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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20-23 그리스도와 함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1. 30. 11:30 Writer : 김홍덕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머리의 뜻이 몸을 자라게 한다고 말씀하였다. 이러한 말씀은 신앙에 있어 복음 이외의 세상적인 것들이 가미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는데, 세상의 것은 몸과 같이 머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의 만물의 하나이기에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곧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을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일 뿐, 그것이 더해져야 더 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몸은 머리의 주관을 받아서 온전히 머리의 뜻을 행할 때 의미가 있듯이, 세상의 모든 학문도 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지, 그것이 있어야 더 온전한 복음이 된다거나, 아니면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식의 생각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바울 사도의 마음은 세상의 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것에 순종하는지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가 세상의 법과 안목에 따라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것을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동일하게 세상의 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세상의 것이 있어야 더 온전한 복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인데 왜 다시 그 의문에 회귀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초등 학문 안에서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의문스럽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시간개념이나 또 이분법적 사고와 같은 관점으로 성경을 공부해보면 정말로 하면할수록 의문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로 이어진다는 것은 정말로 성경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어 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이어 바울 사도는 이러한 것을 붙잡지도 맛보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제대로 알았다면 개가 야옹하지 않듯이 그러지 않을 것인데 왜 이렇게 경계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과학이나 철학이 세상의 초등학문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하여 그것이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것을 더해야 더 좋은 복음이 되고, 더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사람들이 철학이나 과학을 가지면 더 초등학문과 같이 된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울 사도가 또 많은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이 더해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은 이것이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날 때 온전한 존재로 나는 것이다. 사람이 날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기지만 사람으로서는 온전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 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그것으로 그리스도로 사는 것에 부족함이 없는데, 과학이나 철학이 있으면 더 온전해 진다고 하는 생각은 생명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몸을 괴롭히든 자의적으로 겸손하든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모두가 다 생명의 법을 제조와 가공의 법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를 그렇게 다룬다면 다 부패하는 것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 그것 하나면 부족함이 없다.(시 23:1)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때 장성한 어른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아기로 태어나셨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그 마음속에서 아기와 같이 전혀 무능하나 생명 자체로는 온전하게 나는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늘 사람을 부족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부족하게 보면 어떤 이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생명이 미약한 사람의 삶을 보고 육신이 무익하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주의고 영지주의인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공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뭔가를 자꾸 덧붙이려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좋지 않은 것이라 평소에 늘 생각한다.


돈이 있으면 더 영광스럽고, 과학이나 철학에 능통하면 더 그리스도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거창하고 유별난 생각 같지만 이미 우리는 그 속에 심각하게 잠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교회를 크고 아름답게 지으면 좋다고, 같은 값이면 세상에서 성공하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에 순종하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듯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와 뜻이 심겨져서 그것을 표현하는 삶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뭔가를 자꾸 더 추가하려 한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기가 걷지 못한다고 다리를 붙이려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앞에서 말한 하나님을 믿는 것만 사람 안에 있으면 그것이 자라면서 지혜가 더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점점 사랑스러워져 가는 것이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교회에서 과학이나 철학이 있는 자가 높임을 받는 것에 대하여 경계함은 당연한 것이고, 요한 사도가 육신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알 수 있다.


신앙은 여정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그러했고, 예수님이 나셔서 자라심이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 그것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다. 그것이 생명이기에 자라남으로 모든 것이 된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에 뭔가를 더하려고 안달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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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신념과는 다른 믿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 29. 10:53 Writer : 김홍덕

믿음이라는 것은 <기대>와는 다른 것이다. 또한 <신념>과도 다른 것이다. 신념은 굉장히 능동적인 개념이다. 내가 믿는 것에 대하여 아주 능동적인 갈망을 가지도 있다는 것이기에 그렇고, 기대는 믿는 대상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의 의지가 관철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믿음은 상상 이상으로 순종적인 것이다. 순종이라는 것은 믿는 대상이 보이는 모든 결과에 순종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윗 왕이 밧세바 사이에서 난 첫 번째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다 아이가 죽자 씻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는데, 제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믿음의 표현이고 성의고 마음의 표시일 수 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믿음의 상징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사보다는 순종이 낫다는 말씀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믿음이란 아주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상의 모든 반응에 내가 순종할 수 있을 때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부모의 바람대로 아이가 자라는 것을 두고 아이를 믿는다고 하면 곤란하다.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을 지지하고, 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하는 것, 즉 아이가 보이는 모든 반응에 순종하는 것이 아이를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이 나의 바람을 들어 주실 것이라는 기대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강한 신념이 믿음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듯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


신념이 믿음이 되고 기대가 믿음이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임신한 아이가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나, 자신의 병을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다면, 딸이 태어나면 그 아이가 아들로 바뀔 것이라는 것까지 믿어야 하고, 아프다 죽으면 다시 살 것 까지 믿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대에 대한 능동적인 신념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당시는 아브람)이 원하는 어떤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그냥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헹가래를 당할 때 받쳐주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받쳐주지 않아서 자신이 떨어져 다치는 피해를 감수할 때 비로소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 떨어져서 다쳤을 때 받쳐주던 사람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은 정말로 수동적인 것이다. 수동적이라는 것은 마음먹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대상 앞에서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순종할 때 비로서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릇은 아무리 신념을 가져도 스스로 내용물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수동적인 존재가 되고 주인이 따라주는 것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설사 그릇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스스로 뒤집어져 있을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그릇이 주인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릇은 주인이 자신에게 늘 주인이 원하는 것을  담아내는 순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믿음의 반대 방향성을 가진 충성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즉 주인은 그릇을 충성되게 여기고, 그릇은 주인을 믿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질그릇이라 비유한 것을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볼 수 없다고 하신 것도 이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자신의 기대에 대하여 반응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었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듯 하나님의 목적과 의가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순종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믿음은 아주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믿는 대상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정립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믿는 대상이 보여주는 그 어떤 것에도 내가 감수하고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믿음이지 내가 바라는 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나 아이를 기르면서 이 믿음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본다. 아이를 믿는다는 것이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돌아보게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더 알게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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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16-19 머리로 인하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1. 28. 14:06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골로새 교회를 향하여 세상의 철학과 과학이 교회 안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시며 하시는 말씀 안에 머리와 몸과 그림자와 같은 말씀이 있는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다. 교회라는 곳은 그리스도가 머리가 되시는 곳이기 때문이다.


머리는 몸의 모든 정체성을 주관하는 곳이다. 정체성이라고 해서 대단한 것이라기보다, 그 몸의 모든 행동과 모양을 머리에서 결정하기 때문이다. 즉 몸의 모든 것이 머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고 이것은 의학적인 견해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기본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표현한다는 것은 그리스도가 어떤 존재임을 말씀하시겠다는 것인데,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성품이 육신을 가진 사람을 통하여 표현된 존재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첫 열매이자, 그 표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이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책으로 사람에게(만) 읽혀지는 것은 사람이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드실 때부터 정하신 사람의 창조 목적이고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이 하나남의 뜻, 즉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사는 이 하나님의 뜻이 바로 머리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나 사람의 삶이나 모두 이 머리가 지시하는 것을 행하고, 이 머리가 표현하는 것을 나타내어야 하는 것이다.


만약에 이런 것이 원활하지 않게 되면 그것이 바로 '중풍'이다. 즉 머리의 뜻이 몸에 전달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중풍병자를 고치신 것이다. 즉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지 않는 것을 고치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며, 그 고쳐진 상태가 되어야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지니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머리되는 그리스도가 몸을 주관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하나님의 그 뜻이 제대로 전달되어야 온 몸이 자라고 장성한 사람의 삶을 살게 되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이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반면에 철학이나 과학과 같이 머리되신 그리스도의 뜻과 상관없는 것에 따르는 것은 몸이 정상이 아닌 상태인 것이다.


또한 월삭이나 안식일이나 절기와 같은 모든 것은 다 머리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머리에서 비롯되어 표현된 모양일 뿐인데, 그것을 잘 지켜 행하여야 한다고 논쟁을 하지 못하게 하라고 하는 것은, 그런 것은 다 빛이 몸에 비쳐서 그림자가 나타나듯이 복음, 곧 그리스도께서 보이시고 바울이 전하고 에바브라가 전한 복음이 머리가 몸을 주관하듯 하면 나타나는 것일 뿐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더불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중요한 방향의 오류가 있는데, 그것은 생명이 있으면 그 생명의 본능을 따라 나타나는 행동과 법과 규범들이 본질로 오인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의 육신과 삶을 통하여 어떻게 표현되어지는가를 기록한 말씀이 성경인데, 사람들은 그 하나님의 성품, 머리와 같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그리스도의 정체성은 뒤로 두고 거꾸로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그런 생각은 선악과에서부터 시작된 오래된 유전이다. 선악과를 먹은 이유가 선악과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즉 하나님처럼 된다는 것에 대하여 오해했고 스스로 그 방법에 대한 결정을 했다는 것이다. 즉 어떤 것이 선한 것(하나님처럼 되는 것)인지를 하나님과 다르게 스스로 생각했다는 것인데, 그 유전이 지금에 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바울이 골로새 교회에 서신을 보내는 이때의 상황도 다를 바가 없어서, 사람들이 세상의 철학과 과학과 같은 것이 가미되었을 때 더 하나님을 잘 믿는 것이라는 생각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라고 전하는 에바브라의 말은 듣지 않는 그런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과학과 철학은 몸이 아니라 그림자며, 그것은 머리에서 전달된 뜻이 아닌 세상의 헛된 속임수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바울 사도는 과학이든 철학이든 그런 세상에서 비롯된 것들은 다 그리스도를 나타내기 위하여 사용될 것이지, 그것 자체가 그리스도를 표현하는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누누이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머리이신 교회는 세상의 것,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이 더 영광을 받으신다는 것, 화려하고 좋은 교회일수록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골로새 교회 당시에 과학과 철학과 같은 세상의 것이 교회 안에서 더 인정받는 그런 모순과 전혀 다를바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교회라는 공동체에 국한된 말씀이 아니라, 한 개인도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에 있어 분명한 방향성을 가지고, 하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 예수 그리스도와 같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삶을 사는 사람이 되면 성경의 말씀은 스스로 부인하려 해도 나도 모르게 그렇게 살 수 밖에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다시 또 말하지만 성경은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께 있으면 표현되는 삶의 모양을 말씀하신 책이라는 것이다. 성경은 성령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바로 그것인데, 성령의 감동은 사람이 그리스도의 말씀과 십자가를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은 존재임을 고백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신의 정체성을 받아들이게 하는 분이 바로 성령이고, 그것이 성령의 감동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모든 말씀은 말씀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보고 자신이 백조인 것을 발견한 미운오리 새끼처럼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를 깨닫고 그 정체성에 순종하면 백조가 되듯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사는 삶의 모양이 기록된 성경과 같이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본질과 순서가 바뀌고 머리에서 몸으로 뜻이 전달되는 것이 아니라, 몸이 먼저 되어 머리를 움직이려 하고,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하여 사용되어져야할 과학이나 철학과 같은 세상의 것이 복음보다 인정을 받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를 골로새서를 통하여 내내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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