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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십자가의 도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27. 00:10 Writer : 김홍덕

여기서 십자가의 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십자가의 도를 아주 크게 오해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것을 오해하는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의 본질을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을 어겼다고 율법으로 심판하여 죽이려 했습니다. 


실질적인 예수님의 죄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이야기 했는데 왜 그것이 죽을죄가 되었을까? 이는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에 율법이란 행위로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율법을 대함에 있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이나 의 그리고 본질 같은 것은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인생이 부정하다 여겼기에 이 부정한 인생을 구원할 것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들을 가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켜 행하여야 한다고 믿고 무엇보다 주장 했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심령에 율법을 주신 목적이 생명이 되어(말씀이 육신이 되어) 그 율법의 존재 목적의 본체로서 그 생명의 본성대로 하나님의 의를 표현한 예수님의 삶은 그들의 안목으로 볼 때 도무지 율법을 지키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 않는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그들은 미칠 것 같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다. 


인생을 부정하다 여긴 그들의 안목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인간이라는 자신의 모습이 부끄러워해서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려야만 했던 안목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담의 그 안목이 결국은 어린양을 죽게 했듯 유대인들의 안목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것입니다. 사람이 스스로 선과 악의 기준을 가지게 되어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이 부끄러운 것이라 여기는 사람의 죄를 어린양이 피 흘리고 대속하므로 사람들이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덮으신 것입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아담(사람)이 선악과를 먹고서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부끄럽게 여긴 것은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무가치한 것으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는 정체성을 죽인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건축자가 버린 돌과 같은 인생의 정체성이 모퉁이돌이 되게 하신 것입니다. 사람들의 안목으로 볼 때 부끄러운 인생의 모습은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죽음 중에 두실 수 없는 온전한 생명의 모습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예수님의 육신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며, 세상의 가치로 볼 때 도무지 흠모할 것도 없고 하나님의 의에 이를 만한 것을 육신으로 나타내지 못하기에 아무 짝에도 쓸모없다고 여기고 십자가에 발가벗겨 매달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과 같은 육신으로는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고 선언했습니다.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온전한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세상의 가치로 볼 때는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 할 만한 것도 없는 주제에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여 십자가에 아담이 부끄럽게 여긴 모습으로 매달아 ‘이런 꼴로는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없다.’고 선언했는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의 모습이라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이것을 정리하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쓸모없고 부끄러운 인생의 모습, 집 밖에 나가면 감추고 숨겨야 하는 것으로 여기는 우리의 연약함 그것이 숨길 것이 아니라 드러나서 세상의 가치로 죄인이 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십자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떻습니까? 그 십자가를 믿음으로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신앙이라 여기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지 않고 이긴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를 반대로 보고 전면적으로 부인하고 욕보이는 것임에도 오히려 그것이 좋은 신앙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십자가에서 드러난 예수님의 모습, 그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기로 하신 모습이라는 것을 드러내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 육신으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주신 목적을 드러내는 것,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고 하나님 아들의 모습인데 지금 아담이 부끄러워한 모습으로 달리신 예수님은 그 모습이 바로 그리스도의 정체성이기에 그것을 드러내시므로 이 땅에 오신 목적을 다 이루신 것입니다. 그 목적 안에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도 포함된 것입니다. 아니 그것은 예수님의 운명을 율법이라는 각도에서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를 사람들이 거꾸로 믿고 있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철저히 죄인이 되신 예수님의 십자가를 힘입어 세상에서 성공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겠다고 작정하고 떼를 쓰고 있습니다. 방향이 잘못되었습니다. 모든 것이 반대로 되었습니다.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율법을 지킬 수밖에 없는 삶의 모습으로 드러나는 것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인 사람의 모습이 하나님께서 온전한 사람, 보시기에 심히 만족하신 사람의 모습이라는 것을 드러내시려 하심이지 그 십자가를 힘입어 세상에서 성공을 담보하여 주시려 함이 아닌 것입니다.


이런 어두움, 이렇게 율법도 십자가도 하나님의 뜻도 알지 못하는 것의 근본 원인은 모두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인생을 자기 안에 있는 선악의 기준으로 부끄럽고 부정한 것으로 여기는 것 때문입니다.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안목만 바꾸면 되는데 오히려 사람의 육신의 행동을 바꾸려 한 것이 율법을 잘못 대한 모습인 것입니다. 안목은 생명에서 비롯되는 것이고, 율법은 행동을 바꾸는 조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신 생명이 표현되는 법이니 결국 사람이 자기 안목만 바꾸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이신 인생의 정체성을 아담이 부끄럽게 여긴 안목으로 볼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 보는 안목만 있으면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인생은 부끄러운 것이고, 그렇기에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려고 한 자신의 안목이 하나님을 거역한 죄라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율법이 죄를 알게 하는 것이고, 그것을 고백하는 것이 죄를 시인하는 것이고, 그 시인이 있으면 온전한 하나님의 의가 우리 안에 심겨져서 성령으로 잉태되어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 육신의 삶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그러면 율법은 그냥 지켜지는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나타나는 생명의 법칙이 바로 율법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율법이고 이것이 십자가며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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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다 이루었다.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25. 23:54 Writer : 김홍덕

법(法)에는 법리(法理)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를테면 도로교통법에서 교통법규를 위반하면 범칙금을 낸다는 조항의 목적, 곧 법리는 범칙금 부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교통법규를 잘 지키게 하는 것입니다. 세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세금을 내지 않으면 재산을 압류하고 처벌한다고 하는 것은 재산 압류가 목적이 아니라, 세금을 잘 내게 하여 그 세금으로 나라 살림을 윤택케 하겠다는 것이 세법의 법리라 할 수 있습니다.


이처럼 법이라는 것은 그 법이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법의 법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에 명시된 조항들, 이것을 행하고 지키라는 그 조항들은 그 조항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눈에 보이는 것이고, 그렇게 행동하라고 하는 근본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도적질 하지 말라’고 하신 계명을 지키려면 자기 안에 도적질할 이유가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삶에 감사하고 만족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삶이 하나님 앞에서 존재하지 않았던 것 보다 존재해서 살게 되었다는 것이 감사하고, 또한 만족과 안식을 누리는 사람이 다른 사람의 것을 탐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율법도 그것을 지킬 수밖에 없는 마음과 가치관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근원된 법리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 기록된 계명들, ‘어떻게 하라’와 ‘지키라’는 말씀들은 모두 그리스도의 본성이 나타난 모습인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의 법리인 것입니다.


이는 도로교통법에서 범칙금의 부관에 대하여 규정한 것이 범칙금이 목적이 아니라 교통안전이듯, 십계명과 같은 하나님의 율법이 보기에는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씀 같으나 그 본질, 그 법리는 성경이 전하는 모든 말씀이 설명하는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설명하는 것이니, 성경에서 이렇게 하라, 저것을 지키라고 하신 것은 그리스도는 그렇게 하는 존재이고 그것을 지켜내는 존재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가지게 되면 모든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소위 준법정신이라는 법을 지키려는 마음만 있으면 도로교통법이든 세법이든 다 지키게 되는 것과 같이 말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이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또한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성품을 지닌 사람들의 삶의 모습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고 그런 행동을 하려고 애쓰는 것은 마치 범칙금을 부과하기 위하여 숨어서 단속하는 경찰과 같은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말씀대로 산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목적, 곧 모든 사람이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지고 살게 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생명이란 그 본성이 행동과 모양으로 나타납니다. 반대로 가공품과 제조물은 생명이 표현한 모양과 형태를 따라 만들기만 합니다. 그것은 그런 모양과 형태를 이룬 생명의 본성이 없습니다. 법으로 치면 법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도 법리에 해당하는 그리스도의 생명의 본성 없이 몸으로 지켜낸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외식이라 책망하시고 바울 사도와 사도들이 경계한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예수님 자신이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은 예수님은 율법의 모든 법리 그 자체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같은 생명이 되면 율법은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켜 예수님의 생명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본성을 가지면 율법을 다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율법의 모든 말씀,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의 본성에 대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진 사람의 삶의 모양과 행동은 당연히 예수님과 같은 행동양식을 가진 삶을 살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바로 그 삶의 모든 것, 행동양식과 삶의 모양과 의식은 율법을 지키는 삶, 아주 정확하게 말해서 지킬 수밖에 없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율법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것도 어기지도 못하게 지키는 온전한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율법의 완성인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예수님의 생명, 그리스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알면 율법의 모든 것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존재가 되느냐를 알게 되면 율법의 행위, 절기와 규례는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본성은 다름이 아니라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셔서 십자가의 도를 보이시므로 사람들이 그것을 보면 땅에 씨가 심기듯 사람들 안에 예수님께서 보이신 십자가의 도가 심기고 그것이 성령의 능력으로 잉태가 되어 새 생명으로 거듭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생명이 이 육신으로 나타나서 어떤 행동과 삶의 모양과 양식과 규례와 절기를 지키게 된다는 것입니다. 본성에 따라. 바로 그 본성에 따른 행동양식이 성경이고 율법이고 말씀인 것입니다. 바로 그런 삶을 말씀이 육신이 된 삶, 곧 그리스도의 삶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성경의 법리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돌아가신다는 것,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전하고자 하신 말씀의 모든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시는 그 순간 십자가 바로 아래에서는 하나님께서 뜻하신 대로 한 사람(백부장)이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즉 이 십자가에서 못 박힌 예수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어 나타난 존재라는 것이 인정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백부장이 눈으로 본 예수님의 모습이 그의 심령 안에 심겨졌고 성령의 감동으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는 생명의 안목이 열렸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돌아가실 때에 성전의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제사장의 복식(옷)과 절기와 규례를 거쳐야만 만날 수 있던 하나님의 지성소가 사람이라면 누구나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도(말씀)가 육신으로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달리신 것이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그것을 보고 예수님과 같은 육신을 가진 자신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는, 아니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것을 인식(빛이 비췬 것입니다.)하고 순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십자가의 도가 바로 율법의 모든 것을 육신으로 나타나게 하는 생명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로 알고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전하고자 하신 하나님의 말씀이 나의 것으로 깨달아 예수님과 같이 말씀이 육신이 된 삶을 산다면 그것이 모든 율법을 일점일획도 빠트리지 않고 다 지키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처음 이 율법과 복음을 시작할 때에 목차는 <7. 다 이루었다>까지 였는데 예상대로 추가가 되어 다음 회에 <8. 십자가의 도>를 이어가겠습니다. 율법이 어떻게 십자가와 연결되는지 같이 묵상해 보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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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1-25) 아브라함과 믿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25. 16:47 Writer : 김홍덕

이스라엘 사람들뿐 아니라 오늘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그 믿음의 조상을 아브라함이라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단군의 후손인데 말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믿음은 육신의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간혹 모태신앙에 대한 막연한 가산점이나, 목사라는 육신의 신분을 세습하는 것과 같이 혈통과 육신에 관한 것을 믿음의 기준이나 증거로 삼는 것을 보면 이것을 어떻게 해석해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저의 이런 마음이 바울 사도에게도 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에 있어서 할례를 받고 하나님 앞에서 선택받은 혈통이라는 것을 강조하는 바울 사도에게도 말로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 하면서 행동은 혈통에 매인 모습을 보았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은 할례를 받기 전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할례를 받은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고향 땅을 떠난 때는 75세였습니다. 그리고 이삭을 100세에 낳았습니다. 이삭을 얻기 전에 할례를 받았을 테니 24,5년이나 지나서 할례를 받았습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인정을 받은 것은 할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그 아브라함이 바로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것은 믿음이라는 것은 아브라함의 후손의 세계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행함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 하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여기는 사람 역시 그러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면서 정작 믿음이라는 것은 행함이 있어야 한다고 하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은 결국 할례를 받아야 예수님을 잘 믿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십일조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정체성을 가감하지 않고 그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신성과 신으로서의 정체성을 내가 그대로 믿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려면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어떤 하나님이신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하나님일까요? 아니 사람들은 하나님을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사람들이 하나님께 가서 구하기를, ‘육신의 일을 주께 맡깁니다.’, ‘제가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어 하나님께 영광이 되게 하시고, 그것을 보고 사람들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여 주옵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이런 기도는 그야말로 회칠한 무덤과 같습니다. 내용이 일면 거룩해 보이나 기도가 이루어져서 은혜를 입는 것이 모두 이 육신과 세상의 일, 그것도 소유와 공로(공적)에 관한 것입니다. 그렇게 기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것으로 영광을 삼고 또 그것을 의롭게 여기시는 신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소유와 공로를 주관하시고, 사람이 어떤 것을 드리고 어떤 공로를 쌓으면 의롭게 여기시는 신으로 여긴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소유와 공로에 관한 신은 다름이 아니라 바알과 아세라입니다. 풍요와 다산이라는 것이 그 신들의 주제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십니다. <무엇을 하느냐?, 드리느냐?>가 하나님의 주제가 아니라 <너는 누구냐?>, 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가 주제고 기준이신 신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께 가서 믿고 구하는 것이 육신의 것이라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도 믿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면 혈통이나 어떤 공로와 같이 내용이 아닌 형식을 본질로 알고 그것이 잘되어야 하나님을 잘 믿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되는 것은 아브라함이 무엇을 했기 때문이 전혀 아닙니다. 아브라함이 믿음으로 아들 이삭을 드린 것은 아들 이삭을 드렸기에 믿음의 조상이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믿음이 그렇게 한 것입니다. 믿음이 먼저 있고, 그 믿음이 행함으로 나오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은 행함의 시점과 행함으로 인함이 아니라 그 행함이 나오게 하는 본성을 보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것입니다.


어쩌면 너무 뻔하고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브라함과 할례의 관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같이 사람이 어떤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얻어야 하는 것이라면 아브라함이 갈대아우르를 떠나기 전에 할례를 스스로 행하였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브라함을 택하시고 그 믿음을 의로 여기셨다면 할례를 받아야 온전한 믿음이라 하는 것이 합당하겠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 일이 오늘 우리와 어떤 상관이 있습니까? 바울 사도 시대에 할례라는 것이 쟁점이었다면 지금은 십일조 하는 것, 주일 대예배에 빠지지 않는 것, 교회에서 어느 한 부서에서라도 봉사하는 것과 같은 것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일조와, 대예배와, 봉사와 기도와 같은 것을 해서 복을 받고 의롭게 여김 받고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심령이 있는 사람이 십일조도 드리게 하고, 예배를 기뻐하며, 봉사도 하고, 감사하고, 말씀을 더 사모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생명이 본성이 되어 하는 것은 금할 것도 없고 온전한 것입니다. 믿음이란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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