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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48) - 선악과 정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4. 16. 17:48 Writer : 김홍덕

결론적으로 <선악과>는 사람이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또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규정하는 육신적인 안목과 철학에 관한 것이지 과일 하나에 대한 명령과 불순종에 관한 말씀이 아니다. 분명히 성경은 선악과라고 하는 나무에 대하여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라고 하고 있다. 


즉 선과 악이라는 구조와 명제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알게 되는 상태가 하나님이 보실 때 모든 죄의 근원이고, 그 안목이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는 사람을 부끄럽게 여기는 것이다. 그것이 선악과의 정체이고 실체이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있어 모든 믿음의 방해가 된다. 뭐라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려 할 때 마다, 사람은 그것이 될 법한 이야기인지 아닌지 생각하고 자기의 선택에 따르게 된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그런 생각을 정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여 그것을 달라고 한다. 그리고 그것은 이미 유전된 사람의 습관으로 종교적으로는 오히려 그것을 신앙이라 이르는 지경이다.


순종이라는 것이 마음에는 아닌데 하는 미련을 가지고 시키니까 하거나, 하나님이 그렇다고 하니까 그렇게 하거나, 아니면 죽어서 천국 가서 상급을 받으려는 욕심으로 한다면 그것은 순종이 아니다. 그것은 거래일 뿐이다. 순종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그것이 맞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마음조차 없는 것이다. 그야말로 그렇다면 그런 줄 아는 것이 순종이다. 그것은 마음에 선과 악을 판단하는 습관을 가진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두신 것은 사람을 시험하기 위함이나 아니면 하나님의 실수가 아니다. 에덴 동산에 선과 악을 두셨다는 것은 사람에게 육신을 주셨다는 것이다. 에덴 동산은 만족의 동산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만족하시고 쉬셨다. 궁극적인 만족이라는 것이다. 그 상태가 에덴인 것이다.


그 만족의 중앙에 선악과가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만족하셨다는 것이 선악을 알게 하는 관점을 가지고 볼 때 벌거벗어 부끄러워 가리고 싶어지는 육신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족하는 중심적인 내용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나무가 동산 중앙에 있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사람에게 만족하신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면 그 육신이 감추고 싶은 악한 것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도 멀쩡하게 벗고 다녔는데, 선악과를 먹고 나니 자신의 벗음을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것을 부끄러워 했다는 것이다. 즉 이 연약한 육신의 삶이 표현하는 인간의 모습이 부끄럽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결국 그런 관점으로는 에덴동산에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에덴에서 쫓겨난 이유인 것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에덴이 없어졌다는 것이다. 만족이 없어진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에덴을 사람들이 찾고 있지만 이런 관점으로는 절대로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에덴은 자신의 관점이 바뀌면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만족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은 선하므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고 한 것이다. 그것이 바로 에덴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의 모임이 교회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나라를 맛 본 사람이라야 죽어서건 살아서건 하나님 나라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통하여 사람에게 전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이고 뜻인 것이다. 


(선악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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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47) - 선악과와 교회(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4. 16. 17:18 Writer : 김홍덕

이야기가 너무 방대해 지는 것 같지만, 결국은 이 선악과의 문제는 교회의 정체성과 연관된 문제이다. 선악과의 타락이 있었기 때문에 어린 양의 희생이 있었다. 그 어린 양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같은 공동체를 이루는 씨앗이 되게 하신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구원을, 그리고 그 구원 받은 이들이 모여서 하나님의 공동체 곧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오셨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셨다.(마 12:28, 눅 11:20) 이는 예수님이 오셨다는 것 자체가 이미 이 땅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씀하심이다.


흔히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 가는 나라'로 알지만, 이 땅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지 못한 사람에게 죽어서 하나님 나라를 누리는 일은 없다. 운동 선수가 훈련장에서 훈련한 적이 없고, 선수로 등록된 적이 없는데 본 경기에 나설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여튼 선악과를 먹은 사건으로 인하여 희생된 양으로 예언 되신 예수님은 교회의 시작인 것이다. 교회라는 곳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사람들의 모임이라는 것에서 생각하면 교회의 정체성은 간단하고 간결한 것이다.  


이 교회는 모든 것을 선악 간에 판단하는 것이 근본인 세상의 심판들 앞에서 패배자로 또 죄인으로 낙인 찍히는 사람들이 그런 낙인의 상처를 위로 받는 곳이 아니다. 교회는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런 심판과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하여 안식을 누리게 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어떤 이유든지 사람을 기준에 따라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으로 나누는 것과는 무관한 곳이다. 교회가 경계할 것은 오직 하나 사람을 선악간에 판단하는 기준 그 하나만 멀리하면 되는 것이다. 행여 그 기준이 신앙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그러니까 교회는 신앙이 없는 사람도 평안해야 하는 곳이라는 것이다. 신앙적 양육은 삶을 보여줌으로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을 보고 백부장이 고백하듯 스스로 돌이킬 수 있게 하면 되는 곳이다.


예수님께서도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원수가 밤에 가라지를 심었을 때 뽑지 말고 추수할 때 까지 두라고 하셨다. 그러니까 교회는 도덕적으로 또한 신앙적으로 순수한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이미 어떤 기준으로 선한 것만 골라 담기 시작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교회의 기능을 많이 상실한 것이다.


교회는 오히려 신앙이 없고, 사회적으로 아무 것도 없어도 교회 안에서 하는 일에는 얼마든지 자기 맘대로 할 수 있는 곳이어야 한다. 돈 없는 사람이 하기 힘든 일을 꾸미는 것도, 신앙 없는 사람이 자신을 우러내는 것이 아니라 생선 뼈가 발라지듯 하는 것도 교회에서 할 일은 아닌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노아의 방주가 교회에 비유되는 것이고, 그래서 그 안에 부정한 짐승도 탈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부정함은 당연히 사회적이고 세상적이며 사람들이 가진 육신의 안목에 의하여 부정하게 여김을 받는 것이다. 즉 세상적 안목으로 볼 때 부정해 보이는 것이 교회에서는 그렇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세상에서 성공할 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는 말을 타락의 대표성을 띈다고 말하고 싶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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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보편성과 순수성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4. 14. 16:25 Writer : 김홍덕

기업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려고 할 때, 국가가 지원해 주는 제도가 있다. <국가 기술 개발 사업>이라는 것인데, 기술을 개발하는데 소요되는 비용의 일부를 정부가 부담하는 것인데, 세금을 사용하는 것이다 보니 기업의 기술 개발 계획을 심사하게 된다.


그 평가 기준을 크게 보면 <기술성>과 <경제성>이다. 다시 말하면 기술의 우수성과 가능성 그리고 독창성을 보는 것과, 제품이 완성되었을 때 소비자들이 지갑을 열 수 있는 시장성과 사용 편리성 등을 가지고 있는지 보는 것이다. 이를 신앙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신앙의 순수성과 보편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 순도를 논하라면 율법 주의나 영지 주의 그리고 세상의 가치관이 신앙과 결합되지 않는 것을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에 제한이 없어야 하는 보편성을 말하는 것이다.


순도가 지나치면 율법주의나 광신도가 된다. 삶의 전부가 신앙에만 집중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신앙이 보편적으로 흘러 간다면 이는 타락한 신앙이 된다. 세상의 법이나 관습이 신앙과 섞이게 되면 보편성이 떨어진다.



     



즉 금방 생각해 보면 신앙의 순도와 보편성은 양극성을 가지고 있어서 하나에 집중하면 다른 하나가 소흘하게 되는 모순과 같은 것으로 보일 수 있다. 이것이 중요한 관점인 것은 신앙의 모양이 이 둘 중 어느 한쪽에 치우치게 되면 광신도가 되거나 아니면 타락한 신앙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잘못된 관점이다. 신앙은 순도가 높을수록 보편성이 넓어진다. 다시 말해서 신앙의 순도가 높고, 하나님을 아는 것에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수용하는 역량이 넓어진다는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교회들이 이 문제를 잘 모르기 때문에 사회로부터 외면 당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신앙의 순도가 높고 순수하다는 것은 그 만큼 인간 본연의 모습에 더 나아갔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은 더 아담 같고, 더 예수 그리스도와 같다는 것을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의 구원자이므로 모든 인간의 공통 분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아담은 최초의 인간 즉 인간의 뿌리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요즘 말로 한다면 <줄기세포>와 같은 것이다. 신체의 어떤 장기로도 성장할 수 있는 세포인 줄기 세포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인간이 그와 같이 될 수 있는 공통 분모를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사람이기만 하면 누구나 예수를 믿을 수 있고, 예수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상에 이만한 보편성이 어디에 있겠는가? 즉 예수를 잘 믿을수록 더 뛰어난 보편성을 가진다는 것이다. 나이가 많고 경험이 많을수록 예수 믿는 것에 도움이 되고, 교회에 봉사 많이 하고 헌금을 많이 내어야만 신앙이 좋다고 한다면 보편성은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많아도, 돈이 많아도, 또한 때로는 구두쇠 같아도, 또 신앙이 없어도 그런 자신의 조건이나 형편이 더 존중 받아야 한다거나, 그래야만 예수를 잘 믿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문제가 되겠지만, 그냥 그렇다는 그 자체는 절대로 신앙의 제한적 요소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는 교회의 구성원에 관한 것도 마찬가지의 문제이다. 교회는 정말 신앙이 좋은 사람으로부터, 신앙의 정도를 떠나 육신이 부유한 사람, 나이가 많은 사람 등 다양한 사람이 다 동일한 조건에서 신앙을 누리고 평안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가정의 많은 가구나 도구 그리고 비품들은 그 사용 빈도나 중요도에 따라 여러 등급이 있겠지만, 그 어느 것도 필요할 때 없으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가정에 많이 가지고 있지는 않지만 소화기를 본다면, 평소의 생활에서 보면 적당히 두기도 그렇고, 또 주기적으로 흔들어 주는 등 삶에는 유익이 되지 않아 보이지만 화재가 난다면 이는 절대적인 것이 되는 것이다.


교회도 신앙도 그런 것이다. 아주 신앙이 없는 사람도 평안할 수 있어야 하고, 아주 충성스런 사람도 평안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순도고 보편성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알면 알수록 더 신앙이 없는 사람도, 세상적으로 자기 것만 챙기는 사람도, 때론 정신적 결함이 있는 사람도 다 수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보편성과 순도는 서로 반대쪽을 지향하는 하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같은 것이다. 즉 모든 사람의 공통분모인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그 안에 풍성하면 할수록 그 신앙 고백 안에서 육신으로 사는 모양이나 그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이 달라도 다 수용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보편성과 순도의 상관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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