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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사도는 증거에 대하여 계속 말씀하기를,

또 증거는 이것이니 하나님이 우리에게 영생을 주신 것과 이 생명이 그의 아들 안에 있는 그것이니라(요일 5:11)

이라 말씀하고 있다.


증거하는 이는 물과 피와 성령인데, 그 증거하는 이들이 증거하는 것이 바로 영생과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하고 자연스럽고 온전한 것이다. 물과 피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존재라는 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셨고, 그 모습이 제자들에게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게 되었을 때 제자들은 자기 안에 있는 그 변화를 성령의 역사라고 모든 성경에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오늘날도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진정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하는 마음이 성령의 역사임은 그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정체성은 분명해야 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고 그 모습은 사람이 아무리 죽이고 인정하지 않는 모습일지라도 하나님은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온전한 생명이었기에 다시 실리실 수밖에 없는 생명이었다는 것에 대하여 명확하게 깨닫는 깨달음이 있을 때 성령의 역사하심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증거의 내용은 영생을 주신 것이라 했다. 이 영생에 대하여는 예수님께서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라고 하셨다.


안다는 것은 서로 상관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누구나 대통령을 알지만 대통령이 자신을 아느냐 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유대인들에게 안다는 것은 경험하고 자신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저 여자를 안다는 개념은 동침했었다는 의미로 까지 통한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안다"라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목적까지 안다는 것이다. 성경이라는 문헌에 예수님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그것을 잘 살펴보고 논리적으로 보니 예수님이 계셨다고 믿거나, 아니면 문헌적으로, 과학적으로 볼 때 뭔가 신빙성이 없는 것 같지만 그것을 극복하고 그 모든 기적들을 일으켰다는 것을 믿는 마음이 믿는 것이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기적이라는 것도 마찬가지다. 예수님이 그런 능력을 가졌다고, 또 분명히 과학적으로 믿기 어렵고 오래된 신화 같은 이야기라 믿기 어렵지만 오늘날도 그런 기적이 간간이 일어나고 있기에 그것을 믿어야 한다고 하는 것과, 자기 안에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분명하게 있어서 그 정체성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기적도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아는 것은 다른 것이다.


왜 이렇게 안다는 것에 대한 차이를 두려 하는가 하면, 사람들이 알고 있는 예수님은 초인간적인 역량을 가진 분으로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어떻게 모든 인류를 대신하여 십자가를 지고, "사람이 어떻게 바다 위를 걷겠는가? 사람은 그럴 수 없는데 예수님은 그러실 수 있는 분이다." 라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다 아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 보내신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은 하나님께서 왜 예수님을 보내셨는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당연히 인류의 구원을 위한 것이다. 그러나 그 구원의 정체성에 대하여는 하나님과 사람들의 생각이 제법 다르다.


하나님께서 생각하는 구원, 곧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은 십자가의 법인데, 사람들은 이상하게 피라미드의 법을 생각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셔서 사람들에게 보여주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인데, 사람들은 물 위를 걷는 예수님의 모습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즉,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은 보통 사람들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나사렛과 같은 천한 동네의 사람과 같은 그저 연약하고 공상하지 못한 사람의 모습이 낱낱이 드러나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 생각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너무나 큰 차이이고, 오늘날 교회가 점점 화려해지지만 오히려 지탄 받고 사람들은 떠나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탈 인간, 그리고 세상의 법인 피라미드의 법을 좇아서 경쟁에서 이기고, 위대해지고 화려해지고 고상해지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의 정체성에 혼돈이 더해지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온전히 아는 것은 오히려 피라미드와 경쟁의 법칙을 가지고 있는 세상의 법으로는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려서 발가벗겨지는 것이다. 즉 인간이라는 정체성, 사람이 숨기고 싶은 모든 연약함이 완전하게 다 드러나는 것을 인정하고 고백하는 것이 사람인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렇게 고백하고 시인하고 자신도 발가벗겨져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은 운명이라는 것이 자기 안에서 인정될 때 비로소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이 바로 십자가 사건을 듣는 이들에게 그것을 알게 하시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아니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겠는가? 그것이 모든 사람의 모습이고 그것을 인정하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역사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아는 것이 영생이다. 그 인간의 운명을 아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알게 하려 하신 것이다. 그것이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심히 좋아하셨던 사람의 모습이다. 그 모습이 회복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이고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온전한 사람의 모습고, 그 모습이 바로 구원이고 하나님께서 살았다 할 수 있는 생명이 있는 영생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다.


바로 그것을 증거하는 이가 바로 믈과 피와 성령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그 예수님을 자신의 모습으로 고백하게 하는 영이신 성령인 것이다. 바로 그 고백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에 보내신 목적과 자신의 삶을 주신 목적을 아는 사람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보낸 목적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와 뜻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의 삶은 그 목적을 표현하면서 살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것도 영원하신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시는 생명 곧 영생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하나님의 생명이 그 안에 있다는 것 그것이 바로 아들이라는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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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요한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을 이긴 이김을 증거하는 이가 셋이라 했다. 그것은 물과 피와 성령이라고 했다. 물과 피는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의 육신이라는 형식과 하나님이 살아 있다고 하시는 사람 지으신 목적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가 피요 생명이고 형식 안에 채워지는 것이다.


증거하는 이가 셋이니 성령과 물과 피라 또한 이 셋이 합하여 하나이니라(요일 5:8)


그리고 그렇게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사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다. 이것이 물과 피로 임하심이고,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그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의 삶이 다른 사람에게 동일하게 믿음으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이가 있는데 그분이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성령은 영이신데, 그 가장 기본적인 성품이요 하시는 일은 하나님의 아들의 삶이 나타날 때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신도 동일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하게 하시는 이가 성령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과 생명이 전해지게 하시는 이가 바로 성령이신 것이다.


그러하기에 예수님께서도 예수님께서 가시고 나면 보혜사 성령이 오신다고 하신 것이다. 이 도우시는 보혜사는 사람이 살면서 겪는 인생의 문제를 도우시는 카운슬러를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도우시는 것은 물과 피로 나타나는 아들을 보고 또 자신도 그와 같은 존재라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살게 하시는 영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본적으로 사람에게 가지신 의와 같은 것이기에 성령이 하나님의 영이신 것이다. 사람들은 성령이라 하면 신비한 일을 일으키는 영을 생각하지만 성령은 사람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삶을 보고 자신도 그런 존재라는 것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필요하면 기적도 일으키시는 것이지 기적이 성령의 기본 능력이나 기본 업무는 아니다.


성령이 증거하신다는 것은 물과 피로 나타난 하나님의 아들이 진정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증거하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증거를 믿는 사람이 또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주관하시는 분이 성령이시다. 그래서 물과 피와 성령이 하나님의 아들을 증거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세 가지 증거가 온전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이긴 이김이 있는 것이 되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증거 중에 어느 하나도 없으면서 세상을 이긴다고 하거나 이겼다고 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거짓말 하는 것이라는 것을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다. 아들을 믿는 자는 이 증거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너무 당연하고 온전한 것이다.


아들이 누구인가?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육신의 삶이라는 형식으로 표현되는 존재가 아닌가? 이것은 생명의 법이다. 하나님의 의와 목적은 DNA와 같은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DNA를 가지고 있으면 죽일 수는 있어도 사자로 살게는 못하는 것이다. 이것은 거짓말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DNA 없이 사람이 하는 짓을 하면 그것은 흉내고 그것이 바로 거짓말인 것이다.


또 사람이 그 안에 하나님의 아들의 생명 곧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것과 같이 자신의 삶이 된 사람은 절대로 난데없이 그렇게 될 수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 자신의 생명이 될 수 있는 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그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으로 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 과정에서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자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은 성령의 역사이다. 즉 성령의 증거 없이 그렇게 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내용이 인생이라는 형식에 채워져야 하는 온전한 의와 내용이라는 것을 성령의 역사 없이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피와 같은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 가진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보여주는 존재가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을 처음으로 표준적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고 또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예수님께서 가시고 나서 하나님께서 보내주신 보혜사 성령의 역사가 반드시 있어야 예수님을 보고서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과 피와 성령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온전할 뿐 아니라 절대적인 증거인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즉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 깨닫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삶을 살기 위해서는 반드시 물과 피로 나타난 아들을 보아야 하고 그것을 볼 때 성령의 역사가 있어야 하는 절대적인 하나님의 법이 있다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셔서 물과 피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을 보이시고 보혜사 성령이 오셔서 제자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살게 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보혜사 성령이 오시면 모든 것이 기억나고 생각나게 하실 것이라 했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요 14:26)


그리고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 곧 물과 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로 나타난 사람을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즉 육신을 가진 하나님의 아들을 만나지 않으면 성령의 역사도 없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물과 피와 성령의 증거가 있어야 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예수님을 만나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직접 예수님을 보지 못한 사람은 어떻게 하는가 싶겠지만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사람을 또 만나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렇게 전해지는 모든 성령의 역사,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의 원리이자 첫 열매이고 장자 되시는 the Christ이시고 그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게 된 사람들 또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 사람들이 사도와 같은 사람들을 볼 때 다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생명의 전파가 일어나는 세계인 것이다. 바로 그런 사람을 사도라 또 그리스도인(a christ)라고 하는 것이다.


내가 비옵는 것은 이 사람들만 위함이 아니요 또 저희 말을 인하여 나를 믿는 사람들도 위함이니 아버지께서 내 안에, 내가 아버지 안에 있는 것 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요 17:20~21)


그런 생명의 전파가 또한 예수님의 목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땅 끝까지 이 복음을 전하라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요한 사도도 이것을 전함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라고 요한 일서 1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사귐, 즉 같은 생명과 주제를 나누는 사람이 되게 하려고 복음을 전하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보고 들은 바를 너희에게도 전함은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함이라(요일 1:3)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가진 인생을 말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의 육신으로 나타난 사람을 말씀하시는 것이며, 성령께서는 예수님을 보고 제자들의 마음 안에 예수님과 같은 삶을 살게 감동을 주신 것과 같이 지금을 사는 사람들도 그렇게 전해져 온 하나님의 아들의 법이 삶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볼 때 사람의 마음을 감동하게 하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게 하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증거, 세상을 이긴 이김의 증거는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의 육신 가진 십자가의 삶을 통해서 표현되고 그 표현되는 삶을 보고 또 다른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이긴 이김이다. 그러므로 이 물과 피와 성령은 또한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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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이긴 이김, 그것은 어떻게 보면 신앙생활이 무엇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신앙이라는 것이 세상 안에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삶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다는 것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을 믿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존재를 인식하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그 존재를 보이신 이유와 연결되고 그것을 아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알고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실존한다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니라 실존하시는 하나님과 나와 어떤 관계가 성립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관계는 상호작용이고 주관적인 것이다. 주관적이라는 것이 맘대로 해석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하나님의 실존을 객관적으로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존이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어진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의미는 하나님께서 나를 지으시고 의미를 두시는 하나님의 의와 목적에 상호 동의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상호 의미가 있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그 관계는 하나님의 생명을 사람이 표현하는 관계로 설명된다. 그리고 그런 관계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생명과 의와 뜻이 표현되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기에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와 뜻과 목적과 생명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아들의 정체성이고, 그런 삶이 아니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없다는 것이다.


이 이김은 한 마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서 사람의 정체성과 인생의 목적을 천지가 창조되기 전과 혼돈스러운 중에 그 혼돈을 이겨내고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세상의 가치관이 아닌 자신을 지으신 하나님 안에서 찾는 것이 이긴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성품과 생명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생명이 육신이 된 삶을 말하는 것이다. 그 삶의 첫 열매이자 그 삶이 어떤 것인지, 또 하나님의 의와 생명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아들은 아버지의 분신이자 표현이다. 성경에 하나님 아버지만 있고 어머니가 왜 없느냐 하는 사람들은 아들의 정의를 모르는 것이다. 아들이란 생식에 의하여 낳은 동일한 생명체를 말하는 것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어머니 어쩌고 하는 사고 방식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아들 삼으시는 법과 원리를 전혀 모르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버지 되시고 사람이 아들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서 어머니를 찾아서 아들을 낳는 그런 법이 아니다. 하나님이 가지신 의와 뜻이 표현될 때 아들이라 하는 것이다. 세상에서도 자신의 생각을 잘 표현해주는 사람을 '아들 같다'하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이 남자냐 여자냐 하는 문제와는 상관없다.



물과 피는 하나님의 의와 육신 가진 인생이 하나되어 아들이 됨을 증거


아들이 하나님의 의와 생명을 표현한 것이라는 것에 대하여 요한 사도는 물과 피가 이를 증명한다고 표현을 했다. 물은 성경에서 율법과 말씀의 상징이다. 율법을 받은 모세의 이름이 '물에서 건져낸 사람'이고 모세는 홍해를 건넌 사람이다. 히브리인이라는 의미가 '큰물을 건넌 자'라는 의미에서도 율법을 받은 유대인들과 물의 연관성을 볼 수 있다.


이 율법은 형식이다. 말씀도 형식이다. 즉 하나님의 생각이 있고 그것이 표현하고자 하는 수단이다. 문자도 형식이고 TV에 나오는 모든 드라마도 다 작가나 표현하고자 하는 것의 형식이다. 심청전의 모든 내용은 <효>를 표현하고자 하는 형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로 대표되는 모든 말씀은 다 형식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어 형식은 사람의 육신이다. 이 육신은 율법을 지키고, 말씀을 듣고 실천하는 존재이다. 그래서 이 육신은 언제나 형식이다. 한 마디로 이는 어떤 내용이 있어야 하는 그릇과 같은 것이다. 그 내용 없이 형식만 지키고 말씀만 실천하려 하면 그것은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인 육신의 삶 안에 채워져야 하는 내용이 바로 하나님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 맞아야 한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구매하는 목적은 외관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타고 이동하는 것에 있기 때문에 이종하지 못하는 자동차는 죽은 것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이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 사람 안에 있는 것을 말한다. 그것이 없으면 사람이 아무리 육신적으로 살아 있어도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은 것과 같다. 다만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어야 하나님의 목적을 깨닫고 표현할 기회가 있기 때문에 의학적으로 살아 있는 생명은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경우 정말로 기도할 때 자주하는 문구처럼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생명을 상징하는 것을 피라고 한다. 피는 생명이라고 말씀하기도 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가시기 전에 유월절 만찬에서 포도주를 보고 "이것은 내 피"라고 하신 것도 포두가 상징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할 수 있는 생명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물과 피로 임하셨다(요일 5:6)고 하신 것이다. 즉 하나님의 생명과 형식이 하나가 된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요한복음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어"라고 했고, 요한일서에서는 보고 듣고 만진 바 된 생명의 말씀이라고 말씀하신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

이는 물과 피로 임하신 자니 곧 예수 그리스도시라 물로만 아니요 물과 피로 임하셨고 증거하는 이는 성령이시니 성령은 진리니라(요일 5:6-7)



그리고 이것은 예수님께서 보여주시고 그것을 보는 사람도 그와 같이 될 수 있는 법이다. 예수님께서 우리 사람과 같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이유가 바로 그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삶,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살을 보이심은 예수님과 같은 모든 인생들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삶을 살 수 있다는 것과, 그것이 목적이고 살아있는 생명 있는 삶이라는 것을 보이시기 위한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모습, 육신을 가진 인생이 십자가에서 육신의 한계를 고백하는 삶, 세상의 법과 경쟁에서 언제나 십자가로 가는 죄인이 되는 그 정체성을 고백하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것은 세상의 법과 같이 피라미드 꼭대기로 가기 위하여 서로 경쟁하여 이기는 이김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는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의와 말씀이 육신이 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여주시고 그것이 세상을 이긴 이김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이다. 바로 이것을 믿고, 이것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고백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고 세상을 이기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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