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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6절) 하나님의 사랑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23. 06:33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아들을 나를 대신 보내주시는 감동적인 사랑의 모습 때문이기도 하지만, 심지어 그런 모습까지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이고, 그 계획이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는 증거인 것이다. 왜냐하면 어떤 존재를 가장 사랑하는 그 존재의 존재 목적대로 대하는 것 그것이기 때문이다.


만년필을 사랑하는 하는 것은 만년필을 우리 상자 안에 잘 보관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글로 쓸 때 사용하는 사람이고, 자동차를 사랑하는 사람은 씻고 닦고 하는 사람이 아니라, 늘 타고서 이동이라는 목적에 사용하는 사람이 차를 사랑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그 사람의 육신의 문제를 위하여 애쓰고 죽기까지 힘쓰는 것이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동차를 사서 매일 같이 광을 내고, 씻고 닦고 하는 것일 뿐이다. 사람을 사랑하는 가장 근본적이고 큰 사랑은 사람을 존재의 목적대로 사용하고 대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사람의 삶에 있어 가장 힘든 일이 있다면 그것은 왜 사는지를 모른다는 생각이 들 때일 것이다. 그것은 비참한 것이다. 자신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 다 허무하게 느껴진다는 것은 너무 슬픈 것이다. 그것은 적지 않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렇게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 주변에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사랑의 모습으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겠는가? 아니다. 적어도 누군가는 그를 낳았을 것이고, 범죄자들끼리도 서로 아끼는 것이 있는데 그러기는 힘들다. 하지만 그래도 그는 죽을 만큼 힘든 것이다.


왜냐하면 그의 존재 이유를 알려주는 이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자기의 의지로 삶을 시작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신 안에 존재의 이유가 있겠는가? 존재의 이유는 자신에게 이 삶을 허락한 존재에게서 찾아야지, 자신도 어떻게 이 삶이 자기에게 주어졌는지 모르는데 그 안에서 찾는다고 될 일이 아닌 것이다.


부모는 생물학적으로 또한 육신적으로 자신이 존재하게 된 통로인 것이지, 이 육신이 왜 나인가 하는 정체성을 가졌는지는 설명할 수 없고, 또한 그 보모 역시 자신과 동일하게 왜 사는지의 문제를 안고 살았던 같은 정체성의 문제를 가진 동일한 사람일 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내가 왜 존재하는지, 그것을 설명하시고 알게 하시는 분이 계신데 그분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사람에게 있어 절대적이고 본질적인 사랑을 베푸신 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셨다는 것은 아들을 대속 제물로 주신 것 그것이 뿌리가 아니라, 그렇게 까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에 대한 의와 목적과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하시려 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사랑이시라는 말씀의 본질인 것이다.


그러므로 요한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온전히 있는 자는 그의 계명을 지키는 자(요일 2:5)'라는 말씀이 참된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생명의 본성과 같은 것이라 했다. 즉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알게 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고, 그것은 생명의 본성이라서 생명이 그 생명의 본성을 지키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오히려 행여 하나님의 진노를 살까 매일 노력하고 계명을 지키려 하는 것이 더 웃기는 것이다. 그것은 개가 개로 살지 못할까봐 매일 개 같이 굴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개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계명을 노력으로 지키려 한다면 그 안에 하나님의 사랑이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안에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존재의 목적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야구가 최고의 스포츠라 여김과 같이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가지신 존재의 목적이 근본이요 모든 것이 된다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노력으로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고,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계명은 지키려고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지키지 않으려 해도 지키고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생명의 본성이 그런 것이기 때문이다. 이에서 모자람이 있으면 그것은 계명을 지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안에 사랑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런 삶은 삶의 어떤 위대한 성과도 다 울리는 꽹과리와 같은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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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6절) 하나님의 사랑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0. 23. 06:31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보고 싶고, 위해 주고, 심지어 목숨도 내어주는 것이라 알고 있다. 분명히 그것은 사랑이다. 하지만 그런 모습들도 다 사랑이 표현되는 모습이지 사랑의 본질은 아니다. 사랑이라는 것이 있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랑의 표현과 본질의 차이가 있다는 것은 바울 사도가 기록한 고린도 전서 13장에서 볼 수 있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것은 사랑의 모양이라서, 설사 그런 모양을 취했다 하여도 사랑이라는 본질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랑의 본질은 무엇인가? 사랑은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 있다. 그 말 속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사랑에 대하여 정의를 내렸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 하지만 성경이 정의를 내리는 사랑은 단 하나 <하나님은 사랑이시라(요일 4:6)> 이것이다.


꽃을 아무리 예쁘게 그려도 향기가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듯, 세상에 존재하는 어떤 사랑의 표현이 있어도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도 요한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한 의미이고, 바울 사도가 고전 1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내용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신앙의 또 다른 모습 같지만, 결국은 같은 문제로 수렴한다. 그러니까 존재가 있고, 그 존재에 맞는 정체성이 있느냐? 아니냐? 하는 것이 사랑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성경에서 하나님이 사랑이시며, 또한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은 결국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 안에 하나님이 계시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는 그릇으로 지음 받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달성되지 않았다는 의미인 것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데 사랑이 없으면 되겠는가? 하지만 사람 안에 하나님이 없다면 간첩의 사회봉사나, 해적이 동료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신의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는 감동적인 사랑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것이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가 먼저라는 것이다. 그 목적이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그 안에 가지고 표현하는 존재이니, 그것이 없다면 사랑이신 하나님이 없는 것이기에 몸을 불사르게 내어주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그저 안타까운 희생일 뿐인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세계다. 물론 사람들이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는 세계에 살면 이는 말도 안 되는 주장 같겠지만, 오히려 그래서 당연한 이야기이다. 하나님의 세계에서 하나님이 없으면 그 모양이 어떠하든 소용이 없다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폐쇄성 같을지 모르지만, 그건 세상의 법이다.


야구와 축구를 놓고 어느 것이 더 좋은 것인가 하는 논쟁이 가끔 있다. 야구를 좋아하는 사람은 그것이 최고의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하고, 축구의 세계에서 축구가 야구보다 훌륭한 스포츠라 생각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것이 그 세계의 법인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특정 종목을 좋아한다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세계 안에서 하나님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니요, 몸을 불사르게 내어 주어도 그 안에 사랑이신 하나님이 계시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아니 그래서 오히려 그 말씀을 인정하느냐 아니냐에 따라 그 사람이 이 세상을 하나님의 세계로 인정하는지 아닌지의 신앙 고백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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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에 몸으로 성경에 조문을 지켜 행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면 예수님도 낙제생에 불과하다. 그 당시 행동을 지켜내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한 유대의 바리새인과 서기관이 볼 때 예수님은 거의 반항아적으로 계명을 지키지 않으셨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내는 것이라고 한다면 어떻게 예수님께서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될 수 있겠는가? 먼저는 대언자가 되기에 자신도 자격이 없고, 더욱이 행함으로 지키는 것이라면 생명의 관계인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가 되는 것은 더 안 되는 일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예수님을 아노라 하고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거짓말 하고 진리가 그 안에 없다고 한 것이다. 요한이 말하고 있는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는,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이유와 목적을 떠나서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행함으로 성경의 조문을 지켜야 한다는 사람들과, 육신을 부정하게 여겨 마음대로 사는 자들을 다 같이 말하는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신호등이 녹색일 때 건너야 한다는 것을 지키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 자기 안에 있는 생명의 본성을 따라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욕망을 좇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 안에 욕망과 한계와 본성과 연약함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다는 것을 알고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개는 도둑으로부터 주인을 지키는 것을 의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개가 가진 사람에 대한 충성스런 본성이 그렇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개를 키우는 것이다. 개의 그 본성을 사람이 목적으로 하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사람이 가진 이 연약함과 한계와 본성이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나타내시기에 적합하기 때문에 사람을 아들로 삼으시는 것이지, 사람이 의지로 하나님의 아들의 노릇이나 흉내를 내기 때문이 아닌 것이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목적이 자기 안에서 밝아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으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그 법으로 거듭난 사람에게는 도무지 실패할 수 없는 것이다. 강아지가 개로 사는 것에 실패하겠는가? 그럴 수 없듯이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 그 유전자의 계명을 못 지킬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을 계명으로 받아 지켜 행하려는 마음이 있는 사람들은 사람이 가진 추함을 율법으로 감추려 애쓸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거듭나기를 원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만 있으면 계명은 어길 수조차 없는 삶이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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