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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6절) 범죄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17. 06:32 Writer : 김홍덕

사람이 어떤 목적을 가지고 물건을 샀다고 하면, 구매자는 반드시 그 물건에게 기대하는 바가 있다. 그것은 구매자의 목적이다. 그 목적은 물건의 정체성과 일치해야 구매자의 기쁨이 된다. 실제로 작은 물건이라도 사고 나면 기분이 좋은 것이 있고, 비싸고 좋은 것도 그렇지 않은 경우가 있다.


그 구매된 물건에게 있어 구매자는 목적을 가진 주인이다. 그래서 구매한 물건을 자기의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는 창조와도 같은 의미이다. 진열장에 있는 물건은 자신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목적 안에서 사용되기를 학수고대하다가 그 간절함을 이루어주는 구매자를 만나면 비로소 자신의 정체성과 구매자의 목적이 상호간에 의미가 있어 지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는 김춘수 시인의 꽃이 바로 이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름을 불러 주었을 때 내게 와서 꽃이 되었다." 그것이 바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이고, 그것이 꽃에게 또한 진열된 물건에게 있어 주인을 만나 목적이 있는 세계가 시작이 되는 창세기인 것이다.


존재하는 것은 모든 것이 정체성이 있고, 또한 그 정체성이 의미가 있어 구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이 구하는 바가 목적이다. 다시 말해서 만물들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이 어떤 것에 사용되고 의미가 있어지는 세계가 있어서 그 세계 안으로 들어가기를 간절히 소망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는 이동이라는 목적에 맞게 만들어진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자기가 가지고 있는 이동을 위한 기능을 의미 있게 보고 이동하려는 목적의 세계로 가져가기 위하여 구매하는 순간 자동차는 새로운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이것이 사람으로 보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창세기와 같다.


그런데 만약에 자동차를 보는 이가 이동을 목적으로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단순한 쇳덩이로 본다면 그 사람은 고물장수다. 이것은 자동차가 용도 폐기 될 순간이라는 것이다. 자동차가 가진 본연의 목적으로는 쓰일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사망이고 죽음이다.


사람도 이와 같다. 사람을 만드신 이는 자동차가 이동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있듯, 사람에게 기대하는 목적이 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기대하는 것은 하늘을 날아다니는 능력이나, 바다를 가르는 능력이 있는 존재가 되기를 원하시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사람이 그런 것을 하는 것이 존재의 이유라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잘못 만드신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신 분이다. 사람에게 그런 것을 원하셨다면 그렇게 만들 수 없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그런 것이 아니기에 이런 육신을 주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의 생각은 다르다. 사람들의 간절한 소망인 <성공>이라는 것을 지탱하는 기둥들은 연약함이 아니다. 다른 사람보다 나은 능력, 나은 강함, 나은 고상함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탈 인간의 성과가 있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종교 안에서도 가득한 사상이다. 사람이 그 본질 자체로서 쉽게 행하기 힘든 것을 하는 것이 은혜를 입은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은 먹고 싶은 욕망이 있는데 금식하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고, 욕망을 극복하고 금식을 성공하면 신앙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또한 누구나 성적인 욕망이 있음에도 그것을 억제하고 살면 신앙이 좋고 그래서 신앙의 지도자인 사제는 성적인 금욕을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모든 것은 사람을 이 모양대로 만드신 창조자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 분은 이 모습이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범죄다. 사람들이 자신이 이러한 생각을 가지고 산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지 않고, 반대로 그렇게 성공하고 고상해지고 탈 인간의 능력으로 위대해지는 것이 삶의 목적이고 성과로 생각하는 삶에 매몰된 가치관이 바로 하나님께 범한 범죄인 것이다.


고로 이러한 범죄를 고백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이다. 육신의 한계와 본성을 극복하는 것이 성공하는 것이고,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그것을 버리는 것, 그리고 그런 생각으로 살았다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고백하는 것이 바로 회개의 시작이고, 하나님과 자신 사이에 바른 의미가 재정립되어 하나님과의 관계가 달라지는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는 세상이 열리는 창세기가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늘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것을 실패로 여기고, 자신의 본성을 통제하지 못한 것을 죄로 여긴다.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부인하고 오히려 그 목적에 대항하는 삶이다. 사람이 가진 한계와 본성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야 하는 것이지 통제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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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5-10절) 거짓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15. 07:06 Writer : 김홍덕

이렇듯 사람은 원래 자기가 가지고 있는 모습이 하나님의 목적에 부합된 모습인데, 그 마음 안에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는 마음이 있어 그 기준으로 사람의 원래 모습을 보면 그것을 용납할 수 없어 이를 바꾸려고 율법을 지켜내려 하고, 아니면 육신에 대하여 방종하듯 포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사람과 하나님사이에 가장 큰 이견과 갈등은 다른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에 대한 인식이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가진 한계와 모순과 본성을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는데, 사람은 그것이 불만이라는 것이다. 강해지고 위대해지고 고상해지려니 이 사람의 본질적인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사람들의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든다는 것이다. 거짓말은 있는 것을 아니라고 하고 없는 것을 있는 것이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앙하면서 사람에 대한 정의가 다른 상황에서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을 거짓말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과 같은 결과가 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흔히 하듯이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육신에게 필요한 것을 구하는 기도를 하는 것은 삶을 하나님께 의지하는 것 같아 보이지만 역설적으로 하나님께서 그것을 아직 주시지 않았으니 이제 달라는 의미와 같은 것이 되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이미 육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모든 것을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다 주셨다. 그런데 기도하는 것은 주시지 않은 분으로 여기기에 그렇게 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모든 것이 된다는 것에 대한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사람이 취해야할 모습은 육신이 살아가는데 필요한 것을 달라고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다. 바로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모순과 본성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그러한 것들이 서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게 하는 도화지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의 본성을 인정하고 또한 다른 사람이 나와 같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긍휼과 사랑을 이끌어낸다. 하지만 강해지고 위대해지 고상해지려는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긍휼이나 사랑이 나올 수 없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사람을 보면 거의 무자비한 존재가 된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을 무시하듯 하는 것도 이러한 생각에 기인한 것이다. 사람의 본성과 모순과 한계를 성경을 통해서 극복하려 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일단 지옥에 갈 사람으로 무시하는 것이 그것이다. 즉 긍휼히 여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생각은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만든다. 하나님께서 심히 좋았다고 하신 사람의 모습을 사람은 부정한 것으로 여겨서 이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지켜 행함으로 회복시키려 하는 것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때 사랑이 나온다. 그것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습을 그대로 인정한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고, 그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를 표현할 수 있는 그릇이 되기 때문에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 담겨서 사랑을 나타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릇에 무엇이 담기면 그것은 담긴 이름을 따른다. 콜라가 담긴 병은 아무런 저항 없이 콜라로 불리고, 우유가 담긴 종이팩은 역시 저항 없이 그냥 우유로 불린다. 아니 그것은 그렇게 불릴 뿐 아니라 그냥 그것이라 인정된다. 그 내용물이 비워지기 전에 누가 콜라병과 콜라를 따로 생각하는가?


그와 같이 사람이 자신이 세상의 기준으로 또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에서 볼 때 모순되고 한계가 있고 고상하지 못한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비로소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빈 그릇으로 보시고 그 안에 하나님의 성품을 채우시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원래 사람에게 기대하신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빈 그릇이지 무소유의 사상이 빈 그릇이 아니다.


그렇게 그 마음에 하나님이 담긴 사람, 곧 하나님의 성품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 누구냐 할 때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리스도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사람의 모든 한계와 죄인으로 벌거벗겨져서 전혀 고상하지 않은 모습을 끌려가시고 매달리시면서 인정하셨기에 그리스도가 되시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다.


그리고 그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자신도 인간으로서 육신을 가진 분명한 한계가 있고 세상적으로 볼 때, 또한 율법적 기준으로 볼 때 전혀 고상하지 않은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면 예수님을 따라 그리스도(a Christ)와 같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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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1장 5-10절) 사람 본래의 모습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14. 12:16 Writer : 김홍덕

사람은 누구나 분명한 한계와 본성이 있다. 그것은 사람이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지으셨기 때문이다. 사람이 가진 이 한계들은 끊임없이 사람들을 시험해 왔다.


사람들은 자신 안에 있는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본성이나, 또한 생각처럼 움직이지 않는 육신의 한계가 선하지 못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한 생각의 시초가 선악과를 먹은 사건이기도 하다. 하나님처럼 되려 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처럼 되는 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신의 한계를 벗는 것이라는 생각을 늘 해 왔다. 그래서 히어로 영화에 나오는 모든 영웅들은 하나 같이 비범한 존재들이다. 하늘을 난다거나, 투명해서 보이지 않는다거나, 상상 못할 힘을 가진 존재로 그려지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영웅들이 사람 이상의 능력을 가지고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구한다는 가장 기본적인 설정은, 사람이 생각하는 삶의 위기를 탈출하려면 보통 사람 이상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는 의식이 깔려 있는데, 이것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사람을 구하고 영웅이 되는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의미이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런 기본적인 의식은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 선한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는 것은 영웅이 가지고 있는 능력이 선이고, 그런 능력이 없다는 것은 초라한 모습이라는 생각의 뿌리가 있는 것이다.


종교적인 세계 안에서 보면 이런 현상은 더 두드러지는데,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할 메시야는 보통사람과 같아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이 가득한 바리새인들과 유대인들은 초라한 모습의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라고 하니 용서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은 지금도 만연한데, 신앙이 좋다는 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한계와 본성을 제어하는 성과가 좋은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이유에서다. 40일 금식을 했다면 하나님께서 더 귀하게 여기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그렇게 벗고 싶어 하는 육신의 한계를 오히려 입고서 이 땅에 오신 분이다. 그렇게 하신 이유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사람들이 그렇게 벗고 싶어 하는 이 육신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표현하는 존재다. 세상에서도 아들이 있다고 한다면 반드시 아버지가 있다는 것이고, 또한 그 아들의 삶을 보면 아버지의 성품을 알 수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도 이와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면서 살도록 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그렇게 벗고 싶어 하는 이 한계 많은 육신은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가장 적합한 존재인 것이다.


언뜻 생각하면 '이 연약한 육신이 어떻게 하나님의 위대함을 나타내겠는가?' 싶겠지만, 이 육신의 삶은 도화지와 같은 것이다. 이 도화지에 하나님이라는 화가가 그 생각을 그려내는 것이다. 그래서 피카소의 그림을 보면서 피카소의 생각을 보듯이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이 연약한 삶이 하나님을 나타내는 존재인 것이다.


흙은 모든 짐승에게 밟히고, 모든 것이 버려지는 하찮은 것이지만 여기에 씨가 싶기면 생명이라는 위대한 존재가 되듯이, 사람도 자신들이 생각할 때는 이 연약한 육신이 짐승들에게 밟히는 흙과 같이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흙이 아니면 농사를 지을 수 없듯 사람이 아니면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흙의 입장에서 보면 큰 건축물을 지탱하는 철골이나 시멘트에 비하면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여겨질 수밖에 없다. 하지만 시멘트나 철골로 농사를 지을 수는 없는 것이듯이 사람도 위대함을 기준으로 보면 보잘 것 없지만, 하나님의 성품으로 거듭나서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에는 육신의 한계를 뛰어 넘은 영웅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시고, 또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신 곳이 십자가인데 그 십자가에서는 어떤 위대함도 기적도 없고, 연약한 육신을 가진 한 죄인이 쓸쓸하고 비참하게 죽어가는 모습 그것뿐이었지만 그것이 바로 흙과 같이 하나님의 생명을 싹 띄울 수 있는 모습을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 모습이 우리 사람의 모습이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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