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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요한일서 4장 7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은 유명한 말씀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사랑이신지에 대하여 요한사도는 요한일서 전반에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도 늘 말씀해 오고 있다.


흔히들 사랑에는 아가페, 필레오(친구간의 사랑), 에피투미아(지식에 대한 사랑), 스톨게(혈연간의 사랑), 에로스(이성간의 사랑)와 같은 사랑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아가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인 사랑, 사랑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지 않나 싶다.


하나님의 사랑은 밥 퍼주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사랑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표현된 모습이지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사람이 무엇이고, 누구이며 왜 사는지>를 알려주시는 사랑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 인생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은 상호간에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랑은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모든 의(미)와 뜻과 목적은 다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다.


집에 있는 그릇이 주인에게 사랑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 그릇의 목적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고 잘 모셔두고만 있다면 그것은 그릇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 안에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위하는 것


사랑은 위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하여 어떤 것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그 상대가 가장 필요한 것을 해 주는 것이 가장 크고 온전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다. 그런 것은 다 필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절대적이고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이며, 자신은 누구이며,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그것을 알게 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다.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하고 자신의 정체성이 자신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고 최고의 사랑이다. 바로 그런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셨다. 독생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단 하나의 아들이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육신적인 의미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인정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말씀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영생은 다름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가 되는 것


또한 사랑은 그리워하고 필요로 하는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부여하신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미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얼마나 절실한 존재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사랑은 천지창조 과정에서 지으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지만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에서 그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한 유일한 방법이자 사랑임을 말씀하신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를 소망하고 또 성취하기 위하여 살아가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삶에 의미를 가지기 위한 것이다. 일례로 사람이 부모로서 열심히 자녀를 위하여 살다 자녀가 독립하면 삶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서로 사랑하다 한 사람이 죽으면 큰 슬픔과 상실감에 빠지는 것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의 큰 부분이 사라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상실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 의미, 그 이유와 삶의 목적이 사는 동안 돈이나 성공과 같은 것에 있는 것으로 알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결국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죽을 때가 되면 어느 정도는 신분에 관계없이 다들 알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은 무(無)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의 의미라고 알고 살아가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살아가는 이유와 삶의 의미를 아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말하는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 유일한 법을 깨달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자신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독생자인 것이다.


이 유일한 독생자의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영생이며, 그런 모든 법을 만드셔서 사람이 자신의 삶의 존재 목적과 이유와 의미를 알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바로 사랑이신 것이다.


또한 사랑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 존재와 성품을 표현할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절대적인 관계인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실존과 성품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창조가 곧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그것은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는 사랑 그 자체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은 형식이기에 그 존재의 의미인 내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내용이시오 의요 생명이요 영이시기에 그 사랑을 표현할 존재인 형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시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절대적인 사랑이요 사람에게는 영생이요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은 당연히 하나님이 시작한 사랑이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고 창조하신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시라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같은 것이며, 이 사랑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것이기에 그 사람은 구원과 영생이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릇이 언제나 찬장에만 있다면 그 그릇에게 구원과 주인의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사람은 그 사랑을 알고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목적 안에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은 자신이 좀 더 선수로서 뛸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원하는 것이고, 또 좋은 옷이라도 입지 않으면 남을 주거나 버려지는 것이다. 옷은 사람에게 입혀지지 않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옷이 멀쩡해도 죽은 것이듯, 사람이 의학적으로 살아 있다 해도 존재의 목적을 모르고 있으면 죽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살리는 것이라는 것은 바로 구원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유일한 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이 독생자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목적을 가지신 분이고 그것을 알려주시는 사랑 자체이시다. 그 사랑은 유일한 방법이며, 존재 목적을 모르는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인 사람이 화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시는 것은 그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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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 곧 성령은 오직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알도록 하는 영 그것 하나뿐이라고 했다. 이 영은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는 온전한 사랑이며, 하나님께서 이것을 사람에게 알게 하셨기에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이라고 했다.


반면에 적그리스도의 영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영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육신을 가지고 오셔서 하나님의 아들이 무엇인지,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보여주신 예수님의 사역을 부인하는 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이며, 특히 이는 오리라 했고 또 이미 세상에 있다고 했다.


사람의 분류는 대게 '이것이냐? 저것이냐?'라는 방식의 이분법이다. 그러나 좀 더 정확하게 하면 '이것이냐? 이것이 아니냐? 저적이냐? 저것이 아니냐?'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신앙에 있어 중요한 것이다.(이 분류는 신앙의 정체성에 관한 일원론, 이원론과는 다른 의미이다.)


생명을 기준으로 본다면 생명과 물질로 나눌 수 있지만, 생명에 관한 정확한 분류가 있다면, 그것은 생명과 생명이 아닌 것으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여기는 생명이 있다면, 그것이 아닌 것은 다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흉내나 노릇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을 성경이 얼마나 자주 말씀하시는지 모른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시인하게 하는 성령이 계시고 그 나머지는 그 모양이 어떠하고 성령과 나타나는 바가 아무리 유사해도 다 거짓 영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경계할 것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 어떤 것을 첨가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신앙을 과학적으로 이해하려 하는 것과 같은 것으로 그런 것에 대한 표현은 대부분 이렇게 나타난다. "그래도 예수 믿는다고 하면 이 정도는 해야지!"와 같이.


그것이 미혹이다. 신앙은 부인하는 것보다 타협하는 것이 더 위험하고 하나님 앞에 큰 죄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 보다, 십자가에서 잠깐 기절하셨다는 것이나, 예수님의 겉모양은 사람이지만 실제 정체는 아니라는 식의 타협이 더 위험한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잠깐 기절하셨다고 하는 말과 같은 것은 쉽게 구분이 가지만, "예수 믿는 사람이 그래도 예의는 있어야 하지 않겠나?" 아니면 "교회 다니면 그래도 세상에서 좀 그럴듯하게 살아야 사람들이 교회 다니고 싶어 하지?"와 같은 말이 그와 같은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이는 예의나 세상에서 열심히 사는 것이 신앙과 무관하다는 밀이다. 그것은 방향성이 중요하다. 그렇게 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면 정말로 신앙과 무관한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준 삶의 의미를 아는 사람은 하나님을 위하여 살다 보면 사람이 그것을 보고 자신도 하나님을 믿고 싶어지는 마음이 들게 한다.


그것은 사람이 사람을 보고 하나님을 알고 싶어지는 마음이 드는데 예의나 세상의 성공이나 열심히 사는 모습은 절대적이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은 진심을 느끼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 안에 정말로 하나님의 영이 있어 그 영에 순종하며 살면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보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의 정체성을 회복하려는 절대적인 간절함이 그 속에 다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렇듯 사람의 심령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어 그 생명의 DNA인 하나님의 성품이 금할 수 없게 표현되어지는 삶이 아니라 사람이 율법이나 교리를 잘 준수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고 하거나, 하나님의 아들은 영적인 문제이지 육신의 문제는 아니라며 육신의 문제를 무시하는 것들은 아주 교묘한 말로 미혹하게 하는 영들의 세계라는 것을 사도들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그 어떤 아름다운 것을 더한다고 해도 다 미혹하는 영이요 적그리스도의 영인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옳은 것은 옳다고 하고 아닌 것은 아니라하라고 하신 것이다.


오직 너희 말은 옳다 옳다, 아니라 아니라 하라 이에서 지나는 것은 악으로 좇아 나느니라(마 5:37)






미혹하는 영, 곧 적그리스도의 영은 아주 엉뚱하거나 성경을 완전히 부인하는 것이 아니다. 요한 사도가 있었던 초대 교회 시절의 영지주의도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것이 아니었고, 유대인들도 하나님을 부인하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은 지금의 이단과도 다르게 사람이 하나님이나 근거 없이 자신을 그리스도라 하는 것을 엄히 경계했다. 하지만 그들은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끊임없는 경고와 질책을 받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에 자신의 생각을 교묘하게 조금 더하거나 빼거나 하는 것 때문이었다. 그 자신의 생각은 선악 간에 판단하는 기준 곧 선악과를 먹은 심령에서 비롯된 것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신앙에 있어 정말로 위험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믿지 않는 것 보다, 믿는 내용을 가감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감하는 이유는 자신이 가진 선과 악에 대한 기준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아들은 어떠해야 한다는 기준을 사람이 스스로 세운 것 때문인 것이다.


유대인들이 가진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기준은 <하나님의 의>라는 내용보다 율법이라는 형식이 잘 지켜져야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생각했고, 영지주의자들은 하나님께서 사람의 육신 가진 삶이라는 형식을 가지고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임을 부인하고 내용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미혹하는 영의 생각들이라는 책망을 받는 것이다.


그리고 지금 이 시대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기준에 <세상에서 성공>이나 <도덕이냐 예의가 있는 사람>이라는 조건이 첨가되었다. 성공이나, 예의나 도덕이나 고상함이나 부와 명예가 잘못된 것이 아니다. 그것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더 훌륭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께서 더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고 가르치는 것이 바로 미혹하는 영이라는 것이다.


성공이나 예의나 수고나 봉사와 헌신과 같은 것은 그것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되거나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생각하시는 사람의 정체성인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깨닫게 하는 사랑을 표현하기 위하여 육신으로 수고하는 수단과 방법과 과정으로 사용될 때 가치가 있는 것이지 그것이 구원이나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조건이 아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의 영은 오직 육신으로 오셔서 인생의 모습을 보여주신 예수님과 같이 사람이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습 그대로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목적 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하시는 것이며, 그 영이 있는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육신의 모든 것을 수단으로 삼아 그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유대인의 관점이나 영지주의의 과점이나 오늘 타협해가는 신앙의 모든 것은 다 세상에 속한 말(요일 4:5)이라고 요한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이런 말을 듣거나 여기에 솔깃하거나 심지어 가르치는 모든 사람들은 다 세상에 속하였기 때문이라고 요한 사도는 말씀하고 있다. 소리굽쇠가 공명을 일으키듯 말이다.


하지만 이 세상의 말과 하나님께 속한 말은 구분하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것은 이 모든 세계가 다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은 아수라나 키메라 같은 것이 없다. 오직 이것이면 이것으로 존재할 뿐이다. 그리고 나머지는 생명 아닌 것뿐이다.


생명의 구분은 절대로 어렵지 않다. 개와 고양이를 구분하는 것이 어려운가? 말과 당나귀 사이에 태어나는 노새는 노새이지 나귀나 말이 아니다. 그렇듯 생명은 오직 그 자체일 뿐이다. 하나님의 생명도 오직 그것일 뿐이다. 


그것에 세상의 지식이나 종교적 규례나 기적을 더한다고 그 생명이 더 온전해지거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미혹하는 영이요 하나님께서 엄히 경계하시는 것이다. 


변화산에도 바로 그것을 보여주시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만 있으면 되는 것이지 그것에 모세의 율법이나 엘리야의 기적을 함께 둘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오직 예수님의 말을 들으라고 하늘에서 말씀하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설명하시듯 변화산 아래에서는 불(기적, 엘리야의 상징)에도 넘어지고 물(모세-물에서 건져 냄, 율법의 상징)에도 넘어지는 아이를 오직 기도만이 고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기도는 바로 예수님을 구하는 것이다.(이것에 관해서는 주기도문 포스트 등을 참조 바람)


그러므로 미혹은 다른 것이 아니다. 예수 믿는 사람을 절에 가자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미혹은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서 사람에게 설명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을 유대인과 같이 종교적인 규례로 변질시키거나 영지주의와 같이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변질시키거나 지금 이 시대처럼 세상에서 온 과학이나 도덕이나 예의와 같은 것을 더하거나 혹은 하나님 말씀을 빼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미혹이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적그리스도의 영으로부터 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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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 1서 4장에 들어가면서 요한 사도는 영에 대한 말씀을 하고 있다. 이는 3장에서 계명을 지키는 자는 그 안에 하나님의 영 곧 성령이 거하심을 말씀하신 다음에 이어서 나오는 것이다. (신약은 원래 장절이 없고 근대에 들어와서 구분되었다.(참조 대한성서공회))


요한사도는 성령 안에서 행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말씀하고 있는데, 그것은 <계명대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요한일서 3장에서 말씀하고 있다. 즉 성령의 역사는 기적을 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대로 사랑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계명이 바로 서로 사랑하는 것(요 13장)인데, 바로 그 예수님의 새 계명대로 서로 사랑하는 것이 성령의 역사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밥 퍼주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이자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해 주는 것이다.


보통은 성령의 역사라고 하면 사람들이 쉽게 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생각한다. 보통 그것을 사람들이 <기적>이라고 한다. 하지만 세상에 있는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모든 법과 계명에는 목적이 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한다는 것이 세법이지만 그렇다고 재산을 압류하는 것이 세법의 목적이 아니다. 세법의 목적은 세금을 잘 거두어 나라를 위해 국민을 위해 사용하는 것에 있다.


하나님의 모든 계명 역시 목적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다. 세법이 결국은 국민들이 바라는 복지와 국가적 편의를 구현하는 것이 목적인 것과 같다. 그러므로 재산을 압류하는 것이 세법의 실체가 아니듯 하나님의 계명도 지켜내는 것 그것이 본질이 아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계명은 오직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는 것을 위하여 있는 것이지 그 계명을 잘 지켜내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께서 사랑하라는 계명을 주신 것 역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이루라는 말씀이 본질이다. 즉 그 목적을 이루려 하면 사랑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이 사랑인 것이다.


또한 사람에게 있어서도 자신의 존재 이유를 아는 것 이상의 삶의 의미는 없다. 다시 말해서 사람에게 궁극의 기쁨은 자신의 존재 이유가 확인되는 것이다. 부모가 많은 희생을 값없이 치르고도 자녀가 잘 되었을 때 부모로서의 존재이유가 이루어지는 기쁨을 맛보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사람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사랑은 존재의 이유를,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이것 이상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존재 이유와 목적을 가지신 유일한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것도 유일한 사랑인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는 것, 그러니까 다른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이유를 알게 하는 것, 그리고 그것을 위하여 수고하고 봉사하고 희생하고 구제하는 것이 사랑의 표현인 것이다. 그 표현은 마음 안에 사랑이 있으면 아무리 금하려 해도 나타나고 나타나는 것이다.


이 사랑,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 의미를 알게 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알게 하시기 위하여 본디 하나님이심에도 사람의 육신을 입고서 육신을 입고 있는 인생들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를 보여주셨기에 우리의 구주이시고 사랑의 왕이신 것이다.


바로 이 사랑, 육신을 가진 삶을 살면서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하나님의 목적을 전하고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전도요 또한 사람의 존재 목적인 것이다. 바로 이런 삶을 그리스도의 성품으로 사는 것이고 하나님의 형상이 회복된 삶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하나님께서 살았다 하는 유일한 생명이고 유일한 사랑이다.


바로 그런 사랑을 나타내게 하는 것, 육신을 가진 사람에게 육신의 수고와 희생으로 이 사랑을 알게 하는 영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성령이라는 것이다. 그러하기에 기적을 일으키는 영이 사람에게 필요한 영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사람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자 사람의 존재 의미를 깨달을 수 있게 수고하며 살아가게 하는 유일한 영이 <성령>이신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하고 사람이 그 사랑을 나타내고 표현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 목적이다. 그것을 위하여 필요하면 주린 배를 채워주기 위한 기적을, 또 육신의 병을 낫게 하는 기적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재산을 압류하는 것이 세법의 목적이 아니듯 성령의 목적이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는 말씀이 바로 <영을 다 믿지 말고>라는 말씀인 것이다. 유일하신 성령의 역사는 사람으로 하여금 창조주이신 하나님으로부터 온 존재의 목적을 알게 하시는 영 그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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