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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된 모습이고 그 죄인의 자리에서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게 못 박혀 버린 모습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정체성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은 언제라도 세상의 법 앞에서 죄인이 되는 존재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속에 바라는 삶의 모습과 희망이 언제나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고 그것에 눌려 있는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바로 그런 모습, 육신을 가졌기에 세상 기준 앞에서 언제나 패자와 죄인이 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펼치려 하면 육신의 한계가 사슬처럼 자신을 묶고 있는 그 모습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심히 좋은 모습이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이 될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의 핵심인데, 사람들은 육신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불요한 것으로 여기거나 방해되는 것으로 여겨 영지주의처럼 육신을 무익하게 보거나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육신을 제어하려 하는데 바로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과 신앙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신 뜻에 반하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눈에 띄게 신앙적인 반대나 변질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의 법인 성경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보고 지키려는 것도 적그리스도요, 육신을 가진 모습을 싫어하고 감추고서 고상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도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시대에 오히려 더 적그리스도의 생각이라고 사도들이 경계한 영지주의가 더 만연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더 잘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나 뿌리는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 육신의 모습을 거저 한계를 가지고 있고, 고상하지 못하기에 금욕적이고 다스리고 절제하는 법을 만들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율법주의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고,


육신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적 기준으로 고상하지 못한 것으로, 또한 뒤돌아서서 뒷담화 주제로 삼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고, 또한 사람이 가진 육신이라는 그 모습의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제어하거나 포기하거나 욕하거나 슬퍼하는 그 모든 생각이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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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가 요한일서를 기록하던 시기에 있어 가장 큰 종교적 문제인 이단에 관한 문제는 요한 사도 뿐 아니라 많은 사도들에게 있어 교회의 핵심적인 문제였다.


지금은 이단이라고 하면 대부분 '내가 예수다.'라는 식의 신앙적 변질을 주로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 있던 시절이라 그런류(?)의 이단은 존재하기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가장 큰 이단적 관점은 아무래도 영지주의였다. 그것은 '내가 예수다.'식의 지금의 이단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에 가깝다. 실제로 본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이견(異見)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을 철저히 보여주셨다는 것 그것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인간적인 능력들이 신앙에 의지가 되고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있던 시절에는 그것이 더 어려운 문제였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인데 다른 능력을 보여주신 것 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육신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는 모습은 동질성을 느끼기에는 너무 어려운 모습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심이 구체화대고 세상적인 관점과 결합하여 그 의심에 대한 변질된 대안들이 생겨났고 그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정체성 중에 사람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람과 동일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 정체성이 없으면 육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를 늘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잠재적으로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다. 만드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보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그것에 열광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의 핵심은 십자가다. 그 이전의 기적들도 다 그 기적이 목적이 아니었다. 십자가 이전에는 기적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내재되어 있었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고 기적인 내재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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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그리스도. 과연 어떤 존재가 적그리스도인가 싶겠지만 단순하게 영어로만 보면 anti 즉 그리스도에 반하는 존재라는 의미일 뿐이다. 실재로 그리스도에 반하는 존재라면 다 적그리스도이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한 단어의 의미만은 아니다.


그러니까 적그리스도는 신앙의 대반전이나 몰락을 가져오는 입지전적 존재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가르침, 그리스도의 정체성의 반대편에 서는 그 자체가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또 어떤 것이 그리스도에가 반(anti)하는 것인가? 그리스도에 반한다는 것, 그것은 그리스도의 일 하나하나에 시비를 걸고 반한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정체성과는 다른 정체성이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의 정체성, 그것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통해서 나타내고자 한 하나님의 의가 바로 그 정체성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하는 것이 정체성이고 그것과 다른 존재와 생각이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성경을 대하고 하나님을 알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있어 '반대'라는 개념은 보색의 개념이나 남쪽의 반대쪽은 북쪽이라는 식의 개념의 반대 개념과는 좀 다른 개념이 있어야 한다. 그 이유는 그런 관점의 반대라는 사고는 하나님의 반대편에 마귀가 있다는 식의 개념을 낳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의 반대, 또는 예수님과 반대편에 있는 존재가 적그리스도나 마귀가 아니라는 이야기다.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어서 명확히 한다면 반대라는 것이 그런 개념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라는 그리스도의 반대 세력은 한마디로 같은 것을 다르게 보는 것을 말한다. 이는 다양성의 문제가 아니라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을 없는 것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예수님의 정체성에 대하여 인간이 아닌 존재로 보는 관점을 가진 생각과 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또한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오신 그리스도이신 것에 있어 어느 하나를 부인하고 다르게 보는 것, 그것이 그리스도의 적이라는 것이다.


한마디로 적그리스도를 정의한다면 육신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께서 인류의 구원자 그리스도라는 것을 부인하는 생각을 가진 모든 이론과 사람이 다 적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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