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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샤머니즘(Shamanism)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1. 13. 11:56 Writer : 김홍덕

샤머니즘은 

신(神)을 불러들이는 무당(巫堂), 곧 샤먼(shaman)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다. 샤머니즘이라는 것은 이상심리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신령, 정령, 사령 등)와 직접 접촉ㆍ교류하고, 이 사이에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는 인물(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ㆍ종교적 형태로 나타난다.(《종교학대사전》, 샤머니즘, 한국사전연구사(1998년판))

라고 인터넷 위키백과에 나와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미신적 활동, 예를 들면 굿을 한다거나 부적을 붙이거나 가지고 다니는 등의 행동을 샤머니즘이라고 지탄한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하고 있는 샤머니즘의 사전적 의미에 보면 예언, 탁선(신이 내리거나 꿈에서 신이 나타나서 말을 했다고 하는 것), 복점, 치병, 제의(제사 의복?)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신과 접촉해서.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사람이 접촉하는 것을 신접했다고, 귀신 들렸다고 하며 터부시 한다.


그렇다면 샤머니즘의 세계는 왜 그렇게 신과 접촉하려 했을까? 그러니까 신과 접촉하는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삶의 생사화복에 관하여 안정과 번영을 담보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살 동안 건강하고 부유하며 걱정거리 없는 삶을 바라는 마음을 가진 인간이 육신으로는 그 소망에 자기가 바라는 수준까지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육신의 능력 이상을 빌어 자기 소망을 이루려는 마음에서 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육신이 도모하는 일, 그것이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나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어느 것이라도 그것을 바라는 바를 어디엔가 기대하려 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정립된 신론(神論)에 의하여 인정된 신에게 의지하면 종교가 되고 그렇지 않고 무당과 같이 정통적이지 않지만 세습되어온 민간의 방식에 의존하면 샤머니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 명확한 것 같지만 엄청난 오류가 있다. 같은 문제를 어디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종교가 되거나 샤머니즘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범주를 보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들이 문명적으로 발전하면서 종교학, 신학과 같이 신에 대하여 학문적인 정의를 내리고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가진 문제를 그것에 의지하면 종교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뿌리도 결국 샤머니즘이라는 것이다. 종교가 정립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육신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힘든 삶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인간 이상의 존재에게 의탁해 왔는데 그 체계를 인간 스스로가 세우고 스스로 세운 체계 안에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의탁하면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들 스스로가 세운 종교적 논리 세계에 따르지 않고 종교적 논리가 수립되기 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샤머니즘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이나 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종교나 다 같은 조상이고 뿌리가 같고 같은 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되었던 샤머니즘이 되었던 사람이 그것에 바라는 것은 모두 육신으로 사는 인생 한 세상 자기가 바라는 일이들이 육신에게 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는 것은 같은데, 그 마음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종교 안에 있으면 좀 고상하게 보이고 좀 더 확률이 높다고 여길 뿐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믿는 신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확률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종교적 개념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것도 함께 발전했다. 그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종교나 샤머니즘이나 다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교회에 가서 헌금을 했더니, 아니면 무당에게 복채를 주었더니 부자가 되었다거나 병이 나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다 미신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사회과학적으로 공부나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고, 병이 나으려면 의학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기도나 헌금이나 수행을 하는 것은 과학 입장에서 보면 도진개진인 것이다.


그러자 일부 종교, 특히 기독교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창조과학회와 같이 신앙과 과학을 결합하기도 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성경의 일을 증명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종교가 더 우월하고 세상 친화적(세상이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높은)인 종교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확률을 높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어떤 신께 어떤 방식으로 인생의 문제를 의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즉 사람들이 스스로 정립한 종교학이나 신학이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예불하고 미사를 드리면 괜찮고, 그 범주가 성립되기 전 인생들이 의지하던 고전적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면 샤머니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샤머니즘은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신이나 무당에게 의탁하느냐의 문제다. 그러니까 사람이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 다니면서 하나님, 부처님, 천주님께 기도하면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천주님이든 간에 가서 인생이 가진 문제, 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신앙은 다 샤머니즘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라면 더 그렇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물으시는 것이 언제나 동일하게 “너는 누구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와 같이 관계에 관한 질문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너의 문제가 무엇이냐?’, ‘네가 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에게 제시할 공로와 소유가 무엇이냐?’와 같은 것을 물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육신이 살아가는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사람이 거하느냐 아니냐를 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즉 정체성과 관계를 보시는 분이시지 육신의 문제가 무엇이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인 나에게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보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무당으로 대표되는 샤머니즘을 보자. 병을 고치려면 복채를 내라는 것, 산신령이 노하시니 무엇이든 드리라고 하는 것이 샤머니즘의 골격이 아닌가? 이것의 출발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답을 위해 육신의 무엇을 드리는 것으로 구성된 퍼포먼스인 것이다. 존재가 아니라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샤머니즘인 것이다.


그러면 종교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샤머니즘과 다른 것이 없다. 동일하게 육신의 문제를 사삼들이 스스로 정립한 종교 안에 가지고 가서 종교가 정한대로 소유와 공로를 드리는 것이 그것이다. 십일조를 내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나, 공양미를 내면 아비의 눈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나, 가서 주기도문을 백번 외우면 죄가 사해질 것이라는 것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없이 모두 자기가 믿는 신이나 신앙을 위해 육신이 가진 무엇을 드리면 육신의 문제 무엇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고상한 샤머니즘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근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육신의 행함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고, 제사로 드리는 제물 태우는 냄새도 싫다고 하셨다. 한 마디로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또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행함이나 소유를 드림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산신령 같은 잡신 취급하는 것이지 신앙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누구께 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비느냐의 문제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누구께 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비느냐의 문제다. 인생이 존재하는 의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자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서 취업이나, 사업이나, 결혼이나, 건강과 같은 것을 기도하고,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헌금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마음에는 분이 차지만 말을 곱게 하려고 애쓰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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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ot, a church is not forever!!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11. 11. 16:13 Writer : 김홍덕

교회는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이 땅위의 버전인 교회가 영원하지 않다니 그것이야 말로 정말로 멍청한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교회는 영원하지 않다. 아니 영원할 수도 없고, 영원히 보존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the Church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a church에 관한 이야기다.


원론적으로 아니 성경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교회는 영원하다. 하나님 나라의 이 땅위의 버전으로서 교회는 영원한 것이다. 교회가 영원하지 않다면 신앙도 다 소용없다. 이 영원한 교회는 어디까지나 the Church에 관한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the Church와 a church에 대한 구분 없이 자기가 몸담은 교회가 영원해야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멍청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the Church와 a church는 뭐가 다른가? 형편없는 영어능력의 소유자지만 이 정관사 the와 부정관사 a(n)의 차이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영문법에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 개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the Apple이 있고 a apple이 있다. the Apple은 사과라는 종의 대명사다. 이때 the Apple은 실존하는 개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a apple이 실존하는 개념이다. 모든 apples가 가진 생명의 본성, 그 정체성이 바로 the Apple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the Church와 a church 역시 같다는 것이다. 모든 churches의 속성과 본성 그리고 정체성이 바로 the Church이다.


A church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영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 부정관사가 붙는 모든 존재가 영원하지 않음과 같다. 또한 the Church가 영원한 것 역시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만 그 정체성은 언제나 영원하다. 사람도 나고 죽기를 일상 같이 하나, 사람이라는 생명은 영원하고, 사과 역시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먹어치우지만 사과는 언제나 영원하다. 이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주님이시다.


우리 모든 사람은 사과를 영원하게 보존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영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원하게 하려고 사과 한 알을 보존한다고 사과가 영원해지는 것이 아니다. 맛도 사라지고 수분도 사라질 것이다. 뭐 과학적으로 진공 상태나 특수하게 보관한다고 치자, 누가 사과를 그렇게 할 목적으로 재배하는가? 그냥 먹어치우려고 재배하지.


예전에 진시황제가 죽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어이없는 노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역사가 알려주고 있다. 그렇듯 생명은 그 정체성이 영원한 것이지 그 개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것에 생명의 법인데, 생명의 주님이 머리되신다는 교회들은 어이없게도 각 개교회가 영원하여야할 것처럼 애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보라. 다 쓸데없는 짓이다. 교회는 언제나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그리고 교회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고 the Church가 영원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모르니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영원해야 할 것처럼 생각하고 노력한다. 본질도 생명도 하나님도 교회도 뭔지 모르는 멍청이들의 노력이다.


이 멍청함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먼저는 그렇게 a church를 지키기 위하여 양심도 버리고, 사람도 버리는 교회들의 가치관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교회에 말씀도 신앙도 없다고 느끼면서도 꿋꿋이 다니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다.


A church를 지키기 위해서 양심을 버리는 모습은 가을 길 낙엽만큼이나 많다. 세습도 그렇고,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고 그것을 지탄하는 세상의 소리를 ‘하나님을 모르는 소리, 사탄의 소리’로 일축하는 너무나 용감한 교회들도 그렇다. 때론 자기 교회 목사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또 양심과 싸우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버리기도 한다. 교회가 가는 길과 신앙이 다르다고 사람을 내친다. 신앙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바른 답을 해주지 못하는 실체를 들킬까 싶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강조하고 ‘의심하는 자’로 치부한다.


그렇게 교회를 지키려고 할 때는 지킬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재산이 있거나, 명예가 있거나, 아니면 랜드마크 수준의 교회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거나. 하지만 잊지 마시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심과 죽고자 하는 자가 살 것이라고 하심을. 그것도 인정이 안 되면 십자가를 기억하라.


십자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곳이 십자가다. 하나님의 아들을 지키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그 구원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 교회라는 것이라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십자가를 떡하니 걸어 놓거나 아니면 교회 종탑 위에 높이 세워두고서 십자가의 도는 버리는 이 어이없는 상황이 오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멍청했던 필자와 같이 a church에 뼈를 묻겠노라며 두 번이나 긴 삶을 살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는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다. 그 기준은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어떤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지 궁금하다면 가서 평안한가를 생각하면 된다. 내가 평안하다면 누군가는 십자가의 도로 나를 섬기는 사람이 있는 교회다. 그런 교회를 찾아야 한다. 목사가 있어야 하고 장로가 있어야 하고 건물이 있어야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다 회칠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궁금한 것을 듣기에 평안하면 된다. 그게 안식이다. 그래야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평안하지도 않고 가르쳐주는 것도 없는데, 그래도 건물도 있고, 목사도 있고, 장로도 있는 교회에 가야한다며 인생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바로 한 알의 사과를 영원하게 보존하려는 것이고 사람이 죽지 않으려 하는 것이고 a church를 영원하게 하려는 것이다.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A church는 영원하지 않다. 아니 그것은 영원할 수 없다. 그것을 영원하게 여기면 오히려 영원한 the Church를 볼 수도 없고, 누리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다. 그 하나님의 의가 영원한 이상, 유한한 삶을 가진 사람들은 그 영원함을 거치듯 사는 것이다. 한 알의 사과가 이 땅에 열매로 맺혀서 누군가의 양식이 되어도 그 사과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사과인 것과 같이, 교회도 우리 인생도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의 본질 속에 살면 우리가 죽어도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영원함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a church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버리지도 말고, 양심도 버리지 말자. 또한 자기가 다니는 a church가 영원할 것처럼, 또 자기 신명을 다해서 지켜야할 것처럼 여기지도 말자. 교회도 육신을 가진 인생도 하나님의 의와 나라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소비되어질 때 온전한 것이다. 육신, 형식을 가진 만물의 본분이 그것이다. 물론 a church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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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1-11) 죄인을 위하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11. 07:00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핵심적인 십자가 사건을 이 블로그에서 늘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 왔습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된다는 것은 그냥 그럴듯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답의 답이기도 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의 답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5장에서 이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많은 신앙인들은 옳은 것을 지키려 합니다. 세상에서 교회를 지키려 하고, 교인들이 모였을 때 신앙이 더 좋은 사람의 위신을 지키려 합니다. 그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 설사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시험치고 공부하여 된 목사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떨치거나 훈계하거나 욕하거나 뒷담화를 하거나 따돌립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반하는 사람이니 멀리하고 터부시 합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교회를 붕괴시키려고 한다거나 능동적으로 다른 신앙을 전파하려 한다면 다른 이야기지만 하나님을 믿겠다는 마음이 있고, 그 신앙을 그 교회 안에서 성장시키고 지키며 나누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관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막으려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베드로는 막았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예는 결국 같은 것입니다. 의인을 더 의롭게 하고 죄인은 죄인으로 대하는 것이라는 것에서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막아선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것을 막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의로운 것을 지키려고 사람을 버리는 것이나 예수님을 막아선 베드로나 모두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의로운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 그것은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마구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거나, 목사님은 의로운 분이니까 좋은 차를 타고 또 육신이 피곤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나 교회 세습과 같은 일을 하고선 그것을 지적하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일’ 혹은 ‘하나님의 일에 세상이 간섭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일 뿐 그 어떤 의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현재의 신앙인들, 특히 소위 혹은 자칭 영적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관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나, 초대교회 시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유대교에 뿌리를 둔 사람들의 신앙 가치관과 놀라울 정도로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로마서가 성경으로 남아서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것이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살 수밖에 없는 법으로 성경을 주셨는데, 성경을 학문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생명의 법과는 반대로 교회의 높은 곳에서 서서 말하기를 ‘성경대로 살아가야 하나님께 의로워진다’고 말하고, 의로운 것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에 대하여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세상의 모든 가치는 거저 물리치기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의인을 위하여가 아닙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들에 의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앙인들이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본받겠다고 하고, 십자가를 지고서 죽겠다고 하면서, 정작 삶 속에서는 작은 일에서도 ‘네 생각이 틀린 것 같은데…’라는 말에도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옳다하며 자기가 가진 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지키는 것인 양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반대로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더욱이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며 대접받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법과 의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십자가에서 모두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은 모든 인생이 그것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인생에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장대에 들린 놋뱀과 같이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의인이 죄인이 되는 세계인 것입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의인이 그 육신을 죄인과 같이 사형을 당하는 것과, 죄인이 종이 되어 섬기며 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고 살아내는 삶을 사는 것이 십자가의 도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도는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의 법과 요구는 불의한 것이라며 회사가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간절한 도움을 청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도 십자가의 도가 아닙니다. 또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친구와 가족을 버리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 같이 십자가를 외면하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의인이 의롭기 위하여 죄인을 심판하고 또 의를 모르는 사람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지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내팽개친 것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어 흘리신 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생목숨을 버리신 대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벌은 예수님께서 받으셔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생명이 구원을 받는 것인지를 보이셨으니 그 생명이 자기 생명이요, 자기 정체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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