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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께서 금식 후에 받으신 시험의 마지막이 마귀가 세상의 모든 것을 보여주면서 자신에게 절하면 이 모든 것을 주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그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을 본질로 여기면 마귀가 모든 것을 예수님께 주겠다는 의미이다.


하지만 이 세상은 마귀가 남에게 주고 말고 할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만든 것이 아닐뿐더러 마귀 자신도 하나님의 통치 아래 있는 존재일 뿐이다.(욥 1장) 그리고 그는 에덴동산에서 사람에게 선과 악을 알게 되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다고 꼬인 존재이기도 하다.


이런 것을 종합해보면 세상은 본질도 아니고, 또한 이 세상을 본질로 알고 세상을 사랑하는 것은 마귀에게 절하는 것이고, 마귀에게 절한다는 것은 선과 악을 알아서 하나님처럼 되려고 하는 것에 순종하고 숭배하는 타락의 본질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들은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세상의 것으로 해결하려고 한다. 그런 삶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가운데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이다.


의사들의 말이 통증은 증상이라고 한다. 즉 통증이나 증상은 병이 아니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병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부분 먹는 것에서 비롯되고 습관에서 비롯된다. 즉 병의 원인이 있고 그 다음에 통증이라는 증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병의 원인을 고치지 않으면 통증을 가라앉히는 것은 거저 일시적인 방도에 불과한 것이다. 그래서 어떤 병이라도 먹는 것과 습관과 같은 근본 원인을 해결하지 않으면 이내 재발하거나 낫지 않는 것이다.


또한 책도 저자가 전하고자 하는 내용이 있고 글이라는 형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행간을 읽어야 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즉 책이라는 종이나 글씨가 책의 본질이 아니라 저자의 생각이 책의 본질인 것이다. 이것을 모르면 책의 내용보다 책이라는 형태를 중요하게 여기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이 사랑이신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사람의 본질과 정체성을 알게 하셨기 때문에 사랑이신 것인데 반하여 이 세상이라는 형식을 사랑하고 본질로 아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는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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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흔히 신앙을 가지는 것에 대한 반대를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한다. 요한 사도 역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성경의 말씀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또한 이 세상에 어떤 의, 곧 생각을 가지고 계시는지를 말씀하시는 책이다. 그것이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기 때문에 그 만드신 의도가 성경에 기록된 것이라서 그러하다.


그래서 사람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다는 것을 믿어야 비로소 그 사람에게 하나의 세계가 열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인데, 그것을 창세기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만드셨음에도 이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시는 것은 언뜻 모순 같아 보이지만, 그렇게 말씀하시는 이유는 세상을 만드신 의도와 목적과 눈에 보이는 세상의 연관성을 모르면 안 된다는 말씀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을 모르면 이 세상에서의 삶에 매몰되어 살게 되는데 그것은 내용은 모르고 세상이라는 눈에 보이는 형식이 전부인줄 알고 살아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바로 그런 삶이 <세상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한 사도는 <하나님은 사랑>이라고 하셨는데, 세상을 사랑하는 것을 이것에 대비해 보면 더 명확하게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사랑은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보내신 사랑이고, 그것은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이 사람의 정체성이며 또한 사람을 창조하고 삶을 주신 목적이며,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세상이라는 형식이 본질이 아니라 내용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는 것이 가장 큰 사랑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세상을 사랑(요 3:16)하시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사람에게 보이신 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에 반해서 사람들이 자신이 존재하는 목적과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지으신 목적을 모르면서 그저 눈에 보이는 이 삶이 살아가는 전부라고 여기며 사는 것이 바로 세상을 사랑하는 삶이라고 요한 사도를 통해 말씀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세상의 문제를 정치나 과학으로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인류의 역사를 그것에 몰입시키고 있다. 하지만 작은 개인일지라도 한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이 세상을 창조하신 그 내용을 아는 사람이 아니면 세상을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는 세상의 본질이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 믿는 그 안목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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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곧 같은 부모의 생명을 받은 사람을 말한다. 성경에서 말씀하고 있는 형제는 두말할 것 없이 아버지가 하나님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생명이 어떤 것인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아닌가?


하나님의 아들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으로 표현된 사람들이다. 그 처음이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었다.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가진 사람들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살 때 아들, 곧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아들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를 나타낸다는 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그리고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어두움이 없고 밝음이 있다는 것이다.(이 어두움은 컴퓨터를 모를 때 컴맹이라고 하는 그 어두움을 말하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밝음 곧 빛 가운데, 빛 안에 있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빛 가운데 있는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다. 빛은 밝음이고 어두울 때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하는 것이 바로 빛이다. 즉 빛 가운데 있다는 것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두움에 있을 수 없다. 


이 빛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의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아들이기 때문이다.


그런 아들들, 곧 형제들은 서로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미움이 있다면 그것은 오직 하나 하나님께 대항하는 것이기에 하나님과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사람들인 형제들끼리 그런 미움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는 사람은 세상적인 기준, 도덕이나 법이나 예의와 같은 그 기준으로 사람이 미움이 되고 죄인이 되는 것을 자기의 기준으로 삼지 않는 사람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사람이 사람을 미워하는 이유는 사람을 창조된 본연의 정체성으로 보지 않고 세상이 원하는 법과 도덕과 윤리와 같은 가치 기준으로 사람을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 곧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삶을 사는 사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아는 밝음이 있는 사람은 육신을 가진 삶 속에 나타나는 고상하지 못하고 연약하며 언제라도 세상의 법이나 가치관 앞에서 죄인이나 패배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이다.


그러한 것을 아는 사람들은 서로 형제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어떻게 보시는지를 아는 사람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이다. 그리고 그 의를 안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살아 있다고 하는 생명을 가진 것이고, 그 생명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그런 사람들은 서로 형제인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사람이 가진 겉모습을 사람의 정체성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므로 육신의 연약함으로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하나님께서는 중심을 보신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의 중심을 보는 사람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도 또 판단에 이어 미워하지도 않는다는 것이 요한 사도가 전하는 말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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