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0

(요한일서 2장 1-6절) 하나님의 사랑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23. 06:31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보고 싶고, 위해 주고, 심지어 목숨도 내어주는 것이라 알고 있다. 분명히 그것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도 다 사랑이 표현되는 모습이지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있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표현과 본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기록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볼 수 있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은 사랑의 모양이라서, 설사 그런 모양을 취했다 하여도 사랑이라는 본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 말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하지만 성경이 정의를 내리는 사랑은 단 하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6)> 이것이다.


꽃을 아무리 예쁘게 그려도 향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듯,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랑의 표현이 있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한 의미이고, 바울 사도가 고전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신앙의 또 다른 모습 같지만, 결국은 같은 문제로 수렴한다. 그러니까 존재가 있고, 그 존재에 맞는 정체성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사랑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또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결국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데 사랑이 없으면 되겠는가? 하지만 사람 안에 하나님이 없다면 간첩의 사회봉사나, 해적이 동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감동적인 사랑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가 먼저라는 것이다. 그 목적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그 안에 가지고 표현하는 존재이니, 그것이 없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없는 것이기에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저 안타까운 희생일 뿐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다. 물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 살면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 같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없으면 그 모양이 어떠하든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폐쇄성 같을지 모르지만, 그건 세상의 법이다.


야구와 축구를 놓고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인가 하는 논쟁이 가끔 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이 최고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고, 축구의 세계에서 축구가 야구보다 훌륭한 스포츠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그 세계의 법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종목을 좋아한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그 안에 사랑이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니 그래서 오히려 그 말씀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사람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계로 인정하는지 아닌지의 신앙 고백이 되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만약에 몸으로 성경에 조문을 지켜 행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면 예수님도 낙제생에 불과하다. 그 당시 행동을 지켜내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 유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볼 때 예수님은 거의 반항아적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될 수 있겠는가? 먼저는 대언자가 되기에 자신도 자격이 없고, 더욱이 행함으로 지키는 것이라면 생명의 관계인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되는 것은 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아노라 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고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한 것이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떠나서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행함으로 성경의 조문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과, 육신을 부정하게 여겨 마음대로 사는 자들을 다 같이 말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신호등이 녹색일 때 건너야 한다는 것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욕망과 한계와 본성과 연약함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개는 도둑으로부터 주인을 지키는 것을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개가 가진 사람에 대한 충성스런 본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를 키우는 것이다. 개의 그 본성을 사람이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가진 이 연약함과 한계와 본성이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나타내시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사람을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지, 사람이 의지로 하나님의 아들의 노릇이나 흉내를 내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목적이 자기 안에서 밝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그 법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도무지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강아지가 개로 사는 것에 실패하겠는가? 그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그 유전자의 계명을 못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계명으로 받아 지켜 행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가진 추함을 율법으로 감추려 애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기를 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계명은 어길 수조차 없는 삶이되기 때문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계명이라는 것은 어떤 법조문이나 행동 강령이 아니라,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의 근원이고 본성을 말하는 것이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생명이 그 유전적 본성에 순종한다는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마음에는 없는데, 죽어서 천국가기 위하여, 혹은 벌 받는 것이 두려워 억지로 마음에 부담을 안은 채로 꾸역꾸역 지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지금의 말로 한다면 DNA와 비슷한 개념이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그 생명의 본성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인정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다.


그리스도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진 헬라어이고, 히브리적인 표현으로는 '메시야'라고 한다. 이를 지금을 사는 우리들의 말로 표현하면 어쩌면 <영웅>이라고 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당시에 왕이요 제사장 그리고 선지자의 신분을 표현하는 것이고, 이것은 속국이었던 이스라엘이 기다리던 메시야는 해방자요 구원자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는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수 있는 말이다. 죄 가운데 있는 사람들에게 그 죄의 구속에서 벗어나게 하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인 것이다. 이 죄는 존재의 죄이다. 존재가 잘못되면 뭘 해도 안 되는 것이기에 더욱 그렇다.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모르면 왜 살아가는지를 모른다. 이것은 천지창조 이전의 어두움과 혼돈이고, 또한 하나님이 주신 존재의 목적을 이탈한 것이다. 그러한 중에는 마치 어두운 밤길을 가는 것과 같은 인생이 되는 것인데, 그런 어두움과 죄에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구원을 가져다주시는 이가 바로 그리스도, 메시야인 것이다.


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서 보여주신 것이고, 또 그것을 보고 자신의 삶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들의 정체성이고,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있다 하는 생명이 그것이고 또한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이유가 그것이다.


그러므로 그 생명, 곧 사람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그 생명의 본성과 DNA가 바로 계명인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에 동의되지 않는데, 그래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니 억지로 자신을 통제하고 규정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이 계명을 지키면 그 지키는 자는 아버지를 안는 줄로 안다고 했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집 주변에 사는 도둑고양이 틈새에 새끼 고양이가 보이면 사람들은 그 어미가 있다는 것을 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어미도 고양이라고 생각한다. 새끼 고양이가 있는 것을 보고 어미 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도 이와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그 목적인 그리스도의 품성을 가지고 사는 생명에 순종하는 삶이라면, 그 생명을 보면 당연히 그 생명을 주신 아버지가 있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계명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키지 않는다는 것은 행동으로 성경에 기록된 것을 행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목적인 육신과 한계를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살지 않는 것, 그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