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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함...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14. 7. 8. 15:32 Writer : 김홍덕

내게 지갑이 하나 있다.

보통 시중에서 잘 볼 수 없는 작은 사이즈의 지갑이다.

아마도 한 10년은 된 것 같다. 내 생일을 기념하여 아내가 사준 지갑.


보통의 반지갑에 비해 사이즈가 작고 얇아서 맘에 드는 아이템이었는데,

그래도 10년 가까운 세월 동안 쓰다보니 

가끔씩 다른 아이템을 기웃거리도 했다.



그러다 서울 출장 가는 길에서 발견한 아이템

한지인지 천인지는 모르겠지만 얇고 가벼운 것을 선호하는 나에게

딱 한 눈에 들어와서 질렀다. 가격은 착하게 13,000원


그렇게 몇일간 신선한 마음으로 가지고 다녔다.

아주 편리하고 내 기호에 딱 맞는 지갑이었다.



하지만 익숙함을 이기지 못하는 것 같다.

오래되고 칙칙해 보여도 

아직은 내게 존재 목적을 유지하고 있는 옛 아이템을

끝내 쳐박아 두지 못하고 다시 꺼내서

가죽 클리너로 닦아서 다시 장착!




익숙함은 그런 것인가 보다.

세월을 함께 했다는 것이 정녕 그런 것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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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12) - 방주와 선악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7. 8. 10:52 Writer : 김홍덕

노아의 방주는 선악과를 연상케 한다. 어찌보면 생뚱 맞은 이야기 같지만 선악과가 선과 악이 함께 있어 선악과이듯이 방주 또한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선악과라는 것은 선악과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창조하셔서 에덴동산의 중앙에 두셨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중앙에 두었다는 것은 그 영역에 있어 그것이 핵심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에덴동산이란 이름의 뜻은 "만족의 동산"이다. 그리고 모든 사람에게 있어 근심 걱정이 없이 자기가 생각하는 모든 것이 이루어진 세계를 에덴이라 하는 것도 그래서 이다. 그런데 그 에덴의 중심에 생명과와 함께 선악과가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악과는 존재 자체가 문제가 되는 과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하나님처럼 되기 위하여" 먹었기 때문에 문제가 된 것이다. 그것은 불순종이기도 하지만 타락은 근본적으로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이 빚어 낸 결과이다.


선악과는 선과 악이 함께 있는 상태이다. 선과 악을 알게 한다는 것은 그것이 함께 있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것이 하나님의 목적 아래 있을 때는 에덴을 상징하는 것이지만 하나님처럼 되려고 할 때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선악과는 기본적으로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고 앞에서 포스팅한 바 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육신이 어떤 기준에서 보면 선하다 할 만한 것과 또 반대로 악하다 할 만한 것이 함께 공존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바울은 이에 대하여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성령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좇는다고 로마서 7장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비단 그것 뿐 아니라 사람은 누구나 다 이중 혹은 그 이상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한편으로는 세상을 구할만한 마음이 있기도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작은 반찬 하나 더 먹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런 것을 어떤 기준을 가지고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타락인 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어떠함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는 것이 바로 하나님처럼 되려하는 타락이라는 말이다. 그것이 선악과의 타락이다.


선악과는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말한다. 육신이라는 것은 하나님과 같이 되기에 어떤 기준으로 보면 턱 없이 부족하고 악한 존재가 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화장실도 가지 않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는데, 그런 하나님이 되려고 할 때 이 육신은 정말로 부정하고 악한 것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렇게 될 수 없으니 말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선악과 (36) - 육신을 가진 것, 선악과를 만드신 것



하지만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는 행함이나 공적으로는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없는 오늘을 사는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다.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말과 에덴의 동산에 두셨다는 것은 같은 의미라 볼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보실 때 어떤 면에서 볼 때 참 추하고, 또 그 안에서 한 없이 더러운 것이 나오는 인생이지만 그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좋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선악과를 에덴의 중앙에 두신 것이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7장에서 8장으로 넘어가면서 자신을 곤고하게 만든 이 육신이 예수 안에 있어 결코 정죄함이 없다고 한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과 삶을 선악 간에 심판하는 사람들의 죄를 씻게 하시기 위하여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셨기 때문에.  


다만 사람이 가진 육신을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기준을 나누는 마음을 가진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어 버린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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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주에는 분명히 지금의 우리가 가진 지식으로 다 이해하기 힘든 탑승객들이 탑승했다. 하지만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방주는 하나님께서 세상의 죄악을 다 쓸어버리시고자 홍수를 일으키실 때, 그 심판에서 살아 남아야 하는 존재들을 태우는 배였다.


그러므로 방주의 탑승객은 죄악이 만연한 세상에서 살아남아야 하는 존재가 누구인가가 중요한 문제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바로 방주의 탑승 대상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또한 방주가 <교회>라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주에 탑승한다는 것은 교회의 구성이 되는 자격이라는 의미이고, 또한 그 탑승자들의 정체성이 방주의 규격이고 교회의 정체성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방주에 탑승한 탑승객들에게 있어서 논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단연 <부정한 짐승>이다. 타락한 세상에서 살려야 하는 것을 태운 방주라고 할 때 정한 짐승을 태우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지만, 부정한 짐승을 태우는 것은 선뜻 이해하기 쉬운 일은 아니다.


게다가 처음에는 암수 한쌍식이라고 하셨다가 다음에는 정한 짐승은 7쌍씩, 부정한 짐승은 2쌍씩이라고 명시하시지만 뭐가 정한 것이고, 뭐가 부정한 것인지에 대하여는 알 수 없다. 쉽게 생각하면 노아의 방주 이전에 부정하다고 생각되는 짐승은 뱀 정도가 유일하다.


돼지와 같이 굽과 되새김질과 같은 것을 기준으로 정하고 부정한 짐승을 구분하는 것은 모세시대에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 시절에 어떤 짐승이 정하고 어떤 짐승이 부정한지를 가늠할 수 있는 단서가 없다고 봐야 한다.(물론 신학적 고찰은 있겠으나, 필자는 신학자가 아니므로 그것까지 미치지는 못한다)


오히려 이 말씀은 숫자가 가진 수리적인 개념이 아니라 의미적 개념으로 볼 수 있다. 7[각주:1]은 일곱개라는 의미기도 하겠지만 성경에서는 원래 정하고 온전한 의미를 숫자로 표현할 때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정한 짐승은 7쌍이라는 표현은 정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 생각된다.


또한 부정한 짐승은 두쌍씩이라고 했는데 성경에서 2라는 숫자는 기본적으로 부정한 숫자가 아니다. 흔히 아는 부정한 수는 6으로 우리는 알고 있다. 2에 대한 또 다른 성경 말씀은 증거에 관한 것이다. 즉 율법에서 증인은 2명이 되어야 한다고 되어 있다는 것이다.(창 21:27, 신 17:6, 요 8:17)


즉 2는 어떤 것에 대한 증거, 보증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는데, 어떤 짐승인지는 모르지만 부정한 짐승을 2쌍으로 태우라고 하신 것은 교회 안에 부정한 것에 대한 의미를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한 말씀이 아닌가 생각된다.


다시 말해서 부정한 것에 대하여 서로 증거가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너나 나나 다 부정한 존재라는 것이 증거가 되는 곳이 교회라는 의미라고 볼 수 있다. 즉 이는 교회가 어떤 사람을 부정하다고 규정하는 곳이 아니라, 서로가 원래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곳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방주에 탈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지금 노아 시대에 하나님께서 땅의 모든 죄악을 쓸어 버리시기 위하여 홍수가 일어난 마당에 하나님께서 부정하게 여기시는 것이 홍수의 피난처인 방주에 탄다는 것은 사실 말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부정하다는 것을 서로 인정하고 자신이 부정하다는 증명을 받은 사람은 탈 수 있는 피난처가 바로 방주고 교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부정하다는 것을 증명 받은 존재는 방주 곧 피난처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문둥병에 관한 규례에서도 오히려 온 몸이 문둥병으로 희어진 사람은 정하다는 판단을 받는 것과 비슷하다. 즉 교회라는 곳은 자신이 부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증거로 공인 받은 사람이 들어가는 곳이라는 것이다.


또한 교회는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공존하는 곳이라는 것도 아주 중요한 말씀이다. 심판을 받는 세상의 피난처인 방주 안에 정한 짐승과 부정한 짐승이 함께 타는 곳이라는 것이다. 원래부터 정한 것만 타는 것도 아니고, 또한 부정함을 공인받고 고백한 사람만 타는 곳도 아니라는 것이다.


방주는 이렇듯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함께 타는 곳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교회는 하나님 앞에 순전한 신부인데, 그 신부가 순전한 것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공존할 수 있어서 순전한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선악과[각주:2]와 같다. 선악과도 선한 것과 악한 것이 함께 있는 과실이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으니까 자신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은 선과 악을 분리했다는 것이다. 즉 자신이 부끄러워하는 그 육신을 인정하지 않아서 부끄러워했고 감추려 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방주에는 악한 것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방주 안에 부정한 것도 두 쌍씩 태우라고 하셨다. 그것이 교회라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선악과를 먹고 어떤 것을 선과 악으로 나누어 어떤 것은 부끄럽고 버릴 것으로 여기는 것이 교회의 모습이 아니라, 사람의 육신이 부정하고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증거를 받았을 때 구원을 받을 수 있는 곳이 교회라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계속)




  1. 전통적으로 7은 하나님을 의미하는 숫자 3과 사람과 땅을 의미하는 숫자 4의 합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한 상황을 의미하는 뜻에서 온전하고 정한 의미를 가진다고 하기도 함 [본문으로]
  2. 선악과에 대하여는 이 블로그에 길게 설명하였으므로 해당 포스트를 참조 바랍니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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