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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곧 같은 부모의 생명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제는 두말할 것 없이 아버지가 하나님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생명이 어떤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사람들이다. 그 처음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었다.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살 때 아들,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두움이 없고 밝음이 있다는 것이다.(이 어두움은 컴퓨터를 모를 때 컴맹이라고 하는 그 어두움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밝음 곧 빛 가운데, 빛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빛은 밝음이고 어두울 때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빛이다. 즉 빛 가운데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두움에 있을 수 없다. 


이 빛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들들, 곧 형제들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사람들인 형제들끼리 그런 미움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사람은 세상적인 기준, 도덕이나 법이나 예의와 같은 그 기준으로 사람이 미움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을 자기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사람을 창조된 본연의 정체성으로 보지 않고 세상이 원하는 법과 도덕과 윤리와 같은 가치 기준으로 사람을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사는 사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밝음이 있는 사람은 육신을 가진 삶 속에 나타나는 고상하지 못하고 연약하며 언제라도 세상의 법이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나 패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한 것을 아는 사람들은 서로 형제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를 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을 가진 것이고, 그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서로 형제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이 가진 겉모습을 사람의 정체성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신의 연약함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의 중심을 보는 사람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도 또 판단에 이어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요한 사도가 전하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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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도 사람을 미워하는 자신의 모습을 좋아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렇게 원치 않음에도 사람을 미워하는 마음이 그 안에 있다. 이런 미움에 대하여 어떤 이들은 심한 자책을 하거나 종교적인 수행으로 그것을 극복하려 할 만큼 우리 안에 실존하는 마음의 단면이 미움이다.


이 미워하는 마음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빛이 아닌 어두움에 거하는 자며 형제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는 사람이라고 말씀하고 있다.(요일 2:9~11)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것에 과정 혹은 단계가 있다면 미워하기 전에 반드시 하는 것이 있는데 미워하는 대상에 대한 판단이 선행이 된다. '주는 것 없이 밉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알고 보면 그 전에 우리는 상대에 대하여 나름의 판단을 하고서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원래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주신 것이 아니다. 사람이 판단하고 못 마땅한 사람으로 규정하는 것은 단 한 가지 이유 곧 자기가 가진 사람에 대한 기준 때문이다. 물론 그 기준이라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니라 사회적인 것, 문화적인 것과 종교적인 것 까지 다양하다.


그러나 세상에 종교적인 것이나 사회적인 것이나 문화적인 것 그리고 도덕적인 기준이 있다 해도 그것에 대하여 그 사람이 그 기준들이 옳다고 여기지 않는 사람은 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으므로 기준이 문제라기보다 자신이 어떤 기준을 옳은 것으로 보는 것인지가 중요한 문제이다.


요한 사도가 빛 가운데 있으면 그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형제라는 것은 같은 혈통 곧 같은 생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한다. 즉 빛 안에 있는 같은 생명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또한 빛 안에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는 것인데, 이것을 청세기적 표현으로 한다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이라는 것이고, 바울 사도의 표현으로 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빛은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 또한 하나님께서 사람이 이렇게 연약한 육신으로 지으신 이유와 목적과 의를 인식할 수 있는 밝음 가운데 있는 사람이므로 그런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사람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사람은, 사람은 연약하고 세상적인 기준이나 도덕적인 기준이나 사회적이고 법적인 기준으로 볼 때 늘 실수하고 연약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을 뿐 아니라 사람이 그렇다는 것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의 모습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을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인 것이다.


그런 사람의 형제는 또한 사람이 그렇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 형제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 바로 요한 사도의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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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2장 7-11절) 새 계명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1. 5. 06:18 Writer : 김홍덕

새로운 계명이라는 것은 이전과 전혀 다른 계명일수도 있다. 하지만 성경이 전하는 계명에 관한 것이라면 이는 하나님께서 사람에 대하여 계획을 완전히 바꾸시게 되어서 이전 것은 폐기하고 새로운 것을 주시는 것이 아니다.


성경에서 새로운 계명, 또한 이전 것은 지나고 새롭게 되었다는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에 대하여 새롭게 대하여 그리고 예수님이 누구신가 하는 것에 대하여 새로운 안목을 가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말씀이 새롭게 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말씀 자체는 태초부터 언제나 같은 말씀인데 사람이 그 말씀을 새롭게 발견하게 되었을 때 하나님의 계명이 새롭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해 아래는 새것이 없으나 모든 것이 새롭게 되는 것이다.(고후 5:17)


그렇기 때문에 요한 사도 역시 요한 일서를 통하여 전하는 것이 새로운 것이 아니라 옛 부터 있는 것인데 이제 새로운 안목으로 봐야 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 새로운 관점, 이전의 모든 것이 다 새롭게 보이고 새로운 계명이 되게 하는 전환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는 것이라는 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예수 그리스도는 앞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나는 것이다. 만난다고 하니 맛선 보듯이 만나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이는 예수님을 새롭게 아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을 새롭게 만나는 것, 그것이 옛 계명이 새롭게 되는 것이고, 그것이 그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천지창조인 것이다. 한 사람에게 천지창조라는 것은 세상을 새롭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살고 있는 세상이 하나님이 이 세상에 대하여 그리고 사람에 대하여 가지신 의로 새롭게 보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물리적인 세상이나 율법의 조항이 바뀌거나 새롭게 만들어지거나 하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한 개인이 살아가면서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또한 이 세상과 사람인 자신의 모습과 또 자신과 같은 사람의 인생을 새롭게 인식하는 것이 바로 새것이고 태초고 새 세상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이전에는 행위 규범으로 보여서 '무엇을 하라', '하지마라' 하는 것으로 보이던 사람에게 하나님의 말씀은 존재 규범이라는 것이 열려서 이것은 하라 하지마라의 문제가 아니라 '어떤 생명이 되면 어떤 삶을 살게 되는 것에 관한 말씀이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이 새 계명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제자들에게 새 계명을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하신 것이 바로 그것인데,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을 보고서 새로운 계명으로 깨닫는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이라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이는 하나님이다. 이것은 하나님을 서로 나누라는 것인데 단순하게 하나님이라는 신을 소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의를 나누는 것을 말씀하는 것이다.


즉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와 목적으로 대하고 살아가는 관계를 말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사랑이라고 하면 밥 퍼주는 것을 생각하지만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의와 목적을 전하는 것 없이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소리 나는 꽹과리와 같을 뿐이다.)


사람이 서로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나눈다면 이 보다 더한 사랑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을 나눈다는 것은 사람을 선악 간에 판단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을 선악 간에 판단하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 이 사회 속을 살아가는 그 삶의 모습을 인정하고 이해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자신도 그와 같은 운명임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다. 태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두신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사람의 타락과 함께 사람에 대한 정의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삶의 모습에 대하여 그리스도로 인하여 새로운 안목이 열리면 태초가 되고 하나님의 모든 말씀이 새 계명이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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