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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인 과세 관련 뉴스 <-- (클릭)


종교인 과세가 또 뉴스가 되고 있다. 하나님의 일에 세금을 메기는 문제로 여겨지고 있는데, 그런 문제의 정의부터 아주 잘못된 것이다.


기독교 신앙인들이 세금을 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분명히 심각한 착각이다. 세상적인 제도인 시험과 면접 등을 통해서 목사가 된 사람들이 세상의 세금을 내지 않으려고 자신들은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말하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이런 생각이 신앙적으로 큰 모순이라는 것이다.


특히 지금과 같이 사람들에게 배척당하는 기운이 많은 사회적 분위기를 고려할 때 뭔가 단단히 착각하고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세상 가운데 살게 하신 이유를 모른다는 것이다. 이것은 긴 설명이 필요할지 모르지만 간략하게 말해 보자면,


초대교회 시절에 <영지주의>라는 이단 사상이 있었는데, 그 골자가 무엇인가 하면 '예수님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진 분이 아니며, 신앙은 내면만 중요할 뿐 육신은 아무렇게나 살아도 된다.>는 것이었다. 세금을 내지 않겠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신앙적인 뿌리가 영지주의와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왜 그런지 한마디로 한다면,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 세상이 정한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고 십자가에 달려 죽임을 당하실 정도로 세상의 법에 순종하셨는데, 그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자리,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란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었을 때 오히려 구원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구원을 받기 위하여 억지로 세상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한계가 있는 육신을 가지고 여러가지 법과 도덕이 있는 세상에 살도록 하신 이유가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 신앙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세상의 법이나 도덕이 하나님을 믿는데 필요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그것을 무시하라는 것도 아니다.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으로 사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이해한다면 세상에서 특별한 취급을 받는 것이 신앙의 정체성이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기독교의 신앙에는 분명한 내용과 형식이 있다. 내용은 하나님의 의와 뜻이고, 사람의 육신은 분명한 형식이다. 즉 이 사람의 육신이 없으면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드러낼 수 없다는 것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하나님의 법이고, 또한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것이 하나님의 일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육신을 가지고 세상 안에 살아가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이 세상을 등지는 것이 신앙이 아니라, 육신을 가진 삶과 그 삶이 속한 세상을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라는 것을 알고 그것에 맞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 진정한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이다.


세금을 내지 않는 이유가 '하나님의 일에 세상의 세금을 낼 이유가 없다'라고 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그런 식의 생각은 정말로 하나님의 일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일은 예수님을 믿는 것(요 6:29)이라고 했는데 정말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인지 안다면 적어도 그런 말은 하지 않을 것이다.


오히려 많은 가난한 목사들이 과세 표면으로 노출되어 각종 사회적인 지원을 받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르는데, 부자 목사들, 시험치고 면접보고 정치적인 목사들이 세금을 하나님의 일 운운하며 내지 않으려 한다는 것은 참 잘못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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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인과 아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12. 1. 16:03 Writer : 김홍덕

창세기 4장에는 웬만한 사람들이 다 알고 있는 <가인과 아벨>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다. 선악과를 먹고 에덴(만족) 동산에서 쫓겨 난 아담과 하와가 동침하여 아들을 낳았는데 맏이가 <가인>이고 그 동생이 <아벨>이다.


가인의 생업은 농사를 짓는 것이고, 아벨은 양을 치는 사람이었는데, 그 둘이 자신들의 소산물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드니 양을 바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농산물을 바친 가인의 제사는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는데, 이에 격분한 가인이 그 동생 아벨을 쳐 죽이는 사건이 그것이다.



Cain interficit Abelem
Cain interficit Abelem by Nick in exsilio 저작자 표시비영리동일조건 변경허락



이 말씀을 대할 때에 먼저는 '왜 가인의 제사는 안 받아졌을까?' 하는 것이다. 이것은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그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떤 제사는 열납되고, 어떤 제사는 열납되지 않는 세계가 열렸다는 점이다.


물론 어떤 측면에서는 하나님께 무엇을 제사로 드릴 것인지가 중요하다. 하지만 그것이 양이냐 농산물이냐 하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이라면 이 시대는 대부분의 헌금이 돈으로 드려지고 있는데 그런 구분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의 종류나 성격이 이 말씀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 보아야 하고, 또한 어떤 것은 열납되고 어떤 것은 열닙되지 않는 세계가 열렸다는 것이 에덴동산과 달라진 사람의 삶이 시작되었다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이다. 그리고 결국 그것을 아는 것이 어떤 제사가 하나님께 드려지는 제사인지를 알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사람들이 가인과 아벨에 대한 말씀을 읽고서 하나님이 받으시는 제사와 받지 않으시는 제사로 제사를 이분법적으로 구분하는 것은 세상을 이분법적으로 보는 가치관과 연결된 생각이다. 


제사라는 것이 결국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는 것이므로 가인과 아벨의 사건을 보는 시각은 제사가 어떤 것인지와, 그 제사에 대한 사람의 태도(가인의 태도를 기준으로)를 살펴 보는 것이 더 은혜롭다면 은혜로운 접근이라 할 수 있다.


우선은 가인이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열납하시고 자신의 제사는 받으시지 않았다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판단을 했다는 것이 중요하다. 이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네가 어찌하여..."라고 말씀을 하신다. 다시 말해서 이는 제사의 열납 여부에 대하여 가인이 상관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인이 제사와 상관할 일이 있다면, 열납되지 않았다고 생각되면 그것이 왜 그렇게 하셨는지에 대한 하나님의 뜻을 알고자 기다리는 것이 가인이 가져야 할 태도였다면 태도일 것이다. 그러니까 제사의 열납은 하나님의 권한이지 가인이 '왜?'라고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선>이란 바로 그런 것이다. 이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도 <오직 하나님 만이 선하시다>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런 의미인 것이다. 하나님이 모든 일에 뜻을 가지고 계시다는 것, 그 결정에 순종하면 된다는 것, 그것이 오직 선일 뿐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결정에 대하여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하였다. 그것은 그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먹은 선악과의 결과인 것이다. 이 가인은 선악과를 먹고 쫓겨난 아담과 하와 사이에서 난 자식이기 때문에 가인의 결정은 선악과의 결과인 것이다.


가인은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하여 의사를 가진 인간의 모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는 스스로를 부끄러워 가렸을 뿐이지만 그것의 결국은 하나님께서 그 선하신대로 보여주신 결과에 대하여 사람을 죽이는 모습을 보이는 것이 바로 사람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결과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이는 예수님을 주인 유대인의 모습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자신들이 가진 기준으로 볼 때 인정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는 가인이 자신의 제사에 대한 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은 지금 시대의 사람들도 스스로 선과 악에 대하여 판단하는 마음이 있을 때 보여주는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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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일서 3장 1-12절) 믿음과 행함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11. 26. 13:19 Writer : 김홍덕

신앙에 있어 말과 행동의 문제, 어떤 측면에서 이론과 실제라고 표현할 수 있는 문제를 흔히 <믿음과 행함>의 문제로 정의되고 한다.


이러한 문제에 있어 늘 핵심이 되는 성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아마 그것은 '야고보서'일 것이다. 이 야고보서는 한 때 '성경으로 인정할 것이냐?'라는 논란까지 있었다고 하는데 그런 것을 보면 믿음과 행함이라는 것은 참 끊임없는 논란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핵심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라는 바울과,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의 상충되어 보이는 두 말씀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다른 말씀이 아니라 동일한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이 Be에 관한 것인지, 아니면 Do에 관한 것인지>를 묻는 것과, <소유냐? 존재냐?>와 같은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낭중지추(囊中之錐)>라는 말이 있다. "주머니 속의 송곳은 감출 수 없다."는 의미인데, 믿음과 행함, 생명과 표현, 내용과 형식 이 모든 것이 이와 같다. 즉 믿음이 있으면 행함이 따를 수밖에 없고, 생명은 어떻게든 표현되며, 내용과 형식은 절대 분리할 수 없다.


기독교 신앙에 있어 이러한 일원론적 가치관은 신앙의 절대적 기준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선악과라는 것이 인간 타락의 원인이고 결정체인데, 선악과라는 것이 어떤 것을 보는 기준이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가치관이기 때문이다.


이분법적 가치관은 신앙이 타락하는 근본 원인이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내용과 사람의 삶이라는 형식을 나누어서 의를 무시하고 형식을 선하게 여기면 율법주의가 되고, 의만 선하고 육신은 악하게 여기면 영지주의가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일원론적 가치관의 말씀이다. 예를 들어 동전을 두고 앞면인지 뒷면인지를 논제로 하는 것이 아니라 이 동전이 어디에, 어떤 가치로 쓰이기 위한 것인지를 논하는 것이 바로 일원론적인 가치관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을 읽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이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는 존재가 아니라, 사람이 가진 이 육신으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이 보실 때 생명이 있고 살아있는 삶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에게 있어 믿음과 행함은 낭중지추와 같이 그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믿음이 있으면 행함은 너무나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자신이 감당할 수도 없고 이 육신의 삶이 자신이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이라 인정할 수 없어서 끊임없이 무언가를 하고 공로나 수고를 하거나 절제를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로 성경 말씀을 지켜내려고 하면 그것은 믿음이 없고 행함만 있는 것이고 그것이 율법주의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이 육신 속한 삶에서 내용만이 중요하고, 이 세상은 전부 죄악이라서 어떻게든 그것과 분리된 삶을 살아야 하며, 세상에 충실한 것은 세상의 종살이라 여기는 신앙, 어쩌면 투철해 보이기도 하는 그 신앙은 인생이 육신이라는 것을 부인하는 영지주의와 같은 것이다.


그리고 영지주의는 사도들이 그렇게 경계했던 삶이었고 올바르지 않은 신앙이었다. 그런데 오늘날 많은 신앙인들이 신앙만 있으면 육신으로서의 삶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난 것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물론 하나님의 의와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는 상태에서 노숙자에게 밥을 퍼 준다는 것만으로 하나님께 의미 있는 삶이 되지는 않는다. 그렇다고 예수 믿기 때문에 사회적인 책임에 무관한 듯 하는 것도 바른 신앙은 아닌 것이다.


몇 년 전에 샘물교회 사람들이 선교한답시고 중동에 가서는 국가적인 문제를 일으킨 적이 있다. 그 결과 몇 사람이 죽고 나라가 나서서 그들을 데리고 오는 어이없는 일이 있었다. 바로 그런 것이다. 육신의 삶을 부인한다는 것이 말이다.


샘물교회 사건 당시 필자가 다음 아고라에 올린 글


그런 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신 것을 부인하는 것이다. 왜냐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지만 이 땅에 있는 하나님의 의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형식만 지키는 율법주의자들의 법에 순종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베드로가 종 말고의 귀를 잘랐을 때 말씀하시기를,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너는 내가 내 아버지께 구하여 지금 열 두 영 더되는 천사를 보내시게 할 수 없는 줄로 아느냐 내가 만일 그렇게 하면 이런 일이 있으리라 한 성경이 어떻게 이루어지리요 하시더라"(마 26:52~54)

라고 하셨다.


다시 말해서 성경을 이루어지게 하는 것은 사람이 나서서 세상의 모순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을 심판하고 배척하고 대척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법에 의하여 끌려가는 것, 그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되는 세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세상에서 어떤 특권을 가지게 되고, 그래서 세상을 무시하고 사는 것이 신앙이라 여기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 요한이 요한일서에서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으로 사랑하자(요일 3:18)"고 하는 것은 밥을 퍼 주자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세상을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그리 하자는 것이다.


예수님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가지신 사람의 정체성과 목적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이라는 내용을 아니 성품을 표현하여 하나님의 형상으로 회복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사랑에 있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보여주신 것은 세상에 대한 대적이나, 세상에 대한 무시가 아니라 예루살렘 성을 보시며 우시던 그런 모습이고, 하나님을 알지 못하여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는 자들을 '자신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라'면서 하나님께 중보하시는 그런 모습이다.


행함은 기본적으로 생명이 그 본성을 표현하는 것이다. 사람이면 두발로 서서 사회를 이루고 사는 것과 같다. 사람이라는 이름이 생명이고, 사람의 삶이 행함인 것이다. 이것은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 행함은 사람에게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보여주는 것이다. 여기에는 순종이 있지 항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순종은 육신을 가진 삶에 있어 육신이라는 한계에 순종하는 것이고, 세상을 살아감에 있어 세상의 일원으로 충실하게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아닌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본 백부장이 하나님의 아들을 발견하듯, 누가 그 삶을 보고 하나님의 아들임을 발견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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