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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소더스>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록한 성경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모세의 손에 끝까지 들려져 있었던 애굽의 장군으로서의 칼이었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양을 치던 지팡이를 가지고 출애굽을 한 것과 완전히 다른 설정이다.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하여 부르신 양치는 목자의 손에 지팡이가 아닌 애굽의 장군을 상징하는 칼을 들렸다는 것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시각과 철학과 지식으로 채색했다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포스팅 한 것과 같이 출애굽이라는 사건에 대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생각과 성경을 믿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을 연결하려한 시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그런 시도의 가장 유명한 단체가 창조과학회가 아닌가 싶긴 하다.)


그 뿐 아니라 영화 전반에는 성경을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접근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가 분명해 보였는데, 물이 피로 변한 원인이 악어의 출몰이라는 설정, 그리고 물이 피로 변하면서 먹을 것이 없어진 개구리가 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부패한 사체들에서 파리가 나오고 병이 생겼다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성경에 기록된 열 가지 재앙을 상식적으로 접근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재앙을 제외하고도 많은 재앙들이 애굽 백성에게는 해당이 되었으나 히브리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것에는 접근을 절제(?)했다는 것에서 굳이 그것을 한계였다고 폄하하기 보다 성경을 믿음이 아닌 상식으로 보는 어두운 안목의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의 출애굽은 신과 왕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히브리 족속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는 이야기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전반의 과정은 한 사람, 사람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향(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민족이라는 한 민족에 국한시킨 것도 편협한 것이지만, 성경의 말씀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이해가 믿음이나 이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근원된 문제이다. 그런 문제는 사실 이런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나 종교인들 안에도 얼마나 많은 안타깝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는 교회의 골격이 되고 있다. 그 모습이 홍해를 애굽의 장군을 상징하는 칼을 들고서 건너려고 하는 모세의 모습을 설정한 영화와 같은 것이다. 이는 조금의 오차도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신앙은 믿지 못하는 것은 안 믿는 것이 옳다. 마음에 믿지 못하겠는데 믿어야 한다니 최면을 걸듯 신념을 가지고 "믿습니다!"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타협하는 것과 성경을 사람의 지식으로 가감하는 것이다. 믿기지 않으면 안 믿긴다고 고백하는 것이 가장 정직하고 가능성 있는 심령이다.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마음이 열리면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모세의 손에 칼을 들리운 관점,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믿는 관점,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거를 대려고 하는 생각, 성경을 상식과 이치로 이해하려는 모든 것은 이미 자신의 생각이 채색되었기에 안 믿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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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소더스>에 나타난 타협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12. 8. 09:40 Writer : 김홍덕

어제 저녁 아내와 큰 아들과 함께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을 보고 왔다. 어린시절 TV에서 본 <십계>를 생각하면서 발달된 기술이 보여줄 화려한 그래픽에 대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는 매우 불편하게 흘러갔다. 상영시간 내내 지난 번 <노아>를 생각하게도 만들었지만 이내 그것과는 또 다른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노아는 성경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이었다면, 엑소더스는 성경을 논리적 해석으로 불신과 신앙과의 괴리를 연결하려 했다.





영화는 출애굽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뭐 굳이 영화의 내용을 해석해 보면 히브리 백성에 대한 왕과 신의 이견 차이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을 자신의 종으로 노예로 여기는 왕과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는 신의 관점 차이를 보여주려 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내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기대(?), 그러니까 내가 아는 성경의 전재와 얼마나 일치하게 할 것인지를 검증하듯 보는 마음은 어쩌면 나의 선입관이라고 치부한다 해도 이 영화가 가진 문제는 심각하다고 본다. 어쩌면 노아보다 더 문제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가장 하나님께 도전하는 생각이나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이 가진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못 믿겠다!"라고 하거나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이 정직한 마음이다. 그건 불신일수는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으면  못 믿겠다 해야지 믿기지 않는 말씀을 자신이 사람으로 살면서 형성된 가치관과 지식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고 도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진 의와 그것을 표현한 말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가장 타락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기본적으로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존재 목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이 질그릇으로서 엎어져서 아무 것도 담으려 하지 않는 것이라면, 타협은 자기 맘대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주권을 가지려 하는 것이고, 자신이 스스로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사고를 바탕으로 그릇에 담기려는 것을 판단하고 자신의 정체와 연결하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는 삶의 주권을 자신에게 두고 있는 생각이다. 즉 자신이 가진 사상과 지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기 주도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또 합리적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가감하는 것이다. 가감을 하는 근원은 자기 지식으로 볼 때 이해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주권을 자신에게 두고 있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과의 주권을 다투는 것이다. 이는 믿지 않는 것 보다 죄라면 더 큰 죄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던 기록을 마태복음 17장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을 본 베드로가 좋아서 초막 셋을 짖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자고 했다. 하지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에 깨어 보니 예수님만 보였다고 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는 어떤 것도 더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심지어 모세와 엘리야라 할 찌라도.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도 엘리야의 능력도 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하늘과 땅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으로 비롯된 사상과 철학과 과학과 문학과 예의와 모든 것이 바라는 유일한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로마서 8장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하는 가장 온전하고 정직한 마음은 믿어지면 믿는다 할 것이고 믿어지지 않으면 못 믿겠다고 할 것이지, 믿어지지 않고 의심이 되는 것을 자신이나 사회나 세상이 가진 사상과 지식으로 합리적인 해석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믿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영화 <엑소더스>는 성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성경에 대하여 시도하는 주관적 시도가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 도전하는 것인지를 알게 했다. 이는 영화가 성경과 다르게 표현해 가는 것에 대한 불편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런 도전은 이제 트랜드가 된 것 같다. 예전 <십계>나 <벤허>과 같은 영화에 비하여 시간적 거리가 좀 있지만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를 거쳐서 <노아> 그리고 <엑소더스>까지의 과정을 보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는 관점을 조금씩 조금씩 교정해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미혹>이라는 생각에 불편한 잔상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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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미워한다는 것이라고 하면 가서 해치고 싶고 또 불행한 일이 그 사람에게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과 같은 것을 연상하지만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나"와 같은 표현은 좀 다른 것이다.


신앙을 가지고 있으면서 같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이 생업이 잘 풀리지 않거나 사업이 망했을 때 그것을 보면서 속으로 '뭔가 하나님께 회개할 일이 있어서 그렇구나'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세상이 미워하듯이 형제를 미워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형제라고 하면 하나님의 생명을 한 아버지로부터 받아 나누고 있는 생명들의 관계를 말하는 것인데, 그 생명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자신의 구주로 시인한 믿음을 공유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육신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삶의 정체성의 회복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정체성이라는 것이 이 세상에서 먹고사는 문제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체성이 회복된다는 것이 육신의 사업이나 생업의 어떠함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수단일 뿐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전하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는 밥 먹듯이 행하시던 기적마저 다 놓으신 것이다. 


기적을 행하는 것이 인간의 정체성이 아니라, 세상의 법에 의하면 사람의 정체성은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본성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보여주신 것이기 때문이다. 기적을 행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찬양하고 경배할 수는 있지만, 사람은 늘 그럴 수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다는 사람에게 있어 무엇이 예수를 믿는 것인가 하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하는데, 예수 믿으면 부자가 되고 죽어서 천국에 가서 부자로 사는 것과 같은 것이 믿는 것이 아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이 내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모습, 특히나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신 모습을 보면서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깨닫는 사람은 이 세상의 것이 본질이 아니라 수단이라는 것이 명확하게 그 심령 안에 열린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같은 생명을 공유한 사람이 세상 살아가는 수단인 생업이나 하는 일이 잘 되지 않는다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문제가 있다는 시각을 가질 이유가 없다. 단지 수단이 좀 잘 못되거나 익숙하지 않은 문제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육신으로 아들이 아버지의 일을 하는 것에 있어 아버지가 알고 있는 것과는 다른 방법과 수단과 도구로 일을 하다 잘 못되었다고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하나님의 아들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관계도 이러하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 형제가 자신의 삶을 통하여 하나님을 표현해가는 삶의 모양이 때로 부족하고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실패하고 어리석어 보여도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그것이 하나님과의 정체성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며 그 사람에게 가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돌아보고 신앙을 바로 잡으라고 하면 욥의 세친구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는 것과 같이 형제를 대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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