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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와 과정이 어떠하든지 결국은 이 선악과의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다만 그것이 어떻게 연결되었는지에 대하여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은 지식으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결국은 우리가 예수님의 무엇을 믿을 것인가? 하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에 대한 일반적인 견해는 하나님의 명령에 대한 불순종에 있는 것처럼 여기고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 보면,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규정하는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과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을 선한 것과 악한 것으로 나누고 악한 것을 배제하기 위하여 수도하고 법을 만들고 금욕적인 생활을 하는가 하면, 반대로 선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남을 죽이는 것 까지 서슴치 않는 그런 사람의 생각을 말하는 것이라고 했다.


그리고 그렇게 사람이 사람의 모습을 선하고 악한 것으로 나누는 기준은 역사 이래 한번도 통일된 적이 없기에, 사람이 사는 세상은 늘 분쟁과 다툼과 같은 혼돈이 있고, 또 자기만의 선을 추구하는 결과로 남의 피해를 무시하고 심지어 사람을 죽이기 까지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한마디로 사람마다 무엇을 선한 것이라 하고 무엇을 악한 것이라 하는지, 그 기준이 제 각각 다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는 <사람의 무엇을 선한 것으로, 또 무엇을 악한 것으로 보느냐?>의 문제 이전에, 하나님께서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이 연약한 사람의 모습을 보고, 악하고 버릴 것이 있다고 생각하는 그것이다. 그것을 성경은 아담이 벗었음으로 부끄러워했다고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의 연약한 모습을 버리려 하는 문제는, 어쩌면 작은 문제일 것 같지만,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라는 것을 알면 놀랄지도 모른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유대인들 앞에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고 또 로마 속국의 국민으로서 자신이 왕이라고 했기 때문에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이다. 


그런데 핵심적인 문제는 예수님의 모습이 그럴 만 했다면 아마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이나, 또는 로마황제의 아들과 같은 모습이었다면 말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가난한 나사렛 출신, 목수의 아들에 불과했다. 게다가 인간의 부끄러운 모습을 경건한 종교적 공로로 감추려 한 것을 악한 것으로, 또 성전의 기물을 파손하고, 죄인들과 먹고 마시니 그 모습은 사람의 연약함을 부끄러워하는 눈을 가진 이들이 볼 때는 절대로 하나님의 아들이나 왕, 메시아는 아니었던 것이다. 한마디로 벌거벗은 인간의 모습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아담이 부끄러워했던......


그런 모습으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고 왕이라고 하니, 인간의 부끄러움을 감추고 종교적인 율법을 지키며, 연약한 모습을 버리면 버릴수록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라 믿었던 유대교인들에게 이는 신성모독이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이유인 것이다. 그 이유나, 아담이 벗은 것을 부끄러워했기 때문에 죽임을 당한 양이나 이유가 같은 것이기에 그 가죽 옷이 예수님을 의미하고, 우리의 죄를 구속하는 법이라는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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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 (14) - 가죽 옷과 예수님의 구속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4. 2. 19. 09:48 Writer : 김홍덕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성경의 핵심 중의 핵심이다. 기본적으로 예수님께서 사람의 육신을 입고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사람을 대상으로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유가 좀 그렇긴 하지만 만약에 하나님께서 개를 구원하시려 했다면 예수님께서는 강아지로 오셨을 것이다. 또 아니면 우리가 더 강한 모습이라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면 사자나 호랑이로 오셨을 것이다.


아담이 벌거벗은 것을 부끄러워 하여 나뭇잎으로 옷을 해 입었다고 했다. 무화과 나무의 잎으로 옷을 입었지만 하나님께서 가죽으로 옷을 입히셨다고 했다.(창 3:21) 이것은 별다른 이견 없이 양의 가죽으로 알고 있다. 왜냐하면 양은 예수님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아담이 자신이 인간이라서 부끄러운 것을 예수님의 희생으로 가렸다는 의미이다.






그 예수님의 희생에 대하여 우리는 흔히,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했다고 믿고 가르친다. 그것은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 <대속>이라는 것이 버스 차비 대신 내어 주듯, 죄는 우리가 저지르고 벌은 예수님이 받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대속을 그렇게만 생각하면 할수록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에서 멀어질 수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쉽게 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사람과 동등한 모양으로 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아담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그때처럼, 하나님께서는 육신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부끄러워 해야 하는 모습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심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땅에 사람의 몸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는데 격이 많지 않는 모습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아들은 때려도 아프지 않고, 화도 내지 않고, 피도 안 나고, 잠을 자야 할 만큼 피곤하지도 않는 그런 존재라야 하나님의 아들이지만 사람을 위하여 겸손하게 연약한 육신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약 그런 모습이라야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면, 이 땅의 어떤 사람이라도 지금부터는 예수를 믿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을 그만 두어야 한다. 왜냐하면 사람은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습으로 오신 것이 아니다. 우리와 같이 피곤하고 화도 나고 때리면 피도 나고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그런 모습, 우리와 같은 그 모습으로 오신 것이다. 왜냐하면 그런 모습이 부끄러운 모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담에게 양의 가죽으로 옷을 입히신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리스도께서 육신으로 오심을 보조고 그것을 나의 신분으로 삼으면 그 부끄러움이 감추어진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속은 차비를 대신 내어주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과 그 삶을 볼 때, 그 분이 나와 같은 사람이고 인생이구나 하는 것을 깨닫고, 내가 인간이라서 부끄러워 했던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 예수님의 구속인 것이다. 


그리고 그 구속함 안에서 보니, 나로 하여금 사람이라는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보여주신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다면 나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음을 고백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가 밑의 백부장처럼......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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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 경제타운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2. 19. 06:16 Writer : 김홍덕

어느 날 창조경제타운에 올린 나의 작은 아이디어가 생활에 몇 가지 변화를 가져왔다. 최근 2주 내 3군데의 언론과 인터뷰가 있었다. 신문과 라디오 그리고 어제는 월간 중앙까지......사실 내 아이디어는 별게 아니다. 그런데 이제는 나의 사는 이야기까지 뉴스가 되려 하고 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한 일이었지만, 막상 경험해보니 생소한 일임에는 분명하다. 그리고 좋은 일은 좋은 일이다.




창조경제타운 홈페이지




이것이 나에게 의미를 주고 있는 것은 작아 보이지만 나의 생각에 변화가 있었고, 그 생각의 결과 혹은 연장선 상에서 일어난 일이 아닌가 하여 이 일이 흔히 말하는 대박이 나는 일이 아니라고 해도 내 삶에 있어 교훈이 되고 긍정적인 의미가 있다고 생각이 된다.


나는 예전에는 <하면 된다>라는 것을 믿지 않았다. 종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다 하시고 나는 그것에 은혜로 포함되어야만 뭔가 이루어지는 것이지 사람이 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고, 그냥 사회인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도 비슷하게 뭔가 돈도 준비되고 여건이 조성되어야 비로서 내가 뭔가 할 수 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어느 날, 돈 빼고는 나보다 가진 것이 없는 한 사람을 보았다. 조그마한 회사 하나 운영하는 것으로 사람들에게 훈장 노릇하고 자신이 선생인 듯 착각하는 한 사람을 본 것이다. 나는 얼마간 그 사람의 삶을 지켜 봤다. 직원들은 그의 훈장 노릇에 피곤해 하지만 아랑곳 하지 않는 그였지만, 단 한 가지 돈에 관해서는 나름 열심이었다. 문제는 거저 열심이기만 했지만......


그의 삶을 보며 나는 '다소 착각과 환상 속에 살지만 그래도 저렇게 열심히 하는구나! 그런데 나는 이때까지 뭐했나?'하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날 이후 나는 당장 눈 앞에 있는 일들을 할 수 있는 대로 하려 했다. 그래서 머리 속에 있던 아이디어를 특허로 출원해야지 하다 남들이 제품화 하는 것을 몇 차례 본 기억을 교훈 삼아 마침 그 때 TV에서 홍보하는 <창조경제타운> 사이트에 내 아이디어를 올린 것이었다.


그리고 뭔가 투철한 마음이나, 기억에 남는 열정을 가졌던 것 같지는 않지만, 일이 진행되는 동안 하나씩 그때 그때 해야 할 것을 하려 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아이디어를 제품으로 만들 회사를 찾는 일에 그러했다. 그건 지금에 생각해 보면 참 어려운 일이었고, 영업보다 힘든 일이었는데, 그냥 그 순간 할 일은 그것이라 여기고 하나씩 했었다. 한 회사로부터 1억 가까운 투자를 유치하는 것이 쉬운 일인가? 그냥 단순한 아이디어 하나로 말이다.


그렇게 그냥 닥친 순간이 요구하는 것을 하나 하나 하다 보니 이제 특허 기술 이전에 대한 협약도 마치고 제품 개발 단계에 진입했고, 이런 케이스가 정부가 기획한 창조경제타운의 취지에 맞을 뿐 아니라, 제 1호 케이스가 되어 작은 부분이지만 국가적인 주목을 받고 있다.


생각해보면 이 세상에 대하여 사사로이 늘 불만도 많고, 작은 것을 바로잡으려고 신고하고 항의하던 나의 삶이었다. 그러다 이 세상은 내가 극복하는 것이 아니라 순종 하는 것이라는 것을 깊이 깨달은 것이 나에게 큰 변화고 교훈이었다. 내가 그렇게 이 세상에 순종 해야 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이 세상은 이미 육신을 가진 내가 살려고 하면 수명이 닿는 동안 살 수 있게 하나님께서 다 주신 상태이므로, 내가 하나님께서 언제 주시나 기도하고 바라기만 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아니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이 세상을 살아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 육신의 삶에 필요한 것들을 제공해 주시기를 기다리고 기도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와의 관계가 하나님께서 주신 삶과 그 삶의 터전인 이 세상에 순종하면 된다. 왜냐하면 공중 나는 새도 다 먹이시는 하나님이시기에, 정신 차리고 보면 육신으로 사는 것은 얼마든지 살 수 있게 이미 다 주신 상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필요한 것이 있다면, 세상을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조성한 삶에 순종하고 또한 그렇게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세상과 삶이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오히려 세상과 삶을 변화시켰다. 이것은 변화된 신앙관의 결과이다. 


이전에는 이 세상을 그저 종살이나 할 수 없어 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이 세상은 도화지다. 좀 깊이 있게 말해 본다면 사람의 연약함과 그 연약함으로 힘들게 살아야 하는 삶과 그 터전인 세상은 도화지라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이미 조성해 놓으신 세상에 그 일부로 육신으로 하는 삶은 주신 사회적 체계, 국가적인 의와 법에 맞추어 살면 되게 되어 있다.


하나님이 주신 성품 곧, 그리스도와 같은 삶을 사는 것 또한 이것이다. 변화를 주창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삶에는 이미 필요한 것 주셨고, 이 삶이 억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종살이 같아 보여도 이것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터전이다. 이런 모든 것을 주셨음을 믿고 순종하고 살아가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다.


나는 지난 몇달간 그저 내 앞에 닥친 일들을 하나씩 하는 것 밖에 하지 않았다. 그것도 100%도 아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은 했다. 이 세상은 하면 되도록 하나님께서 주심을 믿고, 순간 순간에 순종했던 것이다. 그것이 기대하지 않았던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깨달았던 것이 나에게 체휼되는 시간들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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