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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랑, 기독 신앙의 대명사와 같은 사랑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 사람의 정체성을 알도록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쳐서 사랑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고 예수님께서 몸소 실천하신 사랑이다.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니 뭔가 기독교적 색채가 먼저 떠오를지 모르지만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 삶의 목적이자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를 알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안다면 이것은 기독교의 사랑이라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면 누구나 절실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그러하기에 이 하나님의 사랑이 온 인류를 위한 사랑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모든 사람의 본이 되고 인류의 구주가 되심이 또한 그 사랑을 몸소 보이셨기 때문이다. 사람들, 곧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사람의 모습을 상실한 사람들이 그것을 알도록 십자가를 지고 또 달리셔서 죽으심으로 사람에게 그 정체성을 보여주신 사랑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삶을 차비를 대신하듯, 남이 지은 죄를 대신 벌 받은 것으로 겉모습만을 전부로 치환하여 남을 위하여 희생과 수고를 하는 것이 사랑의 전부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고, 예수님을 하나님이 내신 이로 보지 않는 것이며, 하나님의 사랑을 모르는 것이다.


예수님의 삶이 가장 의미가 있는 것은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살아 있고 하나님께 의미가 있는 인생이 어떤 인생인지를 보여주시는 것이다. 그 보여주고자 하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 생각하고 계획하신 그 사람, 곧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 하나님의 뜻 안에서 회복하는 것에 도움이 된다면, 아니 그것을 위함이라면 십자가에 달리는 죄인이 되고 죽을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모습이 사랑인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고, 그 사랑 때문에 우리가 다른 사람을 위하여 희생하고 수고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본질이 없으면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남을 위하여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것이다.


또한 그 사랑이 있어야 하나님이 내신 이가 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내신 이가 되신 것은 하나님께서 가지신 생각을 표현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 받은 인간의 본 모습인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이란 하나님의 의와 이미지를 말하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존재가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말씀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래 사람을 지을 때 기대하신 하나님의 이미지가 형상화된 삶이 어떤 것이지를 온전히 표현하신 분이 예수님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나님이 내신 분인 것이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표현하고자 하신 사람의 모습은 사람에게 있어서는 자신을 창조하신 분의 목적이므로 자신의 정체성이고 자신의 존재 목적이다.


어떤 존재든 존재 목적 안에 있으면 사랑을 받는 것이고 자신의 존재 목적으로 사용되지 않으면 사랑 받지 못하는 것이다. 야구 선수가 야구장에서 야구를 할 수 없게 되면 감독이 자신을 좋아 하지 않는 것으로 생각하고 낙심하고 불만을 가지게 되는 것이 그렇고, 누구나 가장 사랑하는 펜을 가지고 글을 쓰고 싶어 하는 것이 그것이다. 야구 선수의 존재 의미는 야구고, 펜의 존재 의미는 글을 쓸 때 사용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야구 선수를 가장 사랑하는 것은 야구를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야구선수는 야구장에서 야구를 할 때 가장 의미가 있는 존재가 되기 때문이고 그 스스로도 그것이 가장 행복하고 의미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사람도 자신의 존재 목적 안에 살 때 가장 행복한 것이며 그러하기에 사람을 가장 사랑하는 것은 사람이 존재 목적 안에서 자신의 존재 의미를 느끼고 알고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그 정체성을 알게 하는 것이며, 또 그것을 위하여 육신을 가진 삶을 수고로이 사용하는 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다.


바로 그것이 진정한 사랑이기에 예수님의 삶이 사랑의 왕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사람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기 까지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으로 수고하신 사랑의 모습을 보이신 것이기 때문이다.


많은 사도들의 삶이 또한 그러하다. 초대 교회 당시 전 세계라 할 수 있는 지역을 죽을 고비를 넘겨가며, 또 죽음을 무릅쓰고 복음 곧 하나님께서 사랑에게 메기신 사람의 정체성이라는 복된 소식을 전한 바울의 삶이 그러하고 거꾸로 십자가를 지기 가지 복음을 전한 베드로와 또한 교회 안에 영지주의와 같은 변질된 사상을 경계하며 평생을 교회의 순도를 지키려 한 요한 사도와 같은 이들의 삶이 굳이 밥 퍼주는 것이 아니었지만 진정한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


그 예수님 바로 하나님이 내신 예수님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목적 안에서 그를 알고 믿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사람에게 하나님이 사람에게 메기신 정체성을 깨닫도록 하시기 위한 것이므로 사람이 하나님이 인생에게 주신 목적을 알려고 하고 그것을 믿는 것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는 것은 자신보다 뛰어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사실로 믿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즉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믿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형식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목적을 위하여 보여주신 기적과 같은 것이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것인데 그것을 자신은 상식을 넘어 인정하고 믿는 것이 믿음이 좋은 것이라 생각하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금식과 고난의 형식을 행동으로 따라 하면 더 좋은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착각에 빠져 있다.


그리고 그렇게 예수님이 보여주신 형식을 믿고 얼마 되지도 않고 사람마다 다른 육신의 능력에 따라 자신이 조금 따라 할 수 있는 예수님의 모습이 믿음의 차별성을 가진 것이라 착각하며 스스로 높은 자리에 올라가 있다. 그런 대표적인 모습이 바로 목회자들이다. 공부해서 신앙을 학문으로 동상처럼 고착화시킨 것을 좀 더 안다고 신앙 공동체에서 대접을 받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한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축복하신 것이라는 정말로 많은 사도들이 경계한 변질된 신앙의 토양 안에서 살아 온 사람들이 세상의 지위를 바탕으로 장로가 되어 신앙 공동체인 교회의 일을 정치적이고 자신이 장로가 된 근본인 세상의 방식대로 결정하고 이끌어 가는 것이 얼마나 예수님을 모르는 것인지 상상도 못하고 있다.


흔히들 예수님을 해방자라고 한다. 또한 신비한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믿는다. 하지만 예수님은 해방은 고사하고 자신의 몸 하나도 지켜내지 못하고 죄인으로 돌아가셨고, 그 많던 기적은 다 어디가고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내려오라고 조롱하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힘없이 돌아 가셨는데,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뜻을 전하기 위하여 보여주신 당시의 권력자와 맞서는 모습이나 기적을 행하시는 모습을 객관적으로 믿고 따라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하나님의 내신 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행하신 하나님의 일의 목적은 모른 체 예수님이 우리를 위한 행적을 믿고, 그것에 감사하는 것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예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며 사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주신 이 삶의 모든 수고와 희생으로 사람들에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전하고 알게 하는 것 그것이 사랑이다.


그리고 그런 사랑을 하는 사람은 절대로 사람을 외모로 보거나 사람의 행위를 가지고 판단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오신 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전하고자 하신 의와 말씀과 생명이라는 본질을 알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삶의 모든 소유와 행위와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을 주님의 사랑을 실천하는 도구일 뿐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질을 아는 사람은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고 그런 사람은 사람의 외모와 삶의 모양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것은 도구를 어떤 것을 가졌는지가 그 사람의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지 않는다고 하신 것이다.


또한 사람의 삶과 사람마다 다른 능력을 서로 모으고 그것에 상호 의존하며 그것을 서로 베풀어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보내시면서 까지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에 서로 협력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도들은 늘 협력하는 것이다.


이는 저희로 마음에 위안을 받고 사랑 안에서 연합하여 원만한 이해의 모든 부요에 이르러 하나님의 비밀인 그리스도를 깨닫게 하려 함이라(골 2:2)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시 133:1)


또한 하나님이 내신 이를 사랑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기에 그 사람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의를 사람에게 전하는 사람을 진심으로 사랑하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다. 이런 사랑이 있는 사람은 형제 곧 예수님과 같은 삶의 목적을 가진 사람은 모두가 세상에 하나님이 보이기 원하시는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을 삶의 목적으로 알고 살아가며 또한 육신이 가진 모든 것을 그것을 위하여 서로 나누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오신 목적을 온전히 아는 사람들의 사랑이 온전하면 헌금이든 봉사든 또한 사람의 외모와 행동으로 인한 갈등이나 그 어떤 것이라도 지금의 교회가 보여주는 것과 같이 제도화 할 필요도 없을 뿐 아니라, 그것으로 인한 갈등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사랑이고 진정한 복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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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그 존재의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런 사랑이 희생과 봉사와 같은 수고로 표현될 때 온전한 사랑이 되는 것이다. 사랑의 내용과 표현이 온전히 일치하는 사랑이란 그런 것이다.


사람이 서로를 위하여 가진 것을 나누는 것도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도 온전한 사랑이 되려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뿌리가 되어야 온전한 것이다. 이것을 너무나 잘 표현한 성경이 고린도전서 13장 곧 사랑장이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준다고 해도 사랑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곧 사람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깨닫게 해 주지 못한다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이 가장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사람과 동일한 육신으로 오셔서 표현하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을 사람들에게 알게 하시기 우하여 십자가에 달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은 차비를 대신 내어주듯, 아니면 죄는 우리가 짓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이 가진 육신을 가진 삶의 의미와 목적과 정체성을 알려주시기 위하여 십자가를 지신 것이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알려주시고자 한 사람의 존재 목적과 정체성이라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알지 못하는 어두운 삶을 살던 사람이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그것을 알고 살아서 하나님의 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바로 영생인 것이다.


누구든지 예수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시인하면 하나님이 저 안에 거하시고 저도 하나님 안에 거하느니라(요일 4:15)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은 하나님이 가지신 사랑의 본질과 내용을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육신으로 본을 보이신 것이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지신 의미와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과 그 과정에서 표현된 하나님의 모든 역사를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 사랑은 사람에게 삶의 존재의 목적과 의미와 인생의 정체성을 알게 하시므로 그것을 알지 못하여 이것도 해 보고 저것도 해 보면서 방황하는 인생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것이다. 실제로 사람에게는 많은 돈 보다 자신에게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아무리 돈이 좋아도 여자들이 남자의 돈만 보고 결혼을 하거나 몸을 허락하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에게 의미가 있는 남자와 결혼하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은 관계를 우리는 성매매라고 하는 것이다. 그것은 정상적인 연합이 아니라는 의미인데, 그것이 정상적이지 않은 것은 사람에게는 돈 보다도 자신의 존재 의미와 이유가 더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에게 있어 구원과 가장 큰 사랑과 영생은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을 알아서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이것을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이고, 또한 그것을 보고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 살도록 하신 것을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사랑이고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면, 그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의 사역을 보고 육신을 가진 자신의 삶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 사람은 예수님과 같이 그 삶을 살게 되고 그런 삶이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의 삶과 같이 다른 사람들이 그 삶을 보고 자신도 육신을 가진 삶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도록 하는 것이 바로 전도요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십자가의 삶이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이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 십자가는 인간의 틀(mold)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원래의 모습을 가지고 예수님과 같은 삶을 따라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이 십자가를 지는 삶은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어 그것을 지고 돌아다니고 또 실제로 못 박히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육신 가진 삶을 자신의 운명으로 알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요한사도와 많은 사도들이 영지주의를 그렇게 경계한 것이 바로 이것을 부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십자가를 지는 삶이 바로 사랑이다. 예수님께서 사랑의 왕이신 것이 바로 이 십자가를 지셨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우리의 운명이다. 그것은 우리의 육신 가진 삶이 십자가이기 때문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이 보여주신 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이 무엇인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세상이 가진 법, 곧 연약한 육신은 늘 패배자가 되는 그 법, 예수님을 십자가에 달리게 한 법, 사람이 육신을 끊임없이 강하게 바꾸어 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그 법 앞에 사람은 머리에 있는 생각으로 벗어 날 수 없다는 것을 가시관을 쓰심으로 보여 주셨고, 옷이 벗겨진 몸은 사람이 자신의 신분이 아무리 대단해져도 그 세상의 법 앞에서 스스로를 구원할 수 없으며, 손과 발에 못 박히심은 자신의 행동으로도 세상의 법 앞에서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신 것이기에, 예수님의 그 모습, 우리에게 보여주고 알려 주시고자 한 사람의 진짜 정체성을 보고 육신을 가진 삶을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자신의 잔으로, 운명으로 받으신 것처럼 사람이 그것을 받아들일 때 백부장의 고백처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인 것이다.


십자가를 진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모습을 보고 늘 벗고자 한 육신의 연약함을 벗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운명의 잔이라는 것을 '아멘'하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의 가치관, 인간의 육신은 단련되고 극복해서 고쳐내든 아니면 포기하고 영만 있으면 된다는 시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언제나 조롱이 되는 것이고, 또 힘든 것이다.


하지만 그 모습을 보고 정말로 하나님을 알고 싶어 하고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사람은 그 모습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백부장의 모습이고, 그것이 진정한 구원의 고백이며, 그것이 바로 진정한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그렇게 사람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이 삶을 버릴 것이나 저주할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님을 아는 삶이 그것이다. 그것은 사람의 육신이 연약하다 조롱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나 죄인 취급 받고 조롱당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그렇게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사랑의 모습인 것이다.



두려움을 이기는 온전한 사랑


그러나 이것은 사람이 싫은데 억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은 괴롭지만 이렇게 살면 나중에 천국에 가서 영화를 누린다고 하니 참고 살아가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기쁨의 세계이다. 굳이 믿음의 세계가 아니라도 자신의 정체성에 만족하는 사람들의 삶을 얼마든지 볼 수 있다. 남이 보기에는 한심해 보이고 불편해 보여도 산에서 사는 사람들과 같이 자신이 만족하는 삶은 보기에는 어떠해도 그것은 억지로 하는 세계이다.


믿음이 없이도 그러한데 믿음을 가진 삶이야 더 말할 것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이 삶은 곤고한데 천국에 가야하니 억지로 참고 살아가는 것이 신앙이라고 여기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단언코 말하지만 이 세상에서의 삶이 천국 같지 않았던 사람은 천국에 갈 수 없다. 프로야구 선수로서 살고 훈련하지 않은 사람이 1군 무대에서 야구를 할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 육신의 삶을 인정하며 산다는 것은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있다. 모든 사람이 다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세상의 피라미드 위로 위로 올라가는 것을 본분이라고 여기는 세상에서 그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고 여기며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온전한 사랑은 두려움이 없다고 한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을 온전히 아는 사람, 인생의 본질과 의미와 목적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세상과 다르게 살아가면서 겪게 될 일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인 것이다.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이긴다고 하는 어떤 위협이나 협박과 탄압과 같은 두려움을 이기는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런 모든 것도 다 세상과 다르게 사는 삶을 향한 세상의 한 모양이기 때문에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것은 세상이 추구하는 것이 인생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살아가는 것과 나중에 천국에 가서 잘 살아야 하니 억지로 참고 사는 것이 두려운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나니 두려움에는 형벌이 있음이라 두려워하는 자는 사랑 안에서 온전히 이루지 못하였느니라(요일 4:18)


하지만 온전한 사랑은 그것을 이길 수 있다고 하신다. 이것은 신앙의 과정에서 그 경륜이 있어야 하는 고백이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 4장에서 핍박에 대한 말씀을 하고서 5장에서 우리가 이 육신 안에서 탄식하는 것은 이것을 벗고자 함이 아니라고 말씀하고 있다.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과연 우리가 여기 있어 탄식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 처소로 덧입기를 간절히 사모하노니

이렇게 입음은 벗은 자들로 발견되지 않으려 함이라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1-4)


사람이 육신 안에 있으면서 겪는 삶의 곤고함, 흔히들 말하는 인생을 한자로 표현할 때 "고(苦)"라고 하는 이 삶은 참거나 탈피하려 애쓰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인생의 본질에서 비롯된 것이므로 본질로 인한 증거라는 것을 알고 기뻐하는 것은 진정한 신앙의 기적이요 깨달음이고 그리스도의 삶이다.


만약 그것을 모른다면 그것이 바로 지옥이다. 억지로 사는 삶,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야만 하는 삶 그것보다 더한 지옥이 또 있겠는가? 만약 사람이 그렇게 살고 있다면 그것은 예수 아니라, 그 어떤 것을 사모 헤도 괴로운 인생일 뿐이다.


바로 그런 인생의 곤고함과 죽음의 자리에서 벗어나게 하신 것이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세상의 제도를 뒤집거나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서 인생의 자리를 보여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이시고, 우리가 그 사랑 안에서 서로에게 또 모르는 사람에게 그 사랑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신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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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요한일서 4장 7절 이하에 나오는 말씀은 유명한 말씀이다. 이 말씀의 핵심은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왜 하나님이 사랑이신지에 대하여 요한사도는 요한일서 전반에 그리고 요한복음에서도 늘 말씀해 오고 있다.


흔히들 사랑에는 아가페, 필레오(친구간의 사랑), 에피투미아(지식에 대한 사랑), 스톨게(혈연간의 사랑), 에로스(이성간의 사랑)와 같은 사랑이 있다고 한다. 그 중에서 아가페 사랑은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하지만 무조건적인 사랑이라기보다는 절대적인 사랑, 사랑의 근본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더 맞지 않나 싶다.


하나님의 사랑은 밥 퍼주는 사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불쌍한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 사랑의 모습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시는 사랑이 표현된 모습이지 사랑의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사람이 무엇이고, 누구이며 왜 사는지>를 알려주시는 사랑이다. 이것은 사람에게 있어 인생 전체에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다. 사랑은 상호간에 의미가 있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사랑은 하나님과 사람이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관계로 회복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하기에 사랑은 당연히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될 수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기 때문에 사람의 정체성에 대한 모든 의(미)와 뜻과 목적은 다 하나님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랑은 사람이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것이다.


집에 있는 그릇이 주인에게 사랑 받는다고 하는 것은 그 그릇의 목적대로 사용되고 있다는 의미이다. 그렇지 않고 잘 모셔두고만 있다면 그것은 그릇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다. 이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목적 안에 살아갈 때 비로소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사람이 되는 것이다.



사랑은 위하는 것


사랑은 위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위하여 어떤 것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사랑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사람이, 그 상대가 가장 필요한 것을 해 주는 것이 가장 크고 온전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사실 돈도 아니고 명예도 아니고 이성도 아니다. 그런 것은 다 필요하고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절대적이고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이 무엇이며, 자신은 누구이며, 사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 바로 그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그것을 알게 하는 것 이상의 사랑은 없다. 사람에게 자신의 정체성을 알게 하고 자신의 정체성이 자신과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하는 것 그것이 바로 진정한 사랑이고 최고의 사랑이다. 바로 그런 사랑을 아가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사랑을 위하여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다고 하셨다. 독생자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 단 하나의 아들이 있었다는 의미인데, 그것은 육신적인 의미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들이라 인정하는 단 하나의 정체성이 있다는 것이고 그것을 알게 하셨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를 믿는 사람에게는 영생이 있다는 말씀을 성경 전체를 통하여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 영생은 다름이 아니라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라고 하셨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 17:3)



사랑은 의미 있는 관계가 되는 것


또한 사랑은 그리워하고 필요로 하는 그런 관계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사람에게 부여하신 존재의 목적은 하나님의 형상이다. 이것은 하나님이라는 이미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로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에서 사람이 하나님께 얼마나 절실한 존재인지를 말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사랑하신 사랑은 천지창조 과정에서 지으신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을 표현한 것이지만 사람만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다는 것에서 그 사랑이 가장 큰 사랑이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한 유일한 방법이자 사랑임을 말씀하신다.


사람이 세상을 살면서 여러 가지를 소망하고 또 성취하기 위하여 살아가지만 그 모든 것은 결국 자신의 삶에 의미를 가지기 위한 것이다. 일례로 사람이 부모로서 열심히 자녀를 위하여 살다 자녀가 독립하면 삶의 의미가 희미해지는 것을 느끼는 것도 그런 것 때문이다.


또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서 서로 사랑하다 한 사람이 죽으면 큰 슬픔과 상실감에 빠지는 것도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의 큰 부분이 사라지기 때문인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와 의미를 상실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그 의미, 그 이유와 삶의 목적이 사는 동안 돈이나 성공과 같은 것에 있는 것으로 알고 많은 사람들이 살아가지만 결국은 그런 것이 아니라는 것을 죽을 때가 되면 어느 정도는 신분에 관계없이 다들 알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삶은 무(無)다> 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삶의 의미라고 알고 살아가는 것들이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살아가는 이유와 삶의 의미를 아는 것 보다 중요한 것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랑은 바로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사랑이다. 그 사랑이 말하는 사람의 존재 목적과 의미가 바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과 성품을 표현한다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고,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그 유일한 법을 깨달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 자신이 사람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고, 또 하나님께서 사람이 그렇게 되기를 바라신다는 것을 알고 믿는 것이 유일하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독생자인 것이다.


이 유일한 독생자의 첫 열매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셨고, 그 예수 그리스도를 보니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 영생이며, 그런 모든 법을 만드셔서 사람이 자신의 삶의 존재 목적과 이유와 의미를 알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기에 하나님이 바로 사랑이신 것이다.


또한 사랑은 서로를 필요로 하고 서로를 그리워하는 것인데, 하나님의 사랑도 그러하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그 존재와 성품을 표현할 방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시다. 그러하기에 하나님께서 자신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사람을 만드신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사람은 서로 절대적인 관계인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그 실존과 성품을 표현할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만드셨기 때문이다. 그것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드셨다고 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그 창조가 곧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이시다. 그것은 또 하나님이 사람에게는 사랑 그 자체라는 말씀인 것이다. 사람은 형식이기에 그 존재의 의미인 내용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존재이고, 하나님은 내용이시오 의요 생명이요 영이시기에 그 사랑을 표현할 존재인 형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신 분이시기에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아들이 되는 것이 바로 절대적인 사랑이요 사람에게는 영생이요 구원이 되는 것이다.


이 사랑은 당연히 하나님이 시작한 사랑이다. 사람이 먼저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이고 창조하신 일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알파와 오메가가 되시는 분이시라고 하기도 하는 것이다.


또한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것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은 같은 것이며, 이 사랑과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의 존재 목적을 모르는 것이기에 그 사람은 구원과 영생이 없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그릇이 언제나 찬장에만 있다면 그 그릇에게 구원과 주인의 사랑이 있다고 할 수 있겠는가?


하나님의 사랑은 그렇게 나타난 것이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인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심으로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모든 사람이 그렇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사랑인 것이다.


사람은 그 사랑을 알고서 자신의 존재 목적을 알게 되었을 때 비로소 살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목적 안에 없으면 죽은 것이다. 그래서 운동선수들은 자신이 좀 더 선수로서 뛸 수 있는 곳으로 가기를 원하는 것이고, 또 좋은 옷이라도 입지 않으면 남을 주거나 버려지는 것이다. 옷은 사람에게 입혀지지 않으면 죽은 것이기 때문이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이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인격을 가진 사람으로 살도록 지어진 존재이다. 그러므로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옷이 멀쩡해도 죽은 것이듯, 사람이 의학적으로 살아 있다 해도 존재의 목적을 모르고 있으면 죽은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사랑을 나타내셔서 우리에게 사람의 존재 목적을 알게 하시는 것은 사람을 살리는 것이고 살리는 것이라는 것은 바로 구원이다. 그리고 이 사랑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유일한 방법이다. 그 유일한 것을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이 독생자이신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목적을 가지신 분이고 그것을 알려주시는 사랑 자체이시다. 그 사랑은 유일한 방법이며, 존재 목적을 모르는 사망 가운데 있는 사람에게 구원과 영생을 주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하나님의 의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인 사람이 화목하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화목제물이 되시는 것은 그것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은 사랑이시라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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