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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보는 두 가지 관점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을 표현할 존재로 지으시고 인생을 주신 것에 관한 두 가지 절대적인 관점이 있다. 하나는  이 인생이 부족하고 하나님 앞에 악한 행동을 많이 하므로 이 삶을 끊임없이 절제하고 고쳐야 한다는 관점과, 다른 하나는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 다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것은 언뜻 보면 성선설과 성악설의 논쟁과 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이것은 그런 이야기가 아니다. 그것은 지속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내용으로,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어떻게 보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지으신 육신을 부정한 것으로 보는 것인지, 아니면 하나님과 같이 보기에 심히 좋은 것으로 보는지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인생을 하나님과 같은 관점과 안목으로 보느냐? 아니면 사람이 정한 선과 악의 기준으로 심판의 대상으로서 인간의 육신이 가진 여러 가지 연약함을 보느냐? 하는 문제이다. 즉 하나님과 같이 생각하느냐? 아니면 하나님과는 반대로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한 기준으로 모든 것을 보느냐? 하는 문제라는 것이다.


이것은 신앙의 근간에 속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했는데, 선악과를 먹은 아담은 그 육신을 부끄러워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이 가진 모든 것이 가려지지 않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보기 좋은데, 선악과를 먹은 안목으로 보면 감추어야 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아주 다른 결과와 반응을 나타낸다.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처럼 되려고 한 안목으로는 이 육신의 벗은 모습, 단순히 옷을 입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육신의 연약함이 다 드러나는 것을 부끄러워하기 때문에 이것을 절제하고 통제하여 그런 것이 보이지 않게 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은 결국 어떤 법을 만들고 그 법을 지켜 행하려는 가치관을 가지고서 그것을 지키려 한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계명도 율법이고, 예수님의 말씀도 율법이다. 책을 읽을 때 행간을 읽지 않고 문자만 읽는 것과 같은 모양으로 보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구약과 신약은 시대가 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지 아닌지로 나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안목으로 볼 수 있는 생명이 있다면 십계명도 복음이 될 것이고, 그렇지 않고 이 육신의 연약함을 행함으로 감추려 하는 안목으로 성경을 보는 사람은 산상수훈도 율법이 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것이다.


그런 사람은 육신의 모든 것을 바꾸려 한다. 그리고 그런 맥락에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을 할 수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이라고 읽는 것이다. 즉 복음을 율법으로 읽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목적과 수단



반면에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사람을 보는 가치관은 사람이 가진 연약함이든 어떤 것이라도 다 하나님께서 그것을 그렇게 주신 목적이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 목적을 위하여 인생을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람들은 삶의 모양과 방법에 있어 어떤 것을 택하여도 무관하다. 하나님이 주신 목적만을 향해서 가는 사람은 자신의 인생의 어떤 것도 다 그것을 위하여 사용하는 사람이 되기 때문에, 때로는 겸손하고 때로는 과감하고 남 보기에 교만한 모습으로 사람에게 복음을 외치기도 하고, 어떤 것에는 한 없이 자비하나 어떤 것은 그렇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런 이야기를 하면 '그러면 목적을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는 것이냐?'라고 반문한다. 그런 질문은 한 마디로 목적을 위하여 사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고 해 보지도 못한 사람이라는 것을 실토하는 것일 뿐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신 목적이 무엇인지를 안다면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가장 잘 표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 예수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수단과 방법을 마구 선택하신 분이신가? 그렇지 않다.


제사장의 종 말고의 귀를 자르는 베드로에게 '지금 당장이라도 하늘의 천군과 천사를 불러 군인들을 무찌를 수 있지만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겠느냐?' 하신 분이 예수님이시고, 자신에 대하여 거짓 증언하는 이들에게 일언반구도 않고 오히려 자신이 죽을 수 있음에도 분명하게 선언해야 하는 것은 대답하신 분이 예수님이시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설명하는 말씀이 있는데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과 십자가의 도를 알고서 목적을 향해 가는 것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것으로 혼용하고 구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의 뜻도 십자가도 모르고 시비를 거는 사람일 뿐이다.



사랑 받는 자와 같이 옷 입고



바울 사도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분명히 아는 사람이다. 그가 말하기를 "내 안에 사는 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했다는 것에서 그것은 분명한 것이다. 즉 바울 사도는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자기 안에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사람이었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 중에는 이것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경우가 많다. 그것은 단적으로 생명이 없거나 아직 느끼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리고 성경 말씀을 지켜 행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외 없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신 안에 없는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이것은 아주 분명한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 겸손과 자비와 같은 것은 옷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수단이고 공로이기 때문이다. 옷은 자신을 나타내는 것이지, 옷이 자신의 정체성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성경 말씀을 지키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하나님의 생명이 있는 사람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군복을 입고 있으면 군인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그것은 거짓말 하는 것일 뿐이다.


군인은 군복을 입는다. 그것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이 있는 사람, 하늘의 것을 생각하는 사람, 새 사람을 입은 사람은 그 생명에 맞게 옷을 입는다. 그 옷이 바로 긍휼과 자비와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과 같은 것이다. 이런 모습을 잘 보여 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하나님의 뜻을 표현해야 했기 때문에 천군천사를 불러 로마 병정을 물리치신 것이 아니라, 십자가로 가는 옷을 입으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는 십자가가 보여주는 인간 정체성의 표준이시기 때문인 것이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군인이고 십자가는 군복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이라는 것은 바로 이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어서 그것을 표현하기 위하여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다. 복음을 알면 율법적인 행위로 비치는 것들, 봉사와 헌신과 자비와 예의 바른 삶과 같은 것을 더 잘 하려 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 그런 수고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만든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자신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사람으로서 살고자 하는 그 생명으로 인하여 금하려 해도 그런 삶을 살게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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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3:5-11 어떤 사람에게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2. 6. 11:56 Writer : 김홍덕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이 사람에게 자신의 이야기가 되면 사람의 삶은 바뀌게 된다. 기적을 논하는 것에 있어서 본다면 가장 큰 기적은 사람이 변하는 것이기도 하다. 사람이 바뀐다는 것은 근본적으로 성격이나 성향이 바뀐다고 하기보다, 그것을 표현하고 사용하는 것이 바뀌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성격이 급한 사람은 나이를 먹으며 신체의 반응 속도가 느려지는 만큼 행동이 느려질 수 있지만, 그래도 일을 처리하거나 닥칠 일을 대비하는 것에 관한 마음 씀씀이 같은 것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이 변한다는 것은 성격 급한 사람이 느긋한 사람으로 바뀌는 것이라기보다, 그것을 어떻게 어디에 사용하는지가 달라졌을 때 변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야기를 해 가는 것은 복음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고 살면 모든 것이 되는가 하는 문제에 관한 것이다. 사실 이런 문제를 이야기해야 하는 것은 신앙이라는 세계 안에 'have to'와 같은 것이 너무 많고, 또 뭔가를 해야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라는 문화를 쉽게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좋은 현상은 아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에 관한 것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하나님께서 보실 때 살아 있다고 하시는 것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자연은 살아 있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이 볼 때 자연은 스스로 살아 숨 쉬듯 생태계를 유지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그런 말을 하듯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도 그런 사람, 그런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느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한다. 즉 사람이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에 부합된 삶을 살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살아있는 사람이라고 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목적은 사람이 육신인 인생의 한계를 극복하고 위대해지거나, 육신이 가진 연약함을 숨기고 절제하면 할수록 하나님이 보실 때 목적에 부합된 사람이 아니라, 그 자신의 모습을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우선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실존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지으신 그 형상으로 뭔가를 할 수가 없다. 지으신 대로의 모습을 인정하지 않는데, 어떻게 그 지으신 실존으로 하시려는 것을 하실 수 있겠는가? 그건 그럴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우선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자신의 실체를 드러내는 것을 항상 경계하고 부인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집을 사거나 그릇을 살 때 이런 말을 한다. '손님 오면 보기에도 좋다.'라고 말이다, 하지만 정작 대부분의 사람들은 집에 누가 오는 것을 싫어하고 부담스러워 한다. 화장하고 만나는 것은 괜찮지만 속옷 차림에 화장실 드나드는 모습을 보이는 것은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아담이 벗은 몸을 부끄러워 한 것과 같은 것이다. 누구나 다 그런 모습임에도 그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단순한 생활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활동, 곧 성과를 내고 돈을 벌고 명예롭게 되는 것에도 똑같이 한다는 것이다. 늘 어두운 면은 감추고 어떻게든 남 보기에 좋은 것으로 꾸미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보이기 좋은 것이 되는 것, 그것은 사람이 가지고 있는 사람에 대한 기준이다. '사람이 적어도 이래야지!'하는 기준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것은 사람이 어떠해야 <선한 사람>인가를 가늠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 기준으로 인해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다.



그렇다면, 이 사람의 연약함을 자랑할 것인가?



감추지 않는 것과 자랑하고 떠벌리는 것은 다른 것이다. 이것은 믿음과도 연관성이 있다. 믿음은 수동적인 것이라 누누이 말해 왔다. 사람들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연약함이 드러나는 순간이 되었을 때 그것을 힘써 감추고 피하려 하지 않고, 그것이 드러남으로 인하여 부끄럽고 죄인 되는 것을 피하지 않고 순종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의 시작이다. (사실 사람의 이런 모습은 굳이 신앙이 아니라도 사람들을 감동시킨다.)


그리고 사람이 그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고 나면 그 다음은 어떻게 될 것인가? 이것은 신앙에 있어 중요한 전환이다. 우리가 연약함을 시인하고 죄인 됨을 시인하는 것은 연약함에 머무르거나 죄인으로 살아가기 위한 것이 아니다. 여기에는 반전이 있다.


사실 반전이라기보다 이것이 하나님의 법이다. 사람이 자신의 연약함을 시인하는 것은 부끄럽고 많은 경우 세상이 가지고 있는 선의 기준에 의해 죄인이 되는데, 그렇게 죄인이 된 사람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살리시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것이 바로 이 법인 것이다. 다시 산다는 것은 먼저 죽었다는 것이고, 왜 죽었는가 하면 세상이 가지고 있는 선의 기준으로 볼 때 인간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모습은 죄인이기 때문에 그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도 죄가 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가 죄가 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기 전에 우리 모습에 관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부인하고 배척하고 산 것에 관한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시인해야 하는 죄인 것이다.



죄를 시인함으로 의에 이르고……



사람이 자신의 존재의 연약함과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을 외면하고 산 삶에 대하여 시인하는 것은 죄인으로 머물기 위함이 아니라 의롭게 되고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입기 위함이다.


여기서 잠깐, 이는 도끼를 잃어버린 나무꾼의 마음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의롭다고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이므로 그것을 목적으로 죄를 시인하는 교묘함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도끼가 목적이 아니었듯, 사람은 거저 자신의 실체를 인정하는 그것으로 끝이고 그 다음은 하나님의 권세에 관한 것이다. 그러므로 천국 가는 것을 목적으로 회개하는 것과 같은 것은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그런 고백과 참회를 해 본 사람은 아는 것이다.


요한 사도는 이에 대하여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라고 하셨다. 즉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실체를 인정하고 또 하나님 앞에서는 우리의 실체를 부인하는 죄 가운데 있었다는 것을 인정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죄를 사하셔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다시 살리심과 같이 우리를 살리시고, 또한 깨끗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깨끗하게 한다는 것 역시 깨끗하게 두시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어떤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이유는 그것을 어떤 목적에 맞게 사용하기 위하여 깨끗하게 하지 버릴 것은 깨끗하게 하지 않는 것이듯 하나님도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사용하시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깨닫는다는 것은 이때까지 그렇게 살지 못해서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었던 삶을 고백하는 것이고, 또한 그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세상의 법 앞에서 십자가를 지는 것 같은 죄인이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 고백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 비로소 그 사람을 목적을 위하여 사용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실제적인 권면을 해 가는 바울 사도



사람이 하나님을 존재로 만나면 신앙은 완전하고 온전한 것이다. 아이가 태어날 때 반인 반수로 태어나지 않고 온전한 사람으로 나는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게 끝은 아니다. 아이가 태어나서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위하여 갖추어야 할 것이 많다.


하지만 그 어떤 것도 아이가 자라면서 사람으로서 가진 생명으로서 부족함을 채워야 하는 것은 없다. 이미 태어나는 순간 사람의 유전자로 온전하기 때문이다. 다만 생명이 자라서 어른이 되어야 다시 아이를 낳고 기르는 부모가 될 수 있듯 하나님 안에서도 그런 과정이 있어야 하는 것이기는 한 것이다.


하지만 결혼해서 아이를 낳는 삶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을 사람이 아니라고 하지 않듯이, 하나님의 생명 안에서도 어떤 이들은 자신의 분량이 또 다른 생명을 낳는 것에 이르지 않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생명에 대한 죄는 아니다. 


언젠가 언급하겠지만 신앙의 척도가 있다면 그것은 사람에게 주신 분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주신 것 안에서 하는 것이다. 그것 이상을 하려는 것도 죄고, 그것을 채우지 못함도 죄가 될 수 있지만, 객관적 수준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죄로 말씀하시지는 않는다. 이것은 바울 사도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잘 말씀해 주고 있다.


이제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실제적인 권면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전에 한 가지를 분명하게 하고 가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이 복음이 어떤 사람, 어떤 민족에게라도 동일한 것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만유가 되시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 세상의 모든 만물이 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을 고대하는 것인데 하물며 사람이 인종이나 성격이 다르다고 그렇지 않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다. 이 말씀으로 인하여 교회 안에서는 차별이 없을 것 같지만 사실 그렇지 않다. 강단에서 설교하는 권한(이걸 권한이라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을 강도권이라고 한다고 한다. 그런 것이 대표적인 것이다.


사실 그런 권한 자체가 문제는 아니다. 그런 권한을 가지는 과정이 문제라면 문제인 것이다. 즉 시험을 치고 신앙을 학문으로 공부한 신학(어째서 신앙이 학문이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경력자라야 한다는 조건이 있다는 것이 이미 복음에 대한 절대적인 차별이다. 다시 말해서 이것은 사람이기만 하면 하나님을 알고, 또한 자신이 아는 하나님을 전하고 고백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선포할 수 있는 것에 대항하는 차별인 것이다. 


이 복음은 온 인류를 위한 것이고, 사람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복음이라는 것이 듣기만 하는 것도 아니다. 땅 끝까지 전하는 것이 복음이다. 그러므로 복음은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해서 그것을 표현하고 전하는 어떤 과정에서도 차별이 없는 것이다. 그저 사람이기만 하고, 자신의 존재 목적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에 있다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면 더 필요한 것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런 모든 인류를 위한 보편성이 복음의 진정한 순도이기도 한 것이다. 이것이 있을 때 사람이 아기로 태어남과 같은 거듭남이 있는 것이고, 그리고 이제 목적을 위하여 깨끗함을 입은 것처럼 또한 사람이 자라서 장성하여 다른 사람을 위한 삶을 살 듯 이 복음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지를 향해 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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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 문둥병 (3)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치유 Date : 2015. 2. 4. 15:48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쉽게 성경에 나오는 말씀은 지켜야 된다고 말을 한다. 또 그렇게 가르친다. 하지만 어떠한 것도 행동으로 육신의 것으로 지켜낼 수 있는 성경은 한 줄, 한 마디도 없다. 나는 그것을 확신한다. 만약 누군가가 아직도 성경을 지켜 행하여야 하고 잘 지키고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거짓말하는 사람이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럴 수 있는 사람은 없다고 성경에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십일조를 한번 보자. 많은 사람들이 십일조를 한다. 그 이유는 알고 보면 부자가 되고 싶어서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은 논외로 한다 해도, 십일조의 원천인 수입에 대하여 정확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먼저 세금을 제한 금액으로 십일조를 하느냐? 아니면 세금 전의 소득으로 십일조를 하느냐? 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을 정했다 치자. 그렇다고 해도 어느 날 얻어 마신 커피 한잔, 그것은 수익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도 있고, 누구나 알지만 공론화 하지 않는 탈세된 소득은 또 어떻게 할 것이냐 하는 문제가 있다. 교회에는 많은 개인 소득자, 특히 의사와 같은 고액 소득자가 있는데 그들이 원칙대로 세금을 낸다고 보는 사람은 별로 없다. 그게 현실이니까? 


이런 모든 문제들 속에서 정확한 금액의 온전한 십일조를 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 누군가가 이러한 논제로 끌려 들어온다면 이미 십일조에 대하여 온전하지 못한 사람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십일조의 규례 앞에 사장 정직한 사람이 누군가 하면, 그것은 “나는 온전한 십일조를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는 사람이다. 


금액으로 정확한 십일조를 내는 것이 십일조를 내는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은, 십일조를 낸다고는 하나 대접받은 커피라는 수익과 세금 문제와 십일조를 내기까지 시간이 주는 이자와 같은 복잡한 문제 그 어느 것 하나라도 결격 사유가 있다면, 그는 몸의 일부가 문둥병이 든 것과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십일조는 내지만 일부에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 “나는 십일조를 온전하게 낼 수 없는 사람입니다”라고 고백하면 온전하다 여기신다는 것이 바로 레위기에 나오는 문둥병의 규례가 주는 교훈인 것이다.


이렇듯 성경에는 많은 병자들을 치유하는 선지자와 또 예수님 그리고 교회 시대의 사도들의 행적이 기록된 것은 물론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에 사람이 병들었을 때 고치는 능력이 있으시고, 또한 그렇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병을 고치시는 의미도 있지만, 진정한 의미는 육신의 병에 대한 치유가 주 목적이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틀어진 상황을 육신의 질병을 통하여 설명하시고, 그것을 회복하시려는 하나님의 마음이 표현된 것이라는 것이다.


문둥병이라는 것은 의학이 발달된 현 시대에는 흔한 병이 아니지만, 오늘 우리가 이렇게 성경을 통하여 문둥병이라는 것을 대할 때에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에 대하여 몸의 일부가 감각이 없어 문둥병에 들린 것과 같이 무감각하게 살아가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치유하시기 원하시는 마음과 그 이유를 우리가 알아가는 것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치유를 내 것으로 받아들여서 나의 영적인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치유되었을 때, 진정한 치유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문둥병을 고치셨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삶의 어떤 부분은 정하고 어떤 것은 부정하다고 여기는 생각을 고치시는 것이다. 우선 사람이 그 삶의 일부를 잘라서 어떤 것은 잘하고 어떤 것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원래는 분리될 수 없는 자신의 삶을, 삶이 보여주는 여러 가지 행동양식과 세상적인 환경과 가치에 따라 보여주는 자신의 모습을 나누어 생각하기 때문인데, 그것은 바로 가치관이 존재에 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과 규례에 있고, 그 중에서 어느 것은 잘하고 어느 것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마치 문둥병이 몸의 일부에 있으면 부정하듯, 자신의 삶의 어떤 부분은 선하고 어떤 부분은 부정하다고 생각이 드는 모든 인생은 문둥병에 든 것이나, 온 몸에 문둥병이 발하듯 자신의 모든 행위가 하나님 앞에서 부정하다고 고백하는 사람은 온전히 정하게 여김을 받는다는 것이 문둥병의 규례인 것은, 사람이 자신의 행위와 신분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정할 수 없다는 것을 고백한 상태와 같은 것이기 때문인 것이다. 즉, 자신의 행위 규범과, 종교적인 규례와, 공로와 사회적인 신분과 같은 것은 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 바로 온 몸에 문둥병이 발하여 제사장에게 자신을 보여주는 것과 같아서, 그렇게 자신의 모든 형식이 부정하다고 여기는 사람을 온전타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는 것이 문둥병에 대한 규례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문둥병 환자를 고치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만나면 자신의 행위나 공로나 신분과 같이 육신에 속한 것은 설사 일부를 잘 지켜 행한다 해도 몸의 일부가 문둥병이 들어서 부정한 사람인데, 온 몸에 문둥병이 발한 것과 같은 자리인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자신의 생각으로도 자신의 행위로도 또한 자신의 신분으로도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부정한 자리가 바로 죄인들이 매달리는 십자가의 자리이기에,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 모습을 보이심은, 마치 온 몸에 문둥병이 발한 사람이 정한 사람이듯,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과 같이, 나의 행위와 신분이나 생각과 같은 그 모든 것이 다 하나님 앞에서 부정한 것임을 보게 하여 고백하게 하여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정한 존재라 여김을 받게 하신다는 것을 보여주심이 바로 문둥병을 고치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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