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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주 이야기 하지만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다. 성경을 말씀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그냥 살다보면 성경의 말씀과 같은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은 성경을 사람에게 주신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이야기해서 야구의 타자가 왜 잘 쳐야 하는지를 안다는 것이다. 스포츠에서 또한 군인이 연습하는 것이 연습한 내용을 실전에서 준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팀이 이기고 나라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것임을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신약에 나오는 말씀들도 지켜 행하려고 한다. '기도는 호흡'이라고 하면서 믿는 사람은 기도를 해야 한다(have to)고 이야기 한다. 호흡은 하려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생명이면 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기도는 성도의 본분이나 자격 요건이 아니라, 본능이고 본성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음식을 앞에 놓고 머리 숙여 기도하지 않으면 기도하지 않는 것이고 성도가 아니라 생각한다. 하지만 음식 앞에 왜 기도하는가? 그게 단순하게 한 끼 일용할 양식에 감하는 행동으로서 성도의 기준이 되는 것인가?


진정한 식사기도가 있다면 그것은 음식 앞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하는 형식에 있는 것이 아니라, 먼저 자신이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 앞에 하나님이 목적하신 존재의 목적과 의가 자기 안에 있어, 그 의를 나타내는 삶을 사는 것이 감사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마음의 표현이 그것일 것이다.


계명은 그런 것이다. 계명의 모양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 모양과 삶이 나올 수밖에 없는 생명이 그 안에 자리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문제이다. "내가 누구냐?"하는 것이 정해지면 그것에 맞게 사는 것이고, 그 사는 모양이 어떠한지를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라,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응하실 것이다"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의 삶이 어떤 모습인지를 보이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세상 사라들이 알 것이다"와 같은 말씀을 하신 것이다.


즉 성경의 모든 말씀은 결과이지 원인이나 조건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떤 것의 결과며, 어떤 것의 형식이며, 어떤 생명의 표현인가 할 때,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인 것이고, 그 생명을 가진 사람들의 삶이 어떠한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이것이 또한 순종을 낳는다. 사람은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사람이라는 DNA에게 순종한다. 성경이 말하는 순종은 이것이다. 이것은 실패도 없다. 사람으로 난 사람이 사람의 유전자로 사는 것에 실패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들은 성경의 어떤 것도 못 지킬 이유가 없다.


사람들이 성경을 온전히 지키기 힘든 것으로 보는 것은 주신 목적을 모르는 이유 때문이지, 사람이 무능하거나, 이 육신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기에 한계가 있거나 욕망이 죄스러워 그런 것이 아닌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난 사람들에게 성경은 자신의 일기나 자서전과 같은 것으로 읽힐 것이다. 이가 아니라면 아직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지 못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율법도 마찬가지다. 그 율법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지만, 지키라고 한 이유가 있다. 지키면 천국에 들어 간다가 아니라, 그것을 지키려 하다보면 사람이 가진 한계로는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즉 타석에 들어선 타자는 공을 치는 것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팀이 이기기하기 위하여 공을 친다는 것을 아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안식일에 일을 하신 것이다. 안식일은 결국 예수님으로 인하여 안식하는 것이 주신 목적이지, 안식일 날 일하지 말라고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든 자가 안식일에 예수님으로 인하여 안식하게 되었다면 안식일을 주신 목적이 달성 된 것이다.


이것을 모른다는 것은 율법을 지켜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계명을 지키는 것은 이 모든 성경이 원하는 목적, 곧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삶을 사는 것 그것이지, 하나하나의 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아니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command(사령부, 머리)에 obey(순종)한다는 것이다.(요한 1서 2장 NIV 성경) 이것은 행동을 지킨다는 것이 아니라, 머리에 몸이 순종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의>를 이루는 것이 그것이고, 본능과 생명의 본성을 표현한다는 말씀이다. 이것을 모르는 신앙생활은 다 율법적인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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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는 <계명을 지킨다.>는 말씀이 많이 나온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이는 단순하게 보면 '기도하라'했으면 기도하고, 안식일을 지키라'하면 안식일을 지키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다.


스포츠의 세계에는 이런 말이 있다. <전투는 이기고 전쟁은 진다.> 혹은 <전투는 지고 전쟁은 이겼다.> 같은 표현들이다. 경기 자체는 너무 화려하고 또한 훈련한대로 했지만 정작 경기는 지는 경우를 말하는데 이와 같은 경우는 실제로 많이 있다.


동네 축구를 해 보면 그 중에 뛰어난 사람들이 종종 있다. 그들은 동네 축구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 공을 몰고 골을 넣으려는 욕심으로 게임을 한다. 하지만 축구는 혼자 하는 경기가 아니기에 그렇게 한다고 이겨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지는 경우가 많다.


야구도 마찬가지다. 올해는 어떨지 모르지만, 많은 경우 한 팀에서 부문별 1등을 한 선수가 많이 있는 팀 보다 부문별 1등하는 선수는 별로 없지만 팀플레이가 잘되는 팀이 우승하는 경우가 많다. 


타격으로 치면 선수들은 훈련을 하는 이유가 실전 경기에서 공을 잘 쳐서 살아 나가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이 타자에게 주어진 계명이다. 하지만 그것이 자신의 계명이 된 이유가 있다. 그것은 팀이 이기기 위하여 그렇게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팀이 이기는 것에 도움이 되기 위하여 자신이 잘 치는 타자가 되는 것이지, 잘 치는 타자가 최종 목표가 아니라는 것이다.


성경의 모든 계명들도 이와 같다. 성경을 단순한 행위 규범으로 보면, 성경의 문장 하나하나를 지켜 행하면 된다고 생각한다. 율법이 대표적인 것이다. 하지만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지 않으면 그냥 성경은 도덕책 같은 단순한 행위 규범이 된다. 그런 시각을 가진 사람은 신약 구약이 따로 없다. 다 행위 규범이다.


옛날이야기 중에 게으른 세 명의 아들을 둔 아버지가 죽게 되었을 때 게으른 아들을 걱정하여 집 앞에 있는 밭에 보물을 숨겨두었다고 거짓 유언을 하고 죽는다. 그러자 아들들은 앞 다투어 밭을 파헤치지만 기대한 보물은 없고, 그렇게 밭을 개간하여 농사짓는 삶이 보물이라는 것을 깨닫는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경에 나오는 계명도 이와 같은 것이다. 말씀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을 그렇게 말씀하신 이유가 다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에 나오는 지켜야할 행동들은 행동으로 독립된 것이 아니라, 그런 행동을 본능적으로 하는 생명의 표현들에 관한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무엇에 관한 말씀인가 하면 단 하나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 한 분에 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지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가장 잘 설명하는 분이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하는 것을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존재 목적을 가진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이고 매뉴얼이고 계명인 것이다. 그리고 이 계명의 본질이요 가장 큰 정체성인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니까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이 표현된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된 모든 말씀은 행동으로 지켜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자가 보여줄 수 있는 모습을 기록한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사는 모습과 규례를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성경은 신약이 아닐 요한 계시록도 율법이 된다. 이것은 자명한 것이다.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의 아들이, 또한 하나님의 기쁨이 된다는 관점으로 보면 오늘도 내일도 늘 성경을 지켜 행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성경을 보는 것은 모든 성경을 유대인들의 율법과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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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6절) 대언자 예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18. 09:12 Writer : 김홍덕

요한 사도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요한 일서를 기록한 것이다. 요한 사도는 단순하게 하나님에 대한 범죄를 말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보면 이것을 자신들이 늘 생각하는 것과 같이 행함으로 지은 죄를 말하는 것으로 보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요한 일서를 시작하면서 요한 사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진 바요 이 생명은 나타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이 자신과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함께 있었던 것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나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한 사도가 요한 일서에서 정말로 분명하게 말하고 강조하는 모든 것의 뿌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는 당시에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의 내용도 포함되었지만, 단순히 영지주의를 바로잡기 위하여 쓴 것이라기보다, 그것이 복음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전하고자 했다. 이는 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명확하게 이 복음의 법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사람의 정체성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죄를 돌이킨 사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철이 들면서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들이 되기 일쑤이다. 이는 세상의 방식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도록 이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누가 하나님께 이 범죄를 범하였다면 이것에 대하여 아버지께 대언자가 있다고 했다. 그 분은 우리와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이시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1장을 시작하면서 밝힌 바와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성경을 보는 존재가 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미개척인지는 모르지만 사람 말고 어떤 존재가 성경을 보겠는가? 이 성경이 사람을 위하여 기록되었기에 예수님께서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시고, 세상의 법 아래에 있는 우리와 같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으시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인생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이 살아가는 법 그 아래로 오셔서 우리와 같이 사시다가 우리가 가진 운명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간의 정체성을 보이인 그 사역은 드라마처럼 구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실 때 이미 정하신 인생의 운명이다.


그 운명을 예수님께서 지신 것은 단 하나 모든 사람이 그런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운명을 지신 것은 그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봉사활동이나 밥을 퍼주는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 세상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표현된 존재다. 아버지가 가진 뜻이 이루어진 육신이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가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운명과 법을 인간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지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 법은 정말로 은혜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리 이전의 삶에서 육신의 성공이 성공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 때 그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시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대언자가 되시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가 된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된다고 했다. 물론 하나님이 아버지이시지만 하나님이 사람 앞에서 아버지로서 관계가 형성되는 것, 곧 하나님의 의를 아들과 같이 육신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이셨으므로, 그 증거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전이고, 증거며, 대언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신비한 예수님, 우리 육신과 다른 능력과 존재로서의 예수님을 믿고 신앙한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하지 않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육신의 한계와 운명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사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며,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길이며, 그것이 요한 사도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이 이 글들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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