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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대를 살아가는 신앙들에게 있어 세상에 대한 개념은 좀 부정적이다. '죄악이 관영한 세상'이라는 말에서 그 느낌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날이 갈수록 삭막해지고 사나워지는 세상의 풍조가 이러한 생각들에 불에다 기름을 붓듯이 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런 관점에서 신앙인들은 세상에 대하여 종살이라 말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자신이 살고 있는 이 세상을 떠나는 것이 신앙의 완성이나 거룩한 결단인 것처럼 생각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세상을 인정하지 않는 생각은 사람의 육신을 인정하지 않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왜냐하면 사람이 육신의 한계를 느끼는 것은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고 그나마 산 속 깊이 들어가서 살면 불편할지는 몰라도 육신으로 인한 갈등에서 허우적대지는 않을 수 있다.


육신을 부인하거나, 육신의 삶은 어떠하든지 영혼만 맑으면 된다는 식의 영지주의, 그것은 육신으로 살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도저히 예수님과 같을 수 없다고 여겼기에 육신의 가치를 버려버린 생각이다.


그것과 이 세상을 살면서 신앙을 가지고 있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이 세상의 삶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기고 단순하게 종살이라고 규정하고, 멀리해야만 할 것으로 여기고 가르치고 믿는다면 그것이 바로 이 시대의 영지주의라는 것이다.


많은 종교들이 진정한 도를 깨우치기 위해서는 속세나 세상을 떠나서 산 속이나 사회로부터 단절된 공간에 가야 더 나은 신앙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형태는 이단의 전형적인 모양이다. 초대교회 당시 영지주의가 이단이었듯 지금도 세상에서 떠나면 떠날수록 좋은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 역시 이단인 것이다.


어떤 관점에서는 이렇게 정의를 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사람이 만든 종교는 사람 없는 산으로 가고, 하나님이 만든 종교는 사람 사는 세상 안으로 간다.>라고 말이다.


사람이 만든 종교는 사람 없는 산으로 가고, 

하나님이 만든 종교는 사람 사는 세상 안으로 간다.


온전한 신앙을 세상을 등지고 사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이 세상에 살게 하시고 또 사회를 이루게 하시고 또한 신앙이 다른 사람들끼리 가족이 되게도 하시는 이 경륜에 순종하는 것에 있는 것이지, 그런 것을 떠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세상에 무조건 순종하고 살라는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이는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 이 세상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형식이라는 것을 알고 살라는 의미이다. 형식을 부인하는 것이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세상은 모든 것이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도 생각이라는 내용이 있고 육신이라는 형식이 있다. 그런 사람들이 물건을 만들다 보니 사람이 만든 것은 모든 것이 그렇다. 만년필은 글을 쓴다는 내용이 있고, 펜과 잉크는 그 형식이다. 심지어는 문자조차 형식이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도무지 어떻게 그렇듯 모든 것을 내용과 형식으로 구성하며 살고 있을까? 그것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의 관계가 그러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이 자신이 생각할 때 자신의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자리해야 하는 존재가 바로 사람이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이 내용인데 그 목적을 하나님이 가지고 계시다는 것이다. 아니 어떻게 보면 그것은 하나님 자신일지 모른다. 그래서 우리의 몸이 거룩한 성전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했고, 창세기에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었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과 형식이라는 구조를 부인하거나 그 어느 하나를 버리면 그것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 되는 것이다. 내용을 버린 것이 율법주의고 형식을 버린 것이 영지주의라는 것이다.


내용을 버린 것이 율법주의고 형식을 버린 것이 영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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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지주의라는 것은 초대교회 시절에 생긴 사상이긴 하지만 현재의 시대라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이 영지주의가 사도요한이 경계하는 마귀의 생각이고 적그리스도라는 것은 분명하다.


적그리스도나 마귀라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 절대로 가까이 해서는 안 되는 요소들이나, 알고 보면 우리 마음 안에 그런 요소들이 다 있다. 그래서 그것을 발견하는 것이 신앙의 중요한 부분인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끊임없이 사람들과 다투시는 것이 있다면 사람에 대한 관점이라고 해도 무방하다. 하나님께서는 당신께서 만드신 사람의 육신이 온전하다고 말씀하시는 반면에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고 주장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이러한 구조에서 사람들이 취하고 있는 두 가지 큰 태도가 있는데 하나는 육신이 하나님 앞에서 부족하니 금욕하고 절제하고 훈련하여 하나님께 합당한 존재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고, 또 하나는 육신은 어차피 중요한 것이 아니고 영혼이 중요한 것이라는 생각이다.


그러한 두 구조에 있어 전자를 율법주의라고 할 수 있고, 후자를 우리는 영지주의라고 할 수 있다. 율법주이는 사람의 연약하고 추한 모습을 법으로 규정하여 다스리고 감추는 것이라면, 영지주의는 반대로 육신은 어쩔 수 없고 거룩하게 되는 것과는 무관하니 별도로 생각하는 것이다.


이 두 구조는 예수님을 보는 관점에서도 차이가 있는데, 율법주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고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고, 영지주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예수님처럼 될 수는 없으니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러한 양쪽의 생각은 둘 다 하나님 앞에서 온전한 생각이 아니다. 율법주의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사람에게 떠나온 자리라면, 영지주의는 가서는 안 될 자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분명히 기뻐하셨고, 그것을 다시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육신으로 보내셨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각과 뜻과 의를 믿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온전한 모습은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사람에 대한 생각은 기본적으로 온전하고 보시기에 심히 좋은 존재이다. 이에 대하여 사람이 자신과 또한 사람을 보면서 사람에 대한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하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은 신이 되고자 하는 것만이 아니라 사람에 대하여 자신이 정의를 내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어떠해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지를 자신의 생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것을 평범한 말로 하면 '적어도 사람이 이래야지!'하는 것이 된다.


사람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스스로가 어떤 것이 선한 것이며, 어떤 것이 악한 것이라고 규정하는 권세를 가지려 하는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은 '적어도 사람은 이래야지!'라는 기준들이 생긴 것이다.


그 기준이 율법을 낳은 것이다. 그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인 것이다. 


(율법의 목적은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키려 하면 사람의 한계와 정체가 드러나도록 되어 있는 것인데 이를 오해한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많이 이야기 하였다.)


그리고 또 하나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기준을 선악과를 먹은 결과 가지게 되니 나타난 것이 무엇인가 하면 육신의 것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생각이다. 이것이 영지주의다. 이 시대에 영지주의의 변형이 있다면 그것은 세상을 무시하는 신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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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 그리고 심지어 예수님께서도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지 못한다고 말씀하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보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예수님을 알고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떤 관점의 차이가 있는 것일까?


단순한 비유로 본다면 국민들이 대통령이나 연예인들을 알고 있지만 그들은 대부분의 국민들을 모르는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더 정확하게는 사람들이 아는 것은 예수님의 생애와 그 기록에 관한 것이고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생애를 역사공부를 하듯 알고 있고, 기독교인들과 비기독교인들의 차이는 예수님의 생애를 실제의 사건과 기적으로 믿는지 아닌지에 차이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의 생애가 어떠하든 그것이 나와 상관이 있는 말씀이 아니면 적어도 나에게는 의미가 없다.


앞에서 포스트한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는 '기름 부음을 받은 자'로 이 땅에 오셔서 기름 부음을 받은 자의 직분인 왕이요 제사장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밝혔는데, 그 당시 하나님을 잘 믿는 사람들에 의하여 예수님의 모습은 왕으로도 하나님의 아들로도 인정받지 못해 죽임을 당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신 이 이유가 바로 세상이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이유이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기름 부음을 받은 그리스도로 세운 것에 비해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인정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이 블로그에서 누누이 언급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오신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래야 우리 육신이 예수님과 같이 행할 수 있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따라 갈 수 있으며,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고, 예수님께서 기적을 일으키시는 것을 믿어야만 한다면 우리는 그런 기적을 쉽게 일으킬 수 없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도 어렵거나 될 수 없고 따라가는 것이나 행하는 것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예수님의 기적이나 신비한 능력은 결국 십자가에서 사람의 모습을 보여주시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그 자체가 우리 사람이 따라해야할 목적이나 사람의 정체성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자격을 말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것을 알지 못하면 예수님의 행적을 기록한 성경을 아무리 알고 신학적으로 또한 모든 것을 알고 또 죽은 사람을 살리는 능력이 있다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듯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안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예수님을 우리와 같은 성정으로 보내신 목적을 아는 것, 그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시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 목적을 아는 것이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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