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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16-19 머리로 인하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1. 28. 14:06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세상의 철학과 과학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시며 하시는 말씀 안에 머리와 몸과 그림자와 같은 말씀이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다. 교회라는 곳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몸의 모든 정체성을 주관하는 곳이다. 정체성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라기보다, 그 몸의 모든 행동과 모양을 머리에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즉 몸의 모든 것이 머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학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기본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임을 말씀하시겠다는 것인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표현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 열매이자, 그 표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책으로 사람에게(만) 읽혀지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정하신 사람의 창조 목적이고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남의 뜻, 즉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 하나님의 뜻이 바로 머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나 사람의 삶이나 모두 이 머리가 지시하는 것을 행하고, 이 머리가 표현하는 것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것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 그것이 바로 '중풍'이다. 즉 머리의 뜻이 몸에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즉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고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며, 그 고쳐진 상태가 되어야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니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되는 그리스도가 몸을 주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어야 온 몸이 자라고 장성한 사람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반면에 철학이나 과학과 같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과 상관없는 것에 따르는 것은 몸이 정상이 아닌 상태인 것이다.


또한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절기와 같은 모든 것은 다 머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비롯되어 표현된 모양일 뿐인데, 그것을 잘 지켜 행하여야 한다고 논쟁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다 빛이 몸에 비쳐서 그림자가 나타나듯이 복음, 곧 그리스도께서 보이시고 바울이 전하고 에바브라가 전한 복음이 머리가 몸을 주관하듯 하면 나타나는 것일 뿐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더불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중요한 방향의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의 본능을 따라 나타나는 행동과 법과 규범들이 본질로 오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의 육신과 삶을 통하여 어떻게 표현되어지는가를 기록한 말씀이 성경인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성품, 머리와 같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뒤로 두고 거꾸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은 선악과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유전이다. 선악과를 먹은 이유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에 대하여 오해했고 스스로 그 방법에 대한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선한 것(하나님처럼 되는 것)인지를 하나님과 다르게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인데, 그 유전이 지금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서신을 보내는 이때의 상황도 다를 바가 없어서, 사람들이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이 가미되었을 때 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전하는 에바브라의 말은 듣지 않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과학과 철학은 몸이 아니라 그림자며, 그것은 머리에서 전달된 뜻이 아닌 세상의 헛된 속임수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 사도는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런 세상에서 비롯된 것들은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지,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누누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는 세상의 것,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이 더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 화려하고 좋은 교회일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골로새 교회 당시에 과학과 철학과 같은 세상의 것이 교회 안에서 더 인정받는 그런 모순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교회라는 공동체에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한 개인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면 성경의 말씀은 스스로 부인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또 말하지만 성경은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께 있으면 표현되는 삶의 모양을 말씀하신 책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성령의 감동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를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고, 그것이 성령의 감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말씀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것을 발견한 미운오리 새끼처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정체성에 순종하면 백조가 되듯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는 삶의 모양이 기록된 성경과 같이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본질과 순서가 바뀌고 머리에서 몸으로 뜻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되어 머리를 움직이려 하고,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져야할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세상의 것이 복음보다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골로새서를 통하여 내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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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요한일서를 마치면서......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22. 10:31 Writer : 김홍덕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고 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통해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예수 외에 구원 받을 이름을 주신 일이 없다고 하신 것은 예수님이 아니면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회복되는 구원을 받을 방법이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구원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는 죄와 사망 혹은 어려운 상황에서 구제되는 것을 말한다. 그렇다면 사람이 처한 상황 중에서 가장 심각하고 구원이 필요한 상황이 무엇이며, 또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해당이 되는 곤고하고 어려운 일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어려운 일을 겪게 되지만 그런 일들은 인류 모두에게 공통된 난제가 아니다. 더욱이 이미 죽은 사람이나 앞으로 살아갈 사람, 그 누구라도 사람이라는 것 때문에 가지고 있는 곤고함, 그 구원을 받아야 할 공통의 자리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알아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모든 인류를 위하여 오신 분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회고하고 스스로에게 묻고 또 그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것과 또 그것과 궤를 같이하는 질문들이다. "왜 사느냐?", "인생의 의미가 무엇인지?"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런 모든 해답을 주시는 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말씀하고 그 말씀을 통하여 사람이 자신의 정체성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발견하는 길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모든 인류, 오고 가는 모든 인생들에게 존재의 이유와 목적, 삶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시는 말씀이다. 이 정체성은 생명이다. 이 정체성이 회복된 사람을 하나님께서는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이다. 생명은 태어나기만 하면 그 생명으로 살아가는 모든 것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알려 주시고자 하는 그 의만 알게 된다면 수련하듯 하지 않아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생명의 말씀인 것이다.


살아 있다는 것은 단지 생물학적 호흡이 있다는 의미에 한정된 개념이 아니다. '자연은 살아 있다'와 같은 말들이 그것을 설명하기도 하지만 살아 있다는 가장 근원적인 의미는 목적 안에 있는지 아닌지에 달려 있다. 우리가 시계가 살았는지 죽었는지를 가늠하는 것은 시간을 제대로 알려 주는지 아닌지를 말하는 의미로 사용하는 것이 그것이다.


비단 이것은 시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사람이 만들고 사용하는 모든 물건이 다 그렇다. 사람이 목적하는 기능을 수행하고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그렇지 못하면 죽은 것이 되어 버려지는 것이 모든 만물에 있어 살아 있는지 아닌지의 기준이 되는 것이다. 즉 존재의 목적 안에 있으면 살아 있는 것이고, 존재의 목적이 상실되면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 역시 살아 있다는 것이 단순히 의학적인 생존의 의미에 국한된 개념이 아닌 것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서 말씀하고 있는 사망이라는 것이 바로 이런 기준에 따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이유이자 사람에게 원하시는 존재의 목적이 한 사람에게 있는지 아닌지에 따라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사람과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는 것이다.


그런 생명의 개념, 즉 하나님의 창조목적을 기준으로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를 인정하는 개념(이것을 신앙이라 한다)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창조주라는 것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 없이는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전지전능하신 창조주라는 사실이 자신에게 진정한 의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인생의 존재 목적을 하나님에게서 찾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님을 인정하고 믿고 신앙하는 시작은 그것을 믿는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태초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창세기, 요한복음, 요한일서를 시작할 때 말씀하시는 <태초>의 정확한 개념인 것이다. 그리고 그 시작이 있다는 것은 하나님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가지신 분으로 믿는 시작이고 그것은 그 목적을 아는 것이 바로 생명이 있다는 것을 알고 믿는 시작이 되는 것이다.


요한일서를 기록한 사도 요한에게 있어 그 시작은 바로 예수님을 만나는 만남에서 시작되었다. 유대인이었던 요한 사도, 어려서부터 하나님에 대하여 알았던 요한 사도지만 예수님을 만난 그 시점이 하나님을 만난 세계의 태초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요한일서의 시작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존재 곧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셨고 자신이 그 분을 만남으로 생명의 말씀의 세계가 열렸다는 것을 말하고 그것을 전하고자 요한일서를 기록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만남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만남이며 그 첫 열매가 예수 그리스도셨고, 요한 사도는 그 예수님을 만남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고, 그것이 바로 사람의 존재 목적이고 인생의 정체성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고서는 이 하나님의 세계를 알 수 없기에 그것을 부인하면서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적그리스도라고 단언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요한 사도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보내시기 까지 하면서 사람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신 것을 사랑이라, 하나님의 사랑이라 하였다. 이 사랑에 대한 요한 사도의 말씀은 하나님의 사랑이 없으면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바울 사도의 표현과 동일하다. 즉 사람의 정체성을 알려주지 못한다면 그 사람을 위하여 어떤 수고와 희생을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이다.


이 하나님의 사랑, 사람을 통하여 의와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 삼으시려는 하나님의 의와 사람의 창조와 존재 목적, 그것을 알게 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사랑이다. 사람이 자신이 왜 존재하는지,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알게 하는 것 만한 사랑이 세상에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랑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사귐이 있을 뿐 아니라, 영생이 있고, 또 자신이 하나님으로부터 났다는 것을 알며 세상을 이기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으로 전하고 있다.


요한 사도가 이러한 모든 것을 전한 배경에는 초대교회 당시에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보고 예수님을 믿기는 하지만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생각을 가진 사상들을 엄히 경계하기 위함이 컸는데, 이는 예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면 육신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이 없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께서 아들을 육신으로 이 땅에 보내신 뜻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실제로 신앙의 근간이라 아니할 수 없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음에 있어 예수님께서 신비한 능력을 행하시는 우리와 다른 초인적인 분이고 내가 예수님께서 그렇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 예수님과 유대관계가 형성된다고 생각하는 신앙관이 얼마나 허술한 신앙인지를 돌아보게 하는 것이 요한일서의 말씀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두 가지의 큰 오류가 있다. 하나는 성경을 행함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아들과 구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율법적인 관점이다. 이는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된다는 단순한 발상일 뿐 좋은 신앙의 풍조는 아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군인이라 군복을 입고, 사람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사람으로 사는 생명의 법에 관한 말씀이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성경대로 살지 않으려 해도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다.


또 하나의 오류는 요한일서의 말씀과 많은 상관이 있는데, 언뜻 생각하면 이 시대에 무슨 영지주의가 있겠는가 싶겠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육신으로 지으시고 죄악뿐이라는 이 세상과 사회 속에 살게 하시는 뜻에 대하여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세상을 무시하고 사람이 육신을 가졌기 때문에 나타나는 연약함을 정죄하는 신앙의 모습이다.


이러한 신앙의 풍조는 세상이 흉흉하다고 생각할수록 교회에만 몰입하고 신앙이 없는 사람은 부모라도 멀리하는 태도를 보이기도 하는데, 많은 이단들이 이러한 신앙적 오류에서 시작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전혀 이상한 것도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도, 또 우리가 원하는 것을 제약하는 이 육신을 주셔서 살게 하신 것도 우리가 보기에는 안타깝고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그 육신을 하나님은 심히 보시기에 좋았다고 하셨고, 하나님의 아들도 바로 그 육신을 가진 상태로 이 땅에 보내셨고, 


또한 예수님께서 이 세상의 죄악을 뒤 엎은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세상의 법에 의해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이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수밖에 없는 하나님의 뜻이 표현되었던 것이다.


지금 이 시대를 사는 사람들, 특히나 예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이것을 망각하고 있다. 세상을 고치려 하고 있다. 또 교회를 위해서 사람을 버리기도 하고 있다. 이런 모든 것은 영지주의에서 멀지 않다. 왜냐하면 전혀 예수님의 방법이 아니다. 그것은 세상의 방법이고, 그것은 세상과 타협한 것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세상의 법으로 죄인 되어 십자가 지신 법을 전혀 모르는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요한일서가 주는 교훈은 초대교회와 다르지 않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세상을 바꾸고 싶다면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어야 한다. 정말로 예수를 잘 믿고 싶다면 또한 그러해야 한다. 세상이 신앙을 몰라준다고 배척하고 무시하고 가르치려만 한다면 그것은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하는 이유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신앙이라 하기 어렵다. 그냥 신념일 뿐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으로부터 났으며 하나님의 아들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의 삶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요한일서를 통하여 봤으면 하는 마음으로 요한일서에 대한 포스트를 하였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사람일수록 육신으로 사는 삶으로부터 멀어지려 하는 이 시대의 신앙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요한 사도의 의도를 통하여 진정한 대안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적지 않은 분들이 이 글들에 관심을 가져 주심에 감사한 마음을 표하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바로 알고 하나님을 바로 믿는 신앙을 가지고 싶어 하는지 가늠하기 힘들 정도라 생각이 된다. 그런 모든 분들에게 신학이 아니라 오늘 나의 말씀과 나에게 의미가 있고,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의 삶으로 충분하고 넉넉하게 표현할 수 있는 믿음과 신앙에 도움이 되기를 바라면서……





다음부터는 이전에 포스팅하다가 중단이 된 골로새서를 이어서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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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5장 13-21절) 우상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5. 1. 17. 07:30 Writer : 김홍덕

요한일서의 마지막 말씀은 문맥적인 측면에서 보면 좀 생뚱맞아 보일 수 있다. 좀 난데없이 '우상을 멀리하라는 말씀이 그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예수 안에 있고 그 예수님은'참 하나님과 영생이라는 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말씀으로는 언뜻 연결이 잘 안되어 보일 수 있다.


우상, 그것은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며 신앙의 대상이 되는 상징 내지 형상 혹은 전도된 신념을 고집하는 것'이라고 위키백과(wikipedia)에 나온다. 간단하지만 아주 훌륭한 정의가 아닌가 생각이 된다. 그리고 아울러서 '우상=편견'이라고 정의되어 있기도 하다.


그런 관점으로 우상을 본다면 이는 하나님의 실체에 대한 혼돈과 편견을 가진 편향된 신앙 아니 고집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형상이 없으신데 어떤 형상을 두고 그것이 하나님이라 생각하면 그 형상이 바로 우상이 된다는 것이다. 한 마디로 번지가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본질이 왜곡되거나 있어야 할 자리에 있지 않거나 있어야 할 것이 없음에도 있어야 할 것이 함께 있는 것과 같은 여김을 받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거나, 하나님의 의와 뜻이 없는 것임에도 하나님을 믿는 일로 고집되는 것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그리스도 곧 메시아와 가까운 의미의 이 시대적 표현은 '영웅'이라 할 수 있다. 영웅은 사람이 처한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주는 존재를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것은 때로 '나의 우상'이라는 표현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즉 그리스도와 우상은 비슷한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와 우상은 전혀 다른 존재이다. 우상이나 영웅은 모든 사람이 그것에 이를 수 없다는 절대적인 정체성이 있다. 모든 사람이 슈퍼맨과 같을 수 없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리스도는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또 그 삶을 통하여 다른 사람에게 자신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을 회복할 수 있다는 감동을 줄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그런즉 우상이 우상인 것은 본질은 망각하고 어떤 형상이나 이념이나 생각 속 인물과 같은 것이 그리스도와 같이 사람을 죄에서 구원하고 곤고한 상황에서 벗어나게 해 줄 것이라 기대하는 대상은 전부 우상인 것이다.


돈이 우상이라는 말이 있다. 돈이 있으면 인생의 곤고한 문제들을 벗어 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위대한 사람이 우상일 때도 있다. 즉 그 사람과 같이 되면 자신의 인생이 달라질 것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은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두신 본질적인 정체성과 존재 목적이 아니라 사람이 살아가면서 겪게 되는 형이하학적이고 재화와 용역에 관한 문제들을 기대는 것이다.


즉 그것은 본질이 아니라 형식에 관한 것에 대한 영웅이나 우상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이 아니라 먹고 사는 것에 관해서 기대하는 모든 기대의 대상과 희망을 이루어줄 것이라 기대하는 모든 이념이나 형상은 다 우상이 되는 것이다.


우상은 한 마디로 내용과 형식이 하나가 아닌데 신앙의 대상이나 근원으로 여김을 받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 없이 하나님의 생명이 나타내는 삶의 모습을 잘 지켜 행하면 될 것이라는 생각도 우상이다. 즉 성경의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성경말씀을 우상취급 한다는 것이다.





이는 금송아지 안에 하나님의 뜻과 의가 없고, 또 금송아지가 하나님을 표현할 수 없음에도 그것을 하나님이라 여기는 것이다. 그것은 향기를 낼 수 없는 꽃 그림 같은 것이다. 즉 성경 말씀은 그리스도가 어떤 삶과 어떤 표현을 하는 것인지 성령의 감동을 받은 사람이 기록한 것임에도 그런 삶을 살게 하는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의 의, 곧 사람이 지어진 목적은 외면하체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아들이 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경을 그렇게 본다는 것은 성경을 우상으로 섬기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는 흡혈귀가 나타나면 십자가를 들인 댄다는 식의 개념과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것이다. 십자가의 본질이 흡혈귀를 내어 쫓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인데 그 정체성은 제외하고 모양 자체가 어떤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상은 내용과 형식 중 어느 하나가 없는 상태인데 하나가 된 것과 같이 섬기는 모든 것이 다 우상인 것이다. 내용이 없는 형식을 내용의 본질로 섬기는 돌이나 나무를 조각한 것을 하나님이라 섬기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형상은 없이 본질만 고집하는 생각 속에 있는 이상과 같은 것 역시 다 우상인 것이다. 형상 없는 이상을 우리는 허상이나 허영이라고도 한다.


그러므로 율법주의는 내용이 없음에도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형식만 섬기는 것이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우상 취급하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본성에 위배되는 것이다. 십계명의 1,2,3 계명이 다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모든 것이 다 뜻이 있는데 그 뜻은 외면하고 만드신 것 자체를 하나님과 같이 섬기는 것은 전부 우상을 섬기는 것이다. 그것은 성경책도 마찬가지다. 책을 기록한 목적 즉 행간을 읽는 것이 아니라 성경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고 그 문구대로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바로 우상이라는 것이다. 


또한 그 뿐 아니라 영지주의와 같이 형식을 벗어버린 존재인 천사를 그리스도와 같이 신앙하고 또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무시한 체 하나님의 아들은 몸이 없는 존재라 믿는 그 생각도 우상인 것이다. 


요한 사도는 자신의 영적 자녀들에게 이 우상을 멀리하라고 했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난 삶을 지키라는 것이다. 하나님께로 난 삶은 그리스도께서 사람에게 보여주신 삶이다. 그 결정체는 십자가와 부활이다. 그 모두가 다 하나님의 의와 뜻과 말씀(로고스)이 육신으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났기에 그리스도이시고 하나님의 아들이기에 하나님께로 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사람이 나타내는 이 신앙의 본질을 파괴하고 형상화하거나 전도된 신념을 고집하는 모든 것이 우상이기에 요한 사도는 이것을 멀리하라고, 그것에서 자신을 지키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을 많이 기록한 사도바울과 요한사도는 약간은 다른 관점에서 말씀을 전했다. 사도바울은 율법을 형식으로 지키는 것과 조각된 어떤 형상을 섬기는 형식주의에 대하여 많은 경계의 말씀을 전했고, 요한사도는 그와는 좀 다르게 영지주의와 같이 형식을 무시하고 외면하는 것에 대한 말씀을 많이 전했다.


하지만 그 두 가지는 모두 우상을 경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사도는 초대교회 당시에 큰 이단적인 문제였던 영지주의에 대한 경계의 말씀을 이 요한일서라는 서신으로 전했다. 이는 당시에는 지금과 다르게 실재로 예수님을 봤던 사람들이 많이 살아 있었던 시대적 배경이 영향을 미쳤다.


즉 실재로 사람이 십자가에 못 박히고 죽었는데 얼마 후에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하늘로 승천하는 모습을 본 사람들이 많이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기사를 생각해보면 '어떻게 사람이라는 육신을 가진 존재가 그럴 수 있겠는가?'하는 의문이 들었고, 그래서 예수님의 육신으로 오심에 대한 의구심을 가졌던 것이다.


반면에 바울사도는 상대적으로 예수님을 실제로 본 사람들이 적은 지역을 나라에 가서 복음을 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하나님 혹은 자신들의 신이라 여기는 형상과 형식을 깨고 하나님의 뜻이라는 내용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그래서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와 같은 말씀을 많이 한 것이다.


반면에 요한사도는 요한복음이나 요한 서신들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었고, 보고 듣고 만질 수 있는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신 그리스도로 표현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에 집중했다. 요한사도는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유대인들이 많은 곳에서 말씀을 전했던 것이 큰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런 관점과 또 목적을 가지고 기록한 서신중의 하나가 바로 요한일서이다. 이 요한일서는 단순히 영지주의를 경계하기 위한 목적 같지만 기록된 말씀은 성경, 아니 하나님의 의에 대한 본질적인 말씀이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금의 신앙들의 모습 중에는 세상적인 것을 교회와 결합하여 교회를 시스템화하고 자본주의화 하는 형식에 치중된 신앙적 편향이라는 우상도 크고,


또 반면에 신앙의 순수성과 순도를 지켜야 한다며 세상을 무시하고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는 점을 간과하여 육신의 한계와 본성을 제어하는 것, 그 이상의 무언가를 보여주는 것이 좋은 신앙이라 여기며 세상이 이해할 수 없는 신앙적 형태를 보이는 신앙도 많다.


전자를 타락해가는 교회의 모습에서 볼 수 있다면, 후자는 광신적 신앙이라 느껴지는 모습에서 찾을 수 있는데, 특이한 것은 후자의 경우들은 쉽게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신앙의 순도를 지키는 것이라 생각하겠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육신을 주시고, 또 한 없이 타락했다 여겨지는 이 세상 속에 살게 하신 이유를 버리면 쉽게 광신도와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오늘까지 요한일서가 우리에게 읽혀지는 이유이고, 필자가 다른 성경에 앞서 요한일서를 포스팅하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이 시대의 교회가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은 버리고 크고 화려한 교회의 형식으로 승부하는 타락은 이미 교과서가 된 지경이고 눈에 띠게 드러난 것이라 경계하는 것이 어렵지 않으나, 세상과 단절하고 세상을 무시하는 것이 신앙의 순수성이라 생각하는 신앙의 풍조는 경계하기 어렵다.


그것은 요한사도의 시대나 지금의 시대나 동일한 것 같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영지주의적인 관점과 신앙관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혼합된 모습으로 있는지 말로하기 힘들다. 이 요한일서에 대한 블로그의 글들이 정말로 하나님의 뜻이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표현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에 도움이 되었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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