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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요한 일서 2장 27절에서 "너희는 주께 받은바 기름 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니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라고 말씀하고 있다.





가르칠 필요가 없다는 것은 <기름 부음>이 모든 것을 가르치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이 주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고 우리에게 가르치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말뜻이다. 메시야라는 말 역시 같은 말이다. 메시아나 그리스도나 공히 다 '기름 부음을 받은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메시아는 히브리어고 그리스도는 헬라어일 뿐.


기름 부음은 어떤 신분에 대한 임명과 선언과 상징이다. 그것은 왕과 제사장을 말하는 것이다. 또 기름을 부어주는 것은 가르치는 것과는 좀 거리가 있는 의식이다. 기름을 붓는다는 것은 올림픽 메달을 주는 것 같이 자격이 있는 사람에게 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기름 부음을 받았다는 것은 배우는 자리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어떤 자격과 신분이 갖추어졌을 때 이루어지는 것이므로 이는 배움에 관한 것이라기보다 신분에 관한 것이라는 의미다. 다시 말해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예수님은 왕이요 제사장이라는 것이다.


그런 예수님께서 기름 부음을 받으신 그리스도로 우리에게 보이신 그 삶을 보고 우리가 또한 그리스도와 같이 살아야 함을 깨달았다면 그 사람 역시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이 회복된 사람이므로 그 사람은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우는 것이 아니라 신분이 회복되고 선언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죄목이 두 가지인데, 그 하나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한 반역죄와 또 하나는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한 신성 모독죄이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예수님의 신분은 왕이요 제사장(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세상이 그를 그렇게 한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한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예수님을 알지 못했다는 것은 요한 사도가 요한복음에서도 또 요한일서 3장에서도 말씀하고 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1:5)


하나님은 예수님을 이 세상의 왕으로 또한 제사장으로 궁극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보내었는데 이것을 알지 못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름 부음을 받아 왕이신 예수님이 왕이라 하니 죽이고, 아들이라 하니 죽인 것이다.


기름 부음을 받은 신분 곧 정체성은 배워서 가는 자리가 아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것은 우리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이끌어 내시고 깨닫게 하신 것이고, 그 깨달음 안에 있는 사람이 바로 주 안에 있는 것이다.


교육이라는 것은 근본적으로 주입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그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고 한다. 이는 참 맞는 말이다. 이와 같이 주님의 가르침은 사람 밖에 있는 어떤 것을 사람 안으로 넣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고 우리가 누구인지 깨닫게 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배우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것에 관해서는 예수님 외에 가르칠 수 있는 존재가 이 세상에는 없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사람이 알지 못하고 할 수 없는 것을 알게 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 예수님이라는 이름을 대할 때 이미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그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십자가에서 보여주심으로 우리가 그와 같이 기름 부음을 받은 존재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끌어 내신 가르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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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8-29절) 영원한 생명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1. 17. 08:02 Writer : 김홍덕

어떤 관점에서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라 할 수 있는 절대 다수가 예수님을 알고 있고, 그가 누구이며 어떤 일로 유명해졌는지 알고 있다. 심지어는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죽이려 하는 공산집단이나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도 예수님을 알고 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존재했다는 것이나, 이 땅에서 기적을 행하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객관적인 사실로 믿는 것을 말한다. 하지만 예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예수님과 같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께서 가지신 정체성, 특별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셔서 보여주신 우리의 존재 목적과 사는 이유가 십자가에 달려서 죽을 수밖에 없는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신바 되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갈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아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신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곧 사람의 창조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렇게 될 때 비로소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이 된다. 그것이 하나님께 우리에게 향하신 뜻이다.


아들을 아는 것이 아버지를 아는 것이라는 요한 사도의 말씀이 뜻하는 바가 그것이다.(요일 2:23)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고,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우리의 존재와 삶의 목적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사람의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의 사랑이 그 안에 거하는 사람이요 말씀과 계명을 지키는 사람인 것이다.(요일 2:5) 그리고 또한 그것이 영원한 생명인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다른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다. 이 세상에 하나님 외에 영원한 것이나 영원한 생명은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창 1:1)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 영원한 생명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독립된 개체로서 영원히 살 수 있는 역량이나 또 다른 생명을 부여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 안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은 문을 열고 어떤 공간 안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대학에 들어간다는 것은 대학교 캠퍼스에 들어간다는 것이 아니라, 대학(大學) 곧 큰 학문의 세계에 입문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듯, 하나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뜻 안에 들어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와 뜻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이 곧 영생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세계 안에 들어가면 당연히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는 마치 딸기라는 생명의 종이 있고 낱알의 딸기 열매가 나오는 것과 같다.


딸기 한 알 한 알은 독립된 딸기로서 사람에게 먹히면 없어지니 영원한 것 같지 않지만, 딸기라는 이름 안에, 딸기라는 생명 안에 들어가는 것이고, 한 알의 딸기가 먹혀 없어져도 딸기라는 이름은 언제나 있는 것과 같다.


그리고 사람이 먹은 딸기 한 알도, 딸기가 열매를 맺고 과일이 된 목적이 사람이 먹는 것이므로 사람에게 먹힌 딸기는 목적이 이루어진 구원을 얻은 것이며, 그 생애는 먹혀짐으로 끝난 것 같지만 딸기라는 이름이 가진 목적 안에 들어갔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다. 하나님은 한 알의 딸기에게 있어 딸기라는 이름과 같은 분이다. 사람이 가진 육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표현할 때 비로소 의미가 있어지고 한 알의 딸기가  되듯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의미가 있고,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 할 수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시계가 시간을 나타내는 목적 안에 있을 떄 살아 있다 여김을 받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도 하나님의 지으신 목적 안에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고, 의미가 있는 것이다. 그런 사람은 비록 육신의 삶이 100년도 못살고 죽는다 해도, 먹혀진 딸기가 목적도 이루었고, 딸기라는 세계의 일원 안으로 들어감으로 지속적으로 있는 딸기의 종 안에 영원한 것과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존재 목적 안에서 이생을 살고 또한 마감하더라도 그것은 영원한 하나님의 목적과 의 안에 있는 것이기에 영원한 생명을 얻은 것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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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8-29절) 영원한 생명 (1)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1. 16. 13:01 Writer : 김홍덕

사도 요한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약속하신 약속이 있는데 그것은 영생이라고 하셨다. 이 영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로 말씀 하셨지만 그 중에 핵심이 되는 말씀이 있다면 그것은 요한복음 17장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요17:3)


기독교 신앙에 있어 영생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이는 다른 종교에는 없는 것일 뿐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은혜이기도 한 것이다.


대학 초년생일 때 대학부의 성경공부 리더인 형이 말하기를 비둘기 한 마리가 혼자서 태평양 동쪽 해변 전부와 서쪽 해변 전부의 모래를 하나씩 왕복으로 옮기는 시간이 영생의 시작이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것은 그 당시는 그럴듯하게 들었지만 그런 사고방식은 영생을 보는 아주 초보적인 관점이고 일원론적 관점에서 기록된 성경을 세상의 이분법적 가치관의 일부크로노스적인 시간, 즉 달력의 시간 개념으로 보는 것에 불과하다.


영생은 시간적인 개념인 것 같지만 달력을 넘기는 것으로 대변되는 시간의 흐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것을 말하는 것과 같아 보이지만, 성경에서는 분명히 예수님께서 영생이며, 또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그러니까 영생을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 또한 천국에서 예수님과 함께 영혼이 끊임없이 사는 것이라는 생각만 하는 것은 영생의 본질을 모르는 것이다. 더욱이 그런 삶을 위하여 이 땅에서 주님을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해야 한다고 가르치는 것은 더 난감한 일이다.


물론 영원한 생명은 말 그대로 생명이 영원히 계속되는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물리적인 시간으로 봐도 영원이라는 것에 가진 사람의 상식적인 개념에서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영생과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떻게 영생을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또한 영생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영생이 무엇인지를 모르면서 영생을 얻을 수는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다이아몬드가 무엇인지 모르던 원주민들이 다이아몬드 원석으로 공기놀이 하듯 놀고 있었던 것처럼 모르면 얻을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영생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그렇다면 영생이신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님이라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많은 기적을 행했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아는 것인가? 아니면 예수님께서는 상식적으로 사람이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초자연적인 인물이었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는 것인가?


성경에 나오는 "안다"라는 개념은 책에서 봤다는 식의 개념이 아니다. 확실한 이해를 위해서 설명한다면 만일 '나는 저 여자를 안다.'라고 한다면 그것은 그 여자를 경험했다 동침했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안다는 것은 내게 체휼이 된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내가 예수님과 상관이 있고, 동일한 정체성이 내 안에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나타나심과 같이 자신에게 나타났을 때 비로소 예수님을 안다는 의미가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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