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9

사람들의 생각은 무한하다. 그 생각은 형식이 필요 없다. 그렇지만 생각대로 하려면 언제나 자신의 육신의 삶이 한계로 다가 온다. 그것 때문에 생각대로 안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사람의 자리이다. 십자가에 달린 사람의 생각은 그곳에서 내려가는 것이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다.


사람은 형식이 없는 것을 자기의 정체성으로 삼을 수 없다. 사람이 형식에 구애받지 않고 살기를 바라는 것이 바로 뱀이 하와를 유혹한 '하나님처럼 되는 것' 그것이다. 알고 보면 사람이 원하는 기적이란 것이 다 육신이라는 형식의 한계를 벗어나는 것이다. 그러면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형식을 준수하면서 살아야 한다. 그것이 요한 사도가 엄히 경계하고 전하는 내용이기도 한 것이다. 바로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지고 이 땅에 오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라는 것, 그것이다. 그것이 사람의 정체성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람이어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내용이 될 수 없다. 다시 말해서 자신이 자신의 삶의 목적을 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께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사람의 내용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의>라고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의를 벗어나서 형식으로서의 사람의 자리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피, 곧 예수님의 생명이 우리의 구속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의 생명은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는 것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사람의 자리를 지키시는 것을 완전하게 보여주신 곳이 십자가이다.


그 십자가에서는 사람이라면 그 누구라도 스스로 내려 올 수 없다. 그리고 또 누구도 십자가의 자리로 가는 것을 피할 수도 없다. 왜냐하면 사람은 세상이 가지고 있는 법 앞에서 항상 죄인이기 때문이다. 세상이 원하는 법, 곧 사람이 자기 한계를 벗어나야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그 법, 그 모든 세상 법의 뿌리에서 파생된 법 앞에서는 그 누구라도 죄인이 되기 때문이다.


올림픽에서는 2등부터는 뭐라고 수식어를 붙여도 다 패배자 곧 올림픽이 원하는 승자의 법에 의거하여 죄인이 된다. 돈 앞에서는 더할 말이 없다. 돈 좀 있다 싶어도 항상 그 위에 누군가가 있기 때문이다. 즉 돈이라는 기준에서 늘 죄인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듯 세상이 원하는 승자의 법에 의하면 모두가 죄인이 된다. 그렇게 죄인이 되면 다 십자가에 달리는 것과 같이 모든 것이 발가벗겨지고 스스로 그곳에서 벗어날 수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그때가 되면 가시관 쓰신 예수님처럼 생각으로 자신을 구원할 수 없고, 입고 계셨던 옷과 같이 내게 씌워진 신분으로도 나를 십자가에서 내려올 수 있게 하지 못하며, 못 박힌 손과 발처럼 나의 행동으로도 구원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통해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다. 그것이 예수님의 피요 예수님의 생명인 것이다. 또한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의 의로 회복된 인간 본연의 모습이고 정체성이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빛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 빛과 사귐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을 알면 우리는 이 삶을 빛을 만난 것과 같이 어두움에서 행하지 않아도 된다. 즉 인생이 어떤 것인지 훤히 알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가 세상의 승리하는 법으로 승자가 되려고 그렇게 애를 쓰도 되지 않고 캄캄하던 그 삶의 미래와 삶의 목적이 사람은 그럴 수 없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빛을 만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빛이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렇게 만드셨기 때문이고 우리가 그것을 깨닫게 되면 그것이 빛이 되는 것이다. 


그것을 처음으로 보여주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 예수님의 생명과 같이 우리도 분명한 한계가 있는 존재라는 것을 십자가의 예수님을 보고 알게 되면 그것이 바로 예수님의 피, 곧 생명으로 구속을 받는 빛 안에 거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신의 모습은 아니다. 사람들은 신의 아들이라면 뭔가 일반인과 다른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국사회에서 ‘신의 아들’이라는 말이 가진 의미 중에 군에 가지 않은 남자를 말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엄청난 차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은 보통사람과 전혀 차별성이 없는 모습이었다. 차별이 있다면 오히려 일반인들보다 못한 신분 곧 죄인의 신분이었다는 것이다. 그것도 사형수. 한마디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어떤 시각으로 봐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사람들이 가진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은 여느 인간, 모든 사람과 같은 모습이었다.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렇게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밖에 없다. 물론 십자가에서 스스로 내려올 수도 없다. 그럴 수 있다면 그것은 기적이고 능력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러지 않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이면 거기서 내려오라'고 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이건 고의로 그러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어야 하는 인간의 정체성이란 그런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사람의 정체성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렇게 만들지 않으셨다는 이야기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해서 나타내고자 하신 성품은 그런 기적을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이다. 만약 그렇지 않고 기적을 나타내는 인간을 원하셨다면 이렇게 연약하게 창조하실 리가 없다.


사람들, 특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기대하시는 것에 대하여 오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사람이 신비로운 능력을 가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신다. 물론 필요에 따라 그런 능력을 주는 사람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본연의 목적으로 수렴하기 위한 과정과 수단이지 사람이 기적을 일으키는 도구가 되는 것이 본질은 아니다.


이는 예수님의 삶을 봐도 알 수 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많은 기적을 행하셨지만, 정작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밝히는 심문과정과 십자가에서 죽으시는 과정에서는 그것을 보이시지 않으셨다. 아니 그럴 수 없었다. 그건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통하여 기적을 일으키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시고자 만들지 않으셨다는 의미이다. 아들은 아버지를 설명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사람은 하나님을 그렇게 표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분명한 한계가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한계를 넘어서는 것을 좋은 신앙과 훌륭한 삶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람이 자기의 자리를 지키기를 원하신다. 그래서 죄란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고 성경이 규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리는 공간이나 좌표에 관한 것이 아니다. 이 자리는 정체성이다. 신분에 가깝다. 아들이라는 자리, 과장이라는 자리, 사장이라는 자리, 교사의 자리와 같은 자리를 말한다. 즉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가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에게 분명한 한계를 두신 것이다.


사람은 날아다닐 수도 없고, 물속에서도 살 수 없다. 하지만 사람이 가진 가장 큰 한계는 자기의 생각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사람이 형식을 벗어나서 살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은 육신의 한계를 벗을 수 없다는 것이고, 그것은 사람은 내용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내용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는 형식이기 때문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요한일서 1장 5-10절) 십자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요한1서 Date : 2014. 9. 21. 16:50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피를 흘리신 곳이 십자가다. 그래서 이 십자가는 구원의 상징이고, 교회의 상징이기도 하다. 가끔씩 영화 같은 곳에서 퇴마의 상징으로 나오기도 하는데, 그것은 정말 영화일 뿐 십자가는 그런 것이나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이유가 있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당연한 것이지만,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은 그 시대의 사람들이 볼 때 십자가를 져야할 정도의 죄인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다.


예수님의 죄명은 명패에 쓰인 대로 "유대인의 왕"이다. 그 내역을 둘로 나누면 하나는 유대인의 왕이라 칭한 반역의 죄고, 또 하나는 유대인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 신성모독죄가 있다. 하지만 본질은 신성모독이다. 유대인들이 로마통치하에 있으므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신성모독이 있다 해도 사람을 죽일 권세가 없으므로 이를 빌라도에게 보내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을 덧씌운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죄는 두 가지이다. 이는 예수님께서 송사하는 사람들의 많은 조롱과 질문 어느 것에도 답하지 않으시다가 단 두 가지를 시인하셨기 때문이다. 그 하나가 "네가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이냐?"하는 것에 "내가 그로라"하신 것과,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한 것에 "네 말이 옳도다."하신 것이다.


문제는 사람들이 보기에 예수님이 정말로 하나님의 아들 같고, 또 유대인의 왕 같은 모습이었다면 모르겠지만 창녀와 죄인들과 놀고, 왕이라고 하기 에는 너무 없어 보이는 가난한 사람들과 무리를 지어 다니는 꼴로 왕이라고 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또한 유대인의 왕으로 인정할 수 없는 기준이 있었다는 것이다. 바로 그 기준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기준으로 볼 때 예수님은 그래서는 안 되는 죄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기준은 지금도 사람들 사이에 똑같이 있다. 하나님의 아들은 적어도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들이 화를 낸다면 하나님의 아들은 그러면 안 되고, 보통 사람들이 아프다면 그래서 안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사람들이 조롱하기를 '하나님의 아들이면 그곳에서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적어도 그래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조롱은 금식기도를 마치신 예수님을 시험한 마귀의 시험과 같은 것이다.


40일 금식을 마친 예수님을 보고 마귀는 항상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단서를 붙이고서, 돌을 떡으로, 또 높은 곳에서 뛰어 내리라고 또 자신에게 절하면 세상의 모든 영광을 주겠노라고 시험을 했던 것이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Ⅰ

[평교인의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Ⅱ

[평교인의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Ⅲ

[평교인의 성경 보기/주기도문] - (주기도문)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고 Ⅳ



즉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에 새긴 율법을 다 지킬 수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높은 곳에서 뛰어 내려도 죽지 않는 신비한 능력이 있어야 하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세상의 보이는 모든 것이 본질이라 여기고 그것의 주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그런 목적으로 만들지 않으셨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아들은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은 그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를 나타내는 존재, 곧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이지 마귀나 십자가 밑에서 조롱하는 사람들의 기준과 같은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실재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면?'이라는 조건들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십자가에서 돌아가셨다. 그러자 그 모습을 보고 십자가 밑에 있던 백부장이 "그는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하는 모습을 본다. 어쩌면 그 백부장이 가장 먼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실체를 본 사람일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십자가에 우리 사람들을 메달아 놓으면 다 죽는다. 그것은 사람을 죽이는 형틀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라면 십자가에 못 박으면 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런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돌아가셨다는 것은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이 육신을 가지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법이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능력을 발휘해서 십자가에서 내려오거나 율법을 다 지켜 행하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예수님과 같이 우리가 육신을 가진 연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졌다는 것이고,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구원하는 법인 것이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