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9

사람이 육신으로 살아가는 것과 세상 안에 사는 것은 같은 맥락이다. 사람의 육신이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고 그릇이라면, 이 세상 또한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것 역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바울사도는 모든 만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이라고 했다. 즉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피조물의 고대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의 나타나는 것이니(롬 8:19)


그러므로 사람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표현된 만물들이 본질이라 생각하거나, 또 반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다 신앙에 무익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다 하나님을 온전히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선악과 사건을 가지고 봐도 그렇다.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에덴동산 곧 '만족의 동산'에서 쫓겨나는데 이것은 어떤 동산에서 광야로 쫓겨났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 대하여 스스로 나름의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정의를 내리는 위치, 곧 하나님이 만든 세상을 정의 내리는 자리로 가려하면 만족이 그 안에 없다는 것이다.


그렇듯 하나님이 만든 세상은 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뜻이 있음에도 사람이 자기 기준으로 그것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라는 것이 선악과의 말씀이기도 하다.


특히나 많은 종교인들에게 있어 이 세상을 신앙의 대적으로 삼거나, 대충 해도 되는 종살이로 여기거나 또 가족과 같은 사회 구성으로 인한 관계들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배척하는 것과 같은 것은 다 율법주의나 영지주의와 같이 세상과 육신의 삶을 자의적으로 해석한 결과의 모습이다.


요한 사도는 형제를 사랑함에 있어 말과 혀로만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이는 사랑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정체성과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면,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진 목적을 알게 하는 것에 얼마나 많은 헌신이 필요한지를 알게 한다.


요한 사도는 구체적으로 재물이 있고 재물이 필요한 형제가 있는데 돕지 않는다면 사랑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누가 이 세상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함을 보고도 도와줄 마음을 막으면 하나님의 사랑이 어찌 그 속에 거할까보냐(요일 3:17)


그렇다고 이 말씀이 노숙자에 밥 퍼주는 것이 신앙이라고 말씀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보면 성경을 문자적으로 보는 것이고 내용 없이 형식만 취하는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여기서 대상은 형제이다. 형제는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한 하나님의 생명으로 받고 믿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고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모든 형식을 투자하는 것이다. 이것은 자나 깨나 교회에 있고 성경만 보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속한 일원으로서 충실하게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바다 속에 사는 물고기는 짜지 않다는 말이 있다. 짠 바닷물 속에 산다고 그 고기가 짠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에 산다고 세상과 하나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이 본질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의가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삶, 하나님의 뜻과 의를 삶으로 표현하는 삶을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고,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며, 그런 사람들이 서로 형제인 것이다. 이 형제를 위하여 세상의 것을 사용한다는 것은 세상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의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는 또한 생명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다. 사람은 언제나 사람이라는 그 정체성을 표현한다. 젊음도 노쇠함도 자신의 의나 뜻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정체성과 운명의 표현이다. 사람이라는 유전인자의 표현인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 사람(2)



개는 들에서도 짖고 집에서 짖는다. 절대로 '야옹'하지 않는다. 개가 그렇게 하는 것은 개의 유전자를 자나 깨나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유전자가 그렇듯 사람의 삶도 하나님이 주신 존재의 목적이 늘 그렇게 표현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 표현은 당연히 자신의 육신과 세상에 속한 삶으로 표현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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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내심이 되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계신 그대로 볼 것을 인함이니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2~3)


요한 사도는 3장에 들어가면서 어떤 것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러한 말씀은 뒤 이어 나오고 있는 3장의 내용들에서 그 내용을 알 수 있다.


신앙이라는 것이 처음에는 당연히 그 심령의 깨달음에서 시작한다. 어떤 행동양식을 수반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육신으로도 생명이 나면 처음에는 존재 이외에 행위적인 것에 기대를 하지 않는 것과 같다.


갓 태어난 아이가 하는 일이라고는 그 부모를 귀찮게 하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 아이는 부모에게 있어 목숨과도 바꿀 수 없는 귀한 자녀인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 안에서도 이와 같은 생명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말씀하기 위하여 요한 사도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것이라고 한 것이다.


아이가 자라서 존재 이상으로 어떤 행위로 그 부모에게 의미가 있어시듯, 신앙이라는 것도 그러하다. 이것은 분명한데, 왜 하나님께서는 행위와 공로와 소유의 신앙에 대하여는 인정하지 않으시는 존재의 하나님이신가 하는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 블로그에서도 끊임없이 신앙이라는 것이 행위나 소유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해 왔다. 하나님 앞에서 어떤 공로나 수고가 신앙이 아니라고…… 그런데 이제 와서 다시 신앙에는 행위가 있어야 한다고 말을 바꾸는 것인가 싶겠지만 그 이야기가 아니다.


군복을 입어서 군인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라고 했다. 이는 군인이라는 정체성이 먼저 수반되어야 한다는 의미가 가장 크다. 그리고 군인이면 군복을 입는 것이 당연하듯이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으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이지가 명확한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성경의 말씀을 문자대로 또한 그 규정한 행동을 하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 사람의 행동 양식에 관하여 기록된 모든 것은 그 행위를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은 그런 행동을 하게 된다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율법주의라는 것은 그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 없이 율법에 규정된 규례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이고, 반대로 영지주의는 하나님의 생명만 있으면 되었지 그런 것을 지키면서 살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은 오랫동안 문제가 되어 왔지만 해결되지 않는 것은 하나님과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에 대하여 알지 못한 상태에서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께 이르려고 한 생각 때문이다.


유대인들에게는 내용을 무시하고 형식에 속하는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는 것이 신앙이었기에 예수님께 책망을 받았고, 또 성경의 긴 역사 동안 늘 하나님께 책망을 받고 벌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지금의 기독교인들은 그런 행위를 하나님의 생명에 대하여 명확히 알지도 못하면서 무시하면서 살기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영화 <밀양>과 같은 것이 그런 기독교의 모습들이 사회적인 관점에서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가 지은 죄를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하나만으로 다 해결되었다고 고백하는 죄수의 모습은 형식을 무시하는 영지주의적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준다.(영화 <밀양> 중에서)> 


그런 문제가 초대교회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영지주의에 뿌리를 두고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요한 사도도 말과 혀로만 말고 행함으로 사랑하자 했고, 야고보 사도는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한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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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셔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자신들이 신봉하는 율법을 지키는 형식이라는 틀 안에서만 보았다. 그래서 그들은 도무지 예수님이라는 형식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이다.


예전에 성경을 읽으면서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는 왜 그렇게도 하나님을 반복적으로 배반하고 수천 년 동안 그렇게 하나님을 진노케 했을까?' 의문스러웠다. 그러다 자세히 생각해보고 성경을 보니 이것은 하나님의 사람에게 가지신 의를 늘 버렸던 것이었다.


반면에 영지주의자들은 형식을 버렸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육신은 하나님을 믿는 것과는 무관하듯 생각했다. 그것은 형식을 버리고 내용만 취하겠다는 의도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육신만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도 버리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는 것 그리고 하나 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처럼 되는 것이 아니라고 앞에서 말했다.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은 내용과 형식의 완전한 결합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따라서 사람들은 먼저 신앙이 개인의 관점에서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되는 것이 온전한 신앙의 출발이다. 그것은 그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창세기의 말씀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나면 사람은 이 육신과 세상에 대한 가치에 대한 새로운 세계가 열리게 된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세상에 흉악한 범죄가 일어나고, 또 세계적으로 경악할 만한 일이 일어나면 '도무지 하나님은 뭐하고 계시는가?'라든가, 아니면 '하나님이 계시다면 세상이 이럴 수 없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에 큰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다.


기독교인들 중에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도 세상을 바꾸자고 많은 이야기를 한다. 북한 인권 문제라든가, 중동의 문제와 같은 것, 그리고 사회의 불균형과 같은 문제들을 기도하고 기독교인들이 문제 해결에 나서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한다. 


하지만 정말로 분명하게 말하지만 그런 외침은 절대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왜냐하면 어두움은 물러가라고 외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라 작은 불빛이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자신이 그 작은 하나의 불빛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정답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새벽이 오기까지 어두움 안에 순종해야 하는 것이다.


어두움은 모르는 것이다. 컴맹이라는 말도 그렇게 생긴 것이다. 세상의 어두움은 제자리를 모르는 어두움 때문이다. 세상이라는 형식은 내용을 담는 그릇이라는 것을 모른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장 기초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로서의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빛인 것이다.


얼마 전에 종영한 '정도전'이라는 드라마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장면은 정도전이 정몽주에게 죽임을 당할 지경에 이르렀을 때 보여준 정도전의 태도였다.


정도전이 꿈꾸던 세상이 절친인 정몽주에게 저지당하고 죽음을 앞에 두고 있을 때 정도전은 자기가 꿈꾸는 세상은 자신이 아니면 다음 세대, 그 때도 안 되면 그 다음 세대에서 꼭 이루어질 것이라며 죽음을 받아들이는 모습이었다.


반면에 훗날의 태종인 이성계의 아들 이방원은 그 시대에 자기 손으로 새 세상을 만들겠노라며 정몽주를 죽이고 왕이 되기 위하여 정도전마저 죽인다. 여기서 주가 더 새로운 세상에 대한 믿음이 있었는가를 따진다면 그것은 정도전이다.


이방원은 자신의 손이 아니면 새로운 세상이 되지 않으리라 생각했기에 새 세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각오도 믿음도 없었다. 다만 의지만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정도전은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어떻게든 이루어질 진리라고 믿었기에 자신이 아니라도 될 것이라 믿었기에 죽음을 받아들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정도전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정도전이 자신이 꿈꾸던 세상은 자신이 아니라도 꼭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었듯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섭리를 그렇게 믿는 믿음이 온전한 것이다.


이러한 믿음에는 정도전이 죽음을 맞이하듯 희생이 따를 수 있다. 또한 이 믿음은 믿는다는 그 하나 만으로 말만 하고 있거나 글이나 쓰고 있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정도전 역시 자신이 살 동안 최선을 다하여 그 세상을 위하여 힘썼던 것과 같이 


하나님을 믿는 사람도 이 세상에 대하여는 자신이 아니라도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온전히 경영하심을 믿어야 하고, 또한 그러한 믿음만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살 동안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기 위하여 힘써야 하는 것이다. 결과는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에……


그것이 바로 진정한 믿음인 것이다. 이 믿음에 대하여 야고보서와 골로새서와 같은 성경에서 사도들이 분명하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 사도 역시 그 믿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 바로 요한 일서 2장에서 3장으로 전환되는 시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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