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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시체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11. 3. 18:16 Writer : 김홍덕

교회 생활을 하면서 설교의 본문으로 잘 들을수 없는 성경 중에 유다서가 있다. 요한 계시록 바로 앞에 있는 성경인데 이 유다서가 유명하다면 유명한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유다서에 "모세의 시체"에 대한 언급이 있기 때문이다.


유다서에는 천사장 미가엘이 마귀와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다투었을 때 잠잠했다고 하는 내용이 있다.


천사장 미가엘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마귀와 다투어 변론할 때에 감히 훼방하는 판결을 쓰지 못하고 다만 말하되 주께서 너를 꾸짖으시기를 원하노라 하였거늘(유다서 1:9)


유다서는 기본적으로 이단에 대한 경계의 말씀이라고 한다. 이단이라고 하면 지금도 많이 있지만, 예수님이 승천하신지 얼마되지 않았던 초대 교회 시대의 이단은 지금과는 좀 다른 측면이 있었는데, 그것은 직접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 지금과 아주 다른 점이다.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의 존재를 부인하거나, 자신이 예수라고 주장하는 지금의 이단과 같은 이단이 있기 힘든 상황이었는데도 많은 사도들이 이단에 대하여 심히 경계를 했는데 그것은 영지주의의 영향이 크다.


영지주의는 신학적으로 많은 정의가 있을 수 있겠지만, 요한 사도의 정의를 따르면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즉 그 시대 사람들은 사람인 자신과 같은 존재로 인정하기 어려웠던 예수님을 모습을 보고 예수님은 보통 사람이 가진 육신을 가진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유다서에서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는 것도 이와 일맥 상통하는 바가 있다. 자기 자리를 떠난 천사나 소돔과 고모라의 사람들이나 다 자기의 자리를 떠난 존재들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이것은 성경이 말하는 죄라는 것이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 자리를 떠났다는 것은 창조하실 때 두신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시간을 알기 위하여 만들거나 산 시계가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면 그 목적을 상실한 것인데 바로 그런 상태가 존재의 자리를 벗어난 상태 곧 성경이 말씀하시는 <죄(罪)>이기에 그런 상태에 있는 것이 바로 죄인이고 또한 이단이라고 유다서의 저자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신학자들에 따르면 미가엘과 마귀가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변론했다는 것은 유대인들에게 구전된 내용이라고 한다. 그런데 그것이 이단을 경계하도록 하기 위한 말씀을 하고자 하는 유다서의 저자가 왜 언급을 하였을까?


그것은 모세의 시체가 가지고 있는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모세는 율법을 받은 사람이고, 율법에 대하여 이야기 할 때 <모세의 율법>, 혹은 <모세가 전한 율법>이라는 표현을 할 만큼 율법의 대명사요 율법에 대하여 대표하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모세는 율법을 대표하는 사람인데, 그 모세의 시체라는 것은 율법의 껍데기 곧 형식이라는 것이다. 모세의 시체는 모세의 영이 빠지고 없는 육신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의 목적과 내용은 없고 율법을 지키는 형식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생각과 사람들의 사고 방식과 신앙이 바로 <모세의 시체>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모세의 시체에 대하여 천사장과 마귀가 변론했을 때에 천사장 미가엘이 훼방하는 판결을 하지 않았다고 했는데 이것은 엄히 꾸짓었다는 의미가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는 사람들에 대하여 미가엘이 완전히 잘못되었다고 정의를 내린 것이 아리나 주께서 꾸짓기를 원한다고만 했다는 것은 형식이라는 것이 불필요한 것으로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 바로 이단이라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내용은 버리고 형식만 지키는 유대인들을 꾸짓으신 것은 율법의 형식이 잘못되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목적은 모르고 형식만 지키는 유대인들의 신앙 상태를 꾸짓으신 것도 이와 같은 것이다. 즉 이것은 형식은 버려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도 율법을 폐하려는 것이 아니라 온전케 하려 한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율법의 형식이 무효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율법을 주신 목적이 온전케 되도록 하기 위하여 율법을 형식으로만 아는 자들에 대하여 변론했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모세의 시체를 언급한 것은 모세의 시체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기록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율법이라는 형식 그리고 더 나아가서 형식이라는 것에 대하여 일방적으로 나쁘고 버릴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유다서의 저자가 경계하는 이단의 생각이라는 것이다.


이는 아주 민감한 것인데 민감하다는 것은 잘 못 생각하면 큰 일이 난다는 것이 아니라, 형식이라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하지만 또한 형식을 버리면 안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는 것에서 민감하다고 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은 하나님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과 같은 존재이다. 그런데 본질을 망각하고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이 본질이고 삶의 전부인 것으로 알고 사는 것도 죄이지만, 반대로 내용만 본질이고 형식은 무조건 인정하지 않는 것 역시 죄라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후자의 생각이 초대교회에 있었던 영지주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천사장 마가엘 조차 모세의 시체와 같이 내용이 없는 형식과 같은 육신의 삶을 나쁜 것으로 단정하지 않고 주님께서 꾸짓기를 원한다고 한 발 물러선 표현을 한 것은 형식이나 내용 그것이 같이 있는 것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21세기라고 하는 현대의 세계는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이 없기 때문에 영지주의가 없을 것 같지만, 일방적으로 종교적인 형식을 부인하는 신앙이나, 또한 신앙만 있으면 되지 육신의 삶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신앙과 같은 것이 다 영지주의적인 신앙이라는 것을 모세의 시체까지 들먹이며 영지주의를 경계한 유다서의 저자가 전하고자 한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은 생명이다.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살아 있기 때문이고 또한 하나님께서 생명이 되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본성으로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의 종교적인 형식도 또한 세상이 요구하는 형식적인 삶도 다 맞추어 낼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생명은 안에서 밖으로 그 본성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 말씀이 요구하는 각양의 삶의 모습이나 또 세상이 요구하는 사람들이 인정하는 삶의 모습은 열매와 같은 것이다. 열매는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열매를 맺게하는 유전자를 가진 씨만 있으면 되는 것이다.


그 씨만 있다면 모든 형식이 완성되고 온전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것이 종교적인 규례도 그러하고, 사회를 만든 사람들 그 누구 하나 예외 없이 다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인정한다면 신앙은 반 사회적인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디모데서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하나님의 지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후 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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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거처가 되시는 하나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11. 3. 17:05 Writer : 김홍덕

모세의 유일한 시편, 시편 90편에서 모세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영원한 거처가 되신다고 하셨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처소가 되신다는 것은 일반적으로 사람이 하나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다는 것과는 좀 반대가 되는 개념 같아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것은 같은 개념이다. 거처(dwelling place)는 거하는 곳, 주거하는 곳과 같은 의미이다. 즉 한마디로 집이다. 집이라는 곳은 안식하는 곳, 수고하고 쉴 수 있는 안식과 행복의 뿌리가 되는 곳을 말한다. 그곳을 거처라고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거처, 곧 안식하는 곳이 되고, 또한 우리는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성전이 되는 관계가 되는 것이다. 이것은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과 같은 말씀이다.


안식할 수 있는 거처라는 곳은 어떤 관점에서 보면 제자리와 같은 것이다. 그것은 사람들이 고향에서 느끼는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의 거처가 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람이 가는 것이 자기 자리에 돌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기에 그것에 안식이 있다는 말씀이다.


또한 반대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그릇과 같이 지으셨기에 사람 안에서 사람의 성품과 인격으로 자리하심으로 그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게 되면 하나님 또한 사람으로 인하여 안식하시게 되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전이 되는 것이다.


이러한 처소와 성전의 개념은 공간에 관한 개념이 아니다. 그렇다고 공간으로 이야기 하는 것 자체가 틀렸다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공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고 교회당에 하나님이 계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공간적 개념으로 본다면 무소부재(계신 곳이 없는)하신 분이니 모든 곳에 계시기 때문이다.


하지만 본질적인 뜻과 의미는 목적에 대한 자기 자리이다. 한 마디로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것을 말한다. 식칼이 있어야 할 자리는 부엌이지만 그 보다 더 중요한 목적은 요리에 필요한 자료를 자르는 목적에 부합한 상태로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자리에 있는 것이다.


만약에 식칼이 부엌에서 식재료를 잘라 요리하는 것이 아닌 것에 위험하게 사용된다면 그것은 자리를 벗어난 것이다. 그렇게 되면 칼도, 또한 칼의 주인도 서로에게 안식할 수 없게 된다. 칼은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으로 인하여 원래 만들어진 목적대로 사용되지 못하고 폐기될 수 있는 것이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에서 벗어나면 거처를 떠난 것이 된다. 이것은 공간 만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 안에 거하시면서 그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에 있으므로 이 또한 만족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릇으로서 또한 성전으로서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에게 하나님이 안식할 수 있는 거처가 된다는 말씀이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의 거처가 된다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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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안에, 그리스도 안에 산다는 것이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이것에는 노력이나 훈련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람 안에 사는 것에 훈련이나 노력이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육신의 유전 정보가 그렇듯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존재 목적 또한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생명의 세계라는 것이 명확하게 자기 안에 있다면 수고하듯 신앙생활을 하지 않을 것이다. 또한 신앙생활을 무슨 업적을 쌓듯이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종이나 하는 짓이지 아들과 같이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존재는 그렇게 하지 않는다.


부모는 그 자녀가 자신과 닮았고,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이 보이거나, 또한 살면서 자신과 같은 삶의 방식을 보이는 것이 신기하고 또한 그것에서 묘한 기쁨이 있다. 왜냐하면 아들은 그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 육신으로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에 그것이 확인된다는 것은 아버지가 아들을 낳은 목적이 달성된 것이기 때문이다.


아들은 아버지에게 수고함으로 아들임을 인정받지 않는다. 아들은 사람들이 그 아버지와 닮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사는데 사람들이 아버지와 닮은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 안에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버지와 같이 사는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받기 위하여 수고하고 업적을 쌓아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종이 하는 신앙세계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살기 위하여 노력한다면, 그는 종의 신앙을 가진 사람이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품성이 자기 안에 있어 하나님의 아들의 세계 안에 속한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 뿐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중요한 신앙의 진리이다. 이것을 모른다면 늘 수고하고, 행여 하나님 앞에 실수할까 전전긍긍하는 삶을 살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람도 사람의 유전자로 사는 것에 노력은 하지 않지만 더 사람답게 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한다. 그것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모순이 있는 논리이다. 사람이 사람으로서 충실하게 산다면 정말로 사람답게 살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답게 살기 위해서 노력해야 한다는 사고를 가졌다는 것은 사람으로, 또한 사람답게 사는 것에 대하여 염려가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그런 강박이 때로는 '짐승만도 못한 삶'으로 변하기도 한다. 사람의 존재 목적을 이 세상의 부귀영화나 성공에 두고 집착하다 보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 사람들이 생각하는 세상에서 사람답게 사는 모습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모습의 이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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