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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은 정말 제대로 흘러가고 있는 것일까?

Category : 잡동사니 Date : 2014. 11. 12. 10:16 Writer : 김홍덕

어제는 한국과학기술정보원(KISTI)에서 개최하는 2014 미래유망기술세미나에 다녀왔다. 특별한 기대는 없었고 오히려 경품에 더 관심을 가지고 참석한 세미나였다.







하지만 생각보다는 들을만한 내용들이 좀 있었다. 특히나 신기술과 신제품 개발에 도움이 될 수 있는 DB를 구축해 놓고 검색할 수 있게 KISTI에서 구축한 TOD/COMPAS는 그 존재 유무를 알았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몇 시간 앉아 있던 값은 했다고 할 수 있다.


내용들은 어렵진 않았지만 들으면서 전문적인 사람들의 능력에 감탄하게 하는 내용들이 많았다. 그리고 앞으로는 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스마트폰들이 2~3년 이내에 3D촬영이 가능한 카메라가 장착될 것이라는 것과 같이 IT와 관련하여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 것인지에 대한 내용들이 많았다.


세미나의 형태도 나름 첨단이었다. 서울에서 강의를 하고 대구, 부산, 광주의 대학에 있는 강의실에서 실시간으로 강의를 들을 수 있었다. 강의실 전면을 차지하고 있는 모니터 반은 강의장과 강사를 나머지 한면에는 PT내용이 실시간으로 전국에 보여지는 기술은 대단해 보였다.


그런데......


평소에도 늘 생각해 왔고 강의 내내 드는 생각이 있었는데 그것은 <"과연 이런 흐름이 맞는 것인가?">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이 살아가는 방법과 시대의 변화가 정말로 사람에게 유익하고 사람 본연의 정체에 적합한 형태로 가고 있는 것인지를 생각해 본다.


강의 중에 로보트에 관한 내용이 있었다. 지금까지 많은 기술들이 로보트들을 사람과 비슷한 모양으로 만들려고 노력해왔고 일본 혼다의 아시모와 같은 경우 한 대에 2억에 가깝지만 실제로 제법 인간의 모습을 닮았다.



ASIMO (2010)
ASIMO (2010) by Ars Electronica 저작자 표시비영리변경 금지



그런데 이제는 기술의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고 한다. 과연 사람들이 사람의 모양과 비슷하게 생긴 물체가 사람과 비슷한 행동을 하는 것에 얼마나 호감을 가질 것인지에 대하여 회의적이라는 것이다. 아니 말 그대로 비호감의 요소가 될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로보트도 각자의 기능에 맞게 전혀 사람답지 않고 오히려 디자인과 가구의 일부와 같은 모양을 가지고 필요한 기능을 하는 모양으로 바뀌고 있다는 것이다. 즉 기계는 기계다워야 한다는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많은 기술들이 발달하면서 사람들은 언뜻 보면 편리해지고 있다. 예전에는 누구나 전화번호 수첩을 가지고 다니거나 많은 전화번호를 외우고 다녔고, 물어 물어 길을 찾았고, 어느 도시나 유명한 약속 장소가 늘 있어 그렇게 미리 만나기를 약속하고 만났다.


하지만 이제는 스마트폰 하나면 전화번호도 외울 필요 없고, 길 찾는다고 차에서 내리거나 사람에게 물을 일이 없고, 약속을 정하기 보다 실시간으로 바로 만나고 대충 가서 전화로 만나면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


정말로 편리한 것 같지만 한마디로 편리하게 사람을 만난다는 가면 아래 사람이 사람에게서 점점 멀어지고 있는 것이다. 과연 이 기술의 발달이 사람에게 정말로 유익하게 흘러가고 있는지 생각해 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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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는 육신을 가진 인생의 정체성이 어떤 것인지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된 모습이고 그 죄인의 자리에서 스스로는 벗어날 수 없게 못 박혀 버린 모습이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정체성이다. 육신을 가진 인생은 언제라도 세상의 법 앞에서 죄인이 되는 존재이다. 무엇보다 자신의 마음속에 바라는 삶의 모습과 희망이 언제나 자신을 죄인으로 만들고 있고 그것에 눌려 있는 모습이 바로 인간의 모습이다.


바로 그런 모습, 육신을 가졌기에 세상 기준 앞에서 언제나 패자와 죄인이 될 수 있고 자신의 생각을 펼치려 하면 육신의 한계가 사슬처럼 자신을 묶고 있는 그 모습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심히 좋은 모습이고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아들이 될 수 있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정체성의 핵심인데, 사람들은 육신이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것에 불요한 것으로 여기거나 방해되는 것으로 여겨 영지주의처럼 육신을 무익하게 보거나 율법주의자들과 같이 육신을 제어하려 하는데 바로 그것이 적그리스도의 모습인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생각과 신앙은 예수님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이고, 예수님의 정체성에 반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들에게 보이고자 하신 뜻에 반하는 것이기에 그렇다는 것이다.


적그리스도는 눈에 띄게 신앙적인 반대나 변질을 말하는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생명의 법인 성경말씀을 행위 규범으로 보고 지키려는 것도 적그리스도요, 육신을 가진 모습을 싫어하고 감추고서 고상한 모습으로 신앙생활을 하려는 것도 적그리스도의 모습이다.


그러한 관점에서 보면 지금의 시대에 오히려 더 적그리스도의 생각이라고 사도들이 경계한 영지주의가 더 만연하다고 볼 수 있다. 다만 그것이 더 잘 감추어져 있을 뿐이다.


율법주의나 영지주의나 뿌리는 같은 것이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 육신의 모습을 거저 한계를 가지고 있고, 고상하지 못하기에 금욕적이고 다스리고 절제하는 법을 만들고 그렇게 해야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하는 율법주의도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고,


육신을 가진 사람이 살아가는 모습을 세상적 기준으로 고상하지 못한 것으로, 또한 뒤돌아서서 뒷담화 주제로 삼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적그리스도는 한마디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고, 또한 사람이 가진 육신이라는 그 모습의 어느 하나라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에 부족하다고 여겨 제어하거나 포기하거나 욕하거나 슬퍼하는 그 모든 생각이 바로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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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가 요한일서를 기록하던 시기에 있어 가장 큰 종교적 문제인 이단에 관한 문제는 요한 사도 뿐 아니라 많은 사도들에게 있어 교회의 핵심적인 문제였다.


지금은 이단이라고 하면 대부분 '내가 예수다.'라는 식의 신앙적 변질을 주로 하고 있지만 그 당시에는 육신으로 오셔서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을 직접 본 사람들이 있던 시절이라 그런류(?)의 이단은 존재하기 어려웠다고 볼 수 있다.


그 당시에 가장 큰 이단적 관점은 아무래도 영지주의였다. 그것은 '내가 예수다.'식의 지금의 이단과는 오히려 반대되는 개념에 가깝다. 실제로 본 예수의 정체성에 대한 이견(異見)이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정체성이 사람들에게 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십자가에서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을 철저히 보여주셨다는 것 그것이다.


지금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초인간적인 능력들이 신앙에 의지가 되고 있지만 실제로 예수님을 본 사람들이 있던 시절에는 그것이 더 어려운 문제였다.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모습인데 다른 능력을 보여주신 것 같이 여겨질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일한 육신을 가졌다고 보기에는 물 위를 걷고, 죽은 자를 살리는 모습은 동질성을 느끼기에는 너무 어려운 모습이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심이 구체화대고 세상적인 관점과 결합하여 그 의심에 대한 변질된 대안들이 생겨났고 그 대표적인 것이 영지주의였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정체성 중에 사람에게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람과 동일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 정체성이 없으면 육신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희망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람은 기적을 행하시는 예수님과 같은 모습이 되기를 바란다. 그것은 육신의 한계를 넘어서는 존재를 늘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다. 영화를 보면 그런 사람들의 생각이 잠재적으로 얼마나 큰지를 볼 수 있다. 만드는 사람이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고 보는 사람들이 돈을 내고 그것에 열광하는 모습이 그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여주신 모습의 핵심은 십자가다. 그 이전의 기적들도 다 그 기적이 목적이 아니었다. 십자가 이전에는 기적 안에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내재되어 있었다면, 십자가는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고 기적인 내재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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