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9

스포츠, 그 공간과 시간의 다툼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14. 4. 4. 11:35 Writer : 김홍덕

제목은 스포츠라고 했지만 명확히는 야구와 축구에 대한 비교다. 월드컵이 아닌 이상 국내 시장 규모로 볼 때 이제는 비교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야구가 우세한듯 보이기도 하지만 어쨋든 구기 종목의 양대산맥인 것은 이의가 없을 듯 하다.



IMGP7115
IMGP7115 by lseeker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2013.09.06 대한민국 (Rep. of Korea) vs. 아이티 (Haiti)
2013.09.06 대한민국 (Rep. of Korea) vs. 아이티 (Haiti) by manricheon 저작자 표시



문화적으로 봐도 축구는 유럽의 문화가, 야구는 미국식 문화가 반영이 되어 있다. 무승부라는 것에 대한 개념으로 보면 그렇다. 축구는 무승부가 있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요하게 여기는 경향이 있다 할 수 있다. 하지만 야구(미국)의 경우는 1박 2일 경기도 한다. 끝장을 보자는 것이다. 마치 서부 개척 시절 총잡이의 대결과 같다.


경제적으로 보면 야구가 훨씬 우세(월드컵은 논외)하다. 신문에 나오는 것을 기준으로 보면 축구 구단들은 적자가 많다.(사실 그런 적자를 안고 유지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야 하는지 모르지만) 특히 미디어와의 호환성을 보면 야구는 경제성이 매우 좋다. 9회를 기준으로 광고를 최소 20회 이상 보낼 수 있다.(투수 교체 시간 등 포함) 하지만 축구는 고작 Half Time 뿐이다. 게다가 15분씩 광고만 보는 시청자는 없다. 홈쇼핑이 아닌 다음에야...


하지만 이런 차이들은 기본적으로 형식으로 인한 차이이다.(무승부에 관한 차이 빼고) 이 두 종목은 기본적으로 개념이 많이 다르다. 야구는 구기 종목 중 유일하게 공을 소유한 팀이 수비를 하는 경기이다. 그리고 모든 스포츠를 통틀어 감독과 코치가 등번호가 있는 유니폼을 입는 경기이기도 하다.(크로켓도 그런가? - 이건 잘 모름)



 축구

 시간을 정해 놓고 공간을 다투는 경기 

 특정한 공간만 점수가 됨

 야구

 공간을 정해 놓고 시간을 다투는 경기

 모든 공간이 점수와 연관(땅에 떨어지면 안타 및 인플레이)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 두 종목은 경쟁의 대상이 다르다. 축구는 시간을 정해 놓고 하는 경기다. 즉 시간은 다툼의 근본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축구는 정해진 시간 안에 공간을 어떻게 점유하고 활용하여 상대가 지키는 공간으로 자기의 공을 넣느냐의 다툼이다. 


반면에 야구는 시간 제한이 없다. 모든 아웃과 세이프는 시점을 기준으로 형성된다. 정해진 공간인 베이스를 누가 먼저 점유하느냐에 따라 경기가 운영된다. 타자가 친 공과 타자주자 중 누가 먼저 1루에 도달하느냐로 부터 시작된다. 스트라이크 존에 들어 오는 공을 때릴 수 있는 시간이 딱 정해져 있다. 타자가 그것을 차지하느냐? 아니면 투수가 차지하느냐 또한 중요한 쟁점이다.


한마디로 축구는 시간을 정해 놓고 공간을 다투는 경기고, 야구는 공간을 정해 놓고 시간을 다투는 경기다. 물론 둘 다 소위 말하는 타이밍이라는 공통적인 기술적 요소와 공간에 대한 전술적 요소가 공존하지만 다툼의 근본 개념이 그렇다는 것이다. 


구기 종목은 공을 가지고 경기를 한다. 스포츠 특히 구기 종목의 경우 예전 전쟁의 대용 특성이다. 군대가 적의 땅을 점령하는 것이 전쟁이라면, 구기 종목은 공을 자기의 의도대로 상대에게 넣거나 보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공은 전쟁으로 치면 전쟁의 목적이다.


만약 나라 간에 전쟁을 한다면 한 나라가 옳다고 여기는 의를 다른 나라에 관철시키는 것이 전쟁의 목적이다. 한 나라가 옳다고 여기는 것을 다른 나라에 관철 시키겠다는 최종 행동이 전쟁인 것이다. 이것이 구기 종목에 녹아 있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 나라가 옳다고 여기는 <의>는 시간과 공간으로 표현되는 것이라 볼 수 있겠다. 그래서 구기 종목은 대체로 그렇게 나눌 수 있다. 공간을 정하고 시간을 다투는 종목은 대체로 네트를 사이에 두고 경기를 한다. 이들은 모든 공간이 점수가 된다. 이런 경기들의 기술적 핵심은 타이밍이다. 공간은 정해져 있으니. 반대로 네트가 없는 농구, 핸드볼, 축구 등은 다 시간이 정해져 있다. 공간을 다툰다는 것이다. 이들은 특정 공간만 점수가 된다.


그렇게 보면 사람에게 있어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요소인 것 같다. 사람이 옳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시간 그리고 공간과의 함수 관계에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 시간과 공간의 의미를 잘 새겨 본다면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카이로스 vs 크로노스, 위치 vs. 자리 이것을 차이를 안다면 더더욱.... 괴변 같을지 모르지만 스포츠, 야구와 축구 등의 스포츠에 녹아 있는 시간과 공간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을 정리해 본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하면 된다.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4. 3. 16:54 Writer : 김홍덕

<하면 된다.>는 말이 있다. 난 어쩌다 군을 특전사에 다녀왔는데, 특전사의 특전훈도 <안 되면 되게 하라!>다. 하지만 난 이전에는 하면 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다. 뼛속 깊이, '사람이 한다고 되나?', '되는 일은 다 따로 있다', 또 '되게 하는 이는 따로 있다' 등의 생각이 박혀 있었다. 당연히 내 삶도 그러했다.





어쩌면 앞에서 포스팅 한 것 처럼, 실패를 해 보지 않았고, 또 하지 않으려 노력하다 보니, 삶의 방식은 당연히 소심하고 소극적일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거시적으로 본다면 그것이 진정한 실패였다. 그러고 이런 나의 생각은 다분히 종교적인 가치관의 기반 위에 형성되었다.


즉, 하나님께서 하시지 않으면 아무 것도 안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 뭔가 하시고 계시다는 것을 알기 전 까지는 무조건 조심하고 기다리고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다보니 신앙 생활의 많은 시간들을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심이 쏠려 있었다. 그것을 아는 것이 핵심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한 달란트 받은 사람과 같은 삶이다. 내가 뭐라고 언급할 처지는 아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아직도 이 생각에 매몰되어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이 세상을 만드실 때, 이미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그 뜻을 밝히신 하나님이시다.


다만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이, 육신의 삶에 관한 것에 집중되어 있을 뿐이다. 즉 <"내가 어떻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보답해 주실까?"> 궁리하는 프레임에 갇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그런 것에는 관심이 별로 없으시다. 이 육신의 삶에 관해서는 이 육신이 거하는 세상 안에 그 법이 이미 다 있다. 그러니까 이미 다 주신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라는 현상계를 만드시고 또한 사람의 육신 또한 형상으로 태어나게 하셨다는 것은 세상과 육신은 그 코드가 같다는 의미이다. 즉 육신의 일은 이 세상의 법에 따라 하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에 관해서는 자기 하기에 따라 다 될 수 있게 주셨다는 것이다. 세상이 존재하고 내가 세상 안에 존재한다는 것이 이미 다 주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하면 된다는 것은 의미 있는 말이다. 육신으로서 세상을 살아가면서 세상에 관한 일은 하면 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그런 법으로 살면 되는데, 육신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의 뜻과 생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서 시간을 보내는 것, 하나님의 뜻을 위반하는 실패를 하지 않으려는 노력과 같은 것들은 그것 자체가 가장 큰 실패이다.


이 모든 것을 함축시킨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라는 것이다.


육신이 살아가는 일은 하면 된다. 하면 결과가 자기가 원하는대로 된다는 것이 아니다. 하면 된다는 것이다. 한다는 것은 언제나 된다는 것이다. 즉 Do라는 것은 언제나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결과가 나의 뜻대로 된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신앙 안에서 하나님께 있다. 다만 결과가 아니라 "하는 것"은 언제나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 결과가 어떻게 되어야 하는 것이 하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한다'는 행위 자체는 늘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결과에 순종할 수 없는 사람은 하지 않은 사람이다. 결과에 순종할 마음 없이 두 달란트와 다섯 달란트 받은 사람이 어떻게 장사를 시작할 수 있었겠는가? 오히려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은 결과를 염려했기 때문에 가만히 묻어 둔 것이다.


'순종이 제사 보다 낫다'는 것은 뭔가를 해 본 사람의 세계이다. 해 보지 않았다면, 순종할 명령도, 결과도 없다. 해 보았다는 것은 육신의 삶이 세상의 법에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법은 존재의 법으로서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은 언제나 무릎만 꿇고 앉아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한 달란트 받은 사람일 뿐이다.


하면 된다는 것을 믿지 않았던 나의 시절은 순종을 모르는 시절이었다. 결과에 순종할 자신이 없었으니 아무 것도 하지 않았고, 내가 한다고 될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순종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나서야 비로서 육신의 삶에 대하여 할 것은 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 이전에는 모르는 세계였다. 그런 말은 알았지만.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앙의 보편성과 순수성  (0) 2014.04.14
영화 <머니 볼>  (0) 2014.04.10
실패 예찬  (0) 2014.04.02
창조 경제타운  (2) 2014.02.19
때론 실패자가 되어 보자..  (0) 2014.02.12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실패 예찬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4. 2. 22:03 Writer : 김홍덕

드라마를 잘 보지는 않지만 어쩌다 재방으로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의 한 회를 보게 되었다. 그 회에는 이성계와 정도전 그릭 이방원이 나온다. 새로운 세상을 열자는 정도전에게 이성계는 뒤짚을 것이 아니라 개혁을 하면 되지 않겠는가 답변을 하는 대화를 이방원이 듣게 된다.



이에 이방원은 왜 아버지인 이성계를 설득하지 않느냐?라고 하자 정도전은 개혁을 꿈꾸는 자는 설득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패가 필요한 것이라고 답변을 한다. 이성계가 개혁에 실패해야만 새 나라를 건설하게 될 것이라는 답변인 것이다.


실패!!!


사람들이 모두다 회피하고 싶은 실패에 대한 예찬을 해 볼까 한다. 물론 나보다 더 훌륭한 사람들, 또 이루 말할 수 없는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 그리고 철학자들의 실패 예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에 넘칠 정도로 많다. 다만 그 위에 나도 한 술 얻어보려 하는 것이다.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실내는 성공의 어머니다!">라는 누구나 아는 명언에서 부터 수많은 실패의 격언과 말들과 교훈이 있다. 나도 분명히 그런 세상을 살고 그런 것을 간간히 가르치는 학교를 다녔다. 그런데..... 불과 얼마 전까지 그 많은 것은 지식일 뿐이었다. 하지만 이젠 아니다. 여튼 나는 그렇다.


사람들은 실패를 피하려 한다. 한마디로 죄악시 한다는 것이다. 뭐 죄로 여기느냐? 하겠지만, 기피하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에서 죄와 같은 대접을 받고 있다는 말이다. 물론 당연히 그 가치와 성격은 다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실패를 두려워하는 것일까?


그것은 한마디로 실패는 바르는 바와는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즉 내가 바라는 버켓리스트에는 늘 없는, 아니 없어야 하는 것이라고 바라고 간절히 희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도 그랬기 때문에 아마 사람이라면 거의 다 그런 생각에서 출발했을 것이라 나는 생각된다.


하지만 실패는 인생의 일부이다. 그러므로 인생이라는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에게 있어 실패는 그 삶에서 절대로 분리되지 않는 요소인데 그것을 사람들은 외면하려 하고, 그 실패를 회피하려 애를 쓰다 보니, 마치 주자에게 신경 쓰느라 타자에게 안타 맞은 투수와 같은 결과를 손에 쥐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에게 실패를 회피하려는 마음은 비단 실패에만 적용되는 자세는 아니다. 어떤 기준, 즉 자기가 사는 문화와 나라, 그리고 자신이 처한 환경 안에서 규정된 어떤 선과 악한 것, 바라는 것과 없기를 바라는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이라는 이분법적 논리의 기반에서 부정적인 요소를 버리고 회피하고 떠나려 하는 것이 몸에 베였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고 있는 선악과, 즉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은 결과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어떤 것에 대하여 있어서는 안될 일을 스스로 정한다는 것이다. 실패는 인생에게 있어 불가분의 관계임에도 늘 피하는 것이 그 때문인 것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전거 타는 법 하나 배우는 것에도 실패 없이는 된 것이 없다. 그렇게 실패는 내 인생의 일부이듯, 사람이들이 그렇게 피하고 싶어하는 일들도 이미 인생의 일부인 것이다. 그래서 그 존재를 확인할 수 있고, 그렇게 봤기 때문에 피하려 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가 먹은 것이 선한 과일이나 악한 과일이 아니라 선과 악을 어우르는 선악과인 것 처럼, 실패도 또한 삶에서 그렇게 피하고 싶어하는 일들도 다 인생의 일부이다. 그렇게 인생을 봐야 한다. 어쩌면 삶에서 피해야 할 유일한 것이 있다면, 실패나 나쁜 것이 나에게 없기를 바라는 그 마음 그것 하나 뿐일지 모른다. 아니 그렇다. 


실패는 친구로는 껄끄럽다. 하지만 친해야 한다. 그를 멀리하고는 인생을 알 수 없다. 사람들이 나쁘게 생각하는 모든 것도 그렇다. 그것을 장려하거나 일부러 그럴 필요는 없지만, 그들은 우리가 사는 삶의 일부인 것이다. 그게 사람이고 세상이다.


나 역시 늘 실패를 멀리하려 했었다. 하지만 크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얼마간의 실패를 겪고서 얻은 것의 가치는 대단하다. <"실패해 보지 않는 사람은 도전하지 않는다.">라는 말을 좋아한다. 이전에는 도전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정도전이 이성계에게 해 준 말이 바로 그것이다. 아마 그 말이 그 뜻이라는 것 조차 실패의 경험이 없다면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김집사의 뜰 > 복음 담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영화 <머니 볼>  (0) 2014.04.10
하면 된다.  (0) 2014.04.03
창조 경제타운  (2) 2014.02.19
때론 실패자가 되어 보자..  (0) 2014.02.12
신앙이 얼마나 절대적 사안인가?  (0) 2013.11.25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