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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사도는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살인하는 것이고, 그 안에 영생이 없다고 말씀하고 있다. 요일 3장에서 말씀하고 있는 사망, 살인, 영생은 육신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그 사람이 살아 있는지 아닌지에 관한 말씀이다.


이는 시계를 보고 살아 있다하는 것은 시간을 잘 알려주는 목적을 이루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은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대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 목적이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사람이 사랑을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이든 연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을 말한다. 사람이 연약한 것을 인정하지 않고 강하고 강해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마음에서는 사랑이 나올 수 없다.


군이나 직장에서 더 나은 능력을 바라는 마음으로 사람을 대할 때는 사랑이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마음에 따라가지 못함으로 힘들어 할 때 그때 사람 안에서 사랑하는 마음이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세상의 법을 따라 가지 못하는 모습이 비칠 때 나타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그토록 사람이 한계와 약함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기를 바라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이 또한 이것이다. 형상은 하나님의 이미지를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존재,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바다를 가르는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사랑하기를 원하시는 것이다.


이 사랑은 밥 퍼주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사랑이 표현된 하나의 모습이다. 사랑은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바탕에 둔다. 사람이 한계를 가지고 연약하고 뜻대로 다 할 수 없는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는 절대로 사랑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사랑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곧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그것을 알려주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육신의 목숨도 그것을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것이 사람의 모습이고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이 되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세우신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고서 밥을 퍼 주는 것은 사랑의 형식이나 모양만 있는 것일 뿐 하나님이 살아있다고 여기실 생명이 있는 사랑은 아니다.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3장 앞머리에서 말씀하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요한 사도도 요한일서 3장에서 형제들이 서로 사랑하기를 권하면서 4장에 가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말씀한다. 그것이 유명한 "하나님은 사랑이시라"하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이 불쌍한 사람에게 법 퍼주시는 분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사람에게 그 정체성과 존재의 목적을 알려주시는 분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이 그 마음 안에 하나님의 성품인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사람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있다면 자신의 삶은 분명하게 달라진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잘 것 없고 심지어 별로 도덕적이고 봉사활동도 별로 없는 사람 같아 보이지만 어떻게든지 사람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려 애쓴다.


그것이 사랑이다. 그런 사람은 육신의 목숨이나 재물을 기꺼이 그것을 위하여 사용한다. 이 목숨은 생명과는 다른 것이다. 이는 육신이라는 형식이 숨 쉬는 것 곧 생물학적 생명을 말한다. 또 재물은 사람이 육신으로 수고한 모든 것의 상징이고 집약체이다. 


그런 목숨과 재물을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에 사용한다는 것 그것이 바로 형식의 본분이다. 그리고 그런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것이 유일하게 하나님께서 살아있다고 말씀하시는 생명이 있는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모습이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이신 것이다. 예수님은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말씀하시기 위하여 자신이 가진 기적을 행하시던 능력과 또 하나님의 말씀과 심지어 육신의 목숨도 십자가에서 희생하신 것이다.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그 사랑이 있어야 비로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 그리고 그 사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는 존재 곧 구원받고 영생하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므로 전도라는 것 역시 그것을 전하는 것이다. 단순히 교회에 데려다 놓는 것이 전도가 아니다. 물론 교회가 하나님의 사랑이 충만하면 전도가 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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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소더스>는 기본적으로 이스라엘의 출애굽을 기록한 성경을 바탕으로 한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바로 모세의 손에 끝까지 들려져 있었던 애굽의 장군으로서의 칼이었다. 성경에서는 모세가 양을 치던 지팡이를 가지고 출애굽을 한 것과 완전히 다른 설정이다.






백성을 출애굽 시키시기 위하여 부르신 양치는 목자의 손에 지팡이가 아닌 애굽의 장군을 상징하는 칼을 들렸다는 것이 이 영화의 모든 것이다. 하나님의 일을 사람의 시각과 철학과 지식으로 채색했다는 상징이라는 것이다.


이는 앞에서 포스팅 한 것과 같이 출애굽이라는 사건에 대한 상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의 생각과 성경을 믿어야 한다는 어떤 강박을 연결하려한 시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다.(그런 시도의 가장 유명한 단체가 창조과학회가 아닌가 싶긴 하다.)


그 뿐 아니라 영화 전반에는 성경을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접근으로 해석해 보려는 시도가 분명해 보였는데, 물이 피로 변한 원인이 악어의 출몰이라는 설정, 그리고 물이 피로 변하면서 먹을 것이 없어진 개구리가 떼로 나타났다고 하는 것, 그리고 그렇게 부패한 사체들에서 파리가 나오고 병이 생겼다고 하는 것들이 얼마나 성경에 기록된 열 가지 재앙을 상식적으로 접근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하지만 마지막 재앙을 제외하고도 많은 재앙들이 애굽 백성에게는 해당이 되었으나 히브리인들에게는 그렇지 않았다는 것과 같은 것에는 접근을 절제(?)했다는 것에서 굳이 그것을 한계였다고 폄하하기 보다 성경을 믿음이 아닌 상식으로 보는 어두운 안목의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하나님의 출애굽은 신과 왕이 자기 백성을 어떻게 볼 것인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외형적으로 볼 때 이스라엘 히브리 족속의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하는 이야기로 보일지 모르지만 그 전반의 과정은 한 사람, 사람이 세상에서 자신의 고향(정체성)을 회복하는 과정을 말씀하시는 성경이다.


그런 하나님의 말씀을 히브리민족이라는 한 민족에 국한시킨 것도 편협한 것이지만, 성경의 말씀을 객관적이고 과학적이고 상식적인 이해가 믿음이나 이해라고 생각하는 것이 가장 근원된 문제이다. 그런 문제는 사실 이런 영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나 종교인들 안에도 얼마나 많은 안타깝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가르치는 교회의 골격이 되고 있다. 그 모습이 홍해를 애굽의 장군을 상징하는 칼을 들고서 건너려고 하는 모세의 모습을 설정한 영화와 같은 것이다. 이는 조금의 오차도 없는 불편한 진실이다.


신앙은 믿지 못하는 것은 안 믿는 것이 옳다. 마음에 믿지 못하겠는데 믿어야 한다니 최면을 걸듯 신념을 가지고 "믿습니다!"할 것이 아니다. 그리고 더 나쁜 것은 타협하는 것과 성경을 사람의 지식으로 가감하는 것이다. 믿기지 않으면 안 믿긴다고 고백하는 것이 가장 정직하고 가능성 있는 심령이다.


믿지 못하겠다는 사람은 마음이 열리면 믿을 수 있다. 하지만 모세의 손에 칼을 들리운 관점,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믿는 관점, 성경을 과학적으로 증거를 대려고 하는 생각, 성경을 상식과 이치로 이해하려는 모든 것은 이미 자신의 생각이 채색되었기에 안 믿는 것 보다 더 어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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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엑소더스>에 나타난 타협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12. 8. 09:40 Writer : 김홍덕

어제 저녁 아내와 큰 아들과 함께 영화 <엑소더스. 신들과 왕들>을 보고 왔다. 어린시절 TV에서 본 <십계>를 생각하면서 발달된 기술이 보여줄 화려한 그래픽에 대한 기대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영화는 매우 불편하게 흘러갔다. 상영시간 내내 지난 번 <노아>를 생각하게도 만들었지만 이내 그것과는 또 다른 관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노아는 성경에 대한 완전히 다른 해석이었다면, 엑소더스는 성경을 논리적 해석으로 불신과 신앙과의 괴리를 연결하려 했다.





영화는 출애굽 사건을 다루고 있었다. 뭐 굳이 영화의 내용을 해석해 보면 히브리 백성에 대한 왕과 신의 이견 차이를 보여주고자 했다고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사람을 자신의 종으로 노예로 여기는 왕과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는 신의 관점 차이를 보여주려 했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러나 영화 내내 성경에 기록된 내용을 어떻게 묘사할 것인가? 하는 의문에 대한 기대(?), 그러니까 내가 아는 성경의 전재와 얼마나 일치하게 할 것인지를 검증하듯 보는 마음은 어쩌면 나의 선입관이라고 치부한다 해도 이 영화가 가진 문제는 심각하다고 본다. 어쩌면 노아보다 더 문제가 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가장 하나님께 도전하는 생각이나 신앙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원망하거나 불신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자신이 가진 관점에서 하나님의 말씀이 믿어지지 않는다면 "못 믿겠다!"라고 하거나 <새빨간 거짓말>이라고 하는 것이 정직한 마음이다. 그건 불신일수는 있지만 하나님에 대한 도전은 아니기 때문이다.


믿어지지 않으면  못 믿겠다 해야지 믿기지 않는 말씀을 자신이 사람으로 살면서 형성된 가치관과 지식을 가지고 합리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는 하나님에 대한 반항이고 도전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가진 의와 그것을 표현한 말씀에 대한 자의적인 해석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 가장 타락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하나님을 자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가장 기본적으로 사람이라는 존재가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는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존재 목적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불신이 질그릇으로서 엎어져서 아무 것도 담으려 하지 않는 것이라면, 타협은 자기 맘대로 선택적으로 받아들이려 하는 주권을 가지려 하는 것이고, 자신이 스스로 합리적이라 생각하는 사고를 바탕으로 그릇에 담기려는 것을 판단하고 자신의 정체와 연결하려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이는 삶의 주권을 자신에게 두고 있는 생각이다. 즉 자신이 가진 사상과 지식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자기 주도적인 생각이기 때문에 그것이 아무리 화려하고 또 합리적이라도 하나님에 대한 가장 강력한 도전이다.


성경을 보는 관점에서 가장 위험한 것은 가감하는 것이다. 가감을 하는 근원은 자기 지식으로 볼 때 이해하거나 반대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삶의 주권을 자신에게 두고 있는 생각이다. 따라서 그것은 자신의 삶에 대하여 하나님과의 주권을 다투는 것이다. 이는 믿지 않는 것 보다 죄라면 더 큰 죄다.


성경에서 예수님께서 변화산에 오르셨던 기록을 마태복음 17장에서 보여주고 있는데, 모세와 엘리야가 나타난 것을 본 베드로가 좋아서 초막 셋을 짖고 예수님과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있자고 했다. 하지만 하늘에서 소리가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니 너희는 저의 말을 들으라"는 소리에 깨어 보니 예수님만 보였다고 했다.


즉, 하나님을 믿는 것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는 어떤 것도 더하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심지어 모세와 엘리야라 할 찌라도. 왜냐하면 모세의 율법도 엘리야의 능력도 다 예수님이 사람에게 보여주고자 하신 하나님의 뜻 안에 다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 하늘과 땅은 물론이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으로 비롯된 사상과 철학과 과학과 문학과 예의와 모든 것이 바라는 유일한 바는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이라고 로마서 8장에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성경을 대하는 가장 온전하고 정직한 마음은 믿어지면 믿는다 할 것이고 믿어지지 않으면 못 믿겠다고 할 것이지, 믿어지지 않고 의심이 되는 것을 자신이나 사회나 세상이 가진 사상과 지식으로 합리적인 해석을 유도하는 것이 가장 믿지 않는 것이고 하나님께 도전하는 것이다.


영화 <엑소더스>는 성경을 믿지 못하는 사람이 성경에 대하여 시도하는 주관적 시도가 얼마나 하나님의 생각에 도전하는 것인지를 알게 했다. 이는 영화가 성경과 다르게 표현해 가는 것에 대한 불편함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명백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그런 도전은 이제 트랜드가 된 것 같다. 예전 <십계>나 <벤허>과 같은 영화에 비하여 시간적 거리가 좀 있지만 애니메이션 <이집트 왕자>를 거쳐서 <노아> 그리고 <엑소더스>까지의 과정을 보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보는 관점을 조금씩 조금씩 교정해 가고 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미혹>이라는 생각에 불편한 잔상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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