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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꾸는 믿음의 힘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 30. 14:56 Writer : 김홍덕

세상을 바꾸려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자신들은 세상을 바꾸려 힘쓴다고 늘 나와서 거짓말을 하지만 사람들의 울분만 쌓아가는 정치인에서부터, 서울역에서 부흥회하듯 찬송가를 불러대어 사람들의 눈살 찌푸리게 사람들을 비롯해서,


주일마다 교회의 가장 높고 밝은 조명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며, 또 그것이 세상을 바꿀 것이라며 세상의 문제를 또 죄악을 고발하듯 설교하는 사람은 또 얼마며, 반대로 또 그런 모습을 보면서 교회가 타락했다며 <쿼바디스>와 같은 영화를 만드는 사람에 이르기까지 셀 수도 없고,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꾸려 한다.


하지만 그런 문제 제기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어둠은 물러가라 외친다고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한 줄기 작은 빛이 있어야 한다.>는 말처럼 그런 외침이나 사람들을 자극하는 것으로는 문제를 알려줄 수는 있어도 문제를 해결하거나 세상을 바꾸거나 사람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


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힘은 분명히 있다. 그것은 대안 없는 지적질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그저 자신의 역할에 맞게 그리고 그것에서 조금 더 마음을 더한 평범하지만 다른 사람이 볼 때 정말로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는 삶의 모습, 그것이 진정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최근에 대구에서 돈벼락 사건이 있었다. 고물의 모아 어렵게 모은 할아버지가 손자에게 물려준 돈을 정신지체가 있는 손자가 길거리에 돈다발을 뿌린 것이다. 그 이후에 그 돈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글들이 인터넷에 올라왔고, 많은 사람들이 돈을 돌려 주었다.


하지만 돌아온 돈은 없어진 돈에 비하여 턱없이 모자랐는데, 어떤 사람이 500만원이나 되는 큰돈을 익명으로 돌아오지 못한 돈이라 생각하고 받아 달라며 기부했다는 기사가 났다. 그 일에서 가장 압권은 <돌아오지 못한 돈도 다 사연이 있겠지요.>라는 그 말이다.





세상은 바로 그런 사람들로 인해서 바뀌는 것이다. 그들을 보면 사람들이 한 결 같이 말하기를 "아직 우리가 사는 세상은 따뜻하다", "이런 분들이 있어 아직 세상은 살만하다."라고 말하고, 또 그 사람들의 행적 앞에 스스로는 그렇게 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고백을 하는 것조차 망설이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세상을 바꾸는 힘이다. 이것이 진정한 정치고 이것이 능력이다. 국회에서 싸움질 하는 수십 년 동안 국민들에게 이런 마음을 준 적이 없다. 서울역에서 아무리 예수 믿으라고 외쳐도 사람의 마음을 그렇게 울릴 수 없고, 그렇게 자백하게 하지 못한다.


하나님을 믿고 예수를 믿는다는 것도 바로 그런 것이다. 예수님이 성전에서 상을 엎었다고 세상을 뒤집기 위해 오신 분으로 알고 교회에 모여서 소리 높여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고 사회 운동을 하는 신앙은 하나님을 모르는 것이다. 고로 그들에 의해서는 세상도 바뀌지 않는다. 사람의 마음? 절대 얻을 수 없다.


세상을 바꾸고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은 지적하고 꾸중하고 훈계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너무 쉽고 간편한 것이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을 울리고 또 그 사람과 일 앞에 자신은 그렇지 못함을 스스럼없이 자백하게 만드는 삶을 묵묵히 살아가는 것, 그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이라는 것의 근본도 마찬가지다.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하는 시간에 사람이 감동할 만한 삶을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살면 된다. 왜 그렇게 해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이 그러셨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법으로 죄인이 되고 십자가에 달리신 것이 바로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입장에서 볼 때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으려는 사람들의 무지함은 사람이 감당할 수 있는 억울함이 아닐뿐더러, 말씀과 같이 마음만 먹는다면 하늘의 천군천사들로 하여금 그 상황을 벗어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데도, 그렇게 하면 육신을 가진 사람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를 바라시는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이루어지겠느냐 하시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건만,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고 사회운동으로 세상을 바꾸려고도 하고, 또 사람들이 자신들을 보고 불편해하는 것은 아랑곳 않고 기도만 큰소리로 하며, 또 더 나아가서는 신앙이 없다며 사람을 나무라고 훈계하려 드는 것은 도무지 성경도 하나님도 예수님의 십자가도 모르는 그런 모습일 뿐 전혀 세상을 바꾸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세상을 바꾼다. 하지만 하나님을 어떻게 믿는지가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그 마음과 그 법으로 믿는 것인지, 아니면 세상이 뭐라고 하든지 교회만 좋고, 자기들과 같지 않으면 신앙 없는 사람으로 훈계하는 것이 세상과 사람을 바꾸는 것이라고 믿는 것이 믿음인지가 중요한 것이다.


세상은 소리치는 사람, 훈계하는 사람, 신앙이 좋아서 남을 가르치고 설교하는 사람에 의해서 바뀌지 않는다. 그런 사람들은 예수님을 못 박듯이, 세상에서 부족하고 나약하고 사회에 저해되는 사람들을 찾아 징벌하고, 도려내고, 한 사람 안에서 신앙을 발라내는 것이 세상을 바꾸는 것이라 생각하지만 그건 아니다.


세상은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알고 그것에 충실하게 사는 것으로 인하여 바뀐다. 가장 근본적으로는 자신과 하나님의 관계 안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알고 그 안에서 사는 것이고, 그 생명이 사람 안에 있으면 삶도 요란스럽고 남에게 지적질하고 소란스럽고 눈살 찌푸리게 하지 않고 돈벼락 사건 속의 자선가들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감동시키는 삶, 그것이 믿음이고, 그것으로 세상은 바뀌는 것이다. 


자신의 안목으로 보는 세상에서부터 우리가 사는 세상에 이르기 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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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로새서) 2:20-23 그리스도와 함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Date : 2015. 1. 30. 11:30 Writer : 김홍덕

사도 바울은 골로새 교회의 성도들에게 머리의 뜻이 몸을 자라게 한다고 말씀하였다. 이러한 말씀은 신앙에 있어 복음 이외의 세상적인 것들이 가미되는 것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는데, 세상의 것은 몸과 같이 머리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의 과학이나 철학이나 재물이나 명예와 같은 그 어떤 것도 이 세상의 만물의 하나이기에 그 모든 것은 하나님의 독생하신 아들, 곧 사람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사는 것을 위하여 사용되는 도구일 뿐, 그것이 더해져야 더 나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몸은 머리의 주관을 받아서 온전히 머리의 뜻을 행할 때 의미가 있듯이, 세상의 모든 학문도 다 하나님을 나타내는 도구로 사용되어져야지, 그것이 있어야 더 온전한 복음이 된다거나, 아니면 그런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더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식의 생각은 올바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바울 사도의 마음은 세상의 학문을 초등학문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은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것에 순종하는지를 되묻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신 이유가 세상의 법과 안목에 따라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는데,


그것을 보고 자신도 예수님과 같이 동일하게 세상의 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으로서 세상의 것이 있어야 더 온전한 복음이 된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인데 왜 다시 그 의문에 회귀하느냐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세상의 초등 학문 안에서 성경을 보면 모든 것이 의문스럽다. 세상이 가지고 있는 시간개념이나 또 이분법적 사고와 같은 관점으로 성경을 공부해보면 정말로 하면할수록 의문스럽고 이해되지 않는 것이 꼬리에 꼬리를 물로 이어진다는 것은 정말로 성경을 한번이라도 제대로 알고 싶어 한 사람이라면 알 수 있는 솔직한 고백일 것이다.


이어 바울 사도는 이러한 것을 붙잡지도 맛보지도 만지지도 말라고 한다. 그런데, 어떻게 보면 생명의 말씀이라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제대로 알았다면 개가 야옹하지 않듯이 그러지 않을 것인데 왜 이렇게 경계를 하는가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한다.


바울 사도의 말씀과 같이 과학이나 철학이 세상의 초등학문인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비하여 그것이 초등학문에 불과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러한 것을 더해야 더 좋은 복음이 되고, 더 교회에서 필요한 사람이 된다는 사람들이 철학이나 과학을 가지면 더 초등학문과 같이 된다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바울 사도가 또 많은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 이외에 다른 것이 더해질 필요가 없다고 말씀하는 것은 이것이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이라는 것은 날 때 온전한 존재로 나는 것이다. 사람이 날 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아기지만 사람으로서는 온전한 것이다. 


그리스도로 거듭 난다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나기만 하면 그것으로 그리스도로 사는 것에 부족함이 없는데, 과학이나 철학이 있으면 더 온전해 진다고 하는 생각은 생명을 모르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몸을 괴롭히든 자의적으로 겸손하든 뭐라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그것은 모두가 다 생명의 법을 제조와 가공의 법으로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생명체를 그렇게 다룬다면 다 부패하는 것이 되는 것은 자명한 것이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것에 그리스도로 거듭나고,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 그것 하나면 부족함이 없다.(시 23:1)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로 거듭남이다. 예수님도 이 땅에 오실 때 장성한 어른으로 하늘에서 내려오신 것이 아니라 아기로 태어나셨다.


그와 같이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나 그 마음속에서 아기와 같이 전혀 무능하나 생명 자체로는 온전하게 나는 것이다. 그것을 알지 못하면 늘 사람을 부족한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렇게 사람을 부족하게 보면 어떤 이들은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이들은 아직 그리스도의 생명이 미약한 사람의 삶을 보고 육신이 무익하다고 단언하는 것이다. 그것이 율법주의고 영지주의인 것이다.


신앙에 있어서 가장 나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가공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뭔가를 자꾸 덧붙이려 하는 것 그것이 가장 좋지 않은 것이라 평소에 늘 생각한다.


돈이 있으면 더 영광스럽고, 과학이나 철학에 능통하면 더 그리스도를 안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은 거창하고 유별난 생각 같지만 이미 우리는 그 속에 심각하게 잠겨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교회를 크고 아름답게 지으면 좋다고, 같은 값이면 세상에서 성공하면 더 영광스럽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과의 정체성을 깨닫고 그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어진 질그릇과 같은 존재라는 것에 순종하고,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듯 자신에게 하나님의 의와 뜻이 심겨져서 그것을 표현하는 삶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고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이것에 대하여 알지 못하면 뭔가를 자꾸 더 추가하려 한다. 그것은 갓 태어난 아기가 걷지 못한다고 다리를 붙이려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생명은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 앞에서 말한 하나님을 믿는 것만 사람 안에 있으면 그것이 자라면서 지혜가 더해지고 하나님 앞에서 점점 사랑스러워져 가는 것이다.


예수는 그 지혜와 그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 사랑스러워 가시더라(눅 2:52)


그러므로 바울 사도가 교회에서 과학이나 철학이 있는 자가 높임을 받는 것에 대하여 경계함은 당연한 것이고, 요한 사도가 육신을 부인하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문제인지를 알 수 있다.


신앙은 여정이다. 이스라엘의 출애굽이 그러했고, 예수님이 나셔서 자라심이 그러하듯 우리의 신앙도 그러하다.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나는 어떤 존재인지를 아는 것 그것만 있으면 부족함이 없다. 그것이 생명이기에 자라남으로 모든 것이 된다. 이것을 모르면 신앙에 뭔가를 더하려고 안달이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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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대와 신념과는 다른 믿음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5. 1. 29. 10:53 Writer : 김홍덕

믿음이라는 것은 <기대>와는 다른 것이다. 또한 <신념>과도 다른 것이다. 신념은 굉장히 능동적인 개념이다. 내가 믿는 것에 대하여 아주 능동적인 갈망을 가지도 있다는 것이기에 그렇고, 기대는 믿는 대상의 의지와 무관하게 나의 의지가 관철된 것을 말하기 때문이다.


성경에서 믿음은 상상 이상으로 순종적인 것이다. 순종이라는 것은 믿는 대상이 보이는 모든 결과에 순종을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다윗 왕이 밧세바 사이에서 난 첫 번째 아들을 살려달라고 기도하다 아이가 죽자 씻고 밥을 먹는 것과 같은 것이다.


성경에서는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했는데, 제사라는 것은 어떻게 보면 믿음의 표현이고 성의고 마음의 표시일 수 있다. 즉 하나님께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표시하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믿음의 상징이라 볼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제사보다는 순종이 낫다는 말씀이다. 그도 그럴 것이 믿음이란 아주 수동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믿음이라는 것은 기대가 이루어질 것이라 믿는 것이 아니라, 믿는 대상의 모든 반응에 내가 순종할 수 있을 때 믿는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를 기르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부모의 바람대로 아이가 자라는 것을 두고 아이를 믿는다고 하면 곤란하다. 아이를 믿는다는 것은 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길을 가는 것을 지지하고, 아이가 자기가 원하는 것을 할 수 있도록 모든 것을 지원하는 것, 즉 아이가 보이는 모든 반응에 순종하는 것이 아이를 믿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하나님을 믿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하나님이 나의 바람을 들어 주실 것이라는 기대나 그렇게 되기를 바라는 강한 신념이 믿음이 아니라,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듯 하나님께서 내가 어떻게 하시든지 그것에 순종할 수 있는 것을 믿음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은 것이다.


신념이 믿음이 되고 기대가 믿음이 되면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임신한 아이가 아들이라고 믿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나, 자신의 병을 하나님께서 낫게 해 주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이 있다면, 딸이 태어나면 그 아이가 아들로 바뀔 것이라는 것까지 믿어야 하고, 아프다 죽으면 다시 살 것 까지 믿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즉 기대에 대한 능동적인 신념은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당시는 아브람)이 원하는 어떤 것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기에 그냥 떠나는 것 그것이 바로 믿음인 것이다.


그러므로 헹가래를 당할 때 받쳐주는 사람을 믿는다는 것은 받쳐주지 않아서 자신이 떨어져 다치는 피해를 감수할 때 비로소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지, 떨어져서 다쳤을 때 받쳐주던 사람을 비난한다면 그것은 믿는 믿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믿음은 정말로 수동적인 것이다. 수동적이라는 것은 마음먹는다고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어떤 대상 앞에서 수동적인 존재라는 것을 깨닫고 순종할 때 비로서 수동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이다.


그릇은 아무리 신념을 가져도 스스로 내용물을 채울 수 없다는 것을 알 때 비로소 수동적인 존재가 되고 주인이 따라주는 것을 수용하게 되는 것이다. 설사 그릇은 자기가 받아들이고 싶지 않아도 스스로 뒤집어져 있을 수도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아는 것, 그것이 그릇이 주인을 믿는 것이다.


그렇게 되었을 때 그릇은 주인이 자신에게 늘 주인이 원하는 것을  담아내는 순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믿음의 반대 방향성을 가진 충성의 모습이 되는 것이다. 즉 주인은 그릇을 충성되게 여기고, 그릇은 주인을 믿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이다. 성경에서 사람을 질그릇이라 비유한 것을 생각해보면 간단한 것이다.


예수님께서 믿음을 볼 수 없다고 하신 것도 이것이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다 하나님을 믿었지만 자신의 기대에 대하여 반응해 주시기를 바라는 것이었지, 하늘의 뜻이 땅에 이루어지듯 하나님의 목적과 의가 사람에게 이루어지는 것을 순종할 마음이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다.


믿음은 아주 순종적이고 수동적인 것이다. 그것은 믿는 대상과의 관계가 분명하게 정립되었을 때 가능한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믿는 대상이 보여주는 그 어떤 것에도 내가 감수하고 수고하고 희생하는 것이 믿음이지 내가 바라는 기대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특히나 아이를 기르면서 이 믿음에 대하여 많이 생각해 본다. 아이를 믿는다는 것이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늘 돌아보게 한다. 그러면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된다. 믿음이 얼마나 대단한 것인지를 더 알게 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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