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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6절) 대언자 예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18. 09:12 Writer : 김홍덕

요한 사도는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는 것에 대하여 전하고자 했다. 그래서 이 요한 일서를 기록한 것이다. 요한 사도는 단순하게 하나님에 대한 범죄를 말하고 있으니 사람들이 보면 이것을 자신들이 늘 생각하는 것과 같이 행함으로 지은 죄를 말하는 것으로 보겠지만 그렇지 않다.


이 요한 일서를 시작하면서 요한 사도는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듣고 보고 만진 바요 이 생명은 나타난 것이라고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것은 자신이 주님으로 모시는 예수님이 자신과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함께 있었던 것을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로 나타나셨음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요한 사도가 요한 일서에서 정말로 분명하게 말하고 강조하는 모든 것의 뿌리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는 당시에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의 내용도 포함되었지만, 단순히 영지주의를 바로잡기 위하여 쓴 것이라기보다, 그것이 복음의 실체이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이것을 전하고자 했다. 이는 이 복음을 받은 사람들이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했다. 명확하게 이 복음의 법을 알게 된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사람의 정체성을 모르거나 부인하는 죄를 돌이킨 사람이다.


사람들은 누구나 철이 들면서 이러한 죄를 범한 사람들이 되기 일쑤이다. 이는 세상의 방식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 사도는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하나님께 죄를 범하지 않도록 이 글을 쓴다는 것이다.


그리고 만약 누가 하나님께 이 범죄를 범하였다면 이것에 대하여 아버지께 대언자가 있다고 했다. 그 분은 우리와 온 세상을 위한 화목제물이시고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분명하게 선언하고 있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1장을 시작하면서 밝힌 바와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성경에서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왜냐하면 이 성경을 보는 존재가 다 육신을 가진 사람이기 때문이다. 과학적 미개척인지는 모르지만 사람 말고 어떤 존재가 성경을 보겠는가? 이 성경이 사람을 위하여 기록되었기에 예수님께서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시고, 세상의 법 아래에 있는 우리와 같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심판을 받으시고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시는 모습을 보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우리의 운명이고 인생의 방식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사람이 살아가는 법 그 아래로 오셔서 우리와 같이 사시다가 우리가 가진 운명을 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인간의 정체성을 보이인 그 사역은 드라마처럼 구성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실 때 이미 정하신 인생의 운명이다.


그 운명을 예수님께서 지신 것은 단 하나 모든 사람이 그런 운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그 운명을 지신 것은 그 운명에 순종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법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데 봉사활동이나 밥을 퍼주는 것이다, 아니면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 세상의 법과 질서를 무시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가 표현된 존재다. 아버지가 가진 뜻이 이루어진 육신이 아들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증거가 그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운명과 법을 인간과 같은 육신을 가지고 지시면서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 법은 정말로 은혜로운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인생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아무리 이전의 삶에서 육신의 성공이 성공이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며 살았더라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그 때 그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의 대언자시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이 대언자가 되시는 것을 하나님 앞에서 대언자가 된다고 하지 않고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된다고 했다. 물론 하나님이 아버지이시지만 하나님이 사람 앞에서 아버지로서 관계가 형성되는 것, 곧 하나님의 의를 아들과 같이 육신으로 표현하는 존재가 되었을 때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이 땅에서 육신으로 하나님의 아들 되심을 보이셨으므로, 그 증거로 인하여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전이고, 증거며, 대언자가 되시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첫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만 신비한 예수님, 우리 육신과 다른 능력과 존재로서의 예수님을 믿고 신앙한다. 하지만 그것은 온전하지 않다. 정말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한 것은 육신의 한계와 운명을 인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그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사는 것이며,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며,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길이며, 그것이 요한 사도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것이며, 그것이 이 글들의 목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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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6절) 범죄 (3)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17. 16:05 Writer : 김홍덕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죄를 범하는 것은 본질이 아닌 형식이 본질인줄 알고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히브리서의 기자는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은 것이 아니라(히 11장)"고 한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다.


먹는 것과 사는 것에 대한 선후를 깔끔하게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사는 목적을 모르기 때문이다. '먹기 위해 사는지, 살기 위해 먹는지' 하는 말에는 사는 목적이 배제되었기 때문이다. 삶의 목적은 다른 것이 아니다. 창조주가 주신 존재의 목적, 그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이 삶에 들어온 것이 아닌데, 어떻게 자신 스스로가 그 목적을 설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돛단배 안에서 부채질하면 배가 갈 것이라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내가 의지로 선택한 삶이 아니라는 것은 내게 삶을 부여한 이가 있고, 당연히 목적도 그 분에게 있는 것이다.


이렇듯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을 알지 못하면 본질을 알 수 없다. 세상에 보이는 모든 것이 본질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먹는 것이 사는 것이 되고, 성적 쾌락이 성욕의 본질인 줄 아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육신이 본질이라 생각하는 것이고, 그런 생각은 당연히 육신의 죄가 하나님이 말씀하는 죄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 생각은 육신의 행동을 바르게 하면 하나님께 합당한 사람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그렇게 되면 필연적으로 존재의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기록한 성경을 행위 규범으로 보게 된다. 그리고는 행동을 잘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가르치고 배우고 그렇게 살게 된다.


그러나 결론적으로 그렇게 산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 목적을 잘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삶의 본질을 보이는 것과 육신과 같은 형식으로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은 예수님께서 40일 금식을 하신 이후에 받으신 시험에서도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의 세 번째는 마귀가 천하만국을 보여주고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이 보이는 천하만국은 본질이 아니기에 그것을 위하여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근본이시오 삶의 목적을 정하신 하나님만 경배해야 된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이 본질을 망각하고 사는 삶이 바로 하나님의 목적을 외면한 근본적인 죄라고 성경은 또한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육신의 죄가 죄의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삶을 살게 하신 이유를 알지 못하고 이 육신을 제어하고 극복하는 것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 생각하고 열심을 내는 그것이 본질적인 죄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아무리 열심히 살고, 또한 선한 삶을 산다고 해도 이것이 없으면 본질이 빠진 삶이 되는 것이다. 마치 겉모양은 너무 좋은 자동차지만 정작 굴러가지 못하는 고장 난 차와 같은 것이다.


차가 고장이 나서 서 있다면 이동을 목적으로 구매한 주인에게 죄를 범한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아무리 잘 살고 바르게 살아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허락한 목적, 그리고 인생이 육신을 가지고 있는 목적을 모르면 근본적인 죄인인 것이다.


이 하나님의 목적은 육신을 인정하는 것이다. 육신을 극복해서 위대한 성과를 내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육신을 가졌기에 연약하고, 또한 고상하지 못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도 그렇게 인정한다. 그런 사람에게서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계획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줘도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아무리 화려한 모양이라도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는 이동을 목적으로 하는 사람에게는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 이것을 모르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있는 범죄다.


이 죄가 하나님 앞에서 고백되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이 육신의 삶을 잘 못 알고 있었다는 것,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하나님의 기쁨이 되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고백을 한다는 것은 앞으로 목적이 회복된 삶을 살게 되었다는 고백이기 때문이다.


그 삶에는 실패가 없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가 개로 사는 것에 실패하겠는가? 절대로 그런 일은 없다. 그렇듯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육신의 목적을 모르고 살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거듭난 생명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인정하는 것이 바로 인생의 목적을 알고 사는 것, 그것이기 때문이다.


그 깨달음, 그 고백이 바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시작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창세기고, 그것이 회개고, 그것이 구원인 것이다. 이 본질을 모르면 다른 것은 다 부질없는 짓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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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6절) 범죄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17. 11:09 Writer : 김홍덕

그러면 '사람이 본능을 마음대로 표현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구나?' 생각하고 '마구 먹고, 마구잡이로 성욕을 표현하면 어떻게 되겠는가?'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육체를 함부로 굴리는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하나님께서 한계와 본성을 가진 육신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영지주의적인 생각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한계와 본성의 존재 이유가 마구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행동하면 세상적인 범죄자가 되는 경우가 많다. 반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본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만들어진 존재라는 것을 알면서 그렇게 하면 소위 말하는 이단이 되는 것이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요한 사도가 엄히 경계하는 영지주의인 것이다.


그러나 어느 경우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잘 몰라서 그런 것이다. 하지만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후자가 더 안타까운 일이다. 어쨌든 둘 다 하나님 앞에서 그 방향이 잘못되었음을 알고 나면 다 돌이키게 된다. 그리고 행여 모르던 시절에 육신의 목적을 몰라서 마음대로 한 것이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의 법률에 벗어났다면 그것은 세상의 법에 따라 죄 값을 치르고 마음은 하나님 앞에 고백되어야 하는 것이다.


많은 종교인, 특히 기독교인들이 무시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면 사회적 법률과 문화를 범한 것도 같이 사해지는 줄로 아는 것이 그것이다.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육신의 목적을 몰라서 사는 동안 지은 죄는 그 법률 앞에 또한 피해자 앞에 용서를 구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서 지은 범죄는 행동으로 지은 것이 아니다. 존재로서 지은 죄를 말한다. 이는 하나님께서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모든 행하심은 존재에서 표현된 것이지, 하나님의 표현하시는 것이 본질이 아닌 것이다.


그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이 주신 인간의 정체성을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와 같이 부끄러워하고 인간이 가진 한계를 극복해야 강해지고 또한 부끄러움을 감추어야 고상해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인간의 존재하게 하신 이가 가지고 있는 존재의 정체를 부인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께 죄를 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본성은 하나님의 목적을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면 된다. 그러다 보면 자연적으로 통제가 된다. 하나님 앞에서는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성적인 욕망을 표현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자동차도 브레이크가 있다. 이동이 목적인 물건이지만 가지 않게 하는 기능이 있다는 것이다. 단순하게 달리지 않고 서 있도록 그 능력을 제어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고 달리는 것이 목적이지만 브레이크가 있다. 다시 말해서 이동이라는 것과 달리는 것은 다르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사람이 가진 본능들도 마구 잡이로 표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자동차는 늘 달리고만 있어야 하는데, 그렇다면 그 주인이 어떻게 탑승해서 이동이라는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사람들이 이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사람의 행동을 규정하여 행동으로 범하는 죄를 금하려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욕망을 주신 것은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고 서로 구성된 사회에서 이기적인 욕구 충족을 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다.


만약에 사람에게 성욕이 없다고 해 보자. 어떻게 인류가 지속될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사람이 대를 이어서 살아가면서 사람이 나고 또 살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기쁜 일이라고 생각하셨기 때문에 성이라는 욕망과 또 그것으로 인한 희락을 주신 것이지, 그 희락을 누리라고 주신 것이 아닌 것이다. 


다시 말해서 성적인 욕구가 만족되었을 때 기쁨은 성이 존재하는 목적이 달성된 결과지, 그 기쁨이 성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잊어버리는 것은 사람들이 행동을 바로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삶의 방식에 기인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존재의 목적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함으로 나타나는 표현을 본질로 알고 살기 때문에 성적 기쁨이 성의 목적으로 착각하는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이 하나님께 죄가 되는 것이다. 본질이 사람이 가진 육신의 행동이 아닌데, 그것을 본질로 보니 그것으로 지은 죄가 하나님 앞에서 죄 짓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존재의 목적을 모르는 것에서 비롯된 것이고, 존재의 목적을 모른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한계와 욕구의 존재 이유를 모르는 것이다.


그것을 모르고 하나님의 믿고, 하나님처럼 되려 하면 인간이 육신을 가진 것을 부인하려 하는 것이다. 육신은 자꾸 죄를 짓는데, 그래서는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육신이 세상의 법 앞에서 늘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잘 알고 계신다. 오죽하면 그 아들이 세상의 법으로 십자가에 달리는 것 까지 보고 계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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