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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귀신 들린 자의 회복 (1)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5. 2. 4. 15:38 Writer : 김홍덕

성경에는 의외로 귀신 들린 사람에 대한 말씀이 많다. 마태복음에만 해도 그냥 귀신 들린 자를 고치셨다고 언급한 구절 외에도 8장에서 돼지 떼로 들어간 귀신 들린 사람의 일과, 귀신들려 벙어리 된 자(9장), 또 귀신들려 눈  멀고 귀머거리 된 자(12장), 가나안 여자의 딸(15장), 또 변화산 밑에 데려온 아이(17장) 등, 많은 기사가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바리새인들과 귀신에 대한 논쟁을 하기도 하셨다. 예수님께서 귀신의 왕 바알새불의 힘으로 귀신을 내어 쫓는다고 하는 일에 이르기 까지 많은 귀신 이야기가 나온다.


중풍병자는 머리에 생각이 있지만 그것을 몸이 받들지 못하는 상태라면 귀신이 들렸다고 하는 것은 몸은 멀쩡한데 머리에 생각이 귀신에게 점령당한 즉 그 생각을 빼앗긴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중풍병자는 머리의 생각대로 몸이 움직이지 않기 때문에 움직임이 부자연스럽지만, 귀신 들린 자는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자도 쇠사슬로도 제어 할 수 없다고 했고, 변화산 아래에 데려온 아이도 자기가 통제가 안될 정도로 움직임이 많아 불에도 넘어지고 물에도 넘어진다고 하셨다. 이처럼 귀신이 들리면 그 머리의 생각이 빼앗겨서 자기 몸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는 것이다.


머리가 빼앗겼다는 것은 통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통제라는 것은 억압이 아니라, 목적 안에 두게 하는 능력인 것이다. 원자력 발전소는 원자력을 억제하는 것이 아니라, 그 놀라운 힘을 어떤 목적 안으로 가지고 오는 시설인데, 만약 그것이 통제를 벗어났다면 그것은 전기를 발전시켜서 사람들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목적을 벗어나서 오히려 사람을 위험에 빠트리거나, 아니면 전기를 생산하지 않는 상태가 되었을 때, 우리는 그 상태를 통제를 벗어난 것이라고 한다. 


일본에 지진이 났을 때, 원자력 발전소가 크게 문제를 일으켰는데, 그때 그 원자력 발전소들은 귀신들린 자와 같이, 엄청난 원자력 활동은 했지만, 원자력 발전소의 머리라고 할 수 있는 목적에서 이탈해서 사람의 통제를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그 당시 발전소들의 설비가 원자력이라는 기능을 상실한 것이 아니라, 통제를 벗어나 버렸던 것이다. 목적이 상실된 것이었다는 이야기다. 귀신이 들렸다는 것도 그것과 마찬가지이다. 몸의 기능은 오히려 극대화 되었는데, 머리가 빼앗겨서 물에도 들어가고 불에도 뛰어들게 되는 상태가 바로 귀신 들린 상태인 것이다.


거라사(마 8장에서는 가다라)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막 5장)은 무덤 사이에 살고, 쇠사슬로 묶어도 그것을 끊어 버릴 정도였고, 소리를 지르며, 돌로 자기의 몸을 상하게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나 같이 보통 사람들로서는 하기 힘든 일들인데, 그 사람에게는 일상과 같은 일들이었다. 사람이 쇠사슬에 묶이면 움직이지 못해야 정상인데 이 사람은 그것을 끊어 버린다는 것이다. 중풍병자는 머리의 생각이 몸으로 전달되지 않아서 몸을 움직이지 못하는데, 이는 반대로 머리의 생각이 정상이 아닌데 몸은 괴력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신비적인 것을 사모하는 사람들이 있다. 신비한 능력을 사모해서 가진다고 해도 그것이 가진 목적, 즉 머리를 빼앗긴 상태로 신비한 능력을 행한다면 그것은 귀신 들린 자들의 모습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흔히 할 수 없는 것을 행하려고 하는 것이 그렇다.  마태복음 8장 28절에 보면 귀신들린 자들이 “심히 사나와 아무도 그 길로 지나갈 수 없을 만 하더라”라고 했다. 즉 귀신 들린 자의 상태와 같은 방법(길)으로는 사람들이 다니기 힘들다는 말씀이다.


이는 신앙 세계에서 남이 하지 못하는 기적적인 능력을 행하는 것이 더 예수님을 닮은 것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는 마치 그들에게도 사람들이 쉽게 다가가지 못하고 그렇게 기적을 행하여야만 예수를 잘 믿는다고 하는 것은 사람들이 다닐만한 길이 아니라는 말씀이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달리실 때 기적은 고사하고 자신의 몸 하나도 건지지 못하셨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할 수 없는 방법이 아니라, 누구나 그럴 수밖에 없는 십자가의 자리에서 구원을 보이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이신 길이신 것이다.


신비한 일을 일으키려 하는 사람들은 다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하고, 또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그러한 능력을 주셨다고 한다. 그런데 이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도 예수님을 만났을 때,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여”(막 5:7)이라고 알아 봤다. 당시에 아무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지 않을 때 인데 이미 귀신 들린 자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아보았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예수님께 고침을 받아야 하는 귀신 들린 사람이었을 뿐이다.


그러므로 오늘날도 자기가 아무리 하나님의 능력으로 기적을 행하고 하나님을 위한다고 해도, 귀신 들린 자가 “나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원컨대 하나님 앞에 맹세하고 나를 괴롭게 마옵소서.”(막 5:7)라고 말한 것과 같이, 예수님과 귀신 들린 자는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누구나 될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의 자리를 보이려 오신 분이기에, 사람들이 다니지 못하는 길을 제시하는 사람들과는 무관하다는 것이다. 


즉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행함으로 신앙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과도, 예수님과도 상관이 없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오히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났을 괴롭게 된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누가 이 글을 읽으면서 그 마음이 괴롭다면 그 사람은 분명히 신비한 능력이 있을수록 더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분명하다. 그리고 그는 만민을 구원하러 오신 예수님과는 무관한 사람이라서 괴로운 것이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 들린 사람은 소리를 지르고 자기의 몸을 돌로 상하게 한다고 했다. 사람의 말이라고 해도 메시지가 없으면 그것은 소리일 뿐이다. 귀신 들린 자가 소리를 질렀다는 것은, 메시지가 없는 소리라는 것이다. 메시지는 말하는 사람에게 주안점이 있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들을 때 의미가 있어야 메시지가 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본 영화는 아니지만 2009년에 개봉된 중국영화 <바람의 소리>라는 영화가 있는데, 반일 단체의 두목을 잡기 위해서 두목으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일본 군인들이 초대형식으로 성에 가두어 두고 일본군 입장에서 스파이를 색출하려고 한 영화다.


그 영화에서 성에 초대받은 사람 중에 두 사람이 실재 반일 단체 소속이었는데, 그 사람들은 어떤 중국 노래를 불렀을 때, 노래 어떤 부분의 높낮이로서 의미가 전달되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다른 사람들은 노래 소리로 들리지만 이미 약속이 되어있는 반일 단체의 사람들은 그 안에서 메시지를 알아차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그 두 명 중 한 명은 고문 받다 죽고, 한 명은 병원에 후송되어 가서 자기들만의 노래를 불러 메시지를 전달하여 참사를 막게 된다. 그게 메시지고, 그렇게 메시지가 있는 것은 말씀이고 말이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다 소리다.


즉 하나님께서 신비한 능력을 일으키시는 목적과 사람의 존재 목적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일반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일을 행하는 사람들이 그러한 능력이 신앙이라고 말하는 것은 귀신 들린 사람의 소리와 같이 입에서 나오지만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 들을 때는 그냥 소리인 것이다. 왜 그것이 소리이냐 하면 보통 사람들은 쇠사슬에 묶이면 풀 수 없기 때문이다. 즉 그냥 연약한 인생들이 할 수 없는 것을 이야기하는 그것을 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아무런 메시지가 없다. 기도해서 병을 고치지 못하는 사람에게 그것이 신앙이라고 말하면 그것이 바로 메시지가 없는 소리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복음 즉 복된 소식이고 복된 말씀이 되는 것은 우리가 노력하지 않아도 기적을 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에 복음이 된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된다고 하는 모든 말은 그냥 소리일 뿐이다. 그리고 귀신 들린 사람들은 그런 소리를 한다는 것이다.


복음은 누가 들어도 복음이라야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목사만 할 수 있는 것이 있는 교회다. 그러면 그곳은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목사 아닌 사람은 어떻게 하란 말인가? 교회 안에서 돈 있을수록 인정을 받는다? 그렇다면 그곳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또 예배시간에 노래를 잘하는 사람만 특송을 할 수 있다? 그럼 그곳도 하나님의 나라가 될 수 없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그렇지 못한 사람들에게 그냥 소리에 불과한 일들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내가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신앙이라고 말하는 모든 소리는 다 보통 사람은 하지 못하는 사슬을 끊어버리는 힘이 있는 귀신들린 자의 소리와 같은 것이다.


그런 귀신 들린 자들을 예수님께서는 고치셨다. 그렇게 하신 것은 그것이 고침을 받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은 사람이 창조된 목적을 벗어나서 위대해지고 강해지는 것을 죄로 여기시기 때문이다. 귀신 들린 것과 신비한 능력을 행하는 것은 다른 것이라고 하고 싶을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같은 것이다. 뭐랄까 목적도 모르는 채 신비한 능력을 사모하는 것이 원인이라면, 그 결과는 귀신들린 자의 모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신비한 능력은 없어져야 하는가? 그게 아니다. 정말 진정한 능력과 기적이 뭔지 아는가? 그것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다. 또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들 앞에 기적을 보이시는 이유인 것이다. 신비한 능력 자체가 목적인 신앙은 다 귀신 들린 자와 같은 것이다. 신비한 능력이 있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고 하는 것 역시 다 귀신 들린 자와 같이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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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울 사도는 이어서 음란과 우상 숭배와 같은 것을 벗어 버리고, 새사람을 입었다고 하고 있다. 이 새사람은 어떤 사람인가 하면, 그것은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좇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대 원리이다. 성경이 시작될 때 창세기에서 이것을 선언하듯이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정의(definition)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하시는 말씀 성경의 정의가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진 사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예수님께서 그것을 보이신 이유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라고, 또 될 수 있다고, 또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이시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진 육신을 가지고 오셨고, 십자가에서 인간의 모습 외에 아무 것도 없었고 


또한 인간의 모습 이외에 아무 것도 없고 고통 받는 자리에서 스스로 내려올 수 없는 것이 인생이고 사람이라는 것을 몸소 보이신 곳이 바로 십자가의 자리이고, 그 모습을 보고 모든 사람이 자신도 그리스도와 같은 운명이라는 것을 알게 되시기를 바라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신의 운명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이 바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리고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좇은 사람의 모습인 것이다.


십자가에 대하여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 같지만, 바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십자가는 초인적인 능력을 상징하는 것이 아니다. 귀신이나 흡혈귀를 퇴치하거나 사람이 육신으로 지은 모든 죄를 법정의 결과에 상관없이 모두 사하여 주는 그런 능력을 가진 것이 십자가라고 생각하기도 하는데 그것은 십자가를 바로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십자가는 인간의 표준이 드러나는 자리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지를 말해주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산품으로 치면 금형(mold)과 같은 것이다. 십자가를 거쳐야 온전한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을 좇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사람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십자가는 우선 예수님께서 왜 십자가를 지셨지는 아는 것이 우선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또 하나님 나라의 일원으로서 하나님 앞에 죄가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죄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을 하나님이 만드셨는데 하나님이 보실 때 죄가 없다면 죄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세상적인 기준으로 죄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은 세상적인 관점으로는 죄가 매우 크다. 그러니까 사형을 당하신 것이다. 하지만 이 성경과 예수님의 모든 사역은 이 세상의 법과 이치에 대하여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인지할 수 있는 이 세상의 모든 것으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그리스도의 모습,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그 세상의 법, 곧 예수님을 죄인으로 십자가에 못 박은 법이 무엇인가 했을 때, 사람이 하나님이 지으신 그대로의 모습이 하나님 보시기에 좋고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라고 하면 죄가 되는 그런 법인 것이다. 그것이 유대인의 법이고 로마의 법인 것이다.


그 법은 오늘, 아니 인류가 가진 영원한 법이다. 왜냐하면 이 법의 뿌리가 선악과에 있고,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나면서 육신의 삶을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자신의 기준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을 스스로 정해서 그렇게 되고자 하는 것이 있는 한 영원한 법인 것이다.


그 법은 오늘날도 늘 우리 곁에 있다. 세상은 늘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만 승자요 의인으로 인정한다. 하다못해 사람이 겸손하고 봉사하고 착한 것도 경쟁과 비교가 되고 그 중에서 승자가 의인이 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어떻게 보면 그런 구조 자체가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닐 수 있지만, 문제는 모든 사람이 한 분야의 경쟁 방식에서 다 잘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운동이라는 분야에서 보면 모든 사람이 운동을 잘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고, 또 사람이 봉사를 하고 고상한 것으로 치면 또 다 그럴 수 없는 것이다. 또 사람이 아무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지 않으려 해도 나이 들면 도움이 필요하게 되는데, 나이 드는 것이 자신의 잘못도 아님에도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흔히 말하는 대로, "적어도 사람이 이래야지!"하는 것을 갖다 대기만 하면 웬만하면 죄인이 된다. 설사 어떤 것에 만족하더라도 세상에 있는 또 다른 기준으로 보면 무조건 다 죄인이 되게 되어 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가지고 있는 "적어도 사람이 이래야지"하는 모든 기준을 만족할 사람은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율법은 일 만개 중에 단 하나를 어긴 것이나 9,999개를 어긴 것이나 어겼다는 것에서는 동일한 기준을 가진 것이 율법이고 세상의 법이다. 그러므로 더욱 더 세상의 법 앞에서 온전한 의인은 있을 수 없다. 바로 그런 이유로 인해서 예수님께서 세상의 법으로는 육신을 가진 인생은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을 보이신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죄인이 된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의인이 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법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세상 사람들이 의인으로 삼는 것을 잘하는 사람을 얻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람의 본연의 모습으로 있는 그 자체, 그러니까 스스로 선악 간에 판단하는 선악과를 먹기 이전의 사람의 모습을 보이는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세상 사람들의 기준과 유대인들이 가지고 있었던 스스로 만든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도무지 왕도 아니고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데, 유대인의 왕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셨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는 죄인이 되셨던 것이다.


로마의 법으로 볼 때 왕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사람들 위에 군림할 힘을 가진 정치와 무력의 승자여야 하는데 예수님은 허구한 날을 죄인들과 세리들과 창기들과 놀고 있으면서 왕이라고 하니 용납할 수 없고, 안식일을 모양으로 범하고 유대인들의 규례는 지키지 않는데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 또한 용납될 수 없었던 것이다.


세리나 죄인들은 다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된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이 선하다 여기는 기준을 통과하지 못한 사람들이다. 예수님께서 그런 사람들과 함께 하셨다는 것은 그런 상태에 있는 사람이 더 하나님을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함께 했다는 것은 그 격이 같다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그런 모습, 선악과를 먹기 전에 아담이 자신의 벗은 모습을 부끄러워하지 않았듯, 사람이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심히 좋았던 인간의 모습, 곧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런 모습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야말로 하나님의 형상을 좇은 사람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사람이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이기에 살리실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었기에 죽음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바로 그것이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의 표상인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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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5-11 땅에 있는 지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3. 17:14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유는 땅에 있는 지체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특히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 (요한일서 5장 13-21절) 우상



먼저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땅에 있는 지체'는 이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육신이기만 하면 무조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땅의 것을 생각하는 지체, 땅의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아는 세계 안에 있는 육신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문맥적으로 뒷받침 하는 것은 7절에서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서 살 때에는'이라는 말씀과 같이 땅의 것을 본질로 아는 세계 안에 살 때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땅에 있는 지체가 가진 것이 바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육신이라고 그것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욕심도 정욕도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좀 다르다. 사람이 정욕을 가지고 있는 것과 음란이 다르고, 부정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욕은 욕심의 사유화적인 개념이며, 악한 정욕과 우상숭배와 같은 탐심은 다 사람의 본성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가진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겨 놓은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벗어난 자리에서 사람의 육신과 세상의 만물이 본질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매몰된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듯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위의 것과 땅의 것에 대한 개념이 없이 위의 것과 땅의 것을 혼합하거나 아니면 땅의 것을 본질로 아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실상은 그런 삶 그 자체가 바로 음란이고 사욕이고 부정한 정욕이고 탐심과 우상숭배인 것이다.


음란이나 간음의 정의는 정당한 짝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있어 성생활이라는 것이 부부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축복 받는 것이지만 그 짝이 아닌 상대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음란한 간음이라고 하는 것이듯, 사람도 자기가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 것과 짝이 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간음이고 부정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맞는 짝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의와 성품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짝으로 삼아서 자신의 본질로 삼지 않으면 어떤 아름다운 삶을 살아도 그것 자체가 이미 음란한 것이다.


이는 마치 해적이나 간첩이 서로 간에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정도로 각별하고 또 일반 국민들에게 유익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 죄를 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해적이나 간첩에게 가장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국가에 자수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어떤 일도 다 배우자 이외의 상대와 관계하는 간음과 같은 것이다. 


실재로 성경이 말씀하는 간음, 하나님께서 음란한 백성들이라고 하는 표현들은 다 이런 맥락이다. 그리고 이것을 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바로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마땅히 섬기고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 삶의 내용과 본질로 삼아야 하는 하나님외의 것을 사모하는 땅의 것을 생각하는 땅에 있는 지체로서 사는 것은 그 자체가 간음이고 음란이며 우상 숭배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탐심이 되는 것은 사람이 육신과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살아가게 되면 그것의 유익을 위하여 살게 된다. 즉 육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은 다 탐심인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주신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훔쳐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 근원적인 도적질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에게 이러한 우상 숭배의 것을 버리라고 하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지금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에 지금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현상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권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세상의 과학과 철학을 신앙에 가미하려는 생각이 바울 사도가 지적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단 하나,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유전자만 있으면 어떤 장소 어떤 상태라고 해도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듯, 그 대칭점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진노하시고 죄로 여기시는 것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해도 그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상황에서 모든 것은 그것이 어떤 아름답고 위대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다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앙은 참 단순한 것일 수 있다. 생명이라는 것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양은 단순해도 생명인지 아닌지, 생명이라는 것만 알면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단순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아들이며, 성경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인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는 짓이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답고 고상하고 위대해도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늘 음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의 한 단면으로 신앙에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것이 더해지면 더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이 골로새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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