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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이기심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심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시작이라면 완성이자 결정체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다. 실재로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 이어지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에서부터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말씀하신 내용은 정말로 예수님 사역의 의미를 온전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 안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요한사도가 기록하고 있다. 이 요한 사도가 요한 일서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이 무엇인지를 말하면서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 이후 하신 말씀을 그 때는 다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17장의 기도문의 경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또 졸고 있었다. 설자 예수님께서 아주 큰소리로 기도하셔서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기에 병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다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런 요한 사도와 사도들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때 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가시고 나면 예수님의 하신 모든 말씀이 생각나고 기억났기도 했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로 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 것인지에 대하여 요한의 마음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듯 깨달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법이 적용된다. 성경을 읽어도 알지 못하다가 십자가의 사건이 가진 정체성과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안에 믿음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빛이 비취는 세로운 세계의 시작이 열리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이긴 이김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아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세계이며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과 십자가와 부활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사건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열리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란 자기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자기의 모습과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이 동화되듯 열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초라한 모습일 수 없고, 나사렛과 같은 천한 출신이 될 수 없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세상의 법아래 세상이 연약하게 또 죄인으로 여기는 육신을 가진 삶을 살면서 그것을 세상과 같이 연약하고 추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아들 삼으시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심을 안에서부터 믿어 삶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이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세상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능력을 ㅂ여주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십자가에서 그냥 돌아가셨고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경쟁 방식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라 믿는다. 즉 세상이 경쟁하는 방식인 시험에서 교회에 다시는 사람이 합격하면 세상을 이긴 것이라 생각하고, 세상이 끊임없이 경쟁하는 부자가 되는 경쟁에서 이겨서 부자가 되면 이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교회, 특별히 큰 교회들의 기본적인 생각인 듯하다. 교회를 일단 크게 지어놓으면 사람이 모인다고 생각하기에 신도시가 건설되면 가장 먼저 교회가 크게 지어지고, 또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의 큰돈으로 화려한 성전을 짓고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고 생각하는 결정체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의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각양의 경쟁이나 다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겨내서 1등하고 부자 되고 화려해지고 고상해지는 것이 이김이라 생각하지만 바로 그 세상의 법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신앙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법으로 이기면 세상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건 아주 어리석은 믿음이다.


예수님의 이기심은 오히려 세상의 법 안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법 때문에 죄인 되고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예수님의 이김이고 승리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며, 이것을 모르면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일뿐인 것이다.


건축자들은 버린 돌,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그 법으로 보면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한 유대인의 왕이라 할 수 없는 초라한 사람의 모습, 그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 사람의 본질적인 정체성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의 보습이다.


그래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듯이 그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이다. 세상의 법 아래서는 죄인 되고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죽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 안에서는 진정으로 살았다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 이 비밀을 모르면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구원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세상의 법과 프레임 안에 있는 경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보여주신 기적이 객관적인 사살이라 믿는 믿음을 가지면 이기고 승리하여 1등 되고 부자 되고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한 것이고 십자가를 욕보이는 것일 뿐 믿음도 하나님의 아들의 삶도 또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다. 그것 그냥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고 자기의 신념에 매몰된 자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아무리 밥을 퍼 주고 또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창조와 존재 목적을 아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것이며 계명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세상의 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생각에 끌려가서 자신이 죄인이 되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요구하는 경쟁의 법과 프레임 안에서 자신은 늘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죽을 때 살아나고 이기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고 자신의 본성이며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죽고자 하면 사는 법이고, 죄인이 의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법이며, 이것을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사랑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이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고 이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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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신다.(요일 5:4) 그리고 그 이기는 근거는 <믿음>이라고 하신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로 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 이후 제자들에게 길게 말씀하신 내용들 중에 요한복음 16장 마지막에 나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다음에 병사들에게 잡혀가시고 석방되지 않고 그 길로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 그리고 '담대하라' 부탁한 제자들은 모두 떠나가게 된다. 그것은 언뜻 이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도무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어떤 것일까? 그 이김의 근거가 되는 것이 믿음이라 했는데 그 믿음은 또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이겼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있는데 한마디로 하면 자기의 뜻과 목표가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놓고 자기의 겉옷을 예수님 가시는 길에 놓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심판을 받자 바라바를 선택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길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로마로부터의 통치를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실상은 잡혀서 심문을 받으니 자신들의 기대를 배신한 예수님을 배신해 버렸다. 그들의 뜻과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거나 자신들을 해방시킬 메시야가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사람들이 이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이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생존 경쟁에서 예수 믿는 믿음이 있으면 이긴다는 것이며, 또한 사람이 가진 각종 본능을 억제하고 유혹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이르고, 또 부자가 되며, 또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김은 세상의 법이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서 세상을 더 풍족히 누리기 위한 다툼의 승리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법아래 있는 이김이지 예수님의 이김이 아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이김이다. 그 예수님의 이김의 시작은 40일 금식 이후에 받으신 시험을 이기신 것이고, 대미는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이기신 이김이다.




마귀의 시험에 이기심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 할 때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다. 즉 다시 말해서 '네가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것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고,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 세상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이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시험도 마귀의 요구대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귀의 요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과,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세상의 모든 영광의 주인이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돌에 새긴 율법을 떡처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는 육신의 한계를 극복한 존재도 아니며, 또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실존이나 경배할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율법을 죽어라 지켜내는 것도 아니며,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신 이김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이김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겨내서 강해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얻는 것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만 경배하는 것이 시험을 그리고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기적을 보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금식한 예수님을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가진 배고픔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배고픔이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에 대한 배고픔이 가장 크다. 그 배고픔을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을 잘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을 더 잘 지키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모든 것이 바로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이 가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의이다.


또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육신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지주의 신앙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이 육신의 한계 너머의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불요한 것이며, 이 육신의 삶은 구원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영지주의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다들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잘 지켜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금식하고 철야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생각과 같은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의 표현과 본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육신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기적을 행하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 연약한 육신을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고 믿음이며,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영광을 얻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얻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하 만물,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피라미드와 같이 끊임없이 높은 곳으로 또 높은 곳을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교회를 화려하게 짓고,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 세상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이 천하 만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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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하나님께로 난 같은 아버지의 생명을 받은 형제들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말씀하신다. 계명이라고 하면 십계명과 같은 행동 강령이나 규율과 같은 것이라는 느낌으로 받지만 그런 것은 모두 하나님 계명의 세칙이지 계명의 본질이 아니다.


그러니까 세법에 세금 내지 않으면 압류나 강제 징수를 하겠다고 되어 있다고 세법의 목적이 압류나 징수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한 사업에 필요로 하는 세금을 모으고 집행하는 것에 있는 것이듯, 사람들이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생각하는 여러 가지 규범이 계명의 목적이 아니며 십계명을 비롯한 성경의 모든 말씀의 목적이 사람이 그 정체성을 회복하여 의미를 가지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목적인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안식일이나 주일을 지키는 것과 같은 행동 규범에 있는 것이나 어떤 절기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곧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고 삶의 의미를 회복하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거나 부인하거나 십계명과 같이 계명의 목적을 설명하기 위한 표현에 매몰된 것은 하나님의 계명도 사랑도 더 나아가서는 하나님도 예수님이 오신 목적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서로 사랑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밥 퍼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존재 목적을 깨닫게 하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 밥을 퍼주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의 목적을 나눈 사람들은 형제며 그 형제들은 삶의 모든 형식을 나누고 희생하며 수고함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다.


그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 그 계명에 세상적인 윤리나 법을 더하는 자, 그 계명의 본질인 육신으로 주신 삶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서의 정체성의 어떤 부분, 육신이나 내용을 버리고 하나만 선택하는 자는 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며 사랑도 알지 못하며 계명을 지키지 않는 자다.


그런 사람은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으며, 주여! 주여! 부르고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어 쫓고 병자를 고치며, 40일 금식을 수 없이 하며, 결혼하지 않고 매일 수도하며 기도하고, 세상에서 가장 높은 종교적 지위나 명예를 얻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계명도 사랑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유대인을 책망하신 것이 그들이 도적질을 하거나 강도거나 아무 여자나 범하거나 창녀와 놀거나 나라를 팔거나 이방 신에게 절해서가 아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자 사람을 향하신 뜻을 알지 못했기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 시대의 교회가 유대인의 모습을 따르고 있다.


그렇듯 본질을 모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은 너무 무겁다. 왜냐하면 그것은 개가 고양이 소리를 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사람의 본질이 형식을 지켜 내용을 채워가는 것이 아니라, 빈 그릇과 같이 내용을 담아 그릇의 정체성이 정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창조의 목적이자 존재의 목적이 자신의 내용이자 본질이 되어 육신을 가진 형식이라는 삶으로 표현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즉 방향이 명확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먼저 사랑하심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셨지, 사람이 스스로 생겨서 숨어 있는 하나님을 찾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 오라(마 11:28)"하셨다. 하지만 예수를 믿는다고 인생의 수고가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인생의 수고가 그치려면 장례식장을 거쳐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수고와 무거운 짐은 육신이 먹고 살아가는 문제에 관한 것이 아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러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 11:27-30)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수고와 무거운 짐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매겨놓은 원래의 존재 목적과 본성에 맞지 않고 살아가는 수고와 그 짐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개에게 고양이 소리를 내게 하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이 그 수고와 짐을 내려놓게 하시기 위한 것이라는 말씀이 바로 마태복음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것을 인생의 수고와 육신의 삶이 가진 생계의 짐이라고 한정하는 것은 앞에서 말한 사랑과 계명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 많은 교회가 그렇게 설교하고 있다. 그것은 계명과 다른 세상의 법으로 시험치고 경쟁력을 갖추고 강단에 섰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을 부르실 때 그 앞에 하신 말씀이 무엇인가 하면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다"라는 말씀을 하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짐은 하나님을 아는 것과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앞에서 계속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아는 것 외에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회복되는 것은 없다.


하나님과 사람이 관계성이 형성되고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는데 아들이 되지 않는 것은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아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아들은 아버지와의 관계성을 지키기 위하여 수고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생명으로 난 것 그것이면 족하고 충분하기 때문이다.


고로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는 것은 아들이 되는 것이다. 아들이 되는 것은 짐을 지는 수고에 있지 않다. 생명이 육신으로 표현되면 그것이 아들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계명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계명도 하나요, 사람 지으신 목적도 하나며, 사람과 하나님의 회복된 관계도 하나이니 곧 아버지와 아들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 사랑의 법, 아들을 아는 것, 자신이 지어진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아는 것은 수고로운 것이 아니다. 무거운 것은 더더욱 아니다. 그러므로 계명은 아주 가벼운 것이다. 행여 교회에서 원하고 자신이 알고 있는 신앙이 싫은 것이라 억지로 하고 있다면 그것은 가벼운 계명도 아니고 예수님의 멍에도 아니다. 그것은 온전치 못한 복음이며,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사랑이 중요한 만큼 어렵고 계명이 중한 만큼 무겁고 어려운 것이라 생각될지 모르지만 그건 어쩌면 주신대로 사는 것이다. 이것은 체념적으로 산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랑의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과 삶을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게 하셨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만들면 쉽게 작동되고 어렵지 않게 만들려고 하는데 하물며 하나님이 그러시겠는가?


그러므로 사람들이 휩쓸리듯 세상의 흐름을 따라 어떻게든 피라미드의 꼭대로 향하려고 단단한 벽돌을 만들기 위하여 흙 안에 껍데기인 볏짚을 넣고 또 단단하게 하려고 굽듯이 사람이 가진 한계를 극복하고 또 연약함을 감추고 고상하려 애쓰다 어느 날 문득 "왜 사는지?"라는 질문 앞에 허망하게 되는 그 수고와 짐과 그 허망함 이기려 억지로 억지로 지켜보는 계명의 무거움을 벗을 수 있도록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그런 것이 아님을 알게 하시는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계명은 쉬운 것이다. 사람이 사람으로 사는 것이다. 그저 하나님께서 지으실 때 이 몸과 이 연약한 삶을 주신 이유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아는데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왜 힘들겠는가? 하지만 그 연약함도 세상의 법으로 볼 때 연약한 것이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하나님의 의와 뜻 안에서 보면 그것이야 말로 진정한 기적이고 능력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법과 사람의 안목으로 볼 때 그렇게 부족해 보이는 이 육신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성전이요 그릇이며 형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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