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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인들은 사회에서 문제가 되는 행동에 대해서 조심은 하지만 그것을 하나님께 기도하면 다 용서해 주신다고 생각하고 심할 경우 당사자에게 사과나 용서를 구하지 않기도 한다. 또한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은 그런 기독교인들의 모습을 비난한다.


이는 양자 모두가 하나님의 성품을 회복한 삶에 대한 경험이 없기 때문이다. 성경말씀은 기본적으로 사회 법률이나 도덕과 같이 사람의 행동에 대한 선과 악을 가리는 말씀이 아니다. 성경은 오직 하나님의 의에 합당한 것이 어떤 것인지를 말씀하시는 책이며 그것이 또한 선이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죄는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동의하는지 하지 않는지를 기준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를 자신의 의로 삼고 살아가는 사람이면 선한 사람이고 죄가 없는 사람이며, 그렇지 않으면 노벨평화상의 매년 수상할 정도의 선함을 가지고 살아도 의미가 없다.


이렇듯 성경말씀이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고, 죄와 구원이 그 의가 없이 살던 삶이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것으로 회귀하는 것을 구원의 역사라고 하는 것이다. 행위 규범에 관한 죄와 잘못하는 것과 악한 것은 그 다음의 이야기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형식을 가진 존재인제 그 형식으로 인하여 잘못된 행동으로 죄가 될 수 있지 않느냐? 하는 의문도 들 수 있다. 물론 그럴 수 있다. 아니 그것이 당연하다. 그것이 바로 사람이 연약함이다. 그러니까 육신으로 세상의 법률이나 종교적인 율법을 다 지킬 수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율법과 세상의 법률 앞에서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하며, 또한 그것이 죄기 때문에 그런 죄를 하나님 앞에서 용서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율법과 세상의 법률 앞에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수밖에 없었다.


바로 그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세상의 법과 종교적인 율법 앞에서 언제라도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시인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육신을 가진 인생은 세상이 규정하는 법률과 또한 종교적인 율법 앞에서 언제라도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사건이 바로 십자가 사건이다. 십자가에 죄인으로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은 육신을 가진 사람이 죄인으로 낙인찍기 위함이 아니라 육신은 언제나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시인함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구속의 은혜를 입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사람은 그런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과 율법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보시고 심히 좋았다고 하신 모습이라는 것이다. 범죄 전의 아담이 하늘을 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지 않는가? 우리와 같은 존재였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다.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부인하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선악과를 먹게 했고, 그 결과 육신이 한계를 가졌다는 것이 부끄러워져서 율법의 무화과나무로 옷을 입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면 이 육신의 한계가 감추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끊임없이 수도하면 성적인 생각이 들지 않을 것이라 여긴다는 것이다. 머리 깎고 산에 들어가 있으면 화를 내지 않게 될 것이라 여긴다는 것이다.(사실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면 화낼 사람이 없다.) 그것이 바로 율법으로 사람이 세상의 법과 율법 앞에서 죄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감추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법과 율법 앞에서 죄인이 아닌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보통의 사람들이 알고 있는 신앙생활이다. 경건하게 기도하고 금식하고 하면 사람 안에서 드는 욕심과 성적인 욕망과 같은 것을 이길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노력하고, 이긴 척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살인한 자고,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은 자는 간음한 자라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한마디로 사람은 자신을 절제한다고 사람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게 된다거나 성욕이 없는 경건한 사람이 될 수 없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런 것을 이기기를 기도하고, 그것을 절제하려 애쓴다. 그것이 죄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죄는 그것이 죄가 아니라, 사람이 노력하면 세상의 법과 율법 앞에서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이 죄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런 존재가 아닌데 그럴 수 있다고, 또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자기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 사도가 하나님 앞에서 자백해야 한다고 하는 죄가 바로 그것이다. 사람이 노력하고 율법을 잘 지키면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여기는 것, 바로 그것이 죄고, 그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8-9)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세상의 법과 율법 앞에서 선한 존재가 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 그것이 바로 죄를 시인하는 것이다. 예수님도 육신으로는 그것을 이길 수 없다는 것을 십자가로 가셔서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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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5-10절) 죄(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9. 29. 12:03 Writer : 김홍덕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고 있는 죄의 근간은 '존재의 죄'라고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자신의 존재 목적에 적합한 정체성을 가지고 살고 있는지? 아닌지? 그것이 바로 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이는 에덴동산의 아담과 하와에서 시작되어 지금도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이 왜 사는지를 망각하고 사는 그 자체를 말하는 것이다.


실재로 사람들은 살다가 어떤 나이, 혹은 어떤 상황이 되면 불연 듯 '나는 누구인가?', '나는 왜 사는가?' 혹은 '인생의 목적은 무엇인가?'와 같은 의문에 휩싸이고 때로 그것이 스스로 자살을 하게 하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사람들은 한번쯤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존재 목적은 어떤 상황에서도 사람이 정할 수는 없다.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어떤 종교라도 신앙을 가질 수 없다. 하지만 잘 생각해보면 이 땅에 살았던 어떤 조상이라도 조상이 근원인 것은 아니다. 우리는 그것을 납득하는 것이 너무 어렵다. 


이렇듯 존재라는 것이 중요한 것은 존재가 정해지면 그 다음에 사는 모습이 정해지고, 또 무엇을 위하여 살 것인지가 정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존재의 목적을 파악하지 못한 체 살아가는 모습과 방법에 몰두하고 있다. 


우리는 살면서 어떤 것에 몰입한 사람을 볼 수 있다. 그들에게는 대부분 자신의 삶의 목적이나 자신이 존재하는 이유를 그 자신이 몰입하고 있는 것에 두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이나 자식이나 또한 예술이나 일과 같은 것이긴 해도, 어쨌든 그런 목적이라도 있다면 하는 일의 장인이 될 수 있다.


사람이 그런 모습을 보이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은 그릇이다. 늘 뭔가를 채워야 한다. 그 안에 물을 채웠다면 물그릇이 될 것이니 물과 같은 삶을 살 것이고, 그 그릇 안에 사랑하는 사람을 채웠다면 그 사람을 위하여 살 것이다. 그릇은 그 담긴 것에 맞게 사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장 근원적인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사람 안에 채워져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하나님의 성품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만드신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잡히면 그 사람의 삶은 자연스럽게 성경의 모든 것을 지키고 다른 사람에게 나타내며 사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반대로 하나님께서 주신 존재의 목적을 떠나서 살면 그 삶이 아무리 위대한 것을 이루었다 해도 그것은 안타깝지만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이 세상이야 하나님께서 말씀만으로 만드신 것인데 그 안에서 세상의 것을 아무리 이루어봤자 새로운 것은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 업적도 아니라는 것이다.


간첩을 보자. 그는 국가 안에서 국가의 의와 법에 반하는 존재이다. 그런 존재가 많은 사회사업을 해서 유명해지고 많은 기부를 하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고 해 보자. 그건 하면 할수록 문제가 되는 것이다. 어느 날, 그 사람이 간첩인 것이 알려진다면 그에게 도움을 받은 모든 사람도 다 곤란해지는 것이다. 그건 의도나 방법의 문제가 아니다. 간첩이라는 정체성의 문제인 것이다.


이와 같이 자신의 존재목적이 회복되지 않은 상태로 세상에서 많은 것을 이루어 간다면, 이룬 것이 많을수록 죄가 많아지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죄의 정체인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 그것이 바로 죄의 기준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죄라고 하면 법률상의 죄를 떠 올린다, 살인과 도적질 강간과 사기와 같은 것, 그리고 일상 속의 거짓말과 부도덕이나 남에게 피해를 끼치는 것들을 죄라고 생각한다. 그것들은 분명히 죄다. 예수 믿는다고 그것이 자신과 무관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러한 사회 속에서의 죄는 시대 상황에서 따라 죄가 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영웅적 행동이 될 수도 있는 것들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죄의 근원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그러한 죄는 그 시대와 사회가 정한 법에 따라 심판을 받고 죄의 값을 치러야 하는 것이다. 예수 믿는다고 그것에서 예외가 된다거나 그냥 예수 믿는다는 이유로 그것에 대하여 용서 받았다고 주장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그런 죄가 세상에 있듯이 그런 죄에 대하여 세상의 법이 있다는 것이다.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의 일부이고 세상인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죄가 있다고 구원을 불허하시는 하나님이 아니시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네가 누구냐?"하는 그것뿐이다.


한마디로 말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거하는 사람인지 아닌지 그것을 죄의 기준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행위로 범하는 것은 그 시대의 법에 따라 살면 되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자신하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에 도전적이거나 무례하지 않기 때문임을 아시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낸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 하나님의 성품을 일컬어 사랑이라고 한다. 사랑, 곧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에서 말해 놓았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존재의 목적을 아는 사람의 삶이 바로 그런 것이라는 것이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가 되고 내가 예언하는 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 것도 아니요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게 아무 유익이 없느니라.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고전 1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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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껍데기 벗기기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9. 26. 16:10 Writer : 김홍덕

스마트폰을 살 때면 당연한 듯 폰 케이스 가게에 들러서 이른바 폰 껍데기를 하나 장만하곤 한다. 그러면서 '나는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투명한 것을 한다.'는 타협안을 가지고 폰 자체의 디자인에 또 하나를 덧씌운다.


아이폰5S, 내가 사용하는 전화기다. 작년 10월 출시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구매하면서 똑같이 폰 껍데기를 했다. 그것도 SGP로. 타협안대로 투명한 것으로.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껍데기를 어렵게 벗었다.


하지만 끝내 알루미늄으로 된 뒷면의 긁힘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고 뒷면에는 보호 필름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SGP가 무상으로 교환해 주었다는 정도.


사실 폰은 껍데기 없이 사용하는 것이 제 맛이다. 아무리 보호 필름이 선명하게 보이게 한다곤 하나 빛 투과율 100%인 필름이나 유리는 없다. 그러므로 무조건 원본보다 필름을 통하면 덜 선명한 것이다.


게다가 폰을 살 때면, 아이폰 유저가 아니라면 나름 디자인도 본다. 아이폰 역시 디자인은 일단 논외로 할 정도로 갑이니 그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디자인 보고 산 비싼 전화기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디자인을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하나 같이 폰을 사면 껍데기를 한다. 가끔씩 껍데기 없이 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나는 다시 보게 된다. 보기 힘든 예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폰에 껍데기를 씌울까?


표면적인 이유는 당연히 비싼 폰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폰의 가치가 외관에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달라진다. 폰의 가치, 곧 폰의 본질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에 있다. 기능도 사실 활용에 비하여 성능이 지나치게 높은 게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이 본질보다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 생각이고 그 생각이 상업적 술수와 보조를 맞춘 것이다. 또 한 가지를 예로 들면 가구나 집안의 살림을 살 때면 의례히 말하기를 "손님 오면 그래도……"하면서 좋은 것을 산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집에 사람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꺼린다. 이게 뭔가?


이건 단순한 사회의 한 단면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순적으로 사는 것은 사람 안에 살아가는 본질적인 이유와 목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수고의 결정체인 돈의 대부분을 형식을 치장하는 것과 바꾸어 낸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보면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폰 껍데기를 한다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보다 형식이 중요해 지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부터 껍데기 버리고 형식을 버린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떠날 때는 갈 자리가 있어야 한다. 형식을 버리고 껍데기를 버리는 것이 중요하고 먼저 할 일이 아니라, 갈 자리, 나의 본질에 대한 밝음과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만 있으면 형식은 자연스럽게 본질을 받침하게 된다. 그건 이치다. 하나님 만드신 세상의 기본법이다.



'벗겨 버려야지' 생각을 실천



완전하진 않지만 폰 껍데기를 벗어 보았다.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본질 중심으로 돌려  놓으면 좋겠다. 삶의 많은 것이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듯이 그렇게 순서가 잘 정돈되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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