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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과에 대한 성경의 정확한 표현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이다. 우리는 그냥 선악과라고 줄여서 쓰면서 그 의미의 핵심을 간과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저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불복종한 상징이나, 인류의 역사를 바꾼 과일 중의 하나와 같은 표현으로 희석된체로 말이다.


선악과는 하나님의 계율에 대한 범죄적 <행위>의 대명사가 아니다. 본질은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한 죄로 보신다는 의미이다. 그런데, 이것이 완전히 희석되어 버렸다. 이는 사람들이 삶과 세상의 요소를 선과 악이라는 이분법적 논리로 분리하고 그 중에서 악한 것을 배제하고 자신의 삶에서 추출하는 것이 훌륭한 인생이라는 유전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논제에 대하여 "그럼 악한 행동을 하고 살아도 된다는 말인가?"라는 반문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문제가 아니다. 즉, 어떤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어떤 행동이 선한 것이며, 어떤 행동이 악한 것이냐? 하는 것이 선과 악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을 행동과 그 결과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행동이나 표현은 어떤 것인가를 생각해 보자. 행동과 표현은 그 존재의 정체성에서 비롯된다. 군복을 입어서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군인이라서 군복을 입는 것이다. 만약에 간첩이 우리나라에 살면서 도덕적으로 너무 훌륭하게 살고 주변 모든 사람에게 칭송을 받는 삶을 산다고 해 보자. 대학에 기부도 하고 그렇게 살았다고 해도, 그가 간첩이라는 것이 밝혀지면 좋은 뜻으로 기부를 받은 대학마저 곤란해 질 것이다. 이건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누구냐의 문제인 것이다.


무엇인 선한 것이고 무엇이 악한 것이냐의 기준은 사람의 행동과 세상의 결과로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누구이냐? 하는 문제가 더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실재로 성경에서도 선악과를 먹고 몰랐던 부끄러움도 알게 되었고, 자신의 행동이 악하다는 생각도 가지게 된 아담은 하나님을 피해 숨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숨어 있는 아담을 찾아와서 질문을 하신다. 그때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던진 질문이 <"아담아 네가 어디에 있느냐?">이다. 숨바꼭질로 찾으면 술래에게 들킨 사람인데, 질문이 어색하다. 통상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아담, 네가 무슨 짓을 했느냐?">가 더 적합할 것인데 말이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는 불순종의 행동을 했는데, 하나님은 왜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셨을까?


이는 아담의 행동이 무슨 행동을 했느냐?에 대한 죄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네 자리, 곧 너의 정체성과 네가 일치 하느냐? 네가 네 정체성의 자리에 있느냐? 하는 질문인 것이다. 다시말해서 사람이 선과 악을 알게 되어 부끄러워 하고 자신의 행동을 악한 것으로 인식하여 숨는 아담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신 목적, 사람에게 부여한 정체성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어디에 있느냐?">라고 물으신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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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론 실패자가 되어 보자..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4. 2. 12. 11:15 Writer : 김홍덕

어제(2월11일)에는 스포츠 안에서 두 눈물을 보았다. 하나는 누구나 아는바와 같이 올림픽에서 이상화 선수가 금메달을 따서 흘리는 기쁨의 눈물이었고, 또 하나는 흥국생명 여자 배구단이 10연패를 끊고 승리한 다음 눈시울이 불거진 류화석 감독이다.


전지현이나 김태희 같은 화려함과는 다른 아름다움이 있는 이상화 선수의 눈물은 승리와 기쁨의 눈물이다. 물론 그 안에는 그간의 고생과 수고로움 또한 녹아 있을 것이다. 어제 그녀의 승리는 참 감동적인 것이었다. 그러하기에 그녀는 영광을 받아 마땅하다. 





한편, 평소에 큰 호감을 가지고 있는 분은 아니지만, 흥국생명 류화석 감독이 10연패를 청산하고 승리한 다음 여자 리포트의 소감을 묻는 질문에 답하지 못하고 붉어진 눈시울은 어쩜 패배자의 아픈 눈물이었다. (흥국생명은 시즌 최 하위이고, 플에이 오프 진출이 거의 불가능한 상태)





그렇게 같은 세상에 다른 의미의 두 눈물을 볼 수 있는 하루였다. 생각해 보면 우리는 승리와 패배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일들의 반복 속에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때로 패배자가 되어 봐도 좋을 것 같다. 물론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니라, 납득할 수 있는 수고의 끝에 오는 패배는 얼마든지 즐길만한 일이 아닌가 생각한다.


사실 실패와 성공이라는 것은 남자와 여자와 같은 상호 베필의 관계이다. 남자라는 개체가 없다면 여자라는 단어조차 불요하듯, 실패가 없다면 성공이라는 것 역시 단어조차 존재할 수 없는 그런 불가분의 관계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이건 같은 것의 양면과 같은 것이고, 또한 실패는 성공을 그리는 캔버스나 도화지와 같다. 혹자는 성공의 어머니라고도 했다.


어쩌면 큰 실패는 아닐지 모르지만, 나도 나름의 실패들을 겪었는데, 그때마다 나는 그것에서 멀어지려 하고, 할 수 있다면 그것을 피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건 삶도, 나 자신도, 인생도 하나님도 모르는 것이었다.


산다는 것 자체에 집중한다면 때로 청하지 않았음에도 문을 두드리는 실패를 손님처럼 맞이해 보자.
동전의 뒷면과 같이 그 뒤에는 성공이 있다.


그러나 막연히 실패가 성공과 상관이 있다고 여기면 자위하는 것은 오만이다. 그러니까 성공을 목적으로 실패를 수용하는 것은 삶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성공과 실패는 사람의 삶 안에 있는 공존하는 것이고, 내 삶의 일부이기에 수용해 가는 것이 온전하다.


알고보면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와 같다. 인생의 연약함, 그리고 그 연약함으로 인한 삶의 다양한 부정함, 그리고 그 부정함 속에 매몰된 것 같은 나의 삶이 원래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 좋았다고 한 나의 삶이라는 것을 수용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삶이기 때문이다.


삶의 어쨋던 외형상 그 모양은 같다. 다 죽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차피 다 같은 결과를 향해가는 우리의 삶 속에서 성공이라는 것만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때로 실패자의 눈물도 흘려보자. 사람이 타락한 것이 실패하지 않으려 애쓰기 때문임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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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선악과라는 것은 아담과 같이 어떤 것은 부끄러운 것, 또 가려야 할 것이라고 여기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리고 사람이 그런 상태에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께서는 죽은 것이라고 하신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스스로 어떤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이 세상을 만드신 목적,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외면하고 다른 의의 기준을 부여하는 상태가 되는 것을 선악과를 먹었다고 표현하시고, 그런 상태는 하나님 앞에서 죽은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선악과의 말씀인 것이다.


생각해보면 사람이 당연히 무엇이 선한 것인지에 대하여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은데,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죄, 특히나 모든 죄의 뿌리와 같은 것을 보시는 것인가?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이 가진 선의 기준이 창조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하면, 사람이 가지고 있는 선과 악의 기준이 각각 다른 것과 연관성이 있다.


그럼, 사람은 왜 각자가 생각하는 선의 기준이 다른가? 왜 그런 것인가? 그것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러한 고민에 앞서 현재의 교회와 성당 그리고 각종 종교에서도 무엇인 선한 것인가를 연구하고, 신앙하면서 설교하고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 내려 하고 있다. 하지만, 그런 모든 노력들 조차 각각이 추구하는 선과 악이 다르다는 것은 단순한 아이러니일까? 그것은 사람들의 근본이 선과 악을 판단하는 자기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다 선악과를 먹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사람들이 구분하는 선과 악의 기준은 단언컨데 사람이라는 존재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의 모든 사람이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은 오직 사람의 행동과 소유와 같은 형식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얼굴이 다르듯 어떤 것을 표현하는 것이 다 다르기에 그 다른 만큼 갈등이 있고, 또한 그 만큼 선과 악의 기준이 다른 것이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이 비슷한 사람들이 모이려 하고, 같은 취미를 가진 사람이 모이고, 같은 관심사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것이다. 그것은 자기가 생각하는 <선>과 같은 것을 선으로 여기는 <의>를 가진 사람들이 그 세를 모아 자신들의 의를 주장하려 하기 때문이다.


즉, 사람이 주장하는 모든 선이라는 것이 그 사람의 존재 자체의 정체성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의 행동과 외모를 판단의 대상으로 두고 있기에, 그것에 대한 기준이 다 다른 것이다. 예로 간음이라는 행동에 대한 기준도 나라마다 다 다르다. 심지어 에스키모인은 외부 남자에게 자기 아내를 잠자리에 내어주는 것이 최고의 접대였다고 한다. 그것은 분명 간음이지만, 사람의 왕래가 드문 에스키모인들에게는 근친혼들로 인한 유전적 열화를 막기 위한 생존의 관습이었다.


살인도 마찬가지다. 전쟁이라는 상황이 되면, 그때는 살인의 가치가 달라진다. 오히려 많이 죽여야 선한 것이 되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비단 이런 흔치 않은 상황이 아니라하더라도 우리 생활의 주변에는 이런 일들이 비일비재하다. 실재로 한 신혼 부부가 삶은 감자를 소금에 찍어 먹을 것인가, 설탕을 찍어 먹을 것인가 하는 것으로 다투기 시작한 것이 양쪽 집안의 문화를 비난하게 되고, 결국 이혼한 사례도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이 글을 읽는 모든 사람의 오늘 하루 일과를 돌아보면, 알고보면 별 것 아닌 것인데, 내가 해 온 방식, 내가 옳다고 하는 방식들이 달라서 이견을 보이고 조정하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생각해 보면 사람들이 얼마나 행동과 형식에 대하여 각각의 기준이 다른지 알고보면 정말 놀라운 것이다. 


반면에, 오늘 당신은 다른 사람도 나와 같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상기하면서 어떤 문제를 해결해 보았는가? 다시 말해서, 사람을 사람이라는 그 존재 자체로 보기 위한 노력을 얼마나 했는가를 생각해 보면 우리가 얼마나 선악과를 먹은 삶을 사는지 발견할 수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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