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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장 13-21절) 우리가 아는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14. 07:19 Writer : 김홍덕

사도 요한은 이제 서신을 마무리 해 가고 있다. 서신을 마무리하면서 형제들에게 '우리가 아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다. 그 세 가지는 먼저 하나님께로 난 자는 범죄하지 않는다는 것과 우리가 하나님께 속했다는 것과 끝으로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고, 그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며 영생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다.


이것은 요한 일서의 앞부분에서 영지주의에 대하여 경계를 했던 내용의 결론이다. 요한 일서는 먼저 태초부터 있는 말씀이 만질 수 있는 육신으로 우리에게 오셨다는 것에서 시작했다. 그 육신으로 오신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을 말씀함으로 육신을 부정하는 신앙에 대하여 경계한 것이다.


이러한 요한 사도의 의도는 사람의 육신이라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형식이고 실존이라는 것을 알게 하시려고 예수님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자신도 그와 같이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되나 하나님의 법으로는 아들이 되는 것을 알게 하심을 전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하나님과 사귐이고 하나님과 하나 되는 것이며, 그렇게 하나님과 하나 되고 사귐이 있는 삶이 바로 죄 사함을 받은 삶이라 말씀하고 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할 육신을 가진 존재로 지어졌다는 목적이 달성된 것이기 때문에 목적과 의도가 수용된 피조물이 창조주 앞에 살아 있고 구원을 받은 존재가 되는 법을 설명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며,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안에서 사는 계명을 지키는 삶을 사는 사람은 사랑하는 삶을 산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사랑은 존재의 이유를 알게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사랑하시는 것이고, 또한 그 사랑을 아는 사람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는 수고와 희생을 치르며 사람에게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하는 참 사랑을 전하심과 같이 계명을 지키는 삶, 곧 사랑하는 사람의 삶 역시 다른 사람에게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는 수고와 희생을 감당할 수 있다는 것을 형제가 궁핍한데 재물로 돕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씀을 들어 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요한일서의 전반적인 흐림은 일관된 것이다. 또한 이것은 요한 사도가 가진 개인적 신앙관이 아니라 성경의 모든 내용, 예수님을 만나고 전하는 모든 사도들의 말씀이 하나 같이 이것을 전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대교회 당시에는 육신이라는 형식만 중요하게 여겨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야 한다는 유대인과 반대로 육신은 중요하지 않다며 형식을 포기하는 영지주의가 만연했다.


이러한 신앙들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내용이신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어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고자 하신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 둘 다 어긋난 것이다. 그러한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사랑하심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 있고 그것을 알게 하심이며, 내용이신 하나님이 형식인 사람의 삶을 통해 표현되는 것이 하나 되는 것이고, 사귐이며, 구원인 것을 모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풍조는 초대교회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의 신앙도 그러하다. 이 시대에는 그런 것이 없다면, 이 시대의 사람들이 영지주의나 율법주의에 대하여 경계해야할 이유가 없다면 그런 말씀이 이 시대로 전해질 이유가 없는 것이기도 하거니와, 그런 이유가 아니라도 이 시대의 신앙도 잘 살펴보면 그 두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정말로 세상을 단순하게 정리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내용과 형식>으로 나눌 수 있다. 우리가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그렇고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 하나님이 이 세상을 만드셨으니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의 방식이 그런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사람이 만든 스마트폰은 하드웨어라는 형식이 있고, 통화나 정보의 전달이라는 목적이자 내용이 있고, 사람이 만든 자동차는 이동이라는 목적과 쇠로 만든 차체가 있는 것이 바로 그렇다. 그리고 그 둘이 하나가 되지 못하면 사람들은 그것을 죽은 것이라 한다. 시간을 알려주지 못하는 시계, 굴러가지 않는 자동차, 전화가 되지 않는 휴대폰, 그런 것은 다 죽은 것이다. 즉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되지 못한 것은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도 이와 같다. 사람이 만든 물건이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그 법 안에 있다는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인생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는 창조하신 분이 계시고 창조하신 분이 있다는 것은 창조의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육신의 삶에는 내용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람도 의학적으로 아무리 살아서 숨 쉬고 멀쩡해도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그 안에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죽음과 사망의 실체이다.


그 하나님의 목적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육신이라는 형식이 어떤 내용과 하나가 되어야 살아 있는 것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표현하고 내용으로 삼아야 할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 사람의 존재 목적인 내용과 육신이라는 형식이 사귀고 하나가 된 사람을 하나님은 아들이라 하시는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뜻이 표현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그 표현되어야 할 내용,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표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성품은 위대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모습이다. 세상의 법과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의 아들도 왕도 될 수 없고 오히려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신 사람의 모습인 것을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다.


율법주의 곧 내용은 없고 형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죄인이고, 십자가에서는 잠깐 기절했고 마술 같은 것이라며 형식을 부인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 사람의 육신이 가진 욕망과 연약함과 고상하지 못한 것을 포기해 버리는 것이다.


이런 모습은 오늘날도 만연한데 지금도 성경을 지키면 하나님이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형식만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앙이 완연하고, 반대로 세상은 종살이라며 무조건 떠나고 배척하며 이 세상에서의 삶은 대충 살아도 신앙만 잘 지키면 된다고 생각하는 영지주의에 뿌리를 둔 신앙들이 만연하다.


하지만 요한 사도가 전한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은 적그리스도라고 경계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과 사람이 하나가 되고 사귐이 있는 사랑의 상태를 전했다. 그리고 이것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이라고 시작했다.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된 상태를 살아 있다고 한다. 살아 있다는 것은 생명이 있다고 한다. 사람도 호흡과 육체가 하나로 있을 때 살아 있는 것이다. 그리고 살아서 숨 쉬고 산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이름, 곧 사람이라는 유전자로 살아가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표현하자면 사람은 사람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사람으로 살기 위해 연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람답게 살려고 한다는 것은 사람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는 것은 내용이자 목적이며 존재의 이유이신 하나님과 사람의 삶이 하나가 된 삶이 살아 있는 삶이다. 그 삶은 하나님에 대하여 사람에 대하여 밝히 안다. 사람이 사람이 무엇인지 아는 것처럼. 아니 오히려 그것은 알 필요조차 없는 것이다. 유전자로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런 사람들, 하나님이 아버지가 되시는 사람들, 하나님이 사람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시는 창조의 목적이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이라는 형식과 하나가 된 삶을 사는 사람은 존재 목적을 이탈한 죄와 무관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당연하고, 그 상태가 하나님 안에 있는 것임이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여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도 당연하다. 예수님을 아는 것은 기록에 남은 예수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 목적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 그것인데 어떻게 예수님을 모르고 그 삶을 살겠는가? 고로 하나님의 성품이라는 내용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라야 예수님을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영생은 시간적으로 영원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다. 이 영생은 사람이 영원하신 또 시간적으로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목적을 아는 세계에 속하고 하나 되는 것이 영생이다. 영원하신 하나님의 의와 세계 안에 들어갔는데 어떻게 영원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그것은 당연히 사람들이 생각하는 시간의 영원성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영생이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이 '우리가 아는 것'이라고 한 것은 생명이 그 안에 있어 금할 수 없게 표현되고 아는 것이다. 병아리는 포식자가 나타나면 본능적으로 피하는 것을 배우지 않아도 안다. 그것이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도 마찬가지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자신의 운명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삶의 내용으로 하나가 된 생명 있는 삶은 범죄도 않고 하나님 안에 있고 영생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아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 사도의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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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에 이어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거든 구하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을 잘 생각해보면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하는 것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참으로 성경은 앞뒤가 잘 맞는 말씀이라는 생각이 든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사도 요한의 말씀하시는 바가 이렇게도 같다는 것이 그것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다시 돌아와서 보면, 하나님께 구하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무엇인가 하는 것에 관한 것이다. 그러하기에 형제가 사망에 이르는 죄 구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구하라고 하신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구하는 것이 기도인지 다시 확인하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요한 사도의 말씀 중에 사람이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가 있고 그렇지 않고 사망에 이르는 죄가 있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그리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하는 것을 보면 구하라고 하고 사망에 이르는 죄 범하는 것에 대하여는 구하라고 말씀하지 않고 있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이 있다면, 요한 사도가 요한일서를 기록하면서 보여준 디테일이 여기서는 좀 약하다는 점이다. 아주 상세하게 육신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하나님을 아는 것에 대하여 설명해 온 것에 비하면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만한 사항에 대하여 상세한 기록이 없다는 것이 좀 의아하긴 하다.

(사실 이러한 말씀은 신학적 고찰이 도움이 되리라 생각이 된다. 하지만 그렇다고 신학이 없으면 성경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단지 도움이 되긴 하겠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형제>이다. 사람이 사망에 이르는 죄에 빠지고 그렇지 않고 하는 것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형제가 그럴 때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하여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 형제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안에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이 아버지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알고, 또 무엇보다 그것이 바로 자신의 모습이고 정체성이라는 것을 고백한 사람이다. 바로 그런 사람들이 서로에게 형제가 되는 것이다.


죄는 하나님 앞에 죄가 되는 것이 있고, 사회적으로 또한 나라의 법이나 회사의 규칙과 같은 것에 명시된 죄가 있다. 하나님 앞에서 죄는 모든 것에 앞서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벗어난 상태를 말한다. 그 안에 있으면 아무리 세상의 법을 잘 지키고 법 없이 살 사람이라 여겨져도 죄인이다. 그것은 멋있는 차가 움직이지 못하는 것과 같은 것이고, 해적 사회에서 아무리 법을 잘 지켜도 나라에 투항하지 않은 상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형제가 사망에 이르지 않는 죄를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그 정체성을 상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지은 어떤 범죄들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형제라 할 수 있는 범주 안에서 어떤 죄 범하는 것을 보면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고백이 상실되지 않은 상태에서 범하는 어떤 범죄에 대하여는 하나님께 간구하라는 의미이다. 이는 형제라 할 수 있는 정체성이 있는 사람을 위해서는 기도하라는 의미인 것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사망에 이르는 죄는 형제라는 범주를 벗어나는 상태에 있는 사람에 대한 말씀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누구하나 예외 없이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지 못하는 상태였는데 그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말인가 싶겠지만, 여기서 말씀하시는 것은 형제라고 할 수 있는 상태에 있다가 그것을 버리고 가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가 그리스도이심을 알고 있던 사람이 이를 버리고 이를 부인하는 것이 바로 사망에 이르는 죄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구분에 앞서 생각해 볼 것이 있다. 이렇듯 용서 받지 못하는 죄와 같이 그것에 절대로 빠지면 안 되는 자리에 대하여 성경이 말씀을 하면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그것은 아주 중요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어디로 가야할지 염려만 하는 자리에서 그것을 알려고 하는 것은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사유의 대표가 어쩌면 <예정론>이 아닐까 싶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예정했다면 다 된 것이지 사람이 할 것이 있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이다. 사망에 이르는 죄를 범했다면 이미 종친 것인데 더 이상 세상 선하게 살 필요가 있겠느냐 하는 생각과 같은 것들이 그것이다.


이러한 관점은 좀 다르게 볼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예정론이라는 것이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가늠하라고 있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난 삶을 살게 된 사람이 자신의 여정을 돌아볼 때 하나님께 그 모든 것을 예정하셨다는 고백이 있을 때 비로소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간구도 체휼도 없는 사람이 '나는 예정되었을까?' 고민하는 것이 예정론에 대한 사유가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모든 경륜은 모든 사람, 오고 가는 모든 역사 속의 어떤 사람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허투루 지은 사람이 없고, 어떤 생명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은 사람이기에 모든 사람은 다 예정된 사람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누가 이것을 부정하겠는가?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을 믿지도 않으면서 자신이 예정되었는지 아닌지를 고민하고 스스로 결정하고 그 결정을 따라 맘대로 사는 것이다. 이런 것을 예정이라고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예정이 있다면 그것은 모든 사람이 다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 그 경륜 안에 들어 간 사람은 돌아보면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예정하심 안에 있었다고 말하고 고백하고 예정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사망에 이르는 죄, 사함 받지 못하는 죄, 성령을 훼방하는 죄도 사망에 이르지 않는 삶, 죄 사함 받고 구원 받은 삶, 성령의 감동으로 사는 삶 안에서 보면 그렇지 않은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이지, 그렇게 살아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것이 어떤 것인지 알려고 하는 것은 아무런 의미 없는 고민일 뿐이다.


그런 것을 잘 알 수 있는 비유가 바로 달란트 비유라 할 수 있다. 주인이 어떤 사람이라 스스로 규정한 한 달란트 받은 종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고자 하는 예정에 들어가 보지도 않고 예정론을 논하고, 죄 사함을 받지 못했는데 사함 받지 못하는 죄를 고민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알고 이 사도 요한의 말씀을 보면 이해가 될 수 있다. 또 이것을 디테일하게 설명하지 않은 것 역시 알 수 있다. 생명이 있고,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사이에 굳이 설명이 필요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무엇을 구하는 것인지도 알고, 형제가 무엇인지 안다면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것인지 아닌지를 본능처럼 안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설명하자면, 형제라 할 수 있는 생명을 자신의 생명으로 삼고 있느냐? 아니면 그것을 버렸느냐?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바로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형제의 정체성에 관해서 말이다.


죄와 사함에 관해서라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면 모든 죄를 사하신다는 대 전제가 기본이다. 다시 말해서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는 없다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굳이 사함을 받지 못하는 죄에 대한 정의가 필요하다면 이것을 알고도 여기서 떠나는 것 그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것을 버리는 것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을 맛본 사람은 그것을 버리지 않는다. 개로 태어난 강아지가 세월 보내면서 고양이가 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서 그것을 버리고 스스로 그것을 부인하지 않는데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이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생명의 주가 되시는 것이다.


사도 요한은 그래서 이어 나오는 5장 18절에서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범죄치 아니하는 줄을 우리가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 곧 형제라 할 수 있는 사람들, 하나님 아버지를 알고, 영생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이 자신 안에 있는 것을 아는 사람은 범죄치 않고, 사망에 이르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해 보지 않고 어떤 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인지, 예정된 것이 무엇인지 궁리하는 사람은 모르지만, 하나님께로 난 자들은 그것을 스스로 안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에 이르는 죄와 그렇지 않은 죄는 머리로 연구하고 신학으로 연구하는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이 예정하신 사람인지를 연구하는 것도 아니다. 모든 사람을 구원하시기로 예정하시고 사람을 지으신 하나님을 믿고 그 뜻 안에 순종한 사람은 사망에 이르지도 않고 자신이 예정되었다는 것도 알고, 또 사망에 이르는 죄가 무엇인지도 알고, 무엇을 하나님께 구해야 하는지도 알며,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아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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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한다. 성경에서는 구하면 주신다는 말씀이 많다. 하지만 앞뒤 정황을 잘 살펴보면 <그의 뜻대로>, <내 이름으로>와 같은 조건들이 많이 있다. 이러한 말씀들은 사람들이 기도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는지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은 들어주시는 구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의 신앙의 절대적인 요소로 보이지만 사실 알고 보면 사람은 그릇으로 표현되고 있다. 그리고 '채워 주소서'와 같이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것을 사람이 담아내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라는 것을 암시하는 표현들이 많다.


이러한 표현이 함축된 말씀이 바로 <순종>이다. 그리고 믿음이라는 것은 아주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 역시 신앙을 깊이 상고해 보면 알 수 있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또한 사람이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시작한 것이 아니기에 삶의 어느 한 절도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킬 권리가 있는 것은 아니다. 적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서는 말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많은 기도를 한다. 밥 달라, 배우자 달라, 돈 달라, 명예를 달라면서 말이다. 그런 것이 없어서 삶이 힘드니 곤고함을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또 어떤 이들은 그런 것이 잘 갖추어지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서 달라고 한다. 그런 사람들이 교회를 좌지우지 하면 <쿼바디스>같은 영화를 찍는 사람도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기도를 하면 들으신다고 생각한다. 그건 당연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이 모르는 것은 육신의 문제, 돈이나 배우자, 명예나 합격과 같은 것을 들어주시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기도하면 들어주시겠다고 약속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먼저 그런 것이 왜 하나님의 주요 관심사가 아닌가 하면 단편적으로 봐도 예수님께서 그런 것을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셨기도 하지만, 정말로 생각해보면 그런 것은 이미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실 때 다 얻을 수 있도록 사람에게 육신을 주실 때 이미 함께 주신 만물과 사회의 규칙으로 주셔서 그 안에 맞게 살면 다 얻을 수 있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 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천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마 6:25-28)


또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말씀을 하셨다. 이름은 생명이다. 여기서 말하는 이름은 생물학적으로 봐도 생명의 특성을 규정하는 이름을 말한다. 기린, 코끼리와 같은 이름이 그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구하라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 안에서 구하라는 말씀인 것이다.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 이는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인하여 영광을 얻으시게 하려 함이라 내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내게 구하면 내가 시행하리라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나의 계명을 지키리라(요 14:13-15)


요한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그의 뜻대로 무엇을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 역시 이 안에 있는 말씀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뜻은 삶의 어떤 선택에 있어 무엇을 선택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인가를 궁금해 하는 그런 뜻이 아니라고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바로 그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시는 기도는 어쩌면 한 가지로 모을 수 있다. 하나님께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해 달라고 구하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려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 그 답이 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생명으로, 그의 뜻대로 구하면 들으신다는 말씀이 바로 이 말씀인 것이다.


사람들은 살아가면서 필요한 재화와 용역에 대한 아쉬움을 떨칠 수 없고, 또 한편으로 생각하면 자기로서는 어떻게 할 수 없는 문제로 다가오기도 한다. 정말로 돈이 궁한 사람에게 재벌 갑부의 자리는 갈 수 없는 소위 말하는 넘사벽이다. 그러면 이것은 사람의 영역이 아니라 신의 영역이라고 생각을 한다. 그리고는 신께 기도하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그럴 때 양심상(?) 재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는 않는다. 그저 자신의 궁함을 벗을 정도의 해결을 바라면서 자신은 겸손하고 양심적이라는 생각까지 덧붙인다. 하지만 그건 기도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다.


돈에 관해서는 어떤 사회든 그것을 버는 법이 있다. 그것에 순종하면 된다. 물론 그 법 안에는 잘 벌리는 것과 망하는 것이 공존한다. 그런 양면성이 공존한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일수록 더 부자가 된다. 망하는 것을 겁을 낸다는 것은, 망하는 것은 나쁜 것이고, 악한 것이며, 자신에게 일어나서는 안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이 선악 간에 판단하는 기준이 보여주는 한 단면이다. 사회에 속해서 살면서 사회가 가진 양면성 중에 자신에게 유익한 단면만이 선이고, 자신에게 일어나야 하며, 반대인 면은 나쁜 것이기에 자신에게 일어나면 안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정말로 선악과를 먹은 마음의 상태인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 선악과의 관점을 벗은 눈으로 세상을 살면, 그야말로 부유함에도 궁핍함에도 거할 수 있는 세계 안에 자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순종을 아는 삶을 살게 된다.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먹고 마시는 것에 대하여 염려하지 않는다는 말씀이 그에게 이루어진 것이다.


망할 만하면 망하고 죽을 만하면 죽는 것이 인생이다. 자신이 사회의 일원으로, 아니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육신을 가지고 살도록 하신 뜻을 알고 그 삶에 순종하는 사람은 사회의 법으로 열심히 살고 그러함에도 부유해지지 못했을 때 순종하고 사는 믿음이 있는 삶을 산다. (이것은 필자 역시 보고 체휼한 바이기에 확신하는 바이다.)


물론 그런 순종이 있다고 삶이 곤고해지지 않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곤고함이 자신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것을 일깨우고, 또한 그런 것이 어우러져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하고, 또한 사람들에게 세상에 속한 이 육신을 가진 삶이라는 형식을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해 가는 삶에 더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모습, 열심히 살아도 세상이 바뀌지 않으니 '법 바꾸자', '정치 잘해라' 외치거나 구국 기도회를 하는 공격적인 방법 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그 모습이 오히려 세상을 바꾼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세상을 구한 것처럼 말이다.(어쩌면 한국교회가 이것만 알아도 나라를 구할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기도하고 구할 것은 하나님께서 나를 이 땅에 살게 하신 이유이지, 이 땅에 살아가면서 필요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다 주셨고, 그 법으로 살면 되는 것이다. 꼭 부자가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가난하면 하나님께 민폐가 되는 것이 아니다. 부자면 복음 전하기 편리한 것이지 유리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음은 성령의 감동으로 전해지는 것이지 돈의 능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복음을 전하고 세상에서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것만 본다면, 서울역에서 큰 소리로 기도하고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고, 수만 명이 모이는 화려한 교회의 건축물이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누구나 겪는 삶의 형편에 순종하면서 그 삶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표현해 가는 그 모습이 보는 사람에게 성령의 감동을 주는 그 법으로 전해지는 것이다.


이런 모든 것을 안다면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구해야 할지 명확하게 밝아지는 빛이 비취는 것이다. 하나님께 사람이 구해야 할 것은 자신의 삶이 존재하는 이유를 알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다. 그 이유를 알면 어두운 방에 들어가서 방에 불을 밝힌 것 같이 세상에 존재하는 자신과 세상의 법과 모든 것이 방 안의 비품들을 그 용도대로 사용하듯 사용법을 밝히 아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한 마디로 말한다면, <내가 누구인지?>, <왜 사는지?>하는 것을 나를 지으신 하나님께 구하고 그것을 알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다스리는 것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과 세상 지으신 목적이 모두 하나님의 표현하는 사람, 곧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인 하나님의 아들이 나오는 것을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졌다는 것을 알고 자신의 삶을 그것에 순종하는 사람은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다스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진정한 왕이다. 세상의 권력과 정치로 다스려서 왕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왕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서 죽기 까지 하는 왕의 법 안에 있는 삶을 사는 왕이다.


바로 그런 존재가 되기를 기도하라는 것이다. 바로 그 기도,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구하는 소리를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들으신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들으심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일이고, 그 아들을 보내셔서 십자가에 죽게 하시면서 까지 들어 주시려 작정하신 하나님의 마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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