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0

성령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이긴 이김을 증거하는 이가 셋이라 했다. 그것은 물과 피와 성령이라고 했다. 물과 피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의 육신이라는 형식과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시는 사람 지으신 목적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피요 생명이고 형식 안에 채워지는 것이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그리고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이 물과 피로 임하심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하게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이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성령은 영이신데, 그 가장 기본적인 성품이요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 나타날 때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신도 동일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과 생명이 전해지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도 예수님께서 가시고 나면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고 하신 것이다. 이 도우시는 보혜사는 사람이 살면서 겪는 인생의 문제를 도우시는 카운슬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은 물과 피로 나타나는 아들을 보고 또 자신도 그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살게 하시는 영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가지신 의와 같은 것이기에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신 것이다. 사람들은 성령이라 하면 신비한 일을 일으키는 영을 생각하지만 성령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보고 자신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필요하면 기적도 일으키시는 것이지 기적이 성령의 기본 능력이나 기본 업무는 아니다.


성령이 증거하신다는 것은 물과 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증거를 믿는 사람이 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주관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래서 물과 피와 성령이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증거가 온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이긴 이김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증거 중에 어느 하나도 없으면서 세상을 이긴다고 하거나 이겼다고 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짓말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이 증거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 당연하고 온전한 것이다.


아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아닌가? 이것은 생명의 법이다. 하나님의 의와 목적은 DNA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DNA를 가지고 있으면 죽일 수는 있어도 사자로 살게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DNA 없이 사람이 하는 짓을 하면 그것은 흉내고 그것이 바로 거짓말인 것이다.


또 사람이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같이 자신의 삶이 된 사람은 절대로 난데없이 그렇게 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즉 성령의 증거 없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이 인생이라는 형식에 채워져야 하는 온전한 의와 내용이라는 것을 성령의 역사 없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피와 같은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 가진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처음으로 표준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고 또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가시고 나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피와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온전할 뿐 아니라 절대적인 증거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과 피로 나타난 아들을 보아야 하고 그것을 볼 때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이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물과 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이시고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이 기억나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 했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곧 물과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직접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싶겠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을 또 만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전해지는 모든 성령의 역사,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의 원리이자 첫 열매이고 장자 되시는 the Christ이시고 그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 또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사람들이 사도와 같은 사람들을 볼 때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생명의 전파가 일어나는 세계인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을 사도라 또 그리스도인(a christ)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그런 생명의 전파가 또한 예수님의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요한 사도도 이것을 전함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요한 일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사귐, 즉 같은 생명과 주제를 나누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가진 인생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난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의 마음 안에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감동을 주신 것과 같이 지금을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전해져 온 하나님의 아들의 법이 삶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볼 때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증거, 세상을 이긴 이김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 가진 십자가의 삶을 통해서 표현되고 그 표현되는 삶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그러므로 이 물과 피와 성령은 또한 하나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세상을 이긴 이김, 그것은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존재를 보이신 이유와 연결되고 그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하나님과 나와 어떤 관계가 성립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관계는 상호작용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이라는 것이 맘대로 해석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존을 객관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존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의미를 두시는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상호 동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상호 의미가 있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관계는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이 표현하는 관계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생명과 의와 뜻이 표현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에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와 뜻과 목적과 생명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들의 정체성이고, 그런 삶이 아니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김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을 천지가 창조되기 전과 혼돈스러운 중에 그 혼돈을 이겨내고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이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생명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이 된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삶의 첫 열매이자 그 삶이 어떤 것인지, 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분신이자 표현이다. 성경에 하나님 아버지만 있고 어머니가 왜 없느냐 하는 사람들은 아들의 정의를 모르는 것이다. 아들이란 생식에 의하여 낳은 동일한 생명체를 말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어머니 어쩌고 하는 사고 방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들 삼으시는 법과 원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시고 사람이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서 어머니를 찾아서 아들을 낳는 그런 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의와 뜻이 표현될 때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해주는 사람을 '아들 같다'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남자냐 여자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다.



물과 피는 하나님의 의와 육신 가진 인생이 하나되어 아들이 됨을 증거


아들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물과 피가 이를 증명한다고 표현을 했다. 물은 성경에서 율법과 말씀의 상징이다. 율법을 받은 모세의 이름이 '물에서 건져낸 사람'이고 모세는 홍해를 건넌 사람이다. 히브리인이라는 의미가 '큰물을 건넌 자'라는 의미에서도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과 물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


이 율법은 형식이다. 말씀도 형식이다. 즉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문자도 형식이고 TV에 나오는 모든 드라마도 다 작가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형식이다. 심청전의 모든 내용은 <효>를 표현하고자 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로 대표되는 모든 말씀은 다 형식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어 형식은 사람의 육신이다. 이 육신은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 육신은 언제나 형식이다. 한 마디로 이는 어떤 내용이 있어야 하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 내용 없이 형식만 지키고 말씀만 실천하려 하면 그것은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인 육신의 삶 안에 채워져야 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구매하는 목적은 외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타고 이동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이종하지 못하는 자동차는 죽은 것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 아무리 육신적으로 살아 있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과 같다. 다만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어야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표현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은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정말로 기도할 때 자주하는 문구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을 피라고 한다. 피는 생명이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시기 전에 유월절 만찬에서 포도주를 보고 "이것은 내 피"라고 하신 것도 포두가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6)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과 형식이 하나가 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했고, 요한일서에서는 보고 듣고 만진 바 된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7)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삶,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살을 보이심은 예수님과 같은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삶을 살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목적이고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삶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 육신을 가진 인생이 십자가에서 육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삶, 세상의 법과 경쟁에서 언제나 십자가로 가는 죄인이 되는 그 정체성을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세상의 법과 같이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여 이기는 이김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바로 이것을 믿고, 이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일서 5장 1-12절) 세상을 이기는 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2. 27. 08:20 Writer : 김홍덕

또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심각한 오해가 있는데 그것은 이기는 방법이다. 예수님과는 너무나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져서 이겼는데 사람들은 이겨서 이기려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만함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선민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차이를 지위나 역할의 차이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을 베풀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가지고 있고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베풀어야 한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까지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자리가 낮은 자리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범하는 기독교인의 두 가지 오류



이 시대에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외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람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거나 죄를 짓고는 그 앞에는 반성하거나 죄 값을 치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그만이라는 편리한 속죄의 방식과 또 하나는 복음을 가졌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이른바 갑질을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런 두 가지 형태는 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과 세상과 사회 속에서 살게 하신 목적을 안다면 사회 속에서 지은 죄는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는 사람들에게 짓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된다고 주장하니

사람들이 이런 대안 없는 비판을 영화로까지 만드는 것이다.(영화 <쿼바디스> 홍보 영상)


예수님은 당시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실재로 죄를 지은 것이 없지만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십자가를 지게 한 것도 순종하셨는데 지금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세상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 더더욱 자신이 지은 죄가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 분명함에도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되는 것이라 편리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세상을 이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마음으로는 솔직히 그런 형태를 미친 짓이라고 하고 싶다.)



밤 늦은 시각 서울역에서 부흥회하듯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갑질>이다


또 하나는 복음에 대하여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듯이 베푸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것을 지금 시대적인 표현으로 <갑질>이라고 할 것이다.즉 복음에 관한 갑질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복음에 대하여 대단한 열정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것은 복음에 대하여 주인 노릇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아주 교묘하고 또 많은 경우 좋은 신앙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 청년들이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하여 가정에서 반대가 심하면 나와서 사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 상황을 짧은 말로 상황이 전부 정리되게 설명하기 힘들고 또 그 나름의 사유가 있고, 또 그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실제로 많지만, 교회의 모임에 다녀오느라 늦게 오는 문제에 대하여 부부간에 또 부자간에 갈등이 일어나면 이혼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부모를 떠나 다른 교인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신앙적 결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바로 갑질의 형태라는 것이다.


복음은 그렇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로 복음의 능력을 믿는다면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될 것은 된다고 믿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자기가 꿈꾸는 세상은 자신이 아니면 다음 세대, 그 세대도 아니면 또 다음 세대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즉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반드시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도 그러했다. 예수님도 분명히 말고의 귀를 자르는 베드로에게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불러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사들을 물리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정도전도 그 당시 얼마든지 정몽주를 죽일 수 있었지만 꿈꾸는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도 역시 그렇게 천군천사가 예수님을 구해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더 온전한 복음을 가진 사람이 사람관계에서 지위적인 상관이 되는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온전한 복음과 더 밝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면 알수록 그 밝은 계시를 가지고 사람 위에서 가르치듯 또 심판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가졌기에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법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법이다.


대학생 때 친구들과 신앙 토론을 자주 하곤 했다. 그 중에 신학생이 몇 있었는데 다툼이 좀 심화되고 정리가 안 되면 그 중에 한 친구가 하는 말이 있었다. "야 임마 신학생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바로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갑질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난 복음이 있고 넌 없으니 내가 옳다는 것, 그것은 올바른 모습이 분명 아니다.


물론 계시가 밝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마음이 듣기로 작정하고 순종이 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그런 문제로 부딪히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 죄인이 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또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더 분명히 아는 분이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죄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되면 물리쳐야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법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법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은 너 같은 모습이 아니라며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것에 순종하시고 그 순종이 하나님의 법으로는 이긴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이김이다.


그런데 부모나 배우자가 교회 생활이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며 배척하고 무시하는 갑질을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해야 복음이 온전해 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 세상의 법을 자신의 법으로 삼은 것이다. 즉 그것은 세상에게 지고 세상의 법에 종이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은 복음이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자신이 복음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 아래서는 세상에 온전히 패한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법은 지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온전한 의인이시면서 죄인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죽이려 하는 것 앞에서 호통 치거나 무찌르거나 하신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십자가로 또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에 순종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아마 이것은 현대의 신앙인들이 가장 잘 알지 못하는 것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정말로 이것은 교묘하고 정말로 이것은 내려놓기 힘든 것이다. 신앙적 관점이 자신과 부족하다 여기는 사람에게 큰 소리 치고 다투고 또 꾸짖고 그것으로 갈등을 겪는 이유가 다 이런 것에 있다.


하나님의 권능을 정말로 믿고 복음의 능력을 믿으면 십자가로 끌려 갈 수 있다. 오늘 지금 내 앞에서 복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증명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운명 같은, 그리고 거절할 수 없이 이루어짐을 본능처럼 아는 믿음



이 믿음은 자기 안에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하여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그런 것은 오직 하나 생명 밖에 없다. 사람은 자신이 사람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유전자로 났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라도 사람으로 살 수 밖에 없음을 안다. 심지어 그것을 인식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듯 하나님 말씀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가 분명하게 열린 사람은 언제나 십자가를 질 수 있고, 자신 보다 신앙이 부족한 사람 앞에서 언제나 죄인 되고 또 그를 위해 수고하고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바로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이기는 법은 죽어서 이기는 법이다. 가르쳐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정복하여 이기는 것도 아니며, 지금 당장 밝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은 죽되 하나님께서 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니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자신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송사 앞에 죄인 되는 사람이다.


'복음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꼴을 당해서야 되겠느냐?'라든가, '이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겠느냐?'라거나,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하겠는가?' 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다 핑계요 변명이요 타협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져서 이기는 법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법은 세상의 프레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의 이김은 언제나 가지고 밝고 의로운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상대를 제압하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죄인 되는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그 마음에 깨달음이 생기고 마음 안에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스스로 자복하게 하는 그 법인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여주신 세상을 이기신 법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