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폰 껍데기 벗기기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9. 26. 16:10 Writer : 김홍덕

스마트폰을 살 때면 당연한 듯 폰 케이스 가게에 들러서 이른바 폰 껍데기를 하나 장만하곤 한다. 그러면서 '나는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니 투명한 것을 한다.'는 타협안을 가지고 폰 자체의 디자인에 또 하나를 덧씌운다.


아이폰5S, 내가 사용하는 전화기다. 작년 10월 출시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 구매하면서 똑같이 폰 껍데기를 했다. 그것도 SGP로. 타협안대로 투명한 것으로. 그리고 1년이 지난 지금 나는 그 껍데기를 어렵게 벗었다.


하지만 끝내 알루미늄으로 된 뒷면의 긁힘에 대한 우려를 떨치지 못하고 뒷면에는 보호 필름을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SGP가 무상으로 교환해 주었다는 정도.


사실 폰은 껍데기 없이 사용하는 것이 제 맛이다. 아무리 보호 필름이 선명하게 보이게 한다곤 하나 빛 투과율 100%인 필름이나 유리는 없다. 그러므로 무조건 원본보다 필름을 통하면 덜 선명한 것이다.


게다가 폰을 살 때면, 아이폰 유저가 아니라면 나름 디자인도 본다. 아이폰 역시 디자인은 일단 논외로 할 정도로 갑이니 그것도 마찬가지다. 그러니까 디자인 보고 산 비싼 전화기를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디자인을 덮어버린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다 하나 같이 폰을 사면 껍데기를 한다. 가끔씩 껍데기 없이 폰을 들고 다니는 사람을 보면 나는 다시 보게 된다. 보기 힘든 예외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폰에 껍데기를 씌울까?


표면적인 이유는 당연히 비싼 폰을 보호하기 위해서이다. 하지만 폰의 가치가 외관에 있는 것인가 생각해보면 달라진다. 폰의 가치, 곧 폰의 본질은 껍데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기능에 있다. 기능도 사실 활용에 비하여 성능이 지나치게 높은 게 사실이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들이 본질보다 형식을 더 중요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난 생각이고 그 생각이 상업적 술수와 보조를 맞춘 것이다. 또 한 가지를 예로 들면 가구나 집안의 살림을 살 때면 의례히 말하기를 "손님 오면 그래도……"하면서 좋은 것을 산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집에 사람 오는 것을 극도로 싫어하고 꺼린다. 이게 뭔가?


이건 단순한 사회의 한 단면이 아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모순적으로 사는 것은 사람 안에 살아가는 본질적인 이유와 목적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삶의 수고의 결정체인 돈의 대부분을 형식을 치장하는 것과 바꾸어 낸다. 안타까운 일이다.


이것은 신앙 안에서 보면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폰 껍데기를 한다고 하나님을 모른다는 것이 아니라, 본질보다 형식이 중요해 지는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오늘부터 껍데기 버리고 형식을 버린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떠날 때는 갈 자리가 있어야 한다. 형식을 버리고 껍데기를 버리는 것이 중요하고 먼저 할 일이 아니라, 갈 자리, 나의 본질에 대한 밝음과 깨달음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것만 있으면 형식은 자연스럽게 본질을 받침하게 된다. 그건 이치다. 하나님 만드신 세상의 기본법이다.



'벗겨 버려야지' 생각을 실천



완전하진 않지만 폰 껍데기를 벗어 보았다. 할 수 있다면 더 많은 것을 본질 중심으로 돌려  놓으면 좋겠다. 삶의 많은 것이 군복을 입어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듯이 그렇게 순서가 잘 정돈되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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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5-10절) 죄(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9. 26. 14:47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당시의) 이유는 초라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을 용납 할 수 없는 법이 있었다는 이야기다. 그 법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든 것이다.


그 법은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는 가치관과 율법에서 비롯된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비단 당시의 유대인들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는 가치관은 인류 모두의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그 가치관을 성경에서 죄(罪)라고 한다. 어원으로 보면 죄는 '자리를 벗어나다'라는 뜻을 가진 '하말티아'라는 말이 어원이다. 즉 죄는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유대인들의 관점은 예수님이 죄인인 것 같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 그들은 죄인이고 그들이 가진 관점이 바로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는 예수님을 보고 죄라고 하는 것이며, 그런 관점은 하나님이 사람을 창조하시고 자리매김하신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건 사람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 유대인들의 관점에서 보면 예수님은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들의 기준에 하나님의 아들은 창녀와 밥을 먹는다거나, 세리의 집에 들어가서는 안 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렇지 않으셨고 오히려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신 것이다.


유대인들이 그리고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은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과 같은 것이다. 그 단편적인 것이 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오라고 한 것이다.


가로되 성전을 헐고 사흘 만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마 27:40)


앞에서도 말한 것과 같이 공생애를 시작하려는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시험에는 항상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 들어 있었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을 가진 사람과는 다른 존재라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에덴동산에서 있었던 사건의 '데쟈뷰(Deja vu)' 현상이다.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이르기를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될 것이라며 유혹한 것과 같은 장면이라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 즉 육신 너머 초인간적 존재가 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과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에 대하여 착각하게 만드는 유혹에 빠진 것이다. 즉 하나님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 하나님과 동일한 능력과 기능과 모양을 가지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비단 아담과 하와의 문제만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사귐에 대하여 하나님과 동일한 같은 개체가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많은 이단을 양산하는 유혹이기도 하다.


이단은 사실 아무나 되는 것은 아니다. 나름 성경에 대하여 많은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그러다가 결정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사귐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개체가 되는 것으로 가버려서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그건 어쩌면 애초부터 성경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어쨌든 하나님과 사람이 같은 개체가 되는 것을 하나가 되고 하나님처럼 되고 하나님과 사귐이 있는 것이라고 보는 시각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존재를 하나님의 아들로 볼 수 없다. 육신은 하나님과 같지 않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는 것은 같은 개체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영이신 하나님의 의를 육신이라는 형식을 가진 사람의 삶을 통하여 나타내는 것으로, 존재의 이유와 존재가 같아지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저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처럼 되는 것으로 아는 관점이 선악과도 먹게 하고 예수님을 시험하며 또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다른 것이 죄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지려는 것, 하나님과 같은 개체가 되고 하나님처럼 되는 것, 그리고 육신의 한계를 벗어나서 십자가에서 내려오는 존재가 되어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된다고 믿는 것 그것이 죄다.


그 믿음, 그 생각이 "죄(罪)"인 것은, 그것이 바로 사람의 자리를 떠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과 같은 개체가 되기 위하여 지어진 것이 아니라, 의를 가지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지음을 받은 것이고, 그 형식으로 육신이 존재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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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까운 죽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9. 26. 10:01 Writer : 김홍덕

어제는 안타까운 일이 있었다. 우리 작은 아이반의 아이가 성적을 비관해서 학교에서 뛰어내렸는데 끝내 목숨을 건지지 못한 사건이 있었다. 그 아이는 최근 모의고사에서 반에서 1등을 했고, 반 아이들과 두루 친하게 지낸 착한 아이라고 아들이 말했다.


뉴스에 나기를 비염으로 힘들고 성적을 비관해서 그랬다고 났는데, 공부를 잘하고 싶은데 늘 몸이 안 따라 주어서 힘들었던 같다. 아들에게 물어보니 비염으로 힘들어했다고 한다. 또 담임선생님도 처음 담임을 맡은 젊은 교사고, 학기 초 원래 담임이 병가를 내는 바람에 대신해서 맡게 된 반인데, 이래저래 안타까운 일이다.


그 아이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지만 어제는 내내 '그 아이가 다시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시질 않았다. 부질없는 생각이고, '좀 더 살지, 부모님은 어쩌라고?' 싶은 마음도 들었지만 마음만 무거울 뿐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일 뿐이었다.


군에 있을 때 가끔씩 부대원들의 자살 소식을 들었었다. 2,000명도 안 되는 부대인데 거의 1년에 1명 정도 그런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는 병사들끼리 밥 먹으면서 '이 군 생활도 못 견디면 어차피 사회에서도 살기 힘드니 잘 죽었다.'라고 몹쓸 소리들을 했던 기억이 난다. 철이 없다는 것이 그런 것인가 보다.


죽음! 참 안타깝다. 자살도 웬만하면 다 타살이다. 어제 죽은 그 아이도 사회가 죽인 것이다. 이 사회가 아이들을 그렇게 만들어가고 있다. 여기서 할 이야기가 아니지만, <전교조>라는 것이 생긴 이후에 아이들의 학교생활이 더 나아졌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는다.


오히려 아이들의 인권을 외치면서 그런 것에 힘쓰는 자신들의 정당성과 우월성 그리고 자부심을 가지기 위하여 교사가 아이들을 가끔은 때려서라도 바르게 교육하고자 하는 것을 원천 봉쇄해버린 집단이 전교조가 아닌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제 그 아이가 있는 학교, 우리 아들이 다니는 학교에도 전교조 교사들이 있는데, 그렇게 사회를 시끄럽게 할 정도로 교육을 위한다면서 아이들의 아픔을 보살피지 못했다 싶어서 한편으로 화가 나기도 한다. 물론 그 아이를 죽음으로 몰아간 사회의 책임이 전교조에만 있는 것은 아니지만, 평소 전교조가 생긴 이후 학교 폭력, 왕따, 학생들의 자살이 늘어난 것 같은 느낌에 한 소리 해 본다.


궁극적으로 우리나라 교육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음 세대의 건전한 사회를 위해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아마 <수능>을 없애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사람을 객관적으로 평가하기 위하여 온 나라가 들썩이는 그것이 사람 사는 사회에서 중요한 일이 되었다는 것이 안타깝고 잘못된 것이 아닌가 싶어서다.


뭐 멍청한 사회 평론은 그만하고, 죽음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 본다. 한 달 여 전, 고등학교 때 교회에서 같이 놀던 친구가 암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며칠을 그 생각이 맴돌았는데, 이제 또 그런 생각이 든다. 이건 분명히 나이의 탓인가 보다.


나이가 들면서 <죽음>에 대해서 아무래도 많이 생각해 본다. 점점 뻣뻣해지는 몸도 그렇거니와 무엇보다 삶의 너머에 대한 생각을 해 본다. 젊을 때는 죽음보다 죽어가는 과정의 고통이 두려웠기도 했었다.


죽음은 결국 형식의 틀을 벗는 것이다. 살면서 생각으로 늘 꿈꾸었듯 몸에 구속을 받지 않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신앙으로 본다면 내용이신 하나님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안으로>는 품속이나 건물 안으로 와는 다른 개념이다. 그건 <세계 안으로>를 말한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을 몸 가진 사림의 인생을 통하여 표현하는 것을 마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흔히들 말하는 창조주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라 믿는다. 이건 어쩌면 사람에게 축복과 같은 일일지도 모른다.


다만, 세상의 모든 일이 그렇듯 그럴만한 사람이라야 그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형식을 벗고 내용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면, 형식 안에 있던 내용과 들어가는 세계의 내용이 같아야 하는 것이라야 하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세상의 이치가 그렇다는 것은 만드신 이의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훈련하고 2군에서 또한 연습장에서 연습하는 신분이 아니었는데 어느 날 1군 경기를 하는 법이 없듯, 이 세상에서 살 동안 죽어서 들어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적이 없는데, 육신이라는 형식을 벗는다고 그 안에 들어갈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는가?


어린 아이의 죽음이 안타까운 것은, 많은 세월 육신의 삶을 살면서 하나님의 만나고(그 아이는 신앙이 없다고 했다)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을 맘껏 표현할 기회가 많았다는 것, 그것이다. 


그런 마음에 삶이 허락되는 동안 더 많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고 알리는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도 먹어본다. 이 안타까움이 그렇게라도 승화되면 그렇게 먼저 죽어가는 이들의 혼이 교훈이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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