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 신앙에 있어 구원의 도구(?)는 ‘예수의 피’다. 예수님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하고 죽음에서 구원한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단세포적인 발상으로 피가 시비가 되기도 했다. ‘기독교인은 피를 마신다(성찬식)’ 같은 것으로.
예수님의 피가 구원을 가져온다는 것은 신앙 안에서 거의 상용구와 같이 쓰이다 보니 이 말씀에 대하여 한번이라도 ‘Why?’, 혹은 ‘How?’와 같은 의문을 잘 가져보지 않는다.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것은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이스라엘이 있는 유대 땅(지금의 증동)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런데 그 예수님의 피가 어떻게 2,000년을 훨씬 넘긴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죄를 사한다는 것인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맹신'이 아닌가 싶다. 여기서 맹신이라는 것은 무조건 믿는 다기 보다 모르고 믿는다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의 피는 우리의 죄를 사한다. 하지만 구약시대 제사 때처럼 그 피가 우리에게 뿌려져서가 아니다. 성경에서 <피는 생명>(신 12:23)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육신의 피가 우리의 죄를 사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있으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이 말씀은 중요하다. 예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은 거듭났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전의 생명이 아니라 그 삶의 근간이 되는 생명이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의 피가 구원에 관여하거나 역사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피 곧 생명이 있다는 것은 구원을 받은 생명이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라는 것, 죄를 사함 받았다는 것은 곧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예수님의 생명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기인한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 = 예수님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구원을 받은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그것은 글로 표현한 것이 그렇고, 그 말의 실체, 곧 예수님의 피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은 예수님과 내가 같은 정체성, 같은 유전 인자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에 있다. 예수님의 생명과 같은 생명이 되어야 한다고 하니 지금껏 살아온 생명과 다른 생명으로 치환되어야 한다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이미 우리와 같은 생명, 우리와 같은 육신, 우리와 같은 성정으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 육신으로 오신 그 예수님이 나와 같은 생명을 가지신 분이셨기 때문에, 나도 예수님과 같은 생명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을 믿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방법인데, 그것이 바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시기 위함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인간은 스스로는 인간이 연약하고 모순된다고 생각하지만 하나님은 이 사람을 만들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존재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에 더할 나위 없이 적합한 존재가 사람이었다는 의미이다. 즉 이 연약한 육신을 가진 이 삶이 하나님을 표현하기에 가장 적합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하심과 성품을 나타내려 하셨는데, 사람이 이를 버렸기 때문에 구원이라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 된 것이다. 즉 다시 그 자리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이 삶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과 같이 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을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구원의 사역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십자가는 죽을 사람을 대신해서 죽으신 모양을 하고 있지만, 본질은 십자가를 통해서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신 것이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하면서 어두움에 거하면 거짓말 하는 자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님의 빛을 만난 사람이 인생의 방향을 모른다면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라는 삶의 빛을 만난 사람은 인생의 어두움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각해보면 감당하기 어려운 말씀과 같이 보인다. 어떻게 사람이 살아가는데 어두움이 없을 수 있다는 말인가? 싶기 때문이다. 사실 사람이 사는 일에는 원치 않고 또 피하고 싶고 또 때로는 실수와 실패로 맞이하는 어두운 일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는 일들이 수 없이 많다.
그런 일들이 있다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된다고 하니 얼핏 생각하면 사람들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어렵구나 싶은 생각이 들 뿐 아니라, 그래서 우리와 예수님이 다르다고 생각하는 단초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이 인생의 목적을 아는 것과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문제들은 다른 각도로 접근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인생의 목적을 안다고 사람이 살아가는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다양한 일과 사건들 그리고 문제는 삶의 본질이 아니다. 그런 모든 것들은 오히려 인생이기 때문에 자연적으로 생기는 것들이라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은 그런 문제들로 하나님을 찾는다. 하지만 그것은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들이 살면서 겪게 되는 각양의 문제와 사건들은 다 삶의 방법이고 형식이다. 그것은 문제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이 무엇인지를 나타내는 마당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그려내야 할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결혼이라고 하면, 결혼을 누구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뜻인지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삶의 대사를 통하여 결혼과 가정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야 할 것인지가 본질이라는 것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어떤 결정을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지 그것만 걱정한다. '이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것인가?' 아니면 '저 사람과 결혼해야 하는 것인가?'하는 고민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모르는 것이 인생을 모르는 일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누구와 결혼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를 아는 것이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어떤 결혼, 또 배우자에 따라서 결혼이라는 것이 크게 달라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결혼생활이 행여 파탄나기라도 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결혼이 아니었나 보다' 생각하는 것 그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생각의 방식과 뿌리가 그러면 하나님을 만난 사람은 어두움이 없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다. 사는 방법과 개별적 문제에 대한 답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님에도 그것을 알아야 하나님을 아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빛을 만나서 어두움이 없다는 것은 삶에 어려움과 어두움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다. 오히려 살면서 겪는 어떤 문제라도 다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것과, 그러한 삶의 사건과 일을 바탕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실재로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겪는 각양의 일들이 없으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낼 마당이 없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그런 것이 없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그저 사람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바랄 것이 있다면, 이 삶을 사는 동안의 모든 일들로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주신 이 삶의 의미를 바로 아는 사람에게는 요한의 말씀과 같이 어두움이 조금도 있을 수 없다. 만약에 사람이 인생의 문제들에 대한 답을 모르는 것을 가지고 '어떻게 사람이 어두움이 없을 수 있느냐?' 한다면, 바로 그 생각이 어두움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빛에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는 것은 생명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아주 쉬운 것이 된다. 즉 어떤 생명이든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동안은 100% 그 생명으로 산다는 점을 생각하면 된다는 것이다. 고양이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다 고양이고, 소나무는 잎부터 뿌리까지 모두 소나무인 것과 같다.
하나님의 빛도 생명과 같이 사람에게 사람이 무엇인지, 또한 하나님이 누구시며 또한 사람과 어떤 관계인지를 아는 것은 생명과 같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늘 생명의 아버지라는 의미로 성경에 나오는 것이다.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 그 유전자에 의해 태어나고 온전히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빛을 만난 사람 또한 100% 온전한 인식 곧 밝음 안에서 살아가게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는 구원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이다. 거듭남은 생명과 관련된 단어이다.
여기서 우리는 생명에는 분명한 방향성이 있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그것은 생명은 태어남으로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지, 그 생명의 흉내나 모양을 갖춘다고 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말하는 것은 ‘이렇게 해야 그리스도인이 된다.’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났기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 방향성 안에서 하나님을 만나고 믿는 사람에게는 어두움이 조금도 없다. 있을 수가 없다. 거듭남 곧 생명으로 난 것은 죽일 수는 있어도 그 생명의 본성을 제거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생명의 정의인 것이다.
이러한 세계에 노력해서 채워가는 것이나, 부족함은 없다. 이건 온전한 것이다. 생물학적, 의학적으로 볼 때 사람은 어떤 짓을 해도, 또 어떤 모양을 해도, 또한 전쟁에서 신체의 일부를 잃어도 사람이다. 이것은 노력으로 채우는 것이나, 기도해서 메꾸어 가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성경을 읽고 대하면서 온전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부담을 가지고 있다. 이는 먼저 자신이 온전하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사람이라는 생명의 기준이 아니라, 사람들이 만든 사람에 대한 기준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람이 예의가 있어야 한다.’는 명제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사람은 자연인으로서의 사람이 아니라 사회인으로서의 사람이다.
이것이 혼돈되면 안 된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죄와 관련한 개념도 이러한 점에서 늘 혼돈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람을 온전하게 여기시는 것에 대하여 믿지 못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도둑질과 같은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굳이 하나님께 빌지 않아도 세상의 법에 따라 처벌을 받으면 된다. 그런 것은 다 행위에 관한 것이다. 이러한 죄에 대하여와 행위 기반의 명제를 가지고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고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이것은 신앙에 있어서 가장 아슬아슬한 논리 같지만 하나님이 존재의 하나님이신데 행위에 대하여 죄를 논할 이유가 없는 것이 근간임이 분명하다. 그러면 사람들은 ‘하나님 앞에서 존재만 고백되면 살인해도 된다는 말이냐?’라고 할 것이다.
살인? 할 수 있다. 하지만 살인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살인죄를 용서 받았다고 한다거나 괜찮다고 하는 것은 미친 짓이다. 살인이 죄가 되는 상황과 사회 혹은 국가에서 살인을 저질렀다면 그 시대, 그 사회, 그 국가가 정한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되는 것이다. 그렇게 명백한 법이 있는데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나는 죄 사함 받았다.’고 하는 것은 미신이고 미친 소리다.
2007년에 개봉한 영화 <밀양>에 나오는 내용이 바로 그것이었다. 아들을 유괴 살해한 범인이 교도소에서 예수를 믿었기 때문에 다 용서 받았다고 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정말로 하나님을 그렇게 믿는 사람들은 다시 생각해야한다.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기에 사람의 행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분이 아니다. 그 행위는 사람이 사람끼리 만든 법으로 심판하고, 또한 서로에게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행위로 사람에게 지은 죄를 존재이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고, 교리에 입각해서 그렇게 고백했으면 죄가 사라진다고 믿는 것은 비겁하고 교활한 마음일 뿐이다.
행위로 지은 죄는 행위에 대하여 규정하고 심판하는 이 세상의 법에 따라 용서를 구하고 심판을 받으며 죄 값을 치를 수 있는 대로 치러야 하는 것이지, 뻔뻔하게 예수 믿으니 괜찮다고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께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행위로 지은 죄를 하나님께서 사하실 것이라고 믿는 그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 회개할 것은 자신이 그렇게 행위를 기반으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고,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나님께서 살인과 같은 행위로 범한 죄에 무관심하신 분은 아니시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이유는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즉 세상에서 사람을 죽일 정도로 자신의 생각이 옳다고 생각하는 그 생각이 그런 범죄적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살인의 예만 본다면 사람을 죽이는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범죄가 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죽여서라도 주장하고 싶은 자신의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나, 사람을 죽여서라도 자신의 이익을 챙겨야겠다고 스스로 정한 의의 법이 있다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
왜냐하면 사람을 죽일 만큼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하는 것도 문제이거니와 어떤 일에 대하여 그런 선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 마음이 바로 가인의 마음이고, 그 마음의 뿌리가 바로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범죄로서의 살인은 사람을 죽여서라도 입증하고 싶은 스스로의 선한 기준이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회개하고, 살인이라는 그 행위 자체는 세상의 법에 따라 심판을 수용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온전한 법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이기도 하다.
이야기가 조금 옆으로 갔는데, 살인이라는 것을 가지고 이야기 한 것은 살인과 같은 끔찍한 사례가 아니라도 사람들은 행위 규범에 대하여 스스로 온전하다고 할 수 없는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다 알고 있다.
그러다 보니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온전할 수 있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알고 보면 그런 마음이 바로 예수님을 십자가로 보낸 유대 제사장의 마음이라는 것이다. 사람의 행위가 완전치 않은데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는데,
사람들이 살아가면서 어떻게 사람이 온전할 수 있느냐 하는 마음으로 스스로 움츠리고 또한 다른 사람을 보고 심판하는 그 마음이 바로 유대 제사장들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생각해 보라 그 마음과 생각의 어느 한 구석에라도 행위 규범이 미치지 않은 곳이 있는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고, 또한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의 관계 역시 아들이 어떤 행위로 아버지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과 같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정체성도 그런 것이다. 행위가 부족해서 하나님의 정하신 목적을 표현하며 사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인정을 받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창조주로서 가지고 계신 나의 존재 목적과, 사람이 어떠해야 선한 것인지를 알려고 하는 것이지, 스스로 선함을 정하고 스스로 삶의 목적을 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것을 스스로 정하는 것은 아들이 성씨를 정하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사함을 구해야 하는 유일한 죄이다. 그 외에 행위로서 지은 죄는 그 시대의 법으로 갚고, 또한 피해를 본 사람에게 용서를 구하면 되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행위로 지은 죄가 있어 서로에게 해를 입히고 또 서로가 화해한 이력이 있다 하여 하나님께서 허물로 보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럴 수 있다는 것을 이미 다 아실 뿐 아니라, 그런 사람의 정체성을 보고 '보시기에 심이 좋았다.'고 하셨기 때문이다.
사람은 어쩌면 숨 쉬는 것만으로도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될 수 있다. 이산화탄소를 내 품으니 말이다. 사람은 행위로 선해질 수 없는 존재이다. 이것을 부인하면 안 된다. 그것이 가장 큰 죄고 그것이 영지주의다.
사람이 행위로 온전해질 수 없는 것은 사람의 행위가 온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법 때문에 늘 죄인이 되는 것이다. 그 대표중의 대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 그리스도를 보고 나도 예수님과 같이 사람들의 법 앞에서 늘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빛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주인이신 하나님의 아들로 와서 이 세상에서 사람들이 행위 규범으로 사람을 죄인 만드는 것을 깨우치시려 하다 보이신 일로 인하여 행위 규범으로 사람을 죄인 만드는 법에 의하여 신성 모독이 되고, 반역자가 된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 사건의 실체이다.
그 십자가를 보고 빛이 비췬 사람은 자신도 세상을 살다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바로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과 같이 말이다. 그것이 바로 빛이다. 그 빛이 비췬 사람은 더 이상 어두움이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거듭남이다. 사람이 행위로 온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든 존재에서 그것이 아님을 아닌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 그것이 바로 온전한 거듭남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사람으로서 가진 정체성을 깨닫는 것이다.
그리고 그 빛, 그 생명을 비췸 받고 거듭 태어난 사람은 그 빛 안에서 살고,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다. 생명이 그 본성대로 사는 것에 있어 그 생명의 유전자로 볼 때 어두움은 있을 수 없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어두움이 없으신 이유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