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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6)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4. 15:57 Writer : 김홍덕

가인이 죽인 아벨을 대신하여 주신 아들 셋과 그 셋이 아들을 낳아 이름을 에노스라 했을 때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셋도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에노스라 하였으며 그 때에 비로소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창 4:26)


이는 정말로 재미 있는 말씀이 아닐 수 없다. 어쩌면 이 한 절이 가인과 아벨이 주는 모든 교훈이 함축된 말씀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에노스가 태어 나서야 사람들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불렀다는 것이다. 여호와는 하나님의 이름이다. 그리고 이름은 정체성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을 제대로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대하여 바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깨닫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스스로 있는 자, 곧 존재의 신이라는 것이다. 그런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인식하고 불렀다는 것은 존재의 하나님을 믿기 시작했다는 것이고, 하나님을 존재의 하나님으로 믿는다는 것은 자신의 신앙이 존재의 신앙이 되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여기서 이름을 불렀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기 시작했다는 의미라고 해석들을 하는데, 그것도 참 의미가 있다. 제사(예배)의 문제로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얻은 아들의 속심령에서 에노스가 나오자 사람들이 하나님을 여호와로, 그러니까 존재의 하나님을 예배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한 개인의 신앙에 있어서도, 아벨의 계보를 따른 셋, 즉 양의 제사를 드리다 죽은 아들을 대신하여 낳은 아들에게서 "죽을 수 밖에 없는 자(에노스)" 라는 고백이 나왔다는 것은, 사람이 양과 같이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고백이 있으면 하나님을 존재의 신으로 바로 예배하게 된다는 말씀이다.


오늘 우리가 이 가인과 아벨 그리고 셋의 말씀을 읽으면서 이것을 알지 못하고, 그냥 "질투해서 사람을 죽이면 안된다 "라는 교훈만 얻는다면 그것은 성경을 겉만 보는 것이고,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며, 거저 역사책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


요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게 하실 것이요(요일 1:9)


죄는 당연히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것은 선악과를 먹고 인간이 부끄럽다고 여긴 아담의 마음이며, 수고한 것을 제사로 열납해야 한다며 동생을 죽인 가인의 마음이다. 즉, 사람의 연약함을 인정하지 않는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런 죄가 있다고 고백한다는 것은 인간이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다. 그런 시인함이 바로 셋의 고백인 것이다. 셋이 아들의 이름을 "에노스"라고 한 고백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고백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그를 깨끗하게 하신다고 했다. 즉 그 예배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제사를 받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여호와로 불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를 수 있어야 한다. 말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부끄러워했던 인간인 내 모습을 인정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인정해야 하나님을 여호와로 부를 수 있다. 그리고 수고가 아니라 양과 같은 운명을 제사로 받으심을 인정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존재로 인정하고 부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아벨의 제사고,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는 것이며, 그것이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이 없으면 신앙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냥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가인의 마음 뿐이다. 그런 마음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신다. 평생을 수고해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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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5)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4. 15:37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연약한 양과 같은 운명으로 드려진 제사이고, 아벨이 드린 양을 바치는 제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을 개인 개인의 교훈으로 가져 온다면 사람이 연약하고 때로 추하기도 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사람들 앞에서 그렇지 않은 척 해도 화장실의 모습은 다 똑같다. 그래서 화장실은 밀폐된 것이다.


모든 사람 안에는 가인과 같은 마음이 있다. 즉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은 양이나 드리는 것이 아니라, 땀 흘려 노력하여 얻은 소출과 같은 세상의 성공을 하나님께서 받으실 것이라는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종교든지 다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신앙하는 신이 기뻐한다고 가르친다.


하지만 하나님은 다르시다. 그런 제사를 받지 않으시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들도 가인의 제사를 드린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겠다는 사람들에게 가인의 제사를 독려하고, 아벨과 같이 자신의 연약함을 고백하면 신앙 없는 것으로 취급해 버린다. 아벨을 죽이는 것이다.


십자가는 너무 연약한 것이다. 그런 제사를 드리는 곳에는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이 두려울 수는 있지만, 그렇게 되지 않을까봐 두려워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가인의 제사와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온전한 제사라고 믿는 사람들은 실패를 두려워 한다.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한다.


하지만 십자가는 다르다. 그렇게 될까 두려워 하고, 그렇게 되지 않을까 두려워 하지 않는다. 설사 그것인 신앙에 관한 것이라 해도, 그렇게 될까 두려워 한다면 다 가인의 제사이다. 교회에서 욕 먹을까 두렵다면 그 교회는 가인의 제사를 드리는 곳이다. 그렇게 되지 않을까봐 두려워야 그것이 아벨의 제사인 것이다.


그런 가인에게 자손들이 났는데,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두발가인이다. 두발가인은 최초로 철을 다룬 사람이다. 영화 노아에서는 어이 없이 나오지만, 그렇더라도 한가지 동일한 것은 세상의 성공과 육신의 성공을 최고로 아는 것에서는 동일하다.


 

<영화 노아는 좀 어이 없었다>


가인의 자손, 즉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제사로 받아져야 한다는 마음이 낳은 것들은 두발가인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가인 자손들의 이름이 가진 의미를 하나 하나 알지는 못하지만 결국 가인의 그런 사상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반면에 하나님께서 가인의 손에 죽은 아벨을 대신하여 아들을 또 주셨는데, 그 이름은 <셋>이다. 이 이름의 어원은 '대신하다'라는 의미라고 한다. 그에게서 아들이 낳는데 그 이름을 '에노스'라고 했다. 그 에노스라는 이름의 뜻은 "죽을 수 밖에 없는"이라는 의미라고 하는데, 이는 인간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셋이 아들의 이름을 "죽을 수 밖에 없는 존재"라고 지었다는 것은 자신 안에 그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이다. 아들은 늘 그 사람의 속사람이 표현된 것이기에 이는 셋의 고백인 것이다. 즉, 셋과 에노스의 세대가 되니 사람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고백했다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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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4)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6. 14. 15:10 Writer : 김홍덕

사람은 원래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만드셨기 때문에 그런 하나님의 목적에 대한 기본적인 본성이 있다. 그것을 성경에서 <양심>이라고 한다.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했다.


물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이제 너희를 구원하는 표니, 곧 세례라 육체의 더러운 것을 제하여 버림이 아니요 오직 선한 양심이 하나님을 향해 찾아가는 것이라(벧전 3:21) 


그런데 그런 마음을 싫어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일면 옳은 것 처럼 보이지만, 다 가인의 마음이다. 그런 마음은 지금의 교리를 낳았다. 교회에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싫어하시는 것을 정하고 그 어느 한 쪽을 선택해야 한다고 가르치면 다 같은 부류의 생각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자기 안에서 한편으로는 사람이란 어떤 존재인가? 생각해 보기도 하고 때로 자신도 연약하다는 것을 느낄 때, 다른 사람도 연약하다는 것을 인정하기도 하기도 하지만, 세상의 법이라는 세계에 들어가면, 사람이 더 강해져야 하고, 더 성공해야 인정하는 그런 모습에 매몰되어 그것을 위해 살아간다.


하지만 모든 사람의 마음 안에는 그런 삶에 대한 의문과 회의가 늘 있다. 그래서 "사는 것이 무엇인가?', "인생은 무엇인가?" 라는 질문 앞에 늘 숙연해 지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에서 성공하기 위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최대한 감추려고 양을 치는 아벨과 같은 마음인 하나님을 표현하고자 하는 마음을 늘 억제하는 것이다.


'약한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라는 것은 물론이고, "세상에서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라는 교회 안의 생각에 이르기까지 그런 모든 생각들은 어쩔 수 없는 자신의 연약함을 감추려는 가인의 마음이고, 사람들은 이 마음을 크게 중요하게 여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은 그것이 아니다. 사람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이 약해지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스스로 감추고자 하는 부끄러운 것들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기 위하여 사람에게 주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신 것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를 열납하셨다는 것이다. 아벨은 양을 치는 자였고, 양은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을 말하는 것이며, 이에 대하여 이사야 선지자가 이사야서 53장에 말씀하신 바와 같이 양은 그 연약함이 그지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양의 운명이고, 그리스도의 운명이며, 사람의 연약함이라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위대함이나 강함으로 드려진 제사가 아니다. 그리스도는 정말 초라한 모습으로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 예수님의 모습을 히브리서 기자는 영원한 제사(히 10:12)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렇게 제사라고 말한다는 것은 이 제사가 하나님께 열납되어 온전한 제사가 되었기에 제사라고 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드린 제사는 어린 양과 같이 드려진 제사(사 53장)이고, 아담이 부끄러워 몸을 가린 것과는 반대로 모든 것이 벗겨진 체로 드려진 제사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양을 제물로 드린 아벨의 제사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연약함을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고, 연약한 모습으로는 하나님께 제사를 드릴 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가인의 제사요 가인의 마음이다. 안타깝게도 지금 많은 교회가 그런 제사를 드리고 있다. 즉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예배의 제물로 드리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하나님께서 에덴 동산의 중앙에 선악과를 두셨을 때 부터, 육신 가진 연약함에 대한 두가지 생각이 있다. 하나는 그것은 부인하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그것을 부인하는 마음은 가인의 제사고, 그것을 인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벨의 제사이고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인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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