아봄과 함께 생각해 본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의 성장과 교훈, 그리고 안다는 것  (0) 2014.05.29
그리스도의 심판과 권면  (0) 2014.05.27
신앙의 보편성과 순수성  (0) 2014.04.14
영화 <머니 볼>  (0) 2014.04.10
하면 된다.  (0) 2014.04.03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생명과 (8)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15. 06:08 Writer : 김홍덕

창세기의 에덴 동산에 나오는 생명 나무와 선악과는 까마득한 옛날, 정말 그랬으면 좋을 것 같은 에덴 동산에 있었던 나무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것은 결국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하여 오늘 나에게 이것을 말씀하고 계시기 때문이다.


즉 오늘 나는 선악과를 먹은 사람은 아닌지, 그리고 나에게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 할 만한 것이 있는 사람, 그러니까 생명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는 사람인지를 돌아보는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하여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를 조금 돌아 보았다.


성경을 객관적인 사실로서 믿는 것도 중요하다. 어쩌면 현대 문명 아래서 교육을 받은 사람들에게 있어 과학적 상식, 그리고 사회적인 관념을 넘어서 이 모든 것을 사실로 믿는다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어렵게 믿었다 하더라도, <"오늘 나에게 어떤 말씀인가?"> 하는 것이 없다면, 정말로 성경이 내게 어떤 의미일까? 생각해 보아야 한다.


성경이 오늘 나에게 어떤 말씀인가 ? 하는 것이 없다면 성경이 내게 무슨 유익인가?


선악과와 생명과 로만 성경을 설명한다면(물론 그건 당연히 가능한 일이다), 사람과 또 하나님께서 지으신 세상의 모든 일들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구분하는 생각과 관념을 가지고 살아서, 늘 사람 사이에서 문제가 되고 또한 스스로 분이 나는 삶을 살던 사람이 그것을 버리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는, 그리고 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이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삶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늘 다툼이 일어나고 스스로 분을 내는 것이다. "이렇게 해야 하는데 왜 그러느냐?"하는 그 생각, 그것이 우리에겐 너무 익숙한 것이라서 벗어 볼 생각조차 못했을지 모른다.


그렇다보니 사람과 사회가 추구하는 이상이 결국 어떤 것을 선으로 보고 매진할 것인가?로 고착되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 알고 보면 너나 나나 둘 다 같은 인간이기에 같은 일에 실수하고, 같은 것을 감추고 싶어한다. 결국은 자신이 처한 형편 상 남들보다 조금 더 잘 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은 이래야지>하는 기준이 되어 있을 뿐이다.


하지만 아주 조금 더 잘하는 그 선함도 하늘에서 보면 63빌딩이나 단층 주택이나 다를 것 없듯, 하나님이 보실 때 아무 것도 아니고, 올림픽에서는 늘 기록이 갱신되고 우승하는 사람이 바뀌어 나타나듯이 내가 '사람은 이래야지!'하는 세계에 있어 나보다 더 잘 지키는 사람은 항상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의 삶의 목적은 그런 것을 지키며 사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실재로 그렇게 사는 것이 힘들고,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그것에 있지 않기 때문인 것이다. 해적이 아무리 열심히 일하고 자신들이 서로 충성해도 언제나 도망 다녀야 하고 죄인인 것 처럼 말이다.  


(계속)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인과 아벨 (1)  (0) 2014.06.12
생명과 (9)  (0) 2014.05.24
생명과 (7)  (0) 2014.05.13
생명과 (6)  (0) 2014.05.12
생명과 (5)  (3) 2014.05.06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생명과 (7)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13. 15:43 Writer : 김홍덕

생명은 이렇듯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는 아무리 번듯해도 이동하고자 하는 주인 앞에서는 그저 생명이 없는 고철 덩어리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생명 나무에 국한 된 것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말씀,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이치가 그것이다.


생명 나무가 그렇고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것이 그런 것이라는 것을 이야기 했다. 그런데 더 중요한 문제가 있다. 그것은 왜 그런 이야기를 기록해 놓고 사람이 알기를 원하셨는가 하는 문제인 것이다. 사실 그것이 없으면 성경의 비밀이 아무리 놀라워도 아무 소용 없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성경과 복음의 고객 혹은 대상은 사람이다. 즉 사람이라서 성경을 읽고, 사람이라서 그리스도가 복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그것을 알지 못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것이고, 사람이 그것을 안다는 것은 자신의 이야기로 누리며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늘 관여하시고 또 아들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으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가기를 바라시는 것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하나님 당신을 표현하는 절대적인 존재가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형식이 없으신 존재이신데, 그 존재를 드러내고자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이다.


이것은 비단 사람 뿐 아니라 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존재를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셨다는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중에 사람을 하나님의 image대로 만드신, 그러니까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존재로 만드시고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라고 하신 것이다.


세상을 다스리라고 하셨다고 하니, 사람들은 물을 거꾸로 솟게 하거나, 하늘에서 불이 내리게 하거나 바위를 염력으로 날리는 것을 다스리는 것으로 착각한다. 이렇게 말하면 '그건 정말 착각이지'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안타깝게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와 동일한 생각을 하고 산다.


자연을 정복하고, 지구 상에 있는 것을 사람의 위대함과 편리함을 위하여 이용하게 되면 될수록 위대하게 생각하고 심지어 그런 결과물을 교회에 가져와서 영광을 얻기도 한다. 예를 들면 큰 공사를 성공했다고 감사 헌금을 드리는 것과 같은 것이 그와 같은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이 세상을 다스리는 것은 정복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이나 사람이나 다 하나님의 존재와 영광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기에, 사람들이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활용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모든 만물이 존재하게 된 목적으로 이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든 일을 사람에게 맡기신 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본분이고 만물의 본분이며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지, 사람들의 생각처럼 자연의 법을 극복하는 것이나,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되는 것을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목적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여길 수 있는 사람은 자신에게 주신 육신의 삶을 순종함으로 받고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심히 기뻐하신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살아서 하나님께서 사람 만드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성품을 잘 표현하면서 사는 그것이 바로 생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고, 또한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며, 또 살아가는 이유가 되는 사람이 되었을 때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계속)

'평교인의 성경 보기 > 창세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생명과 (9)  (0) 2014.05.24
생명과 (8)  (0) 2014.05.15
생명과 (6)  (0) 2014.05.12
생명과 (5)  (3) 2014.05.06
생명과 (4)  (0) 2014.05.04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