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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장 1-12절) 세상을 이기는 법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2. 27. 08:20 Writer : 김홍덕

또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에 심각한 오해가 있는데 그것은 이기는 방법이다. 예수님과는 너무나 다른 방법으로 세상을 이기려 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져서 이겼는데 사람들은 이겨서 이기려 한다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오만함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선민의식이다. 다시 말해서 자신들은 구원을 받았고, 교회에 나오지 않는 사람들은 구원을 받지 못했다는 차이를 지위나 역할의 차이로 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구원을 받은 사람이 구원을 베풀고, 신앙을 가진 사람이 신앙이 없는 사람을 가르치고 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교회에 다니고 신앙을 가지고 있고 구원을 받았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진 자로서 베풀어야 한다는 것도 문제가 아니다. 그것까지는 좋은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전하는 자리가 낮은 자리인지 아닌지는 문제가 된다는 것이다.



세상에 범하는 기독교인의 두 가지 오류



이 시대에 교회가 사회로부터 지탄을 받는 외면적 이유는 크게 두 가지이다. 하나는 사람과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거나 죄를 짓고는 그 앞에는 반성하거나 죄 값을 치르지 않고 하나님 앞에 회개하면 그만이라는 편리한 속죄의 방식과 또 하나는 복음을 가졌다고 그렇지 않은 사람에 대하여 이른바 갑질을 하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그런 두 가지 형태는 다 하나님을 몰라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바로 알면 그럴 수 없다. 하나님께서 육신을 주신 목적과 세상과 사회 속에서 살게 하신 목적을 안다면 사회 속에서 지은 죄는 벌을 받아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는 사람들에게 짓고 하나님께 회개하면 된다고 주장하니

사람들이 이런 대안 없는 비판을 영화로까지 만드는 것이다.(영화 <쿼바디스> 홍보 영상)


예수님은 당시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실재로 죄를 지은 것이 없지만 하나님과 다른 관점을 가진 사람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십자가를 지게 한 것도 순종하셨는데 지금 예수님을 믿노라 하면서 세상이 자신을 정죄하는 것, 더더욱 자신이 지은 죄가 실정법을 위반한 것이 분명함에도 하나님이 용서하시면 되는 것이라 편리하게 생각하고 그것이 세상을 이긴 것이라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마음으로는 솔직히 그런 형태를 미친 짓이라고 하고 싶다.)



밤 늦은 시각 서울역에서 부흥회하듯 찬송을 부르는 사람들

이렇게 하는 것이 바로 <갑질>이다


또 하나는 복음에 대하여 자기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 주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가진 사람이 가지지 않은 사람에게 나누어주듯이 베푸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런 것을 지금 시대적인 표현으로 <갑질>이라고 할 것이다.즉 복음에 관한 갑질을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복음에 대하여 대단한 열정이 있는 것으로 보이지만 실제로 보면 그것은 복음에 대하여 주인 노릇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권능을 믿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아주 교묘하고 또 많은 경우 좋은 신앙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어떤 교회에서 청년들이 예수를 믿는 것에 대하여 가정에서 반대가 심하면 나와서 사는 것이 복음적이라고 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 상황을 짧은 말로 상황이 전부 정리되게 설명하기 힘들고 또 그 나름의 사유가 있고, 또 그것이 불가피한 경우도 실제로 많지만, 교회의 모임에 다녀오느라 늦게 오는 문제에 대하여 부부간에 또 부자간에 갈등이 일어나면 이혼하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부모를 떠나 다른 교인의 집에 들어가서 사는 것이 신앙적 결단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습이 바로 갑질의 형태라는 것이다.


복음은 그렇게 전하는 것이 아니다. 세상을 이기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다. 정말로 복음의 능력을 믿는다면 지금 당장이 아니라도 될 것은 된다고 믿는 것이 믿음인 것이다. 드라마 정도전에서 정도전이 자기가 꿈꾸는 세상은 자신이 아니면 다음 세대, 그 세대도 아니면 또 다음 세대에라도 반드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다. 즉 자신이 꿈꾸는 세상은 반드시 올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이다.


조금 다르긴 하지만 예수님의 모습도 그러했다. 예수님도 분명히 말고의 귀를 자르는 베드로에게 하늘의 천군과 천사들을 불러 예수님을 잡으러 온 병사들을 물리칠 수 없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정도전도 그 당시 얼마든지 정몽주를 죽일 수 있었지만 꿈꾸는 세상은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예수님도 역시 그렇게 천군천사가 예수님을 구해내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하셨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은 더 온전한 복음을 가진 사람이 사람관계에서 지위적인 상관이 되는 권세를 가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더 온전한 복음과 더 밝은 하나님의 계시를 알면 알수록 그 밝은 계시를 가지고 사람 위에서 가르치듯 또 심판하듯 하는 것이 아니라, 더 가졌기에 종이 되고 죄인이 되는 법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법이고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법이다.


대학생 때 친구들과 신앙 토론을 자주 하곤 했다. 그 중에 신학생이 몇 있었는데 다툼이 좀 심화되고 정리가 안 되면 그 중에 한 친구가 하는 말이 있었다. "야 임마 신학생이 그렇다면 그런 줄 알아라."는 것이다. 이런 모습이 바로 현대의 기독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갑질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난 복음이 있고 넌 없으니 내가 옳다는 것, 그것은 올바른 모습이 분명 아니다.


물론 계시가 밝은 사람의 말을 듣는 것이 옳다. 그러나 그것은 그 마음이 듣기로 작정하고 순종이 되는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 않은 사람,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과 그런 문제로 부딪히면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의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때 죄인이 되고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 될 수 있느냐 아니냐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또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에 대하여 예수님보다 더 분명히 아는 분이 있겠는가?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에 대하여 쥐뿔도 모르는 사람들의 손에 잡혀 십자가를 지셨다. 그런데 지금의 교회와 기독교인들은 그렇지 않다. 그런 상황에서 죄인이 되려 하지 않는다. 그런 상황이 되면 물리쳐야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는 법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긴 법은 하나님에 대하여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은 너 같은 모습이 아니라며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하는 것에 순종하시고 그 순종이 하나님의 법으로는 이긴 것이기에 하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이 세상을 이기신 이김이다.


그런데 부모나 배우자가 교회 생활이나 신앙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하나님을 모르는 자라며 배척하고 무시하는 갑질을 하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그렇게 해야 복음이 온전해 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 세상의 법을 자신의 법으로 삼은 것이다. 즉 그것은 세상에게 지고 세상의 법에 종이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은 복음이 자신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자신이 복음의 주인이라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은 이김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 아래서는 세상에 온전히 패한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법은 지는 것이다. 예수님과 같이 온전한 의인이시면서 죄인들이 자신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죽이려 하는 것 앞에서 호통 치거나 무찌르거나 하신 것이 아니다. 그저 자신보다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자신을 십자가로 또 죽음으로 끌고 가는 것에 순종하시는 것, 그것이 바로 예수님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아마 이것은 현대의 신앙인들이 가장 잘 알지 못하는 것의 하나가 아닐까 싶다. 정말로 이것은 교묘하고 정말로 이것은 내려놓기 힘든 것이다. 신앙적 관점이 자신과 부족하다 여기는 사람에게 큰 소리 치고 다투고 또 꾸짖고 그것으로 갈등을 겪는 이유가 다 이런 것에 있다.


하나님의 권능을 정말로 믿고 복음의 능력을 믿으면 십자가로 끌려 갈 수 있다. 오늘 지금 내 앞에서 복음을 분명하게 밝히고 증명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능력은 반드시 나타난다는 것을 믿는 믿음이 있으면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 믿음은 신념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운명 같은, 그리고 거절할 수 없이 이루어짐을 본능처럼 아는 믿음



이 믿음은 자기 안에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이 분명하여야 한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 중에 그런 것은 오직 하나 생명 밖에 없다. 사람은 자신이 사람 같은 행동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사람이란 유전자로 났기 때문에 어떤 상황이라도 사람으로 살 수 밖에 없음을 안다. 심지어 그것을 인식도 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도 그러하다.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듯 하나님 말씀의 역사가 어떻게 되는지가 분명하게 열린 사람은 언제나 십자가를 질 수 있고, 자신 보다 신앙이 부족한 사람 앞에서 언제나 죄인 되고 또 그를 위해 수고하고 죽을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랑이다.


바로 하나님께로 난 사람이며,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이고,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은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이고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이기는 법은 죽어서 이기는 법이다. 가르쳐서 이기는 것도 아니고, 정복하여 이기는 것도 아니며, 지금 당장 밝히는 것도 아니다. 자신은 죽되 하나님께서 살리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아니 죽고 난 다음에는 어떤 일이 일어나든 자신보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의 송사 앞에 죄인 되는 사람이다.


'복음도 모르는 사람에게 이런 꼴을 당해서야 되겠느냐?'라든가, '이래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겠느냐?'라거나, '그래서 예수 믿는다고 하겠는가?' 하고, 복음을 알지 못하면서 예수 믿는 사람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이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라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다 핑계요 변명이요 타협이다. 그리고 그것은 세상을 이기는 이김이 아니다. 그리고 오히려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이 져서 이기는 법의 성령을 훼방하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법은 세상의 프레임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예수님의 이김은 언제나 가지고 밝고 의로운 사람이 죄인이 되는 것이다. 상대를 제압하고 물리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죄인 되는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그 마음에 깨달음이 생기고 마음 안에서 자신도 그렇게 살고 싶은 마음이 생겨서 스스로 자복하게 하는 그 법인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보여주신 세상을 이기신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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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로 이기심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심을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면서 보여주신 것이 시작이라면 완성이자 결정체는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다. 실재로 요한복음 13장에서 17장까지 이어지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 제자들과 유월절 만찬에서부터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에 이르기까지 말씀하신 내용은 정말로 예수님 사역의 의미를 온전하게 알려주는 것이다.


그 안에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겼다는 말씀을 하셨다는 것을 요한사도가 기록하고 있다. 이 요한 사도가 요한 일서에서 세상을 이긴 이김이 무엇인지를 말하면서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긴 것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 이후 하신 말씀을 그 때는 다 알아듣지도 못했을 것이다. 특히나 17장의 기도문의 경우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문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은데,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제자들은 멀리 떨어져 있었고, 그나마 또 졸고 있었다. 설자 예수님께서 아주 큰소리로 기도하셔서 그것을 다 기억하고 있다 해도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기에 병사들이 예수님을 체포하러 왔을 때 다 도망가 버린 것이다.


그런 요한 사도와 사도들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믿음이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은 예수님께서 그 때 하신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가시고 나면 예수님의 하신 모든 말씀이 생각나고 기억났기도 했고, 또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서 예수님의 정체성과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께로 난다는 것이 어떤 것이며 믿음이란 무엇을 믿는 것인지에 대하여 요한의 마음속에서 생수의 강이 넘치듯 깨달아졌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도 같은 법이 적용된다. 성경을 읽어도 알지 못하다가 십자가의 사건이 가진 정체성과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되는 순간 그 안에 믿음이 있게 되고 하나님의 빛이 비취는 세로운 세계의 시작이 열리는 것이다.


이는 세상을 이긴 이김과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아는 것은 안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세계이며 이러한 모든 것은 예수님의 모든 말씀과 행적과 십자가와 부활을 보면서 그것이 자신의 사건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열리게 될 때 일어나는 일인 것이다. 그러니까 그것을 객관적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 아니라, 믿음이란 자기 안에서 예수님의 말씀과 사역이 자기의 모습과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이 동화되듯 열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은 초라한 모습일 수 없고, 나사렛과 같은 천한 출신이 될 수 없고, 안식일도 지키지 않는 사람이 될 수 없는 것이라는 세상의 법아래 세상이 연약하게 또 죄인으로 여기는 육신을 가진 삶을 살면서 그것을 세상과 같이 연약하고 추한 것으로 보지 않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십자가를 지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 또한 그렇게 아들 삼으시려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심을 안에서부터 믿어 삶으로 표현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이김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세상을 이기신 이김은 세상적인 방법이 아니다. 십자가 밑에 있던 세상의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에 하나님의 아들은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오는 능력을 ㅂ여주는 것이라 생각했기에 예수님을 조롱했지만 예수님은 그들의 그런 생각과는 다르게 십자가에서 그냥 돌아가셨고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고 하신 것이다.


지금도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것에 대하여 생각하는 것이 세상의 경쟁 방식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이기는 것이라 믿는다. 즉 세상이 경쟁하는 방식인 시험에서 교회에 다시는 사람이 합격하면 세상을 이긴 것이라 생각하고, 세상이 끊임없이 경쟁하는 부자가 되는 경쟁에서 이겨서 부자가 되면 이긴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생각은 교회, 특별히 큰 교회들의 기본적인 생각인 듯하다. 교회를 일단 크게 지어놓으면 사람이 모인다고 생각하기에 신도시가 건설되면 가장 먼저 교회가 크게 지어지고, 또 사람들의 눈을 찌푸리게 만들 정도의 큰돈으로 화려한 성전을 짓고서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고 기도하고 예배드리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고 생각하는 결정체인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알아야 할 것이 있다면 지금의 많은 사람들과 교회들이 세상에서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각양의 경쟁이나 다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이겨내서 1등하고 부자 되고 화려해지고 고상해지는 것이 이김이라 생각하지만 바로 그 세상의 법이 예수님을 죄인으로 만들고 십자가에 못 박았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지금의 신앙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규정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법으로 이기면 세상에서 승리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건 아주 어리석은 믿음이다.


예수님의 이기심은 오히려 세상의 법 안에서 이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법 때문에 죄인 되고 십자가를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세상을 이긴 예수님의 이김이고 승리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하나님께로 난 자가 아니며, 이것을 모르면 세상을 이긴 것이 아니라 세상의 종일뿐인 것이다.


건축자들은 버린 돌, 세상의 법으로 볼 때는 아무짝에도 쓸데없고, 그 법으로 보면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또한 유대인의 왕이라 할 수 없는 초라한 사람의 모습, 그 모습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때 십자가에 못 박아 버리는 그 모습이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고, 또한 그것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우리 사람의 본질적인 정체성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의 보습이다.


그래서 건축자의 버린 돌이 모퉁이 돌이 되듯이 그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신 것이다. 세상의 법 아래서는 죄인 되고 죽을 수밖에 없지만 그렇게 죽는 사람이 하나님의 법 안에서는 진정으로 살았다 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 이 비밀을 모르면 하나님에 대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구원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르는 것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세상의 법과 프레임 안에 있는 경쟁에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과 보여주신 기적이 객관적인 사살이라 믿는 믿음을 가지면 이기고 승리하여 1등 되고 부자 되고 고상한 사람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화려하게 짓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이다. 


그것은 마귀의 시험을 이기지 못한 것이고 십자가를 욕보이는 것일 뿐 믿음도 하나님의 아들의 삶도 또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다. 그것 그냥 하나님에 대하여 모르는 것이고 자기의 신념에 매몰된 자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일 뿐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런 생각으로 아무리 밥을 퍼 주고 또 자기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준다 해도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창조와 존재 목적을 아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사랑을 알지 못하고 사랑이 없는 것이며 계명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세상의 법,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생각에 끌려가서 자신이 죄인이 되는 삶이다. 다시 말해서 세상에서 요구하는 경쟁의 법과 프레임 안에서 자신은 늘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죄인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것으로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오히려 그렇게 죽을 때 살아나고 이기는 것임을 아는 것이다. 그것이 자신의 운명이고 자신의 본성이며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이 죽고자 하면 사는 법이고, 죄인이 의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법이며, 이것을 알기 원하시는 하나님의 마음이 사랑이며 이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이것이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이며, 이것이 그리스도 안에서 사는 삶이고 이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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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하신다.(요일 5:4) 그리고 그 이기는 근거는 <믿음>이라고 하신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세상을 이긴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믿음은 하나님께로 난 자 곧 하나님의 아들이 가진 것이라는 말씀이다.


세상을 이긴다는 것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유월절 만찬 이후 제자들에게 길게 말씀하신 내용들 중에 요한복음 16장 마지막에 나온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하시니라(요 16:33)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말씀을 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셔서 기도하신 다음에 병사들에게 잡혀가시고 석방되지 않고 그 길로 십자가를 지시게 된다. 그리고 '담대하라' 부탁한 제자들은 모두 떠나가게 된다. 그것은 언뜻 이긴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면 도무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어떤 것일까? 그 이김의 근거가 되는 것이 믿음이라 했는데 그 믿음은 또 어떤 것인가?


사람들은 이겼다는 것에 대한 개념이 있는데 한마디로 하면 자기의 뜻과 목표가 이루어진 것을 말한다. 예수님께서 유월절을 앞두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서 놓고 자기의 겉옷을 예수님 가시는 길에 놓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라며 환영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심판을 받자 바라바를 선택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길 것이라 기대했다. 그들은 이제 예수님께서 자신들을 로마로부터의 통치를 벗어날 수 있게 할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실상은 잡혀서 심문을 받으니 자신들의 기대를 배신한 예수님을 배신해 버렸다. 그들의 뜻과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세상을 이기거나 자신들을 해방시킬 메시야가 아니라 생각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과 사람들이 이김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람들은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이 예수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생존 경쟁에서 예수 믿는 믿음이 있으면 이긴다는 것이며, 또한 사람이 가진 각종 본능을 억제하고 유혹을 이기는 것이라 생각한다.


한마디로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이르고, 또 부자가 되며, 또 도덕적으로 훌륭한 사람이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이김은 세상의 법이다. 피라미드 꼭대기로 올라가서 세상을 더 풍족히 누리기 위한 다툼의 승리에 대한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법아래 있는 이김이지 예수님의 이김이 아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께로 난 자는 세상을 이긴다고 했다. 하나님께로 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어떤 것인지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은 당연히 예수님의 이김이다. 그 예수님의 이김의 시작은 40일 금식 이후에 받으신 시험을 이기신 것이고, 대미는 십자가와 부활로 세상을 이기신 이김이다.




마귀의 시험에 이기심



마귀가 예수님을 시험 할 때 단서가 있었다. 그것은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다. 즉 다시 말해서 '네가 하나님께로 나고, 하나님으로부터 왔다면?'이라는 조건으로 예수님을 시험했다는 것이다.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돌로 떡을 만들고, 네가 만약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고 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온 세상을 가질 수 있는 조건을 제시하는 이 세 가지 시험을 받으셨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어떤 시험도 마귀의 요구대로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마귀의 요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조건이 아니라는 것과, 세상의 모든 영광을 얻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상을 이기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과 세상의 모든 영광의 주인이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은 돌에 새긴 율법을 떡처럼 자신의 것으로 소화할 수 있어야 하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아들은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다치지 않는 육신의 한계를 극복한 존재도 아니며, 또한 눈에 보이는 세상이 실존이나 경배할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것은 세상을 이긴 이김은 율법을 죽어라 지켜내는 것도 아니며,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도 아니며,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승리가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시고 이기신 이김은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이 생각하는 이김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사람들은 인간의 연약함을 이겨내서 강해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고, 율법을 지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며, 눈에 보이는 세상을 얻는 것이 세상에서 영광을 얻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을 시험하지 않는 것과 하나님만 경배하는 것이 시험을 그리고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돌을 떡으로 만드는 것은 기적을 보이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금식한 예수님을 먹을 것으로 유혹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가진 배고픔 중에 가장 큰 것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배고픔이다. 즉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사는지에 대한 배고픔이 가장 크다. 그 배고픔을 율법을 지켜 행함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율법을 잘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생각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아들이면 돌로 떡을 만들어 보라는 유혹이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을 더 잘 지키고, 성경을 문자 그대로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사는 모든 것이 바로 돌로 떡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 신앙이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유대인이 가진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의이다.


또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거나 다치지 않는다는 것은 육신을 부인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육신의 한계를 극복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육신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거나 십자가에 못 박혀도 죽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영지주의 신앙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이 육신의 한계 너머의 존재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 육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에 불요한 것이며, 이 육신의 삶은 구원이나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과는 무관한 것이라는 생각을 하는 것이 영지주의적인 생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다들 그런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성경을 문자적으로 잘 지켜 행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금식하고 철야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라 생각하며,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을 이기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생각과 같은 것이다.


성경의 말씀은 문자적으로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으면 그렇게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의 표현과 본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육신이 높은 곳에서 떨어져도 죽지 않는 기적을 행하여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높은 곳에서 떨어지면 죽는 연약한 육신을 하나님께서 사랑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고 믿음이며, 그런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이다.


그리고 영광을 얻는 것이 눈에 보이는 세상을 얻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천하 만물, 눈에 보이는 이 세상, 피라미드와 같이 끊임없이 높은 곳으로 또 높은 곳을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에 영광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교회를 화려하게 짓고, 예수 믿는 사람이 세상의 높은 자리에 오르고 부자가 되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 세상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이 천하 만물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 오직 하나님만을 경배하는 것, 하나님께서 이 모든 세상의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을 예수님께서 마귀의 시험을 통해 보여주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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