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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1-11) 그리스도와 화평하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4. 22:19 Writer : 김홍덕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그 어떤 행위로도 불가능합니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물론이고 도덕적인 삶도 그렇거니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기도가 되었던 성경을 보는 것이든 교회를 위하여 죽을힘을 다하는 것이든 다 소용 없습니다. 


왜냐하면 먼저 하나님은 존재의 하나님이시지 공로와 소유를 드림을 기뻐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이므로 절대로 변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생각에 하나님을 믿는 신앙적인 행위를 열심히 한다고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또한 우리가 성경에서 알게 된 모든 신앙적 행위는 성경이 말씀하시는 바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진 사람이 보이는 생명의 특성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 생명이 있으면 그런 행동을 한다는 것이지, 성경을 몸으로 지켜낸다고 그리스도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군인이 군복을 입는 것이지 군복을 입는다고 군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바울 사도는 모든 성경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하신 말씀은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며, 그 뜻이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삶으로 표현되는 사람을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이라고 말씀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이며, 그 약속이 자신의 것으로 믿는 것이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또 바울 사도는 이 믿음을 그리스도와 화평케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화평이라는 것은 다툼이 없고 평화를 유지한 상태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반대로 화평하지 못한 상태, 곧 서로 다툼이 있고 적대시하는 상태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사람이 서로 화평하지 못하게 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이유 밖에 없습니다. <의(義)>가 달라서 그렇습니다. 의가 다르다는 것은 선하다고 여기는 것과 악하다고 여기는 것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세상은 언제나 소란하고, 우리 각 개인이 살아가는 매일의 일상에서 겪는 모든 갈등을 생각하면 그 종류가 수도 없다고 여기겠지만, 사실 그 모든 다툼의 원인은 하나입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사람의 다툼은 오직 하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서로 선하게 여기는 것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선하게 여기는 것이 같은 사람을 일컬어 ‘마음이 맞다.’ 하고, 서로 모임과 공동체를 만듭니다.


하지만 서로 선하게 여기는 것, 옳다고 여기는 것이 다르면 만남 자체가 바로 다툼이 됩니다. 개인과 개인이 그렇고 나라와 나라가 그렇습니다. 심지어 사람과 물건이 만나도 그렇습니다. 물건의 정체성과 사람이 바라는 것이 다르면 갈등이 일어나고 사람이 화나게 됩니다. 그런 상태가 바로 화평하지 못한 상태인 것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알면 바울 사도가 예수 그리스도와 화평하자고 한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과 의가 같은 사람이 되자는 것입니다. 의가 같으면 무엇이 선한지 무엇이 악한 것인지에 대한 생각과 안목과 가치가 같아지는 것이니 그러면 당연히 화평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예수님과 본성과 생명이 같은 존재가 되자는 말입니다.


예수님과 본성, 그리고 의가 같아진다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과 본성이 같아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뜻을 예수님과 같이 육신으로 표현해내는 본성을 가진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앞에서 말한 하나님의 약속이 자신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믿는 사람이라는 의미인 것입니다. 그래야 예수님과 화평케 되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은 예수님과 다툰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달리 화평할 이유도 없을 것 같은데,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화평하지 못한 것은 의가 달라서라는 것을 안다면 예수님과 화평하자고 하는 말은 결국 이전에는 예수님과 정체성과 의가 달랐던 우리가 이제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예수님과 같은 생명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자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이런 말씀을 하는 것은 이제는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애쓰지 말고,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과 뜻(말씀)이 육신 곧 자신의 삶이 되어야 하는 것인 사람의 운명이라는 것을 믿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신의 정체성을 깨닫게 되면 율법의 모든 것을 다 지켜낼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아브라함의 예로 말씀한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의 할례가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 계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을 믿은 믿음이 할례를 받는 것으로, 할례로 표현되었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먼저 아브라함을 부르시고 난 다음에 할례를 받았다는 시기적인 결정적 증거와 함께 말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과 생명의 본성이 같고 존재의 정체성이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 모든 율법을 온전케 하는 것이요,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며 예수님과 화평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같은 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과 같은 의를 가진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실체가 그러했고, 하나님의 의가 우리의 의가 되는 것이 우리를 통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달성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모든 것은 결국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입니다. 그 하나님의 의는 사람에 대한 의입니다. 성경을 사람에게 주신 것이니 당연히 사람을 향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사람의 삶으로 나타나신 이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가리켜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 예수님께서 모든 율법을 완성시키러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모든 율법도 다 하나님의 의에 관한 것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예수님과 같이 삶이 되었을 때 나타난 삶의 모양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숨만 쉬어도 율법을 지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 예수님과 의가 같아지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화평케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화평케 되는 사람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의,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됩니다. 그렇다는 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시고 다 이루었듯 우리도 살아갈 뿐인데 이상하게 율법이 다 지켜지게 되고, 성경의 모든 말씀이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 하지 말고, 예수님과 화평케 되어 사나 죽으나 율법과 하나님의 모든 의를 지키고 이루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도 그렇게 되라고 오늘 우리가 이 로마서를 묵상해 가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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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1-25) 약속과 믿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 21:29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요지는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심령 안에 있으면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야고보 사도의 의견과도 같은 것입니다. ‘행함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것은 행동을 유발 시킬 수 있는 살아있는 생명의 본성이 그 안에 없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한 사람은 귀납적으로, 한 사람은 연역적으로 표현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란 그렇습니다. 육신으로 표현하는 것들은 결국 다 생각과 마음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자기 안에 있는 것을 속일 수 없다고 합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행함은 행함이 주체가 아닙니다.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행함은 심령의 표현이고 결과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그 뜻은 사람에겐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은 그 믿음이 심령 안에서 생명이 되어 행함으로 표현됩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이것을 모르면 행동으로 약속을 지켜내려 합니다. 뭐랄까 사극에서 약속의 증표로 부러진 단도 같은 것이 있다면 약속의 당사자가 아니면서 그 증거만을 훔쳐서 약속의 혜택을 누리려는 도적과 같습니다.


이 하나님의 약속은 결국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나님 아들의 정체성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목적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두신 뜻은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신 약속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다는 것은 그 하나님의 뜻이 인생인 자기 자신의 것이고, 운명이며,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약속하신 것, 사람을 향하여 두신 의,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사람에게 약속이고, 그 약속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두신 그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약속과 그것을 믿는 사람의 믿음이 그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 목적하신 사람 안에 있으니 하나님께서는 그 사람이 목적 안에서 정말로 살아 있고 생명이 있는 사람인 것입니다. 마치 시간을 알기 위해 시계를 산 사람에게 시계가 시간을 잘 알려주어 주인의 목적을 달성하면 살아 있는 시계인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님의 약속을 사람이 자기 운명과 정체성이라는 것을 믿어 자기 심령 안에서 생명이 되면 그 생명이 가진 본성으로 인하여 어떤 행함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생명이란 그런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행함의 모양들이 무엇인지를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전을 지을 때도 오홀리압과 브살렐[각주:1]과 같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가지신 성전에 대한 뜻이 자기 안에 있으므로 그들이 만든 모든 것이 다 하나님께서 뜻하신 식양에 충족되었고 하나님께서 만족하셨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법과 같이 아브라함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신 그 약속을 믿었더니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이 아브라함 안에서 생명이 되어 육신으로 나타난바 된 것이 할례고 믿음의 행함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라, 또는 어떤 것을 하라고 할 때 그 사람의 정체성과 맞지 않는 것을 행하라고 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니 아브라함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한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 할례로 표현되기에 충분한 생명이고 사람이었기에 할례를 받으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신실함, 곧 거짓이 없는 것입니다. 거짓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정체성과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것이 거짓이고 속이는 것이고 정체성과 본질과 다른 형식을 취하는 것이 간음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 아브라함 안에 있는 믿음의 본질적인 모습을 가지신 이가 있는데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아브라함의 혈통에서 나셨다는 것은 육신의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라는 것이 핵심이 아니라, 아브라함 안에 있었던 그 믿음, 그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육신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복음서에서 예수님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있었다고 한 것은 아브라함 안에 있는 약속의 본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이 그 약속이 무엇이든 그 약속을 믿는 믿음을 가지려면 약속이 먼저 있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집보다 설계도가 설계도 보다 집을 짓는 주인의 의가 먼저 있었던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그 믿음의 본체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시니 예수님께서 아브라함 보다 먼저 계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듯 아브라함이 믿은 믿음의 본체이신 예수님입니다. 그래서 율법의 본뜻을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을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생각하던 사람이 ‘이것이 아니구나!’ 깨닫는다는 것은 자신이 하나님께서 정한 의에서 벗어난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에서 벗어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자신의 죄를 깨달은 사람에게 이전과 전혀 다른 새 법을 하나님께서 주셨는데 그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주신 사람의 정체성,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사람의 육신으로 표현된다는 것인데,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약속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아니 그 약속을 믿는 사람은 예수님을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와 뜻이 자신의 정체성이고 사람인 자신의 본질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을 믿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마치 하늘을 나는 백조를 본 미운 오리새끼와 같이.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가지신 뜻이자, 사람을 지으신 이유이자 사람의 존재 목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하여 주신 약속이고 그것을 사람이 믿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그것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고, 그것이 율법으로 죄를 알게 된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새 법입니다. 


  1. 출애굽기 31장에 나오는 사람으로 하나님의 성막의 모든 기물을 만든 두 사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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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훈련, 신앙훈련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1. 2. 17:05 Writer : 김홍덕

지금 저의 블로그에는 로마서 강해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특히 이 로마서 앞부분에 있는 행위와 믿음에 관한 말씀을 이야기함에 있어 부각되지 않을 수 있지만 많은 기독교인들에게 이젠 습관처럼 된 <신앙훈련>이라는 것이 행위와 믿음이라는 관점으로 볼 때 어떻게 볼 것인지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가야할 것 같아서 따로 이렇게 설명하려 합니다.



훈련으로 종(種)을 바꿀 수는 없다.



많은 교회와 신앙단체가 신앙에 대한 훈련을 합니다. 이름도 가지각색이고, 최근 들어서는 영어로 훈련 이름을 만들고서는 그 영어 단어의 첫 글자만 따서 약칭을 부르는 것도 많아서 설명을 듣지 않으면 ‘이게 뭐하는 건가?’ 싶기도 한 것도 많습니다. 그리고 요즘 성황 중인 이단 신천지에서도 많은 성경공부와 훈련을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런 신앙훈련, 영성훈련(이하 ‘신앙훈련’이라고 하겠습니다.)에 있어 가장 먼저 생각해야할 것은 <훈련>이라는 단어가 영향을 줄 수 있는 범위입니다. 흔한 표현이 아니라서 설명을 붙인다면, 훈련이라는 것이 (생명의) 종(種)을 바꾸어내지는 못한다는 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신앙훈련이라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생명이 산 자와 같은 생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개를 훈련시키면 고양이나 다른 동물이 될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어쩌다 개를 훈련해서 개가 고양이 흉내를 내면 그것은 말 그대로 ‘흉내’고 ‘노릇’인 것입니다. ‘노릇’이라는 말은 예수님께서 외식하는 유대인들에게 ‘선지자 노릇’한다고 하신 것을 생각하면 익숙한 표현일 것입니다.


훈련이란 어디까지나 이미 태어난 생명의 본성 안에서 그 생명의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이지 훈련을 통해서 다른 종으로 바뀌거나 다른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신앙훈련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훈련을 통해서 더 좋은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맞겠지만 신앙훈련을 통해서 구원을 받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정체성에 대한 분명한 밝음도 없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공로와 소유를 드리므로 이 세상을 살 동안 안위와 복을 받는 것으로 관철된 신앙을 가진 사람이 제 아무리 신앙훈련을 한다 해도 하나님의 의에 이르거나 구원을 받은 생명이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훈련은 살아 있는 생명이 받는 것.



또 하나 이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함에 있어 중요한 것은 어떤 존재에게 훈련이라는 말을 사용하느냐의 문제입니다. 어떤 이야기인가 하면, 훈련이라는 말은 어디까지나 <생명체>에 사용하는 말이고 개념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기계는 시운전, 업그레이드와 같은 말과 개념을 적용하지 기계를 ‘훈련시킨다.’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따라서 신앙훈련은 생명이 있는 사람이 받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이 다 생명이 있지 그럼 죽은 사람이 훈련을 받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이 숨 쉬고 있다고 하나님 앞에서 다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또 사람이 하나님을 믿노라 한다고 또 생명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살아 있다고 하려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살고 있을 때 비로소 생명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은 무엇입니까? 이는 창세기에 말씀하신대로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일반적으로 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절대적으로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을 믿으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된다는 것, 그래서 세상에서 잘 되고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 그런 축복을 받으려면 성경을 행동으로 잘 지켜내야 한다는 것, 그래서 신앙훈련을 통해서 성경을 잘 지킬 수 있도록 습관을 바꾸어야 한다는 식의 논리는 전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과는 다른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히실 것이 아니라 세상의 왕이 되어서 아직도 육신이 죽지도 않고 살아 계셨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은 세상에서 가장 실패한 신분인 사형수가 되어서 돌아 가셨는데 어떻게 예수님께서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다고 하겠습니까? 그리고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으로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라면 정말로 지금까지 살아 계셔서 지난 수천 년의 역사 편찬에 정보도 주시고 또 전쟁도 막고 하셨으면 되지 그만한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닌데 어리석고 하나님을 뜻을 전혀 모르는 유대인들에게 끌려가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모습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곧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을 통해서 표현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 세상에서 성공이라는 기준으로 볼 때 죄인이 되었을 때 하나님의 성품이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의 법이고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그 목적이 자기 삶의 목적과 의미인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그런 사람만이 생명이 있고, 훈련이 의미가 있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전혀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신앙을 가지고, 하나님께서 축복을 담보받기 위하여 행동을 고치는 것을 신앙훈련이라 여겨서 성경을 읽고 수련하고 훈련하는 것은 주소가 완전히 잘못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일단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 할 수 없는 존재니 의미가 없고, 그렇게 하나님 앞에서 죽은 상태의 존재가 훈련한다고 살게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훈련은 종을 바꿀 수 없으니 말입니다.



훈련이 있으려면 먼저 생명으로 거듭나야…



그러므로 하나님을 (잘) 믿으려면 훈련이 급한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께서 살았다 하는 생명이 되어야 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구원을 받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일을 <거듭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훈련이라는 것이 생명에 적용하는 개념이듯 거듭남 역시 생명, 곧 어떤 세계에 있어 살았다고 할 수 있는 존재에 속한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고 하려면 앞에서 이야기한 예수님의 십자가와 같이 세상에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은 육신을 가지신 예수님과 같이 죄인이 되는 것이 운명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과 그 세계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과 이김의 법으로는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라는 하나님의 법이 자기 삶의 법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에 밑에 있던 백부장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사형수가 되어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보고 ‘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라고 고백했습니다. 백부장이 오늘날의 기독교인들과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안목을 가지고 있었다면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보고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 백부장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생명이 있는 것이라는 가치관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즉 다른 생명, 거듭난 생명으로 예수님을 본 것입니다. 그러면 이 백부장은 어떻게 그런 안목을 가지게 되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의 모습,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된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 안에 심겨졌고, 그것이 성령으로 잉태되어 생명이 되었기에 그 생명의 본성에 따라 예수님을 알아보고 그런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예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성공하려 하려고 시험 잘 치게 해 달라, 좋은 직장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 하나님의 마음을 사기 위해서 몸으로 성경을 지키려고 훈련을 받을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 철저히 실패해서 버린 돌과 같은 모습을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지금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할 때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모습이 우리 심령 안에서 성령으로 거듭난 생명이 되는 법이 바로 하나님을 믿는 처음이고, 그 법으로만 생명이 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생명이 된 다음에 그 생명의 풍성함과 능력을 나타내기 위하여 묵상도, 기도도, 훈련도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훈련이 훈련다워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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