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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에 이어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성경은 앞뒤가 잘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도 요한의 말씀하시는 바가 이렇게도 같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보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형제가 사망에 이르는 죄 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기도인지 다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의 말씀 중에 사람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그렇지 않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구하라고 하고 사망에 이르는 죄 범하는 것에 대하여는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보여준 디테일이 여기서는 좀 약하다는 점이다. 아주 상세하게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온 것에 비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항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좀 의아하긴 하다.

(사실 이러한 말씀은 신학적 고찰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이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형제>이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에 빠지고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고 정체성이라는 것을 고백한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형제가 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사회적으로 또한 나라의 법이나 회사의 규칙과 같은 것에 명시된 죄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 안에 있으면 아무리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법 없이 살 사람이라 여겨져도 죄인이다. 그것은 멋있는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해적 사회에서 아무리 법을 잘 지켜도 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은 어떤 범죄들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형제라 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어떤 죄 범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상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범하는 어떤 범죄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형제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죄는 형제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누구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가 그것을 버리고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던 사람이 이를 버리고 이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 앞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렇듯 용서 받지 못하는 죄와 같이 그것에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자리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을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염려만 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대표가 어쩌면 <예정론>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했다면 다 된 것이지 사람이 할 것이 있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다면 이미 종친 것인데 더 이상 세상 선하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예정론이라는 것이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라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을 살게 된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간구도 체휼도 없는 사람이 '나는 예정되었을까?' 고민하는 것이 예정론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모든 사람, 오고 가는 모든 역사 속의 어떤 사람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허투루 지은 사람이 없고, 어떤 생명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사람이기에 모든 사람은 다 예정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이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따라 맘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예정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그 경륜 안에 들어 간 사람은 돌아보면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고백하고 예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망에 이르는 죄, 사함 받지 못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삶,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삶,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삶 안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고민일 뿐이다.


그런 것을 잘 알 수 있는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라 할 수 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이라 스스로 규정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정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예정론을 논하고, 죄 사함을 받지 못했는데 사함 받지 못하는 죄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이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이것을 디테일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 역시 알 수 있다. 생명이 있고,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굳이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도 알고, 형제가 무엇인지 안다면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본능처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형제라 할 수 있는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버렸느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의 정체성에 관해서 말이다.


죄와 사함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면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대 전제가 기본이다. 다시 말해서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굳이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알고도 여기서 떠나는 것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가 세월 보내면서 고양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서 그것을 버리고 스스로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데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이어 나오는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곧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범죄치 않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 보지 않고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인지, 예정된 것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그것을 스스로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에 이르는 죄와 그렇지 않은 죄는 머리로 연구하고 신학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인지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고 그 뜻 안에 순종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지도 않고 자신이 예정되었다는 것도 알고, 또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고,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지도 알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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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한다. 성경에서는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이 많다. 하지만 앞뒤 정황을 잘 살펴보면 <그의 뜻대로>, <내 이름으로>와 같은 조건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말씀들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은 들어주시는 구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로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은 그릇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채워 주소서'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사람이 담아내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많다.


이러한 표현이 함축된 말씀이 바로 <순종>이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아주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 역시 신앙을 깊이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시작한 것이 아니기에 삶의 어느 한 절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는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한다. 밥 달라, 배우자 달라, 돈 달라, 명예를 달라면서 말이다. 그런 것이 없어서 삶이 힘드니 곤고함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것이 잘 갖추어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서 달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면 <쿼바디스>같은 영화를 찍는 사람도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하면 들으신다고 생각한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육신의 문제, 돈이나 배우자, 명예나 합격과 같은 것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그런 것이 왜 하나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닌가 하면 단편적으로 봐도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기도 하지만, 정말로 생각해보면 그런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다 얻을 수 있도록 사람에게 육신을 주실 때 이미 함께 주신 만물과 사회의 규칙으로 주셔서 그 안에 맞게 살면 다 얻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5-28)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름은 생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생물학적으로 봐도 생명의 특성을 규정하는 이름을 말한다. 기린, 코끼리와 같은 이름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구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3-15)


요한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 역시 이 안에 있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삶의 어떤 선택에 있어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궁금해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어쩌면 한 가지로 모을 수 있다. 하나님께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답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재화와 용역에 대한 아쉬움을 떨칠 수 없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정말로 돈이 궁한 사람에게 재벌 갑부의 자리는 갈 수 없는 소위 말하는 넘사벽이다. 그러면 이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신께 기도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럴 때 양심상(?) 재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궁함을 벗을 정도의 해결을 바라면서 자신은 겸손하고 양심적이라는 생각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그건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돈에 관해서는 어떤 사회든 그것을 버는 법이 있다. 그것에 순종하면 된다. 물론 그 법 안에는 잘 벌리는 것과 망하는 것이 공존한다. 그런 양면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더 부자가 된다. 망하는 것을 겁을 낸다는 것은, 망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며, 자신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선악 간에 판단하는 기준이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사회에 속해서 살면서 사회가 가진 양면성 중에 자신에게 유익한 단면만이 선이고, 자신에게 일어나야 하며, 반대인 면은 나쁜 것이기에 자신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선악과를 먹은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 선악과의 관점을 벗은 눈으로 세상을 살면, 그야말로 부유함에도 궁핍함에도 거할 수 있는 세계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순종을 아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그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망할 만하면 망하고 죽을 만하면 죽는 것이 인생이다. 자신이 사회의 일원으로, 아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살도록 하신 뜻을 알고 그 삶에 순종하는 사람은 사회의 법으로 열심히 살고 그러함에도 부유해지지 못했을 때 순종하고 사는 믿음이 있는 삶을 산다. (이것은 필자 역시 보고 체휼한 바이기에 확신하는 바이다.)


물론 그런 순종이 있다고 삶이 곤고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곤고함이 자신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또한 그런 것이 어우러져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세상에 속한 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해 가는 삶에 더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모습, 열심히 살아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 '법 바꾸자', '정치 잘해라' 외치거나 구국 기도회를 하는 공격적인 방법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 모습이 오히려 세상을 바꾼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세상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어쩌면 한국교회가 이것만 알아도 나라를 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이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 주셨고, 그 법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꼭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가난하면 하나님께 민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면 복음 전하기 편리한 것이지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이지 돈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만 본다면, 서울역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수만 명이 모이는 화려한 교회의 건축물이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겪는 삶의 형편에 순종하면서 그 삶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표현해 가는 그 모습이 보는 사람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는 그 법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안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명확하게 밝아지는 빛이 비취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람이 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면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방에 불을 밝힌 것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과 세상의 법과 모든 것이 방 안의 비품들을 그 용도대로 사용하듯 사용법을 밝히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하는 것을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구하고 그것을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다스리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 지으신 목적이 모두 하나님의 표현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인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왕이다. 세상의 권력과 정치로 다스려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왕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하는 왕의 법 안에 있는 삶을 사는 왕이다.


바로 그런 존재가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 기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으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그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까지 들어 주시려 작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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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장 13-21절) 그의 뜻대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9. 06:18 Writer : 김홍덕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는 아주 유명한 성경 구절이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다면 아마 어지간하면 외우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성경구절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한다. 심지어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하는 모든 순간들 앞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한다. 언제나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은 삶의 이정표와 같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은 매뉴얼처럼 어딘가에 분명하게 딱 명시되어 있으면 선택의 순간에 찾아보면 될 텐데 그런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매뉴얼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시고 있다. 이는 성경에 한정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축약하고 있는 것이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책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언제라도 어떤 순간에도 궁금해 하거나 헤아리기 어렵지 않게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늘 궁금할 뿐이다.



심청전 하면 <효>가 생각이 나듯, 책을 쓰거나, 어떤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추진한다는 것은 가장 골격이 되는 뜻이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만드실 때는 심청전의 효와 같이 핵심이 되는 뜻과 의도와 목적이 분명히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즉,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같은 것이다. 심청전의 저자가 효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하고 이런 저런 사건들을 구성하여 심청전을 저술했듯,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고 나타내고자 하신 뜻이 있어서 사람들 만드시고, 또한 사람의 삶에 관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지어진 목적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순간 순간의 선택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은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고 어떤 차를 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왜 사는지를 아는 것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다른 것은 자연스럽게 다 따라오는 것이고, 어떤 순간, 어떤 선택이라 해도 살아가는 목적과 이유가 분명하면 언제나 그것에 맞는 결정을 하게 되고 할 수 있고 그렇게 살 수 있게 세상을 이미 창조해 두셨다는 것 까지 알게 된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그의 뜻대로>라는 것 역시 바로 그런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줄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을 설명해 오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생명, 범죄, 세상을 이기는 것, 사랑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관계들을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그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시신 기본 목적이다. 그 뜻 안에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라면과 떡볶이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궁금해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5장 14절 앞에는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한다"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영생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이며, 그의 뜻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라는 것이기에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는 말씀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 안에서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절대로 없는 약속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 목적을 구하는 것은 구해야 얻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로 어긋남이 없는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사람과 결혼할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와 같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이다. 모든 이차방정식은 이차방정식 공식을 알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 자신의 존재 목적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선택해야하는 어떤 순간에도 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종이 위에 쇳가루를 놓고 자석을 대면 쇳가루들이 자기장의 방향으로 정돈되는 것처럼,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살아가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면 삶의 모든 문제들이 쇳가루와 같이 가지런하고 분명하게 정돈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으셨기에 그 뜻을 아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 뜻대로 경영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에 세상의 모든 문제와 선택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눈이 밝아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빛이 있는 것이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고 그의 뜻대로 구하여 이루어지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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