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50

요한 1서 4장에 들어가면서 요한 사도는 영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이는 3장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심을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다. (신약은 원래 장절이 없고 근대에 들어와서 구분되었다.(참조 대한성서공회))


요한사도는 성령 안에서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계명대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요한일서 3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즉 성령의 역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요 13장)인데, 바로 그 예수님의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밥 퍼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보통은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한다. 보통 그것을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모든 법과 계명에는 목적이 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한다는 것이 세법이지만 그렇다고 재산을 압류하는 것이 세법의 목적이 아니다. 세법의 목적은 세금을 잘 거두어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 역시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세법이 결국은 국민들이 바라는 복지와 국가적 편의를 구현하는 것이 목적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재산을 압류하는 것이 세법의 실체가 아니듯 하나님의 계명도 지켜내는 것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그 계명을 잘 지켜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이루라는 말씀이 본질이다. 즉 그 목적을 이루려 하면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또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 이상의 삶의 의미는 없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궁극의 기쁨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확인되는 것이다. 부모가 많은 희생을 값없이 치르고도 자녀가 잘 되었을 때 부모로서의 존재이유가 이루어지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존재의 이유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 이상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것도 유일한 사랑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이유를 알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구제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 표현은 마음 안에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금하려 해도 나타나고 나타나는 것이다.


이 사랑,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 의미를 알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본디 하나님이심에도 사람의 육신을 입고서 육신을 입고 있는 인생들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보여주셨기에 우리의 구주이시고 사랑의 왕이신 것이다.


바로 이 사랑, 육신을 가진 삶을 살면서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전하고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전도요 또한 사람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바로 이런 삶을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살았다 하는 유일한 생명이고 유일한 사랑이다.


바로 그런 사랑을 나타내게 하는 것,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육신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 사랑을 알게 하는 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기적을 일으키는 영이 사람에게 필요한 영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수고하며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영이 <성령>이신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사람이 그 사랑을 나타내고 표현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을 위하여 필요하면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한 기적을, 또 육신의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을 압류하는 것이 세법의 목적이 아니듯 성령의 목적이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영을 다 믿지 말고>라는 말씀인 것이다. 유일하신 성령의 역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영 그것뿐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일서 3장 13-24절) 사랑의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2. 9. 14:43 Writer : 김홍덕

흔히들 기독교를 사랑의 종교라고 한다. 이 시대의 현대인들도 그렇게 인정해 줄지는 모르지만 말이다. 기독교가 사랑의 종교인 것은 구제와 같은 일들이 많이 있고, 그것을 교회 안에서 많이 가르치고 시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분명한 사랑의 모습이지만 사랑의 본질이라기보다는 사랑의 표현양식이라고 보아야 한다. 성경에는 요한사도가 말씀한 재물을 가지고 형제의 궁핍을 돌아보지 않는 것은 사랑이 없는 것이라는 말씀과 같이 분명한 사랑의 모습이 구제이긴 하지만 왜 그렇게 하는 것인지가 본질적인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살아가는 이 사회와 세상에서 경제적 여건은 동일할 수 없고, 또한 그런 이유에서만 아니라도 여러 가지 이유로 살아가는 육신의 문제에 대한 나눔이 절실한 것은 사실이고 이런 절실함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는 것이 기독교와 봉사단체들인 것은 분명하다.


다시 말해서 그런 모습이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신앙이라는 측면만 강조하면서 육신의 문제는 돌아보지 않는 것은 영지주의 생각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다. 영지주의가 신앙에 있어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말로 중요한 것은 사랑의 본질인 것이다. 이는 제작된 방송 콘텐츠가 있고 가정에 TV가 있어야 하는 것처럼 그 사랑의 본질이 있고 밥 퍼주는 봉사와 구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또한 그 어느 것이라도 하나가 소홀하게 되면 안 되는 것이다.


계명이라는 것은 분명히 이론이 아니다. 실재적으로 어떤 형태로든지 지켜내는 것이 목표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의 계명이라는 것은 사랑의 본질이 온전한 표현으로 표현되어 나타나는 것이 계명이 실천되는 것이다.


따라서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성경에 사랑하고 하신 말씀을 좇아 사람에게 구제하고 봉사하는 것이 온전한 것이 아니라, 사랑의 본질을 계명과 같이 지켜서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하는 것이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성경을 읽고 전함에 있어 가장 혼돈스럽다고 할까 그런 것이 있다면 지킨다는 것과 같은 행동에 관한 것이다. 왜냐하면 성경에서 명한 행동에 대한 규율은 행동만 그렇게 한다고 온전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보이지 않는 숨과 살아있는 생기만도 아니고, 또 육신만도 아니다. 생명은 사람이라는 유전자가 사람으로 표현되어 있고 살아 움직일 때 생명이 있는 것이다.


계명도 이와 같다. 계명을 지킨다는 것이 행동만 그렇게 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과 계명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이 그 사람의 행동과 삶으로 표현될 때 비로소 계명이 지켜지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와 뜻인 계명의 목적과 본질이 분명히 그 사람 안에 있어야 하고 또한 그것이 삶으로 표현되어져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힘든 것이 아니다. 생명은 자연스럽게 그 생명대로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혼돈스러운 것은 사람의 육신의 호흡이나 혼을 사람의 본질로 보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사람의 본질이 아님을 아는 것이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신앙의 핵심인 것이다. 육신의 호흡을 가지고 생물학적으로 살아 있다 하여도 그 삶이 하나님의 의와 뜻을 나타내는 것에 사용되지 않는다면 죽은 것이다.


사랑은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의와 뜻이 그 사람 안에 있어서 그것을 나타내고 또한 그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사는 삶, 그런 삶은 필요하면 구제하고, 또 그것을 위하여 필요하면 봉사하고 또 더욱 필요하다면 목숨도 내어놓는 그런 사랑이다. 그것이 사랑장의 말씀이기도 하다.


또한 이렇게 계명을 지켜가는 것에는 억지나 노력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 안에 생수의 강이 넘치듯 생명의 본성이 확실하면 그 본성ㄷ대로 사는 것이다. 이 본성은 끊임없이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목적과 의를 전하려 하는 본성이다.


이 본성은 하나님으로부터 왔다. 하나님도 그것을 전하기 위하여 아들을 보내시니 것이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이 있다면 이 본성은 언제나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가지신 의와 뜻을 전하는 모습일 것이다. 그렇게 의와 뜻이 살아가는 모습으로 있는 것이 계명이다. 그리고 그 계명은 사랑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사랑아시기 때문이다. 아니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랑이신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고, 그 안에 영생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일 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망, 살인, 영생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사람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말씀이다.


이는 시계를 보고 살아 있다하는 것은 시간을 잘 알려주는 목적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목적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든 연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연약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강하고 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에서는 사랑이 나올 수 없다.


군이나 직장에서 더 나은 능력을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마음에 따라가지 못함으로 힘들어 할 때 그때 사람 안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세상의 법을 따라 가지 못하는 모습이 비칠 때 나타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람이 한계와 약함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이 또한 이것이다.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바다를 가르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 사랑은 밥 퍼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표현된 하나의 모습이다. 사랑은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바탕에 둔다. 사람이 한계를 가지고 연약하고 뜻대로 다 할 수 없는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곧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육신의 목숨도 그것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 밥을 퍼 주는 것은 사랑의 형식이나 모양만 있는 것일 뿐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여기실 생명이 있는 사랑은 아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 앞머리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요한 사도도 요한일서 3장에서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권하면서 4장에 가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한다. 그것이 유명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불쌍한 사람에게 법 퍼주시는 분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에게 그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이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성품인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있다면 자신의 삶은 분명하게 달라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 것 없고 심지어 별로 도덕적이고 봉사활동도 별로 없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어떻게든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려 애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런 사람은 육신의 목숨이나 재물을 기꺼이 그것을 위하여 사용한다. 이 목숨은 생명과는 다른 것이다. 이는 육신이라는 형식이 숨 쉬는 것 곧 생물학적 생명을 말한다. 또 재물은 사람이 육신으로 수고한 모든 것의 상징이고 집약체이다. 


그런 목숨과 재물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에 사용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형식의 본분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것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말씀하시는 생명이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기적을 행하시던 능력과 또 하나님의 말씀과 심지어 육신의 목숨도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존재 곧 구원받고 영생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라는 것 역시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단순히 교회에 데려다 놓는 것이 전도가 아니다. 물론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면 전도가 되겠지만……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