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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5-11 땅에 있는 지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3. 17:14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말씀에 이어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이유는 땅에 있는 지체는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 있기 때문이라고 했고 특히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했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 (요한일서 5장 13-21절) 우상



먼저 이 말씀에서 우리는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땅에 있는 지체'는 이 육신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육신이기만 하면 무조건 여기에 해당된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땅의 것을 생각하는 지체, 땅의 것이 전부인 것으로 아는 세계 안에 있는 육신의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문맥적으로 뒷받침 하는 것은 7절에서 '너희도 전에 그 가운데서 살 때에는'이라는 말씀과 같이 땅의 것을 본질로 아는 세계 안에 살 때라는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렇다는 것은 땅에 있는 지체가 가진 것이 바로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은 모든 사람이 다 가지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하나님의 아들로 사는 육신이라고 그것에서 벗어날 방법은 없다. 하나님의 아들이자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이라고 욕심도 정욕도 없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좀 다르다. 사람이 정욕을 가지고 있는 것과 음란이 다르고, 부정은 말할 것도 없고, 사욕은 욕심의 사유화적인 개념이며, 악한 정욕과 우상숭배와 같은 탐심은 다 사람의 본성 자체가 아니라 사람이 자리를 벗어난 상태에서 가진 욕망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메겨 놓은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창조목적과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을 벗어난 자리에서 사람의 육신과 세상의 만물이 본질이라 생각하고 그것에 매몰된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듯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났다는 것은 위의 것과 땅의 것에 대한 개념이 없이 위의 것과 땅의 것을 혼합하거나 아니면 땅의 것을 본질로 아는 삶을 사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실상은 그런 삶 그 자체가 바로 음란이고 사욕이고 부정한 정욕이고 탐심과 우상숭배인 것이다.


음란이나 간음의 정의는 정당한 짝과 함께 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사람에게 있어 성생활이라는 것이 부부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축복 받는 것이지만 그 짝이 아닌 상대와의 관계를 부정하고 음란한 간음이라고 하는 것이듯, 사람도 자기가 내용으로 삼아야 하는 것과 짝이 되지 않으면 존재 자체가 간음이고 부정한 존재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맞는 짝이 무엇인가 하면 그것은 두 말 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의와 성품인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와 목적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나타내어 하나님의 이미지를 나타내기 위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것을 짝으로 삼아서 자신의 본질로 삼지 않으면 어떤 아름다운 삶을 살아도 그것 자체가 이미 음란한 것이다.


이는 마치 해적이나 간첩이 서로 간에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정도로 각별하고 또 일반 국민들에게 유익한 일을 한다 해도 그것으로 죄를 면할 수 없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해적이나 간첩에게 가장 선결되어야 하는 것은 국가에 자수하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아닌 상태에서 하는 어떤 일도 다 배우자 이외의 상대와 관계하는 간음과 같은 것이다. 


실재로 성경이 말씀하는 간음, 하나님께서 음란한 백성들이라고 하는 표현들은 다 이런 맥락이다. 그리고 이것을 종교적인 용어로 말하면 바로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즉 사람이 마땅히 섬기고 자신의 주인으로 삼고, 자기 삶의 내용과 본질로 삼아야 하는 하나님외의 것을 사모하는 땅의 것을 생각하는 땅에 있는 지체로서 사는 것은 그 자체가 간음이고 음란이며 우상 숭배인 것이다.


또한 이것이 탐심이 되는 것은 사람이 육신과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살아가게 되면 그것의 유익을 위하여 살게 된다. 즉 육신의 삶이 자신의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열심히 사는 것은 다 탐심인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고 주신 인생을 자신의 것으로 훔쳐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또한 성경이 말씀하는 근원적인 도적질이기도 한 것이다.


지금 바울 사도가 골로새에 있는 신실한 형제들에게 이러한 우상 숭배의 것을 버리라고 하고 있다. 그것은 역설적으로 지금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골로새 교회에 지금 바울이 지적하고 있는 현상들이 있기 때문에 이런 권면을 하고 있다는 것은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세상의 과학과 철학을 신앙에 가미하려는 생각이 바울 사도가 지적하는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에서 하나님께서 진노하시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하나님께서 죽었다고 하는 것은 단 하나, 그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것이다.


생명이라는 것이 유전자만 있으면 어떤 장소 어떤 상태라고 해도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사는 것이듯, 그 대칭점에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진노하시고 죄로 여기시는 것이 아무리 다양하고 복잡해도 그것은 단 하나 하나님의 존재 목적을 상실한 상황에서 모든 것은 그것이 어떤 아름답고 위대한 모양을 하고 있어도 다 잘못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신앙은 참 단순한 것일 수 있다. 생명이라는 것이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양은 단순해도 생명인지 아닌지, 생명이라는 것만 알면 그 모든 것을 다 이해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단순한 측면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도 이와 다를 바가 없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사람의 존재 목적으로 거듭난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삶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고, 아들이며, 성경의 모든 것이 그 사람의 삶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인 반면,


그렇지 않은 사람은 하는 짓이 아무리 대단하고 아름답고 고상하고 위대해도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늘 음란하고 우상을 숭배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의 한 단면으로 신앙에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것이 더해지면 더 좋은 신앙이라 여기는 것이 골로새 교회의 문제이기도 하고 오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에 대하여 잘 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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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4 위의 것과 땅의 것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2. 15:24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신 말씀에 나오는 <위의 것>은 바울 사도만의 표현은 아니다. 물론 이런 표현이 자주 나오는 것은 아니지만, 성경 전체로 본다면 하늘의 것이 있고 땅의 것이 있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바로 <물>이다. 하늘의 물과 땅의 물이 있다는 것이다. 창세기 1장에서는 이를 궁창 위의 물과 궁창 아래의 물이라고 말씀하고 창세기 7장에서는 홍수가 날 때 하늘의 창이 열리고 깊은 샘이 터졌다는 말씀이 있다.

하나님이 궁창을 만드사 궁창 아래의 물과 궁창 위의 물로 나뉘게 하시매 그대로 되니라. 하나님이 궁창을 하늘이라 칭하시니라(창 1:8-9상)

노아 육백 세 되던 해 이월 곧 그 달 십칠일이라 그 날에 큰 깊음의 샘들이 터지며 하늘의 창들이 열려(창 7:11)


특히 이 중에서 노아의 홍수의 경우에는 홍수의 원인 곧 하나님께서 땅을 심판하시겠다고 생각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6장에 나오는 대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를 삼고 그 사이에서 위대한 자 네피림(용사)이 나왔기 때문'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창 6:2-4)


먼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면서 물은 만드셨다고 하신 것이 아니라 바로 나누었다고 하셨는데, 이 물은 모든 사람이 가지고 있는 정체성의 갈증 곧 '나는 누구인가?', '왜 사는가?', '존재의 이유가 무엇인가?'와 같은 인간 본연의 갈증을 해갈하는 물을 말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진 자신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물, 곧 말씀을 취해야 하는데, 이 갈증을 해소하기 위한 물은 두 가지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궁창 곧 하늘 위의 물과 하늘 아래의 물, 곧 땅에 속한 것이 있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우리 생활에도 상수도가 있고 하수도가 있다. 상수는 마시는 물이고, 하수는 상수를 사용하고 난 다음에 버려지는 더 정확히는 소산물이다. 그리고 사람만이 마시는 상수와 사용된 하수를 구분한다. 그러니까 짐승들은 마시는 물과 사용하는 물의 구분이 없고, 심지어 자신이 마시는 물속에 배설까지 하지만 개의치도 않고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러한 것을 보면 사람은 분명히 마시는 물과 마시고 난 다음에 버려지는 물이 있다. 그것은 육신도 그러하지만 영혼 곧 자신의 정체성에 관한 것 역시 그러하다. 즉 사람이 자신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기 위해서는 마셔도 되는 상수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궁창 위의 물,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늘 위의 물을 먹는 사람이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이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아내로 취했다는 것은 성경에서 여자(비유이지 여자라는 존재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를 사람과 땅의 것으로 비유되는 것으로 볼 때 이것은 골로새 교회의 문제와 같이 땅에 있는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것이 좋아 보여서 그것을 신앙에 더하는 모양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배필 곧 동급의 짝으로 삼았다는 것은 사람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상수도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과 땅에서 난 것이 짝을 이루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 위대한 네피림이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은 오늘날 교회들이 더 크고 위대해지는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설명하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어 위대함을 좇자 하나님은 사람들이 육신이 되었다고 하셨다. 즉 이는 내용은 없고 형식만 남은 존재가 되었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내용이 있을 때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육신이 된 사람, 곧 상수와 하수의 구분이 없는 짐승과 동일한 존재가 된 사람을 땅에서 멸하시려 홍수를 일으키셨는데, 이 때 하늘의 창이 열려서 물이 쏟아지고 땅의 깊은 샘이 터져서 물이 넘쳐서 합해져서 홍수가 되었다는 말씀을 하고 계신 것이다.


이것은 하늘의 물, 곧 하나님의 말씀과 땅에서 나는 과학과 철학과 같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 같은 것이요, 하수도 물과 같은 것이며, 땅에서 나는 것이 섞이면 홍수, 곧 물은 넘쳐나나 사람은 죽을 수밖에 없는 상태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홍수는 자기 정체성에 목마른 사람, 곧 육신이 되어 버려 내용이 없어 내용에 대한 채움이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하늘과 땅의 물이 합쳐져서 넘쳐났지만 오히려 그 넘쳐나는 물로 다 죽임을 당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다시 말하면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섞으면 죽음에 이른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위의 것과 땅의 것에 관한 분명한 하나님의 생각이신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에 있어 가장 위험하고 하나님을 진노케 하는 생각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세상을 뒤섞는 생각, 그리고 신앙에 땅에서 난 지식, 곧 금방은 사람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수가성 여인이 내내 길러야 했던 그 물을 섞는 것이 가장 타락한 생각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것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고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비단 골로새 교회 사람들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이것을 분명히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땅에서 비롯되는 생각, 곧 사람이 연구하고 생각하여 낸 것은 그것이 아무리 위대하고 사람의 정체를 밝혀 낼 것 같지만 그것은 다 궁창 아래의 물일뿐이다. 과학은 아직 사람을 다 알지 못하고, 철학도 모든 인류가 공감하는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사고를 내어 놓은 적이 없다. 


그런 것이 설사 이후 세대 언젠가 가능해진다 해도(그럴 리도 없지만) 이전 세대에도 적용될 수 있는 유일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뿐인 것이다.


하수는 다 상수도를 사용함으로 나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 땅의 모든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그 어떤 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함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초등학문이라고 하신 것이다.


위의 것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과 뜻과 의일 뿐이다. 사람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하나님의 뜻은 사람 지으신 뜻이다. 즉 사람의 존재 목적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정체성에 대한 갈증을 해갈하는 유일한 물이고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수인 것이다.


이 물은 마시면 다시 갈하지 않고 오히려 그 안에서 넘쳐 난다고 하셨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그 유전자가 안에 있으면 언제나 그 생명력을 발휘 한다. 언제나 넘쳐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 위하여 준비하고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저 살아가기만 하면 넘쳐나는 것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그저 사람으로 살기만 하면 사람이라는 것을 넘쳐나게 표현한다. 그것은 이 세상의 모든 생명이 그렇다. 꽃도 꽃이라는 유전자가 표현되면 향기가 넘쳐나는 것이다. 동물은 그 넘침을 활동으로 보이고 식물은 향기와 같은 것으로 넘쳐나게 표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향기라는 표현을 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은 늘 위의 것을 사모해야 한다. 즉 사람은 하나님을 담기 위한 질그릇과 같은 존재이기 때문에 언제나 하나님을 담아내고 표현하기를 사모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위의 것이고, 그것이 궁창 위의 물이고, 그것이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다.


이 물은 분명히 하나님께서 구분하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것에 대한 구분이 없으면 하나님의 세계가 창조되지 않은 사람이다. 이것은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 한다. 사람이 상수와 하수를 구분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것은 절대로 섞으면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은 자신에게 노아 홍수를 초래하는 것이 될 뿐이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것을 섞은 신앙은 하나님께서 죽은 것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 물에서 나오는 것이 바로 세례다. 그곳에서 살 수 없다는 고백이 바로 세례인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말씀과 세상의 것을 섞은 세계 안에서는 살 수 없다는 고백이 있는 사람이 진정한 세례를 받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에 또한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주신 것 이외에 어떤 것도 사람의 본분으로 삼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런 것은 다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을 위하여 있고(롬 8장), 또한 그것은 하수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나오는 산출물과 같은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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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1-4 위의 것을 생각하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1. 13:29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면 위의 것을 생각하라고 말씀하고 있다. "위의 것?" 그것이 무엇일까? 어떤 것이 위의 것인가? 이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은 사람과 연관이 있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성경에는 위의 것이라는 것이 많이 나온다. 이런 위의 것을 총칭하면 하늘이다. 골로새서의 본문에도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하신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이다. <위(上)>의 대명사는 바로 "하늘"이다.


하늘과 땅은 분명한 관계성이 있다. 즉 땅은 어떤 경우도 하늘의 뜻을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비가 오지 않으면 어떤 땅도 다 말라 버린다. 또한 하늘이 비를 내리기 시작하면 어떤 땅이라도 다 젖고, 하늘이 추워지면 땅도 추워지고 하늘이 여름이 되면 땅이 여름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모든 것은 다 하늘의 변화에 맞추어 산다. 그렇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이 바로 '위의 것'의 한 단면이다. 즉 땅과 아래의 모든 것에 대한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하늘이고 그것이 위의 것이다. 


사람들은 '하늘'이라고 하면 위를 올려다보았을 때 보이는 파란 하늘을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늘은 그 하늘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땅 곧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모든 뜻이 있는 곳을 "하늘"이라고 한다. 이를 다르게 말하면 사람의 존재 목적이 하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위의 것'은 바로 하나님이 가지고 계신 사람의 존재목적,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과 삶의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뜻이 바로 그리스도와 함께 사람을 다시 살리시는 뜻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위의 것이다.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앞에서 다시 사신 것과 같은 법으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로 다시 살리심을 받았다는 것은 위의 뜻,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듯 자신에게 이루어짐으로 그것을 산 생명으로 보시는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그리스도의 법으로 인하여 살리심을 받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법, 곧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시는 하늘의 법이 아닌 땅의 법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이는 땅의 것이 하늘의 것을 더럽히기 때문이 아니다. 땅의 모든 것은 다 하늘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하늘 곧 위의 것만으로 부족함이 없는 것인데, 신앙에 있어 땅의 것을 생각하고 그것을 더하여야 더 좋은 신앙이 된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바울 사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은 땅의 것이 위의 것을 훼손할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다. 땅의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위의 것으로 부족하다는 것이고, 그것은 그리스도를 살리신 법이 사람을 구원하는 것에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며, 땅의 것은 위의 것에서 비롯된 것인데, 오히려 땅의 것으로 위의 것을 보완하려는 어리석음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있어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보다 좋지 않을 뿐 아니라 성경의 많은 사도들이 말씀하고 경계하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신앙을 가감하는 것이다. 즉 하늘의 뜻, 위의 뜻 곧 하나님의 뜻이요 그리스도를 살리신 뜻을 가감하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믿지 않는 것보다 악한 것이다.


지금 골로새 교회의 사정이 그러했다. 철학과 과학에 대하여 알고 이것을 복음과 결합하여 화려하게 보이는 말과 이론으로 사람들을 미혹했을 때, 사람들이 신앙에 과학이나 철학을 더하는 것이 더 좋은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는 것이다. 즉 신앙을 가감했고, 땅의 것을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골로새 교회에 있었던 그런 현상은 오늘날도 만연한 사상이다. 만약 오늘날 그런 사상이 없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골로새서와 같은 성경을 읽게 두실 이유도 없을 것이다. 오늘날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고, 더 지식 있고, 더 공부하고, 더 부유하면 세상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예수 믿는 것이 유익하리라 생각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 가미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신학을 해야만 교회에서 설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해야(그것이 맞는 것인지 모르지만)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할 수 있다고 하고, 돈 많고 세상에서 높은 지위에 있으면 장로가 되기에 유익한 것이 다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것은 현 시대의 교회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법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위의 것은 땅의 것과 다르다. 오히려 땅의 것이 아무리 만연해도 하늘이 바뀌면 다 바꾸어야 하는 것이다. 겨울에 아무리 눈이 많이 와서 땅에 쌓여 있어도 하늘이 봄이 되면 다 녹고, 가뭄이 들면 사람들이 아무리 물을 땅에 뿌려도 하늘에서 1~2미리 비가 오는 것만 못할 뿐 아니라 하늘에서 비가 와야 땅이 바뀌는 것이듯, 땅에 있는 과학이든 철학이든 재물이든 명예든 그 어떤 것이라도 다 위의 것에서 비롯되어야 하는 것이다.


위의 것, 그리스도를 살리신 법은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에 있지 않고, 십자가에 있는 법이다. 십자가의 법이라는 것은 인간이기만 하면 누구라도 인정할 수 있는 인간의 모습 그것뿐이다. 즉 지식이 없어도, 재물이 없어도, 명예와 고상함이 없어도 되는 인간 본연의 모습을 보인 곳이 바로 십자가의 법인 것이다.


사람에 땅의 것 어떤 것으로 설사 최고가 된다고 해도 사람으로서 최고인지, 인생의 목적 안에서 행복한 것으로 최고인지 알 수도 없고, 또 그렇지도 않다. 설사 그렇다고 치자. 그러면 더 문제가 된다. 아무나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이 있어야 행복하고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 수 있다면 그럴 수 없는 사람은 하나님도 믿을 필요도 없고, 행복을 위해 수고할 필요도 없다. 그냥 하루 하루 흥청망청 살아도 된다. 어차피 1등 밖에 안 되는 구원인데 어떻게 하겠는가?


하지만 십자가의 법은 오히려 그 반대다. 세상에서 뛰어나야 행복할 수 있다는 법 앞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그런 곳이 바로 십자가가 이기 때문이다. 초라한 꼴로 하나님의 아들이라 유대인이라 왕이라 하니 죽임을 당한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었다는 것이다.


세상의 피라미드 구조에서 늘 힘겨워 하는 우리의 모습이 바로 그 모습인 것이다. 1등을 할 수 없어서, 육신 이상의 힘을 발휘하여 성공하여 모든 것을 가진 존재가 될 수 없어서 돌아서면 "을"이 되고 죄인이 되는 그 모습에서 벗어나려 발버둥치고 노력하는 것이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그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위의 것이라는 것이 바울의 말씀이고 하나님의 말씀인 것이다.


그 위의 것이 바로 인간의 본질이고 존재의 목적이다. 그것이 있고 나서 땅의 것이 있는 것이다. 하늘에서 비가 와야 땅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사람은 사람의 본연의 모습을 인정하는 하늘의 뜻이 땅과 같이 흙으로 지어진 사람의 본질이고 내용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땅의 것을 그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땅의 것을 하늘의 것과 혼용하거나, 땅의 것이 더해져야 더 좋은 신앙이라거나, 하나님께서 사람의 본질을 알게 하는 수단으로 사용되는 율법과 기적과 같은 것을 본질로 알고 신앙에 더하는 것은 다 땅의 것을 생각하는 것이고 그리스도와 함께 산 것이라 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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