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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을 부인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니다. 예수님이 죽어야 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유대인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반대(anti)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보이셨다.


그것이 처음 전한 것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육신을 가진 예수님이 육신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십자가에 서 보이심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이 처음 전해진 것이라는 것이다.


그 이후에 사람들은 다시 육신으로는 십자가를 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 영지주의고 요한 사도가 또한 당대의 사도들이 경계한 것이다. 그들은 예수님을 따라 하는 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든 행동을 따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런 사람들이 허다하다. 하지만 그것은 TV를 사 놓고 방송을 보지 않는 것과 같고 책을 사서 저자의 생각을 배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보이신 아들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시고 우리가 아들이 되는 법은 절대적인 의존 관계이다. 이것은 콜라가 병이 없으면 아무 것도 아닌 것과 같다.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인 육신을 가진 존재이다. 이것을 모르면 모든 것이 잘못된다.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와 말씀을 가지신 내용이고 본질이시며, 사람은 그것을 표현하는 그릇이고 형식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가 아들이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부인하는 것은 다 적그리스도다.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을 영화롭게 할 수 없으니 율법에 명한 것을 지키고 자신을 개조해야 한다고 하면 그것이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고, 또한 내용만 있으면 되고 형식은 필요 없다고 하는 것 역시 아들을 부인하는 적그리스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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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은 서로가 서로를 가능하게 한다. 아버지가 되려면 아들이 있어야 하고, 아들이 되려면 아버지가 있어야 한다. 아들은 아버지를 존재하게 하고 아버지는 아들이 존재하게 한다. 절대적인 관계이다. 아들 없이 아버지라 불릴 수 없고, 아버지 없이 아들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의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 했다.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1)


그러므로 아들을 부인하면 아버지가 없고, 아버지를 부인하면 아들이 없다는 것이 요한 사도의 말씀이고 이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는 말씀이다. 다만 아들을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아버지를 부인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가 포인트일 뿐이다.


요한 일서에서 또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육신으로 하나님의 뜻을, 창조하실 때 사람에게 목적하신 하나님의 뜻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처음 전해들은 말씀(요일 2:24)이다. 이것은 요한 사도가 서신을 쓸 당시의 사람들이 들은 처음 들은 복음이기도 하고, 인류 전체로 보아도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에게 두신 첫 말씀(하나님의 의도인 LOGOS)인 것이다.


이 처음 말씀을 부인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모습을 고칠 것이 있는 것으로 보는 관점이 하나님의 의를 부인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종교를 사람이 가진 악한 것을 고쳐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악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정체성을 부족한 것으로, 이 상태로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일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하는 그것, 오직 그것 하나뿐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은 아들을 부인하게 된다. 그런 생각은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수 없으니 율법을 지키고 규례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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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18-29절) 하나님의 아들 (2)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1. 14. 08:08 Writer : 김홍덕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들이 흔히 일반인과 다른 능력을 가진 사람을 일컫는 '신의 아들'과는 다른 개념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를 말한다. 원래 사람들은 아들을 보면서 아버지가 있다는 것과 어떤 사람인지를 안다.


그 외에도 사람들이 혈육으로 낳지 않아도 자신이 생각하는 것을 정말 잘 대변하고 표현하는 사람을 아들이라 일컫기도, 또한 아들로 삼기도 한다.


아들은 그런 것이다. 아들의 가장 중요한 정체성은 아버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아버지를 표현한다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보이지 않는 의도가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혈육으로 아들이 표현하는 것은 아버지가 가지고 있는 종족보존의 본능이 표현된 것이고, 아들의 생각이나 직업이나 사는 모양은 아버지의 생각이 표현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심도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육신을 가진 사람들에게 가지신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만드셨는지, 또 왜 사람을 이렇듯 연약한 육신을 가진 상태로 만드셨는지, 사람과 하나님은 어떤 관계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심으로 동일한 육신을 가진 인생들이 그것을 보고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육신을 가지고 사는 이유와 하나님과 어떻게 아들이 되고 어떻게 믿어야 하는지를 보여주셨기에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다.


그것은 매우 중요하다. 특히 중요한 것이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성정과 육신과 한계와 모양과 생각과 본능을 가지고 오셨다는 것 그것은 성경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을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서 설명하시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것을 보는 사람이 또한 그렇게 되기를 바라심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와 뜻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었다면, 또한 그렇게 아들이 된 사람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같이 되는 것이고 예수님과 같이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고,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고, 하나님의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형제인 이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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