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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10) - 방주의 탑승객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7. 7. 11:16 Writer : 김홍덕

노아가 만든 방주의 규격은 길이가 300규빗, 너비가 50규빗, 높이가 30규빗이라고 되어 있다. 이는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정확히 몇 미터인지는 알 수 없다. 아무도 노아의 규빗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규빗을 SI계 단위인 미터(M)로 환산하는 것도 어리석은 짓이다.





노아가 만든 방주의 규격은 어떤 것이 들어가기에 적합한 규격이라는 점을 생각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것이 들어가도록 만들어진 공간인지가 중요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들어갈 것을 생각하고 만드는 것이 기본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주 탑승객(?)중에 우리가 정확히 알 수 있는 것은 노아의 가족 8명과 나중에 나오는 비둘기와 까마귀 정도이다. 나머지는 정한 짐승 각 7쌍과 부정한 짐승 각 2쌍이라고만 성경에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아는 동물들을 방주에 태운다고 할 때, 정말로 다 탑승이 가능할까?


코끼리를 정한 짐승으로 봐야하는지 모르겠지만 만약에 그렇다면 14마리가 들어가면 한 마리당 몸길이를 6m정도로 보면 그 길이만 84미터에 해당하고, 기린도 그렇게 보면 높이가 5.5m에 해당한다. 그런데 규빗을 50센티로 본다해도 방주는 길이 150미터에 높이 15미터에 불과하다.


이런 이야기를 해 보는 것은 성경을 그런 관점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기 위함이다. 우리가 아는 과학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에버랜드에 있는 동물도 다 탈 수 없는 크기에 불과한 것이 노아가 만든 방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것은 동물들이 탓겠지만, 홍수에 동물들이 죽을까봐 태운 것이 아니라, 어떤 의미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하게 생각하도 하나님께서 다시 만들 수 없어서 태운 것은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어떤 동물을 태웠느냐? 하는 문제나 어떤 짐승이 정한 것이고, 어떤 짐승이 부정한 것인지를 구분하기 위한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성경에 기록된 말씀은 문자 그대로의 일들이 있었을 것이라는 것을 의심하지는 않는다. 죽은 사람이 부활하는 것이 기록된 것이 성경이다. 그러므로 물리적으로 볼 때 불가능한 공간이라서 방주에 우리가 아는 짐승들이 다 타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른 판단은 아니다.


하지만 성경이 그런 모순을 넘는 기적이 있다는 것을 믿으라는 것 만을 목적으로 기록된 말씀인가 하는 것에 있어서, 상식과 과학에 반하는 일들이 하나님의 놀라운 능력으로 말미암아 실현되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믿음일지, 아니면 그것이 오늘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그런 기적과 같은 일들을 행하셨는지 알고 자신의 말씀으로 받는 것이 믿음일지에 대하여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이다.


방주에 짐승들이 어떻데 다 탑승했는지를 연구하는 하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설사 그것을 연구해서 알게 되었다 해도 왜 그랬는지를 모르면 모르는 것이다. 고대 성형문자나 오래된 문자를 해석해서 그것을 언어로 표시했다고 아는 것인가? 아니면 왜 옛날 사람들이 그런 일을 했고, 그것을 기록했는지를 아는 것이 그 문자를 아는 것인가?


성경의 말씀이 바로 그런 것이다. 개인적으로도 어떤 방법일지는 모르지만 그 당시에 있던 모든 동물들을 성경의 기록되어 있는 것과 같이 방주에 다 탑승을 했을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나에게 의미가 있는 말씀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그것을 믿는다고 방주가 나와 상관이 있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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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 (9) - 세상과 교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7. 6. 23:22 Writer : 김홍덕

노아의 방주는 성경에 대하여 묵상하고 공부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의 예표라고 이야기 한다. 방주가 교회의 예표가 된다면 홍수는 당연히 세상이 될 것이다. 흔히들 이야기 하는 죄악이 넘치는 세상에서 생명을 지킬 수 있는 곳이 교회라는 것이다.


방주가 교회를 의미하는 것이라면, 방주는 당연히 그리스도를 의미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방주가 그리스도 또한 교회가 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이 세상에서 구원자가 되신다는 것이다. 이 방주는 지금 하늘의 창과 깊은 샘들이 터져서 발생한 홍수 상황에서 유일한 피난처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 세상의 방법을 도입하고 세상의 법칙이 동원되어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자아 정체성에 대한 해갈에 필요한 물이 넘쳐나서 오히려 마실 수 없는 홍수가 된 상황에서 피난처가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들의 갈증, '왜 사는가?', '나는 누구인가?'와 같은 자아 정체성의 갈증에 있어 유일한 해답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고, 이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상황에 있어 피난처가 되시는데, 그것은 하늘의 창과 깊은 샘이 터져서 물이 넘쳐나는 상황에서 피난처라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문화와 지식과 철학과 과학이 넘쳐나는 세상이다. 과학은 사람의 근원을 과학적으로 찾고자 생물학을, 또는 우주과학을 연구하고, 철학과 인문학은 사람 내면의 생각들을 연구하고 있고, 세상적인 문화는 갈증을 잊게 하는 즐거움을 끊임 없이 쏟아내고 있다. 한마디로 물이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느 누구 하나 그런 것 안에서 세상에 존재하는 자아의 정체성을 알고 만족하는 사람이 없다. 큰 스님도, 재벌 총수도 대국의 대통령도 어느 누구 하나 다른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볼 때 공감할 수 있는 해답을 찾았다는 사람이 아직은 없다.


그렇다면 교회들은 또 어떤가? 교회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함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과 인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에서 멀어지자 세상의 각종 법과 좋은 것을 교회 안으로 끌어 들이고 있다. 예를 들어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 것과, 다양한 시설을 교회 안으로 가져와서 신앙에 활용하고자 한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어느 것 하나 세상을 극복할 수 없는 상황이다. 작정하고 발전하는 세상의 일부를 교회 안에 가져와서 승부가 될리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교회 학교의 실질적 문제이다. 교회가 성경말씀을 동영상과 같은 세상에서 좋은 것으로 아무리 만들어도, 세상이 만든 만화를 이길 수 없는 상황인 것이다.


이런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아내로 취한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 말씀을 동영상으로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줄 알고, 교회를 편하고 좋은 시설로 만들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 믿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다소간의 문제해결에 영향을 주는 것 같지만 수박 겉핡기에 불과한 상황이다.


진정한 문제의 해결은 성경 말씀을 화려한 CG로 동영상을 만들고, 교회의 시설을 최첨단으로 하거나 휴양할 수 있는 곳을 만든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해답은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하게 아는 것, 그것 뿐이다. 방주는 그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아는 것, 그것이 바로 노아의 방주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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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아의 홍수에 있어 <방주>는 절대적인 요소이다. 하나님께서는 노아에게 방주의 규격을 알려 주셨고, 이것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데(창 6장) 문제는 그 규격의 단위가 <규빗>이라는 것이다. 이 규빗은 대체적으로 사람의 팔꿈치에서 가운데 손가락 끝 까지의 길이를 말한다.


규빗은 '1m는 진공 상태에서 빛이 1/299,792,458초 동안 지나간 거리' 처럼 객관적으로 표준화된 것이 아니라, 사람의 신체 사이즈에 따라 다른 아주 주관적인 단위이다. 그런데 성경에서는 노아의 방주는 물론이고 성전을 지을 때도 주관적 단위인 이 규빗을 사용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객관적이지 않은 단위를 기준으로 방주를 만들라고 하신 것은 이 시대의 사람들에게 규빗이 정확하게 몇 cm인지 연구라하고 하시기 위한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 주관적인 단위로 방주와 또 성전을 지으라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생명의 아버지이시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은 다양한 모습과 삶을 산다. 이것은 자신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단 하나의 모습으로 표현되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방주라는 배의 객관적 규격이 얼마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을 하시고자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방주를 지으라고 하신 것은, 홍수와 같은 세상 가운데 있지만 홍수를 피하고 견뎌낸 방주와 같은 장소를 만들고 그 안에 피하라는 것이다. 이것은 지금으로 보면 교회를 말씀하시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홍수와 같이 창궐하는 물에 빠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곳을 만들고 그 안에 거하라는 것이다.


물은 천지창조 과정에서도 나오는데 별도로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표현보다,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로 또 바다와 육지로 나누는 과정을 말씀하셨다. 특히 하나님께서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로 나누신 것은 사람이 먹어야 할 물과 먹어서는 안되는 물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 (창세기) 천지창조 둘째 날 - 궁창 위의 물과 아래의 물


홍수의 시작에 대하여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합하여 진 것이라고 성경에 기록되어 있다.(창 7:11) 즉 이는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보실 때 사람에게 상수도와 같은 물과 하수도와 같은 물이 합쳐져서 홍수가 났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창세기 6장에서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삼아 네피림을 낳았다'고 하신 것이다. 이것이 홍수라고 했다. 


즉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아 정체성에 대한 끝없는 갈증을 가지고 마실 물을 찾는데, 하나님의 아들과 같고 궁창 위의 물과 같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는가 하면, 사람의 딸들과 같고 궁창 아래의 물과 같은 세상의 다양한 지식이 물과 같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합쳐지면 홍수가 되고, 그것이 합쳐지면 위대하고 장대한 지식이 된다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의 삶 속에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지식이 합쳐진 다양한 것이 있다. 대표적인 것인 "창조 과학회"와 같은 것이고, 또한 교회의 예식과 설교 속에 스며들어 있는 세상의 법칙들이 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세상에서의 성공이라는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이요 궁창 아래의 물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는 것이 합쳐져서 위대한 것을 낳는 것이다. 그래서 서울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 세상, 즉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지식이 짬뽕이 되어 넘쳐나는 세상, 이 세상이 바로 홍수인 것이다. 이런 홍수 속에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세례와 고백의 과정을 거쳐낸 사람들이 살아 남기 위하여 만드는 것이 방주, 곧 교회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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