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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2. 18:25 Writer : 김홍덕

가인과 아벨은 아담과 하와가 낳은 아들들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대로 가인이 아벨을 죽였다. 이른바 인류 최초의 살인인 셈이다. 그러다보니, 가인과 아벨은 사람의 부류에 대한 대명사로 인식될 지경이다. 그런데 문제의 발단, 그러니까 살인의 동기라는 것이 지금으로선 이해하기 힘든 것이다.


살인이라면, 복수라든가, 돈이라든가, 뭐 그런 것이 있을 법 한데, 살인의 동기가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는데, 아벨의 것은 받으시고 가인의 것은 것은 받지 않으셨다는 것에 격분한 가인이 동생이 아벨을 쳐 죽였다는 것이 이 사건의 전말인 것을 보면 말이다.



Cain & Abel
Cain & Abel by seamusiv 저작자 표시동일조건 변경허락



사람들은 많은 경우 살인의 동기가 된 제사 흠향에 있어서의 차별을 가인과 아벨의 직업에서 찾으려고 한다. 그건 틀린 시도는 아니다. 하지만 가인이든 아벨이든 그 마음에 어떤 것을 먹거리로 삼아야겠다는 것 역시 알고보면 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조성하신 결과라는 것을 생각하면 그 마저도 뭐 명쾌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은 것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이시 말이다.


하지만 성경에 나오는 단초는 우선 두 사람의 직업이 전부이다. 왜 하나님께서 가인의 제사를 받지 않았는지에 대한 언급은 없다고 봐야 한다. 직업 외에는. 그렇다면 정말로 직업 때문일까? 가인은 농부라서 제사를 받지 않고, 아벨은 목동이라서 제사를 받았다는 것일까? 


그들의 직업도 다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말씀하시기 위한 계획임을 생각해 보아야 한다. 즉 하나님께서 어떤 것을 사람들에게 말씀하시고자 하시려다 보니, 가인은 농사 짓는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이름도 "얻다"라는 뜻을 가지게 된 것이다. 마찬가지로 아벨도 그렇다.(아벨은 '호흡', '숨' 이란 뜻)


창세기 4장이 시작되기를 "아담이 그 아내 하와와 동침하매...."라고 시작된다. 그리고 그 앞인 3장의 마지막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동산에서 쫓겨나면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농사"를 지어야 먹고 살 것이라고 명하시는 장면이 나온다.


즉 가인과 아벨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의 속사람이 육신이 된 존재가 두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고, 선과 악을 판단하는 존재에게서 난 아들, 즉 선과 악을 판단하는 본성이 두명의 아들로 성육신 되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형식은 가인이라는 형이 아벨이라는 선한 동생을 죽인 것이지만, 내용으로 보면 선악을 판단하는 의가 육신이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에 대하여 설명하는 사건이 바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가인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 앞에 기준이 생겼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제사는 받아져야 한다는 <의>가 생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의는 가인에게서 생긴 것이 아니라, 그 아비 아담에게서 비롯된 것이다. 아담이 먹은 선악과가 가인으로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가인은 "하나님이 나 한테 이러면 안되지?"하는 마음이 생긴 것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말미암아 에덴에서 쫓겨나고 그리고 그 사이에서 형제로 낳은 두 아들은 어떻게 보면 선과악이 함께 있는 선악과와 같은 의미이다. 그래서 "이것은 이래야 된다"라는 기준을 가지게 되어, "제사는 받아져야 한다"는 생각을 했고 그 결과 동생을 죽이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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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이별은?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14. 6. 6. 13:28 Writer : 김홍덕

얼마전 LG 감독에 선임된 

양상문 감독에 대하여 김성근 감독이 

<거절에도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고 했다.


김감독이 

양감독에게 전화로 코치 제의를 했었는데,

다음 날 부산에서 서울로 비행기를 타고 와서

정중하게 거절했다는 일화를 들면서......


살아가면서 가끔씩 겪게 되는 이별들이 있다.

내가 이별의 주최자가 되기도 하고,

반대로 남겨진 사람이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떤 모양에 처해도, 이별은 아름답지 않더라

그러니까 <아름다운 이별>은 없어 보인다.


그래도 우리는 이별을 겪게 된다.

그리고 어떨 때는 떠난 이를 기다리기도 하고

또 가끔은 붙잡아 보기도 원망도 한다.

그리고는 지친다. 


그렇듯 살면서 이별이 아름답지는 않지만

적어도 예의는 있었으면 좋겠다.


떠난 이는 절 떠난 중이니 절을 원망 말고

남겨진 이는 뒷 통수를 가렵게 하지 말자.

어쩌다 돌아고자 할 때 감정 상하지 않게 말이다.


생각해보면 이별 전에 함께 한 시간들,

그때는 서로에게 정말로 진실하지 않았겠는가?

지금이야 설사 원수가 되었다 해도

그때는 아마 진실된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 진실에 대해서라도 예의를 가지면 좋겠다.

그게 사람 사는 작은 품격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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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보는 바른 성경적 관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6. 5. 11:29 Writer : 김홍덕

신앙인에게 있어 <세상>은 어떤 의미인가? 기본적으로 신앙을 가진 모든 종교에 있어 세상은 신앙의 터전인 교회나 절과 같은 곳에 대비되는 곳이다. 좀 과한 비교이긴 하지만 선과 악의 이분법적 양자대결로 본다면 악의 영역에 해당하는 곳이라는 의미이다.





성경에서도 마찬가지로 세상은 바다와 같이 모든 것이 다 혼합되어 있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죄악이 만연한 공간>으로 정의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다 보니 성경에서는 세상을 애굽으로 상징되고, 또한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종살이 했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세상에서의 삶은 종살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분명히 어떤 종교든 그 안에서 본다면 세상은 경계의 대상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것은 세상의 철학과 의에 대하여 동의하는 삶을 살게 되지 않도록 하는 경계이지, 육신이 속해서 살아가는 삶의 터전이기도 한 세상을 무우 자르듯이 외면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분명히 성경도 이 세상을 애굽이다, 또한 세상의 모든 오물을 수용하는 바다와 같은 곳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안에 두신 이도 역시 하나님이시다. 그것은 육신은 세상에 속하는 것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기 때문인 것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하나님이 보실 때 이 세상에서 사람이 속해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고 여기신다면, 예수를 믿는 순간 다른 공간으로 이동이 일어나야 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 가운데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정확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사람들은  실재로 이런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교회라는 장소를 신성하게 여기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무소부재(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신 분)의 신임을 생각하면, 장소적으로 교회라는 공간이 거룩하고 세상이 부정하다는 식의 사고 방식은 선악과적 사고 방식에 기인한 것이다.


세상은 우리 삶의 바탕이다. 그리고 이 세상은 우리가 복음이라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을 드러내는 바탕이 되는 곳이고, 또 복음의 삶을 표현하는 그라운드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서 거룩한 존재가 되는 것은 머리, 곧 생각과 의가 세상과 같지 않아야 하는 것이지, 육신의 삶이 구분된 공간으로 이동하고 몰입하라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육신은 세상에 속한 삶을 제대로 살아가야 한다. 그리고 그렇게 세상을 사는데 그 삶이 구분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세상이 없다면 구분이 될 기준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은 복음을 표현하는 도화지와 같은 곳이다. 우리는 그 안에서 충실이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세상의 사고방식과 의와 철학과 가치관에 물들지 않고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아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복음을 누리는 삶인 것이다. 한 마디로 소금물인 바닷 속에 물고기가 살지만 그 고기가 짜지 않음과 같이 우리도 살아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고, 복음을 신앙한다는 것은 세상과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구분되는 것이다.(거룩이란 구분된다는 뜻) 즉 도화지에 그린 그림은 도화지와 분리하는 것이 아니라, 도화지를 충분히 점유하면서 구분되는 것이다. 이것을 분리하면 그림이 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을 무조건 경멸하고, 외면하고,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운영하는 가정이나 나라와 같은 구조를 단지 신앙이라는 이름 하나로 멀리하고 외면하는 것은 절대로 옳은 생각이 아니다. 이것은 세상의 법이 하나님의 법 위에 있다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을 모르면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이 세상에 오실 때, 세상 사람들은 잘 오지 못하는 곳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이 복음을 듣고 이리 와서 구원을 받아라" 이렇게 말씀하신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당시 이스라엘에서 가장 천한 동네의 말 구유에서 나시고 나사렛이라는 천한 동네에서 사셨다. 이곳은 세상 사람조차 부정하게 여기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도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실 때, 그렇게 누구나 부정하게 여기는 곳에 오셨는데, 교회가 신앙이 생기고 하나님을 섬긴다고 세상과 공간적으로 분리하고, 개념적으로 분리를 도모하는 것은 성경을 잘 모르는 것이다. 이는 선악과적 개념이고 거룩의 개념을 모르는 것이고, 복음이 세상을 이기지 못할 것이라고 복음의 능력을 폄하 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해 본다. <사람이 만든 종교는 사람이 뜸한 곳으로 가고, 하나님은 그 아들을 세상의 가장 천한 곳으로 보내심과 같이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은 할 수 있는대로 사람들 속으로 간다>라고 말이다. 아마 이는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세상은 분명히 부정한 곳이 맞다. 하지만 부정하다고 이곳을 버릴 수 없다. 이는 육신을 가짐을 부정하는 것이다. 이 육신이 아무리 산 속에 숨어 본들 세상 안인데, 어떻게 이 육신을 가지고 세상을 부정할 수 있단 말인가? 하나님의 말씀은 그것이 아니라, 의와 가치관에 대하여 세상에 속하지 말라는 것이다.



[교인의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Ⅳ  



그리고 그렇게 세상에 속하지 않은 가치관과 의를 가지고 세상에서 살아서 그 구분됨을 나타내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말 구유에 보내심이 사랑이셨듯, 우리가 그렇게 세상에서 구분되어 살면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심 같이,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세상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하심과 같이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믿을 것이다. 십자가 밑의 백부장 처럼 말이다. 이것이 바로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하나님을 그려내는 것이다.


신앙이 투철해지고, 순도를 높이려고 할수록 세상에서의 삶을 외면하고 등안시 하고 격리적인 삶을 도모하기도 한다. 나도 역시 그런 세월을 제법 오래 살았다. 하지만 그것은 성경을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었다. 세상은 분명 부정하지만, 외면하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삶으로 살아 내어 그 삶으로 그리스도를 나타내는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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