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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장 13-21절) 그의 뜻대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9. 06:18 Writer : 김홍덕

"그를 향하여 우리의 가진 바 담대한 이것이니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요일 5:14)"는 아주 유명한 성경 구절이다. 어릴 적부터 교회에 다녔다면 아마 어지간하면 외우고 있을 정도로 유명한 성경구절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고자 한다. 심지어 살아가면서 선택해야 하는 모든 순간들 앞에서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인지에 대하여 심각하게 생각한다. 언제나 어느 것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알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



하나님의 뜻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의 뜻은 삶의 이정표와 같은 것이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따른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 하나님의 뜻은 매뉴얼처럼 어딘가에 분명하게 딱 명시되어 있으면 선택의 순간에 찾아보면 될 텐데 그런 게 없어 보인다.


하지만 알고 보면 하나님은 사람들에게 매뉴얼과 같이 아주 분명하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이고 어디에 있는지를 말씀하시고 있다. 이는 성경에 한정된 이야기만은 아니다. 성경은 모든 하나님의 말씀을 축약하고 있는 것이고, 진정한 하나님의 뜻인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책이기에 중요한 것이다.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살아가면서 언제라도 어떤 순간에도 궁금해 하거나 헤아리기 어렵지 않게 분명하게 말씀하셨고, 말씀하시고 계신다. 다만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을 아전인수 격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뜻이 늘 궁금할 뿐이다.



심청전 하면 <효>가 생각이 나듯, 책을 쓰거나, 어떤 프로젝트를 수립하고 추진한다는 것은 가장 골격이 되는 뜻이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그리고 사람을 만드실 때는 심청전의 효와 같이 핵심이 되는 뜻과 의도와 목적이 분명히 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다.


즉, 하나님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같은 것이다. 심청전의 저자가 효에 대한 글을 쓰기로 하고 이런 저런 사건들을 구성하여 심청전을 저술했듯, 하나님께서도 사람을 통하여 표현하고 나타내고자 하신 뜻이 있어서 사람들 만드시고, 또한 사람의 삶에 관여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신이 지어진 목적을 알지 못한 상태에서 살아가는 순간 순간의 선택 앞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고 하는 것은 어디로 갈지는 정하지 않고 어떤 차를 탈 것인지를 고민하는 것과 같다.


하나님의 뜻은 바로 그런 관점에서 이해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왜 사는지를 아는 것에 뿌리를 두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다른 것은 자연스럽게 다 따라오는 것이고, 어떤 순간, 어떤 선택이라 해도 살아가는 목적과 이유가 분명하면 언제나 그것에 맞는 결정을 하게 되고 할 수 있고 그렇게 살 수 있게 세상을 이미 창조해 두셨다는 것 까지 알게 된다.


사도 요한이 말씀하고 있는 <그의 뜻대로>라는 것 역시 바로 그런 것이다. 사도 요한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줄곧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을 설명해 오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 생명, 범죄, 세상을 이기는 것, 사랑과 같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관계들을 말씀하고 있다. 그것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타났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 <그의 뜻>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시신 기본 목적이다. 그 뜻 안에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라면과 떡볶이 중에 어느 것이 하나님의 뜻인지 궁금해 하는 것과 같은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5장 14절 앞에는 어떤 말씀이 있는가 하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한다"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그의 뜻대로 구하는 것이 바로 영생이라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영생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이며, 그의 뜻이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라는 것이기에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심이라>는 말씀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 안에서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절대로 없는 약속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께 자신의 존재 목적을 구하는 것은 구해야 얻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아는 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것은 절대로 어긋남이 없는 약속인 것이다.


하나님의 뜻은 어떤 사람과 결혼할지, 어떤 직업을 가질 것인지와 같은 것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뜻은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같은 것이다. 그것이 모든 것이다. 모든 이차방정식은 이차방정식 공식을 알면 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뜻, 자신의 존재 목적을 분명하게 아는 사람은 살아가면서 선택해야하는 어떤 순간에도 늘 하나님의 뜻 안에서 결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종이 위에 쇳가루를 놓고 자석을 대면 쇳가루들이 자기장의 방향으로 정돈되는 것처럼, 사람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살아가는 이유를 분명하게 알면 삶의 모든 문제들이 쇳가루와 같이 가지런하고 분명하게 정돈되게 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고,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셨는데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성품과 존재의 영광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지으셨기에 그 뜻을 아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 뜻대로 경영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에 세상의 모든 문제와 선택이 어떤 것인지, 또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가 분명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눈이 밝아지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고 빛이 있는 것이고 세상을 다스리는 것이고 그의 뜻대로 구하여 이루어지는 세계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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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쿼바디스>를 보고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 4. 11:35 Writer : 김홍덕

지난 성탄절 오후 아내와 함께 영화 쿼바디스를 관람하러 갔다. 영화는 다소간의 기독교계 반발도 있고 해서 큰 영화관이 아닌 옛날 소극장 같은 곳에서 상영을 하고 있었다. 그것도 일주일에 몇 회 정도. 내가 사는 대구에서는 동성 아트홀이라는 곳에서 하고 있는데 집에서 멀지 않고 마침 상영 회차가 있어 다녀왔다.





영화는 기독교의 문제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가 로마에서 제도화 되고, 유럽에 가서 문화가 되고, 미국에 가서 기업이 되었다. 그리고 한국에서 대기업이 되었다."라는 영화 속의 말의 이 영화의 정체성을 대변한다고 불 수 있겠다.


영화는 주제는 분명하지만 시나리오나 구성은 없고 추적 60분 같은 구성으로 되어 있다. 교회 세습, 목사의 횡령과 성추행 사건과 같은 것을 시작과 끝에 사랑의 교회의 입이 쩍 벌어지는 새교회의 모습을 보여 주며 그 안에 다 녹이려 한 것 같았다.


이런 고발들을 볼 때 느끼는 감정은 단순하다. 가장 먼저는 '문제구만!' 싶은 생각이 든다. 이 영화를 보면서 교회가 좋아지기는 힘들 것이다. 나 역시 보면서 평소에 가진 생각인 <평신도에 의한 교회>가 제도적으로는 적어도 지금의 한국교회보다는 나은 것이겠다 싶었다.


하지만 이런 모든 고발들은 "이래서는 안됩니다"이다. 대안이 없다. 물론 그 안에 '이래서는 안됩니다. 이러지 맙시다'라는 대안은 있지만, 그건 명확한 대안은 아니다. 그리고 잘 생각해보면 뭐 이전에 모르던 내용을 새롭게 알았다고 할 수는 없다. 그 영화를 보고 C.C.C도 사위에게 세습을 했다는 말초적인 사실도 새로운 것으로 친다면 모를까?


한국교회는 분명이 쇠퇴하고 있다. 아무리 교인들이 뭐라해도 반등을 시킬 동력이 없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어쩌면 제도적으로나 상황적으로 대세가 기울어진 상황일지도 모른다. 그건 우리 같은 평교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개가 짖는다고 기차가 서는 것이 아니니 말이다.


하지만 신앙이란 대세의 문제가 아니다. 엘리야의 때에도 바알에게 절하지 않은 칠천이 있었듯 하나님께서 아직 세상을 그냥 두시는 것은 어떤 기쁨과 만족하시는 것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똥 싸고 울기만 하는 갓난 아기가 어쩌다 한번 웃어주는 그것이 그 모든 수고를 잊게하는 것 처럼 말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나라이고 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을 함께하는 공동체인 것은 분명하다. 다만 교회가 정말로 교회 다울 때 그렇다는 것이지, 교회가 이 영화에서 보여주는 한국교회의 모습과 같다면 그건 모양은 교회지만 정말로 '(주)예수그리스도'라는 거대 기업, 그것도 목사가 세습할 수 있는 사기업에 불과하다.


이 영화는 그런 모습을 고발한 영화다. 하지만 안타까운 것은 대안이 없다는 것이다. 영화가 보여주는 대안이라는 것은 "이러지 맙시다!!'정도이다. 하지만 진정한 대안은 "이렇게 합시다,"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이것에도 맹점이 있다. 그건 뭔가를 주장하는 것은 쉽다. 물론 바른 것을 말할 정도로 맑은 가치관을 가지는 것이 어렵기에 정말로 바른 말을 할 수 있다면 그건 다행일 수 있다.


하지만 진정한 대안은 제도나 혁명적인 사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정말로 교회가 바로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의 정체성을 회복하는 것은 아주 작은 것에 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이 신앙의 정체성을 바로 알고 자신의 삶을 묵묵히 깨달은 바 대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다.


영화를 보면서 이런 고발들에 대한 대안을 제도적으로 수립하자거나 뭐 혁신적인 계기가 일어나기를 바라는 것은 어리석은 것이라 생각했다. 이는 부패가 너무 만연해서 포기하자는 것이 아니다. 한국교회가 아무리 병들었어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진정한 신앙의 모습을 회복해서 살아가면, 그 사람을 보고 사람들이 십자가 밑의 백부장과 같이 진정한 예수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대안은 정말 그것 뿐이다. 진정 그것 뿐이다. 어두움은 물러가게 하는 것은 물러가라고 외치는 소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작은 빛 하나가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부패를 물리치자 외치고 고발하는 영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끼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는 그것이 진정 교회를 회복하는 지름길이다.


그렇게 묵묵히 살아가는 삶, 그 삶은 칠흙 같은 어두움과 같은 세상과 교회 앞에 성냥불 같을지라도 그런 빛이 필요하다. 당장 오늘 나의 빛으로 해결되지 않아도 어느 날 그 작은 성냥 불빛이 밝아오는 새벽 빛과 함께 같은 빛으로 하나되는 시간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진정한 교회의 희망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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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아들이 있는 자에게 생명이 있다는 것을 전하는 것은 아들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사도 요한이 전한다고 하셨다. 전체적으로 요한 일서 5장의 말씀들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이 있다는 것은 생명 곧 영원하신 하나님의 생명이 있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영생이란 개념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개념은 객관적인 시간이 끊임이 없는 영원한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이나 상태가 초, 분, 시, 일, 년 이렇게 흘러가는 시간이 끊임없이 지속되는 상태라고 생각한다. 그런 시간 개념을 크로노스적인 개념이라고 하는데, 객관적인 시간을 말한다. 즉 일반적으로 사람은 영원이라고 하면 무한대의 객관적 시간의 적용을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객관적 시간은 그 자체로도 모순이 있을 뿐 아니라, 하나님의 시간 개념이나 영원함에 대한 개념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예를 들어 천지창조를 예로 들어보자. 객관적 시간이 시작되는 시점을 천지의 시작이라고 하면 시작 전 시점에 대한 개념도 있어야 한다. 즉 객관적 시간은 객관성 때문에 시작과 끝을 규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영생이라는 것이 육신의 삶이 객관적인 시간의 무한함 속에 들어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적인 것 역시 마찬가지이다. 영이라는 것은 어차피 객관적 시간의 차원 아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영은 영의 시간 개념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객관적인 시간, 달력으로 표시되는 시간은 육신의 차원에 관한 것이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시간의 영원성이라기보다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를 믿는 것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바로 그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영생이란 사람이 하나님을 바로 믿는 상태가 곧 영생의 상태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영원하신 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원성은 객관적 시간으로 가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객관적 시간의 시작을 태초로 보는 사람들의 생각은 그 시간을 시작하신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그 시각 이전에도 계셨기 때문에 그 시간들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영원성은 물리적인 시간의 개념에 입각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영생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것이라고 할 때, 이름은 그 생명의 정체성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 정체성을 믿는다는 것이다. 그 정체성은 바로 사람의 정체성이다.


그것은 그리스도는 이 땅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사람의 정체성과 목적을 알게 하려 보내신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아는 것이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오신 목적, 오셔서 하신 말씀을 믿는다는 것이기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이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형상인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생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 들어가는 것이다. 창조의 목적 안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으로 전환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세상의 법칙에 따라 이겨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세상의 법을 사람에게 적용하면 사람은 언제나 패배자요 죄인이 될 수밖에 없는 존재가 바로 사람,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생은 인생의 목적이 세상의 법에서 경쟁하여 이기고 그 안에서 영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람으로 지어진 자신의 삶의 목적은 오히려 그런 것에 패배할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세상의 법 앞에서 패배자가 된다는 것을 아는 것이 어떻게 영생인가? 또 패배자로 발견되면 망하는 것일 뿐인데, 어째서 그렇게 되는 것이 바른 것이고 영생인가? 하는 의문이 들 수밖에 없다. 이는 앞에서 수 없이 말한 바와 같이 하나님께서는 이 육신을 강함을 표현하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으셨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자. 예수님은 세상의 법으로 볼 때,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나 유대인의 왕의 꼴이 아닌데 자신을 유대인의 왕이라, 더욱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니 이를 용납할 수 없는 사람들이 십자가에 끌어다 못 박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그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 여기셨기에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던 것이다. 왜냐하면 그 모습이 하나님 보실 때 살았다 할 수 있는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다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교훈을 따라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살아가는 삶에 있음을 알고 그렇게 살아가게 되면 하나님의 세계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세계 안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바울 사도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라고 늘 표현했던 것이다.


이 그리스도 안에서의 삶은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삶이고, 사람의 정체성과 삶의 목적이 세상의 법에 따라 경쟁해서 이기고 사람의 능력 이상으로 더 강해지고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연약한 사람의 원래 모습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듯, 그 연약한 육신의 한계와 주신 능력 안에서 하나님께서 존재하심을 다른 사람이 알 수 있는 수고로운 삶을 살아가는 것 그것이다.


사람들은 흔히 교회 다니면 다른 사람보다 더 도덕적이고, 더 예의 바르고, 더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으로 안다. 그 모양은 옳다. 하지만 왜 그렇게 살아야 하는지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하면 세상 사람들과의 경쟁에서 하나님께서 이기게 하셨다고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그런 영광을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연약하고 고상하지 못한 상태로 지으심은 그것을 극복하라고 숙제로 주신 것이 아니기에 그것을 극복하고 세상에서 성공한 것을 영광으로 여기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게 영광이 된다면 올림픽에서 1등하거나 어떤 대회나 경쟁에서 1등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 믿어도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람의 연약함과 고상하지 못한 한계를 자랑하라고 주신 것도 아니다. 그러한 것은 당연히 사람이 자긍하고 교만하게 되는 것을 막는 것이다. 그런 한계 안에 있다는 것은 사람이 사람을 볼 때 서로가 그렇다는 것을 인정하고 살아가라는 의미도 포함된 것이다. 그래야 서로를 위한 마음과 사랑이 나오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경쟁하는 상대에게 사랑을 느낄 수는 없지만, 자신과 동일한 한계를 가진 상대에게는 사랑이 나올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가진 이 연약한 육신,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인정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이 한계를 벗을 수 없음에도 그것에 메여 인생을 수고하고 짐 진 듯 살아가는 사람에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려주기 위하여 자신의 모든 삶을 수고로이 드리는 것이다.


그 삶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보여주신 사랑이고, 또한 사람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래서 그 모습을 본 사도들과 제자들도 어떻게든지 사람들에게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육신의 모든 수고를 감당한 것이다. 


그리고 이 세계를 아는 사람들, 즉 하나님으로부터 온 이 동일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들은 진정한 형제이고, 그 형제들은 이 수고로운 삶에 대하여 서로 알기에 서로 돕고 또한 사랑하는 것이다. 바로 이런 사랑을 하는 사람들을 보면 세상 사람들이 예수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예수님께서 말씀하셨고, 실제로 십자가 밑의 백부장도 그러했던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회적은 물의를 일으키지 않는다. 생각해보라. 사람에게 그 정체성을 알려 주기 위하여 그 사람보다 낮은 위치에서 그 사람을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무시하겠는가? 신앙 없다고 배척하겠는가? 자기가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사람이 불쾌하게 여길 일을 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이 법으로 여기고 도덕으로 여기는 것을 이유 없이 어기고 무시하겠는가?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죄도 없으심에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것인지를 보이시기 위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는데,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무시하고, 세상의 법을 무시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은 진정으로 악법도 법이라며 죽어갈 수 있는 것이다.


다만 한 가지 그들에게 있어 절대로 용납할 수 없는 것이 있다면,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부인하는 것,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부인하는 것,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와 같이 하나님의 아들은 인간 이상의 어떤 것을 보여야 한다는 것 그것은 용납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런 것에는 목숨을 걸고 외치다 죽는 것이다. 그것이 순교인 것이다.


바로 이런 세계, 바로 이런 삶, 이런 생명을 가진 인생이 바로 영생을 얻은 인생이다. 이런 삶은 하나님의 법 안에, 하나님의 세계 안에,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이것이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이들이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당연히 영생이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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