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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의 심판과 권면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5. 27. 16:45 Writer : 김홍덕

서울역에 가면 예수 믿으라고 메가폰 같은 것을 들고서 전도(?)하는 사람들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이라는 말을 하고, '세상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들을 하면서 사람들에게 피로감을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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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심판의 피로감은 그런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으로 하여금 뭔가 눈치 보게 하고, 또 욕 들어 먹을까 조심하게 하는 것이나, 또한 뭔가를 잘못하고 꾸중을 듣게 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같은 것들도 큰 의미에서 보면 다 심판과 같은 것이다.


그렇다면 왜 심판이라는 것이 있는 것인가? 심판이라는 것이 사람들의 삶을 평가해서, 아니면 예수 믿었나 안 믿었나 구분해서 악하게 살고, 예수를 안 믿었다는 이유로 천국과 지옥으로 나누어 보내기 위하여 인가? 아니면 사람의 신앙이나 마음의 가려내기 위하여 심판하는 것일까?


성경에서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의 마지막 기도에서 세상을 심판하러 온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다고 하셨다.(요 17) 또 반대로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것이 아니라 분쟁하게 하려고 왔다'고도 했고, 세상에 불을 던지러 오셨다고도 하셨다.


분명히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심판자로 오셨다. 요한복음에서 심판에 대하여 아들에게 그 권한을 주셨다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라는 정체성으로 인한 심판이라는 것은 분명히 있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다. 심판이 있다는 것은 어떤 나눔이 있다는 것인데, 그 기준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심판자가 되셨다는 것은 예수님이 포청천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어떤 기준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지 않았다면 기준이 없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는 일이 예수님이라는 기준이 생겼기 때문에 그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심판을 받는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기준이 되신다는 것은 삶의 모양이나 행동에 관하여 기준이 되신다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삶의 모양이나 행동에 대하여 기준이 아니라는 것은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라는 가르침이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가 정말로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예수님께서는 지금 교회에서 성도들에게 교훈하는 생활태도와 같이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 친절하거나, 도덕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 당시의 사회 관념으로 본다면 문제아 중의 문제아였다. 그런데 지금 교회는 사람을 도덕적인 사람으로 만들려고 한다. 이유는 예수 믿기 때문이라며.


그렇다고 이 말이 사회적으로 아무렇게나 살아야 예수님처럼 사는 것이라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도덕적이고 친절한 것은 <나는 누구인가?>하는 문제보다 앞선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먼저인 것은 그것을 알면 지금 그렇게 애쓰는 선한 사람이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짖어서 개가 되는 것이 아니라, 개라서 짖는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은 <네가 누구냐?> 하는 그것에 제대로 대답할 수 있다면 성경이 말하는 모든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생명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즉 어떤 생명이든 그 유전자를 가지고 나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살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이 유전자와 같은 것이다. 즉 '사람의 정체성이 무엇인가?'하는 것에 있어 예수님께서 기준이 되시기 때문에 그 기준과 사람의 정체성을 맞대어 보는 그 자체가 심판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기준이라는 것은 어떤 것인가? 그것은 사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신 십자가의 모습이 바로 그 기준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은 지금의 교회 안에 있는 사람들이 간절히 바라는 세상의 성공이나, 40일 금식기도를 하는 것이나, 신비한 능력이 아니었다.


만약 그런 것을 잘하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선함을 인정 받는 것이 되는 것이라면, 틀림없이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에서 그런 모습을 보이셨을 것이다. 아니, 십자가에 끌려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하늘의 군대를 불러 로마군 다 무찌르고, 대제사장들 유대인들 다 무릎 꿇게 만들었을 것이다.


어디 그 뿐이랴, 하나님의 기적을 일으켜서 사람들로 하여금 절대로 하나님에 대하여 함부로 하지 못하게 벌벌 떨게 하고, 십자가에 달렸다 해도 기적과 같이 내려오는 모습을 보이셨을 것이고, 정말로 정치적으로 왕이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심판의 기준은 십자가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그것 뿐이었다. 지금의 교회에서 하나님께 기도하는 성공과 영적 능력을 기대했던 예수님의 제자들도 다 떠나고 배신한 그런 모습으로 죽어가는 것 그것이 바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사람의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심판의 기준인 것이다.


이 심판의 기준은 세상에서 성공하거나, 세상에서 법 없이도 살 사람처럼 사는 것이 하나님의 심판에서 선함을 인정 받게 되는 그런 심판이 아니라, 인간이란는 존재는 로마인의 세상의 법이나 유대인의 종교적인 법 앞에서는 늘 죄인이라는 것이 발가 벗기듯 드러나는 존재라는 것, 그것을 높이 들리듯 보이는 것 그것이 하나님의 심판을 통과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이 심판은 강요하거나, 이 기준으로 사람을 두렵게 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보여주시고, 그것을 보는 사람이 그 마음에 찔림을 받아 깨우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속에 불이 떨어진 듯 갈등하고 스스로 분쟁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불을 던지러 왔다고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의 심판은 세상에서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으로 법 없이도 살 사람으로 살아가는 공적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이 육신을 가졌다는 것을 온전히 인정하고, 이 육신은 언제나 연약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려 해도 안되고, 종교적인 것을 지켜 행하려 해도 안된다는 것을 고백하는 사람만 통과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심판은 사람이 사람에게 "이 십자가의 도가 심판이니 너는 그렇게 세상의 성공을 좇아 살면 안되고, 십자가 앞에 다 내려 놓아라" 협박하는 것이 강권하여 하나님의 집을 채우는 것이 아니다. 그저 내 삶과 나의 정체성이 그러함을 십자가에 달림과 같이 보여주는 그것을 보고 사람이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권면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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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과 (9)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5. 24. 16:02 Writer : 김홍덕

생명과, 즉 영생이라는 명제는 어떤 것인가? 영원이라는 시간에 대한 정의를 내리고 그 개념을 알게 되는 것이 영생을 아는 것인가? 아니면 이 육신이 실제로 죽지 않고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도무지 어떤 것을 생명 그리고 영생이라고 하는 것인가?


영생에 대하여 예수님께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다"(요 17:3)라고 말씀하셨다. 즉 영생은 죽지 않고 사는 것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다.


그렇다면 세상에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믿는 것은 차이가 있지만, 적어도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기독교의 신으로 그 하나님을 다 알고 있다. 어디 그 뿐인가? 예수 그리스도 역시 믿지는 않아도 알기는 다 알고 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이 영생을 얻은 것이란 말인가?


안다는 것은 서로가 안다는 것이고, 또한 성경을 기록한 유대인들에게 안다는 것은 지식으로 아는 것을 아는 것이라 하지 않고, 체휼하고 경험된 것을 아는 것이라고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가 나와 상관이 있는 상태가 되었을 때 비로서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과 상관성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과 사람과의 사이에 서로에 대한 목적과 의과 동일해야 한다. 사람이 하나님께 바라는 것과 하나님이 사람에게 바라는 것이 다르면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정치판에서 야당은 대통령을 알고 만나지만 생각이 다르다. 그것을 두고 서로가 안다고 할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원하시는 것, 또한 목적 하신 것, 그것이 그 삶에 이루어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을 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아니면 아무리 하나님을 안다고 소리치고 밤새 기도해도 그것은 산에서 낚시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에게 영생이라는 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것, 하나님께서 인생인 나에게 두신 목적, 창조하신 목적 그것을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이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을 설명하신 최종적이고 완전한 게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은 유일하신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불로초를 찾아서 헤맬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로 알기 위하여 노력하는 것이 바로 영생의 길이다.


하나님을 안다는 것, 그것은 하나님이 나에게 두신 뜻을 안다는 것이다. 그냥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믿는 신이 하나님이라는 것을 아는 것을 가지고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 않는다. 또한 교회에 다닌다고, 또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고 하나님을 아는 것도 아니다.


기독교인들이 흔히 하듯이 하나님께 자기 육신이 살아가는 문제에 대하여 기도하고, 그 안에 영광이 있다고 가르치는 그런 신앙 안에서 부르는 하나님도 하나님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의 육신이 처한 사회적이고 현실적인 문제나 해결하려고 계신 분도, 또 그런 일이나 하시려고 사람을 만드신 것도 아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통하여 당신의 성품을 나타내려 하신다. 그것을 목적으로 하시고 가장 좋은 모습이 어떤 것인가 결정하신 것이 바로 이 육신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다. 바로 많은 종교인들이 이 육신이 처한 문제들을 그렇게 자기 신에게 해결해 달라고 기도하고 있는 문제 많은 이 육신이 바로 그 모습이라는 것이다.


늘 문제가 많아서 해결해야 하기에 생각해 보면 이 육신을 가진 것이 너무 불편하고, 또한 이 육신 안에서 나오는 생각들이 너무 추해서 벗어 버리고 싶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과 하와처럼 감추고 싶고 부끄러운 이 육신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에 가장 부합하는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 육신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모습을 표현하시는 도화지이다. 그 이미지가 나타나야 하는 곳이다. 이 육신의 모든 연약함이 있어야 하나님의 성품이 나타난다. 모든 사람이 다 아이언맨 같다면 긍휼이 없다. 사랑도 필요 없다. 그냥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면 된다. 그런 존재들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할 방법은 없다.


그러므로 영생은, 또한 생명과를 먹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에 대하여 똑바로 아는 것이다. 그것을 안다는 것은 유일하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가지고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바로 영생인 것이다.


이 영생은 육신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바로 알아서 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을 알고 그렇게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영생이다. 그것이 영원하신 하나님의 법과 세계 안에 내가 들어가는 것이다. 그 영원함에 내가 편승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영생이고 생명 나무 열매를 먹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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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날 생각해 보는 복음을 전하는 삶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5. 16. 10:25 Writer : 김홍덕

스승의 날이었다. 이제는 스승의 날이라는 것이 삶의 임펙나 기념일 조차 아닌 나이(?) 그리고 또한 삶의 상황이 되어 버렸는데, 그런데 스승의 날이라는 명제를 생각해 보게 된 것은 지난 날 얼마나 스승이나 선생이 되어 보려 했는지, 차마 웃지 못할 세월들이 생각이 나서일 것이다.


언제나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려는 마음으로 살았었기 때문에, 지금 생각하면 웃기 조차 민망한 짓거리들을 했었다. 하지만 어느 날 선생이 되려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의 생각이나 신앙에 대하여 굳이 비판이 아니더라도 이렇다 저렇다 말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 조차 "이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 생각했었다.


이런 말들을 한다. "교사는 있어도 스승은 없다"고. 스승은 "가르쳐 인도하는 사람"이라는 의미라고 네이버 사전에 되어 있다.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 그 대상은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을 가르치고 인도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일게다.


즉 스승이라는 것은 사람을 인도하는 것이고, 그렇다면 제자들을 어떤 자리에서 이끌어 다른 자리로 가게 하는 사람을 일컫는 것이라는 뜻이다. 그러니까 스승이란 사람으로 하여금 있던 자리를 털고 일어나 새로운 자리로 가게 하는 일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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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면에서 본다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가 나를 선생이라 말하는 것이 옳도다"(요 13:13) 하셨는데, 예수님께서 선생이 되신 것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떠난 자리에서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로 인도하신 분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선생이라 호칭을 받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이 자신을 <선생>이라 또한 <주>라 칭하는 것이 옳다고 하신 자리는 우리가 흔히 <세족 의식>이라고 하는,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시던 자리에서 하셨던 말씀이었다. 선생이라는 것, 교육하고 훈계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하는 절묘한 자리가 아닐까 싶다.


사람을 훈계하고 교육하는 것에 있어 가장 저급한 방법은 <꾸중하는 것>이다. 꾸중하는 것이 독존하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채찍만 있고, 당근이 없다면 그건 아무리 변명을 해도 죄인 다루는 방법에 불과한 것이다. 적어도 수레를 끄는 나귀도 채찍과 당근을 병행해서 주는 것을 생각해 보면 더 그렇다.


교육이라는 것의 정의에 "피교육자 안에 있는 것을 이끌어 내는 것"이라는 것도 있다고 한다. 아니 사실 그것이 가장 제대로 된 교육의 정의라고 생각이 된다. 이건 다시 말해서 스승이나, 혹은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미치고 싶어하는 사람들의 정체성이 아닐까 싶다.


그러니까 교육이라는 것은 생선의 뼈를 발라내듯 그 사람 안에 있는 요소를 강제로 끄집어 내고, 보기에 불필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꾸중하고 압박하여 제거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을 보고, 특히 스승의 삶을 보고 자기 안에 있는 것을 뼈를 발라내듯 토해 내는 것이 아니라, 육수가 우러나듯 스스로 각성하고 버릴 것 버리게 하는 것이 교육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면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참 스승이다. 예수님이 보실 때 제자들은 하나님의 뜻을 알기에 부족하고 부족하며, 답답하고 답답하였을 것이지만 꾸중하시는 것이 아니라 결국 우러나도록 하신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또한 십자가에 달리셔서 그 모습을 보는 이로 하여금 하나님의 아들이, 또한 인간이 어떤 존재인가 스스로 고백하게 하신 삶은 참 스승의 삶이다.


오래 전에 스승이 되고 싶은 마음에 대중 앞에서 내가 선생이 되었다고 글을 써서 읽은 일이 있다. 참 생각해 보면 어이가 없는 정도의 일조차 되지 않는 것인데, 스승이 된다는 것, 그 의미는 모르면서 욕심만 가득할 때 그랬다. 그리고 그 마음 한번 인정 받고 싶어 안달나게 살기도 했었다.


그러다 어느 날, 비판이나 비난을 하는 것도 아니지만 사람에 대하여 이렇다 저렇다, 그 사람은 이래서 그렇다는 이야기들을 하고 있는 내 모습에 회의를 느꼈다. 그건 그 사람을 위하는 것도 사랑도 교훈도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게 신앙에 관한 것이라고 달라질 건 없다. 더하면 더했지.(그렇게 위한답시고 평했던 사람들에 대한 죄송한 마음이 잘 가시질 않는다.)


결국 사람에게 복음을 전하고, 또한 그 사람이 변하고 좋은 것을 얻기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바란다면 꾸중도 필요는 하겠지만, 그것만 하고 싸매지도 않고, 무엇보다 그 사람이 스스로 깨우치고 우러나듯 각성할 수 있는 본을 보이며 살 수 없다면, 그건 다 소리 나는 꽹과리 그것에 불과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을 보며, 또 이렇게 큰 영향력 없는 인터넷의 한 공간에서 이렇게 복음에 대하여 전해보고자 하는 나의 마음과 삶에 대하여 이렇듯 어떻게 전해가야 할 것인지를 지난 날의 무식한 과오를 돌아봄과 함께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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