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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로 났다는 것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의미이다. '누가 누구에서 났다'라는 말이 아들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던 것이 표현되었다는 것이고 그것은 아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난 처음 열매이자 아들은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 외에 하나님께로 난 육신은 없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은 곧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졌다는 의미이며,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에 대하여 터부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목적도 그것이었고, 또한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에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어 하나님의 아들 곧 그리스도가 되는 것에 대하여 쉽게 이야기 하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한 혼돈 때문이다. 그리스도라는 그 정체성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최초의 모양 그대로의 모습에 순종하고 그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임을 상실했기 때문에 사람이 그리스도가 되는 것을 어려워한다.


물론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이 예수 그리스도와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그리스도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여주신 것이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아는 것이지 2,000년 전 유대 땅에 오신 예수님과 동일한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성경이 말씀하시는 '하나님과 혹은 예수님과 하나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뜻이 사람의 삶으로 표현되는 내용과 형식이 합해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지 존재적으로 하나가 된다는 말씀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회복한 사람이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볼 때는 십자가에 달릴 수밖에 없는 사람의 정체성이지만 그것이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깨닫는 것이다. 그 깨달음이 있다면 하나님 안에서는 죽은 자가 아니라 살아 있다는 생명이 되는 것이 구원이고 부활인 것이다.


세례라는 것은 죽고 사는 것인데, 이는 죽었다가 죽기 전과 동일한 정체성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는데 이전과 동일한 생명이라면 뭐 하러 다시 살겠는가? 죽을 때는 육신 가진 삶이 저주스럽고 언제라도 벗고 싶은 마음이었다가 다시 살아 날 때는 그것이 아니라 이 육신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진정한 도구며 형식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 세례이고 부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신 십자가에 있다. 연약한 육신, 모든 사람들이 그 한계 너머를 늘 꿈꾸는 이 육신을 가지고서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예수님은 육신을 부인하거나 이 육신을 율법으로 제어하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유대인들에게와 또 세상적인 소유와 지위가 없는 주제에 왕이라고 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는 로마인들에게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기에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바로 그런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기에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더 정확하게는 살리셨다는 것이라기보다 그런 모습은 하나님께는 너무나 당연하게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심히 기뻐하신 그 모습 그대로이기 때문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의 원래 모습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은 그 모습 그대로인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대로라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인 하나님의 이미지를 가장 잘 나타내는 모습 그대로의 사람 모습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사람은 자신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사람이다.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부끄러워한 것은 선악과를 먹고 난 다음에 생긴 마음이다. 그 부끄러움을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듯 유대인들은 율법으로 자신을 가리려 했고,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법 곧 피라미드와 같이 꼭대기로 가야 인정하는 법으로 사람이 육신 가진 것을 가리려 한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것이 사람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자신의 기준으로 사람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감추는 것이 하나님 앞에 부끄럽지 않은 것이라 여기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에덴(만족)동산에 둘 수 없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육신 가졌다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부인하면 스스로가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다.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나타내며 대변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을 다스리고 사람 위에 서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것을 모르면 신비할수록 좋은 신앙이라 생각하고 시험과 공로라는 세상의 법칙에 의하여 목사가 되어 사람 위에 군림하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의 원 모습을 통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것을 아는 사람이고 이것을 표현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의 원 모습은 사람이 연약하고 전혀 고상하지 않은 이 육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육신이 가진 한계를 부끄러움과 연약하고 고상하지 않은 것으로 보는 안목은 세상의 안목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총칭한 사도 요한의 표현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인 것이다. 그런 모든 것은 다 사람의 육신에 대하여 무언가를 더하고 절제된 것이 더 나은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사람 안에 있는 욕망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체 발산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로 났다면 사람을 보고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로 난 것을 아는데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멸시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보고 비난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셨다는 것을 무시하는 것뿐이다. 비난의 이유가 설사 신앙의 어떠함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하나님께로 난 자를 사랑하는 것



또한 사람이 하나님께로 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을 분명히 안다는 것이고, 그것은 삶의 의미와 목적이 분명하게 밝아진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이 온전히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인데 그 사랑을 받은 사람이 사람을 미워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 하나님께로 난 사람인데 그 사람이 자신과 같이 하나님께로 난 사람을 미워하거나 배척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그 사람의 육신의 어떤 모습이든지 아니면 신앙을 표현하는 가치관이든지 그 어떤 모양이라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인 자신에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깨닫게 하시기 위하여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신앙 고백이 있다면 사랑하는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것이고, 그런 신앙이 자신의 삶이고 정체성인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은 자신과 동일한 생명, 같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난 형제를 미워하지 않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것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께로 난 자를 사랑하는 것이고, 이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이것이 사랑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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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4장 7-21절) 거짓 없는 사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2. 21. 07:26 Writer : 김홍덕

요한일서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랑, 그것은 곧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하심과 같은 것이다. 성경 전체를 통틀어 말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자기의 백성이자 아들 삼으시고자 하신 뜻을 전하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심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두어 가지 있는데 그 처음은 이 사랑의 방향성이다. 즉 이 사랑은 사람에게 존재의 의미를 깨닫게 하는 것에 있으므로 사람의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을 알고 있는 이에서 그렇지 않은 이에게로 베풀어지는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랑의 처음은 당연히 하나님이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단순한 것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은 사람에 관한 시작과 끝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이것이 알파와 오메가라 하신 의미이기도 하다.)


또한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있다는 것, 사람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이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람의 존재 목적은 사람이 강해지고 더 위대해지는 것에 있는 것에 있지 않다. 또한 사람이 가진 본성인 식욕이나 성욕과 같은 것을 금하면 금할수록 경건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이 만드시고 보시기에 좋았다고 한 사람을 부정하고 불량으로 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지신 사람에 대한 목적, 즉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사랑은 사람의 모습 그대로 있을 때 하나님의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우리와 동일한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의 모든 한계를 보여 주는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다.


만약에 사람의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에 부족하고, 지금의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세상에서 더 경쟁력을 가질수록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시는 존재가 된다거나, 종교에서 많이들 가르치듯 금욕하고 도덕적일수록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존재라면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내시고 기뻐하는 자라 하시지 않고 천사를 보내셨을 것이다.


바로 이 관점을 모르면 율법주의나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다. 사람이 부족하다고 여겨 끊임없이 율법으로 경건해지려 하는 것도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부인함이고, 오신 예수님의 육신을 부인하는 것 역시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전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한 방향성이 있다. 이 사랑이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언제나 그것을 알고 있는 사람이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다. 이것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사람이 그것을 표현하는 삶이 사랑하는 삶


그러므로 이 사랑을 사람에게 전하는 것 역시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깨달은 사람이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전하는 것이 사랑이다. 바로 이것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우리와 동일한 사람으로 이 땅에 오신 비밀의 하나인 것이다.


사람이 그 심령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분명히 알고 있을 때 그 사람은 내용인 하나님의 의가 안에 있고, 또한 육신 가진 삶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그것이 표현되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이며, 그 육신 가진 삶이라는 형식으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는 모든 것이 다 사람에 대한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과 사도들처럼 말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이 자신의 삶 안에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며, 하나님의 천지가 시작된 태초가 열린 사람이며,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들을 형제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우리를 형제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아들로 삼으신 법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있는 사람이다. 그것이 사랑을 입은 사람이다. 그리고 안에 있는 그 사랑이 삶이라는, 육신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될 때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렇기 때문에 내용과 형식 어느 하나가 없이 사랑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은 거짓말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거짓말이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다. 겉과 속이 다른 것과 같은 것이 거짓말이다. 


군인이 아닌데 군복을 입고 있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진 것을 베푸는 것도 거짓말 하는 하나님의 사랑이며, 그 속에 하나님의 의가 있노라 하며 자신의 삶을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며 다른 사람이 그것을 깨닫도록 자신이 가진 것을 베풀지 않는 것 역시 거짓말 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것을 베푸는 것을 사랑이라고 한다. 그것은 사랑의 표현 방식이므로 사랑이라 생각할 수 있다. 하지만 자신의 가진 것을 아무리 베풀어도 그 목적이 사람의 존재 의미와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무늬만 사랑인 것일 뿐 진정한 사랑도 아니며 하나님 앞에서 그것을 사랑이라고 하면 그것은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또한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있노라 하고 가난한 형제와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뜻을 전하기 위한 수고를 하지 않는 것도 하나님 앞에서 거짓말 하는 것이다. 특히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있노라 하고 그것을 전함에 있어 어떤 계층이나 어떤 행동 양식을 가진 사람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먼저 선을 긋고 있는 것도 거짓말 하는 것이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의 사랑은 언제나 방향성이 있다. 먼저 알고 더 아는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은 언제나 예수님께서 의인이지만 죄인 되신 것과 같은 일이 일어난다. 즉 하나님의 의를 모르는 사람은 늘 하나님의 의와 뜻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죄인으로 여기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연한 모순이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나게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와 뜻을 더 깊이 아는 사람일수록 그렇지 않고 세상적 기준이 더 많은 사람 앞에서 늘 죄인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의 기준에 의해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그런 모순과 무지 때문인 것처럼.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를 아노라 하고 또 많이 아노라 하는 사람이 세상적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정죄하여 죄인을 만드는 것은 예수님의 의를 모르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바로 지금의 기독교의 한 단면이라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소위 교회에 다니는 사람, 예수님을 믿고 구원 받았다는 사람이 그렇지 않은 세상을 늘 폄하하고 동냥해 주듯이 대하는 그 태도야 말로 거짓말하는 사람의 전형인 것이다. 하나님을 먼저 알고 또 하나님의 의와 뜻을 더 많이 알수록 그렇지 않은 사람 앞에서 늘 죄인이 되고, 십자가에 달려서 사람의 한계를 보이는 것이 온전한 사랑이지,


신앙이 없다고 차별하고, 또 신앙이 부족하다고 낮게 여기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설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다.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그 사람들이 깨달을 수 있도록 육신 가진 삶을 수고하는 것이다. 그것이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그렇지 않고 사람을 강제로 깨우치게 하려 하는 것은 다 십자가에서 내려와서 스스로 하나님처럼 구는 것일 뿐 사랑도 전도도 훈계도 아무것도 아니고 그냥 거짓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온전한 사랑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 안에 있는 것이며 또한 육신의 삶을 통해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 표현이 사랑이고 그 표현의 내용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 부여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이며 사람의 존재 의미인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삶은 세상적 관점으로 볼 때는 언제나 조롱거리와 십자가에 달려야하는 죄인처럼 여김을 받는다. 하지만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지 않고서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할 방법은 없다. 만약 있다면 예수님께서도 분명히 그 방법을 택하셨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의 신앙은 사람을 가르쳐서 구원을 또 하나님의 뜻을 전하려 한다. 이것은 마치 예수님께서 천둥과 번개로 사람을 두렵게 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과 같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을 믿노라 하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그 안에 아무리 대단하고 놀라운 비밀이 있어도 늘 시끄럽고 분쟁하며 또한 사람이 두려움을 느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다. 그 존재의 목적과 의미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삶을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 산다는 것은 또 다른 사람을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는 생명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생명이 사랑이라는 표현을 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고, 그것을 삶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자신의 것을 베푸는 것이 바로 사랑이며, 그 사랑은 언제나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세계이다. 그것은 늘 가졌기 때문에 죄인 취급 받아 죄인이 되어 가졌다고 비난한 사람이 다시 가진 자가 되게 하는 법이다. 가졌다는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즉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은 늘 그렇지 않은 사람에게 죄인과 같은 취급을 받아 십자가에 끌려간다. 예수님이 그러했기 때문에 이것은 피할 수 없는 법이다. 그렇지 않으면 도무지 사람에게 하나님의 법을 전할 법이 없다. 여기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죄인이 되어 죽는데 생명이 살아나는 부활의 법이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내용과 형식이 일치하는 것이다. 그 어느 하나가 빠진 것은 다 거짓말 하는 것이고 율법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은 변질된 신앙이나 세상적인 사랑에 불과한 것이다. 온전한 하나님의 사랑은 하나님이 먼저 가지고 계신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위한 삶을 말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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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기독 신앙의 대명사와 같은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의 정체성을 알도록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니 뭔가 기독교적 색채가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 삶의 목적이자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이라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절실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기에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온 인류를 위한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본이 되고 인류의 구주가 되심이 또한 그 사랑을 몸소 보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의 모습을 상실한 사람들이 그것을 알도록 십자가를 지고 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사람에게 그 정체성을 보여주신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차비를 대신하듯, 남이 지은 죄를 대신 벌 받은 것으로 겉모습만을 전부로 치환하여 남을 위하여 희생과 수고를 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하나님이 내신 이로 보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이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살아 있고 하나님께 의미가 있는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생각하고 계획하신 그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 회복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아니 그것을 위함이라면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고 죽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사랑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수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이 없으면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남을 위하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이 내신 이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내신 이가 되신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생각을 표현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본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의와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래 사람을 지을 때 기대하신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삶이 어떤 것이지를 온전히 표현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내신 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신 사람의 모습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창조하신 분의 목적이므로 자신의 정체성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이다.


어떤 존재든 존재 목적 안에 있으면 사랑을 받는 것이고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야구 선수가 야구장에서 야구를 할 수 없게 되면 감독이 자신을 좋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낙심하고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 그렇고, 누구나 가장 사랑하는 펜을 가지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야구 선수의 존재 의미는 야구고, 펜의 존재 의미는 글을 쓸 때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구 선수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구선수는 야구장에서 야구를 할 때 가장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고 그 스스로도 그것이 가장 행복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 살 때 가장 행복한 것이며 그러하기에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존재 목적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느끼고 알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위하여 육신을 가진 삶을 수고로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에 예수님의 삶이 사랑의 왕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수고하신 사랑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도들의 삶이 또한 그러하다. 초대 교회 당시 전 세계라 할 수 있는 지역을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또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 곧 하나님께서 사랑에게 메기신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복된 소식을 전한 바울의 삶이 그러하고 거꾸로 십자가를 지기 가지 복음을 전한 베드로와 또한 교회 안에 영지주의와 같은 변질된 사상을 경계하며 평생을 교회의 순도를 지키려 한 요한 사도와 같은 이들의 삶이 굳이 밥 퍼주는 것이 아니었지만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


그 예수님 바로 하나님이 내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안에서 그를 알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메기신 정체성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목적을 알려고 하고 그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보다 뛰어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형식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목적을 위하여 보여주신 기적과 같은 것이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것인데 그것을 자신은 상식을 넘어 인정하고 믿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금식과 고난의 형식을 행동으로 따라 하면 더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형식을 믿고 얼마 되지도 않고 사람마다 다른 육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이 조금 따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믿음의 차별성을 가진 것이라 착각하며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다. 그런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목회자들이다. 공부해서 신앙을 학문으로 동상처럼 고착화시킨 것을 좀 더 안다고 신앙 공동체에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라는 정말로 많은 사도들이 경계한 변질된 신앙의 토양 안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세상의 지위를 바탕으로 장로가 되어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일을 정치적이고 자신이 장로가 된 근본인 세상의 방식대로 결정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을 모르는 것인지 상상도 못하고 있다.


흔히들 예수님을 해방자라고 한다. 또한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해방은 고사하고 자신의 몸 하나도 지켜내지 못하고 죄인으로 돌아가셨고, 그 많던 기적은 다 어디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힘없이 돌아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당시의 권력자와 맞서는 모습이나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믿고 따라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내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하신 하나님의 일의 목적은 모른 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행적을 믿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사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주신 이 삶의 모든 수고와 희생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전하고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거나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의와 말씀과 생명이라는 본질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삶의 모든 소유와 행위와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질을 아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사람의 외모와 삶의 모양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구를 어떤 것을 가졌는지가 그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사람의 삶과 사람마다 다른 능력을 서로 모으고 그것에 상호 의존하며 그것을 서로 베풀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까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에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늘 협력하는 것이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 2:2)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또한 하나님이 내신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 있는 사람은 형제 곧 예수님과 같은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세상에 하나님이 보이기 원하시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며 또한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것을 위하여 서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온전히 아는 사람들의 사랑이 온전하면 헌금이든 봉사든 또한 사람의 외모와 행동으로 인한 갈등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지금의 교회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제도화 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갈등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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