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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위한 기도, 그 어리석음에 대하여…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0. 23. 09:45 Writer : 김홍덕

많은 신앙인들이 세상을 위하여 기도한다. '세상이 잘못되었고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니 이를 고쳐 주십시오!'라고. 오늘 같은 주일이면 많은 교회들의 이른바 대예배 시간의 대표기도에는 아마 거의 빠지지 않는 기도의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우리는 세상을 위한 기도는 신앙의 필수적인 요소로 동행하고 있다. 하지만 세상을 위한 기도는 엄청난 어폐(語弊)가 있다. 그것은 하나님의 경영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세상을 위한 기도가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것은 보편적 신앙관에 대한 제법 심각한 도전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왜 그런지를 생각해 보자.


신앙의 근간이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을 주로 믿는 것이다.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며, 하나님은 무소부재(계시지 않는 곳이 없으시다)하시며 그의 경영에는 실수도 부족함도 없으심을 믿는 것이며, 그 하나님이 나를 또 사람을 그리고 세상을 만드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의 근간이다. 이 중 어느 하나라도 부인하거나 믿지 않는다면 온전한 신앙이 아니다. 알기 쉽게 표현한다면 구원을 받은 신앙이라 할 수 없다.


그렇다면 실수도 없으시고 그 경영하심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세상의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다면 그것은 온전히 하나님의 부족함이 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자신이 만드신 세상을 자신의 의도하심대로 경영하지 못하고 있으니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나서서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하고 하나님께 이 사태를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세상을 위한 기도인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항변이 있으실 것이다. 하나님은 길이 참으시는 분이라고, 또 추수 때 까지 가라지를 그냥 두시는 분이라고. 하나님은 물론 그렇게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면 그런 하나님을 믿고, 그 뜻대로 산다는 사람들이 나설 필요는 없다. 하나님이 길이 참으시는데 사람들이 나서서 세상을 바로 잡아야 한다고 외칠 이유가 없는 것이다. 사람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동안 불편함을 감수하고 사는 것이 사람의 도리인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을 구원하신다는 신앙에 있어 구세주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삶은 또 어떤가? 하나님이 만든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 사람들에 의하여 죽게 되는 것만큼 잘못된 일이 있을까? 다시 말해서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해야한다면 그보다 더 중한 기도가 있을까? ‘당신의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구하소사, 당신이 우리를 구원하러 보내신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구하소서!’라고 기도하는 것보다 중한 일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정말로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이 바로 예수님을 죽였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로마에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로마에서 파견되어 왕을 대신한 빌라도는 오히려 살리려 했다. 그런데 하나님을 믿는다는 사람들, 자신이 바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였다. 그것은 하나님이 만드시고, 전지전능한 하나님이 경영하는 세상에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세상이 그보다 잘못될 수 없는 상황인데 그 상황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면 지금은 어떤가?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못되었다고 하는 세상이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이 만들고 경영하시는 세상에서 죽는 상황보다 잘못되었는가? 


세상은 잘못된 것이 없다. 적어도 하나님께서 전지전능하시고 그 경영이 온전하다고 믿는다면 세상은 잘못된 것이 없다는 것을 믿는 것이어야 한다. 전지전능한 하나님을 믿는데 그 분이 경영하시는 세상이 잘못되었으니 바로 잡아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한다는 것은 “당신 뭐하는 거야? 일 똑바로 못해?”라는 항명과 다를 바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잘못된 것은 오히려 그 기도를 하는 자신이다. 하나님이 틀리지 않았다면. 세상은 언제나 온전하다. 예수님을 못 박던 시절도 온전하다. 하나님의 뜻이 왜곡되지도 외면 받지 않고 온전히 이루어졌고, 세상의 종말이니 말세니 세기 말이라며 걱정하고 탄식하는 오늘날도 하나님의 경영에는 오류도 부족함도 잘못된 것도 고칠 것도 전혀 없다. 잘못된 것은 이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각, 그 하나뿐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이 망할 것이니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거나, 이 죄악이 관영한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를 지키고 사는 사람이 되기 위하여 신앙을 가진다는 것은 그 시작이 잘못된 것이다. 천로역정에서 담을 넘어 들어온 순례자와 같은 것이다. 진정한 신앙은 세상이 잘못되었고, 이 죄악 속에서 나를 지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이 세상을 온전히 보지 못하는 자기 가치관을 뉘우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세상은 이 물리적인 세상을 한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 세계를 말씀의 주제로 삼고 계신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과 세계는 이 세계와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 안에 형성된 그 세계다. 피사체가 주제가 아니라, 필름에 새겨지는 세상이라는 것이다. 


각 사람 그 사람이 가진 가치관으로, 그 안목으로 형성된 세계,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인지 아닌지에 관한 것이 신앙의 세계고 창세기가 말씀하시는 태초로 시작되는 하나님의 세계인 것이다. 그 세계, 그 나라가 하나님의 의가 주인이 되느냐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각 사람 안에 형성된 세계의 주인이냐 아니냐가 바로 신앙의 세계고 믿음의 세계며 그것이 하나님의 세계라는 것이다. 이것이 열려야 비로소 천지창조가, 빛이 있으라 하신 태초가 있는 세계가 열린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다 형식에 매몰된, 육신의 문제, 세상이 속한 육신의 세계가 본질이고 그 객관적 세상 외에는 하나님의 의로 열린 거듭난 세계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안목과 가치관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은 제대로 된 것이 하나 없는 세상일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란 곳이 자신이 가진 가치 기준대로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자신은 그 세상의 지극히 작은 일부인데, 그 일부로서 세상이 자기 기준대로 움직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자기 기준대로 움직이지 않는 세상은 항상 부족한 것이다. 그래서 자기 기준대로 세상이 움직이지 않으니 어이없게도 하나님께 가서 그것을 바로 잡아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세상을 위한 기도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렇게 어두운 안목이 아니라 자기 안에 하나님의 세계가 열려서 이 세상을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보기를 원하시는 것인데 오히려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이 경영하시는 세상을 원망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과 같은 안목으로 이 세상을 본다면, 그리고 하나님의 경영이 온전하다는 것을 믿는 믿음 또한 온전하다면 지금 이 순간 하나님의 경영은 온전히 하나님의 뜻 안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 보일 것이고, 자기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어 하나님과 같은 안목을 가지고 있다면 하나님이 참고 계시다면 자신도 참을 것이고, 하나님이 기다리신다면 기다릴 것이다. 그리고 또 그렇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와 같은 정체성을 가졌으니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이 자기 기준으로 자신을 이렇게 저렇게 끌고 가고 심지어 십자가에 못 박으려 할 때에 순종할 것이다. 


즉 하나님께 세상을 바꾸어 달라고 기도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자신을 통하여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자기 삶의 영역에서 하나님의 의가 심령의 본성이 된 삶을 살아 하나님의 성품이 어떤지,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예수님과 같이 나타내는 삶을 살 것이다. 사람들이 세상이 잘못되었다고 기도하는 것, 자칭 신앙이 있다고 하는 이들이 더욱 그런 것은 자기 기준으로 하나님을 보고,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세상과 사람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 같으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것이다. 아니 오히려 하나님께 도전하고 하나님을 심판하는 것이다. “어이 하나님, 당신 정말 세상을 이 따위로 경영 할 꺼요?”라고. 그게 아니라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세계의 의가 된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경영에 무조건 옳다 할 것이다. 그 옳다함을 인하여 자기가 십자가를 질지라도. 그게 신앙이고, 세상을 구하는 것이다. 십자가 외에 세상을 구하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면 또 모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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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9-31) 그러면 믿음은 무엇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22. 15:05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는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에 있다고 답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렇다면 믿음이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런 원초적인 질문을 해 보는 것은 믿음의 행위와 믿음은 아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믿음으로 착각하고 있는 것이 바로 믿음의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 말입니다. 


기도가 율법이나 행위니 하지 말자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도를 해서 의로워지느냐? 아니면 의로운 사람이 기도를 하느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기도를 해서 의로워진다면 그 또한 바울 사도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는 행위에 속한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믿음이 있어 그것이 금하려 해도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는 것 중의 하나가 기도라면 이것은 믿음인 것입니다.


믿음이라는 대하여는 먼저 다음의 글을 참조하면 좋을 것입니다.

[평교인의 성경 보기/골로새서] - (골로새서) 1:2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


많은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믿음을 이야기 합니다.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 ‘믿음만 있으면 된다.’, ‘믿음이 있어야 한다.’와 같이 말합니다. ‘믿으니 되더라.’고도 합니다. 그런데 정작 <믿음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답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답하는 내용이라는 것이 믿음의 사전적 정의나, 아니면 좀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일과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 객관적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특히나 믿음에 대하여 많은 사람들이 크게 착각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신념>입니다. 이것은 매우 혼돈되어 사람들을 미혹케도 하는데, 이 혼돈이 믿음을 믿음의 행위로 둔갑시키기 때문에 아주 분명하게 할 이유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의심이 되고 불가능한 것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된다며 의지를 가지고 믿으려 애쓰는 신념과 의지를 믿음으로 크게 착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아들이 꼭 필요한 집에 아이가 잉태되었습니다. 그 가족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아들을 주실 것이라고 믿었기에 그 아이는 분명히 아들일 것이라고 믿고 성별 검사 같은 것조차 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출산하고 보니 딸이었습니다.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정말로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셨다고 믿었다면 그 가족들은 그 아이가 자라는 동안 성별이 바뀔 것이라고 믿어야 할 것이지만 딸아이를 보는 순간 그 아이를 아들로 주실 것이라고 믿던 믿음은 실망과 함께 버려 버립니다. 이런 것이 바로 믿음이 아니라 신념인 것입니다.


이 믿음과 신념을 구분하는 기준은 다음 아닌 능동과 수동의 차이라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은 아주 수동적인 것인 반면에 신념은 아주 능동적인 것입니다. “(골로새서) 1:2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에게”라는 위의 링크된 글에서 믿음이라는 것이 충성과 방향성만 다르나 그 본질적인 것은 같은 것임을 말씀드렸습니다. 


믿음이 수동적인 것이라는 것은 생소한 개념일지 모르겠습니다. 어려워하시는 분들이 많을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완전히 수동적인 개념입니다. 믿음이 수동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적인 관계에 기인합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라는 방향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되시고자 하시는 의를 가지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늘의 뜻이 땅에서 이루어지는 관계입니다.


또한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행함이라는 것,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하나님 앞에 자기 믿음을 보이려는 모습은 능동 그 자체입니다.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는 인정을 받겠다는 의지와 노력입니다. 그 행동 강령이 예수님의 말씀이라고 해도 그 믿음의 행위가 능동적이라는 것은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말씀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잘못 사용하고 믿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오류가 아니라 하나님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엄연히 주인이 있고, 주인의 의도가 분명한 세계를 자기가 다르게 해석하고 사용하고 또 믿고 관철시키려 하는 것은 명백한 도전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말씀을 지키고 있다는 것을 제사와 같이 보이고 드리는 것이 아닙니다. 괜히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제사는 사람이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니 능동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그 드리는 내용, 하나님의 의가 삶으로 나타나는 것을 드리는 것이 제사라는 것을 안다면 그 또한 수동적인 믿음의 세계요 순종의 세계입니다. 사무엘이 사울 왕을 책망한 것은 사울 왕 안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것을 드리려 한 것이 아니라, 제사라는 의식에 집착했기 때문입니다. 마치 오늘날 사람들이 기도해야 하나님께서 자기 삶을 보살필 것이라고 집착하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러한 것을 분명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의 다른 성경에서는 이런 말씀들을 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이 선하매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나니(딤전 4: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 진 것 같이 탄식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오직 덧입고자 함이니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게 하려 함이라(고후 5:4)

우리의 삶이라는 것이 하나님이 주신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 온전한 믿음이라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믿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의 의가 나에게 수용되는 세계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이 원하실 것이라는 착각 안에 있는 확신으로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님이 확실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들이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신앙 안에서 노력하는 행위가 성경에 기록된 것이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자신이 믿음 안에 있다고 믿고 그것이 믿음이라 생각합니다. 하지만 안타깝지만 그런 것은 전혀 믿음이 아닙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믿음은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믿음은 참으로 수동적인 것이고 순종적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무혈 입성할 수 있도록 사람이 가만히 그 운명을 맡기는 것입니다. 그것이 믿음입니다. 바로 그 믿음의 표상이 예수님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보이신 것이 다름이 아니라 순종입니다. 


이 예수님의 순종은 하나님께만 순종한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도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하는 이들이 예수님을 못 박는 것에도 순종하셨습니다. 그것을 이길 충분한 능력이 있음에도 그것에 순종하셨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마음으로 본다면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겠다는 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뜻일까 싶은데 그것에 마저 순종하였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입니다. 그 뜻이 말씀이 육신이 되신 그 육신으로 순종한 것입니다. 말씀이 육신이 된 육신으로 십자가를 물리치는 능력을 나타내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 것이 아닙니다.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려는 지금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바로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입니다. 이는 십자가라는 나무틀을 믿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의 마음과 운명이 바로 자신의 운명이고 인생의 정체성이며 자기의 삶이고 삼의 목적이고 의미라는 것을 순종하고 수용하는 것이 믿음입니다. 이러니 믿음은 100% 온전히 수동적인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성경을 능동적으로 지키는 모습으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이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는 것입니다. 이 순종과 이 믿음이 있으면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삶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야고보서에서 말씀하시는 행함인 것입니다. 이것이 분명하게 될 때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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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 맡은 관원장, 떡 굽는 관원장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0. 21. 18:15 Writer : 김홍덕

보디발의 아내가 유혹하는 유혹을 물리친 요셉은 억울하게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요셉은 여호와의 함께 하심으로 인하여 전옥(감옥의 장)이 감옥의 모든 일을 요셉이 맡기도 합니다. 그러던 중에 바로의 신하 중에서 바로의 술을 맡은 관원장과 떡을 굽는 관원장이 요셉이 있는 감옥(보디발의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래서 시위대장 보디발은 요셉에게 그 두 사람을 시중들게 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두 사람의 꿈을 꾸었는데 해석을 할 수 없어 근심하고 있을 때에 요셉이 꿈의 해석은 하나님께 있으니 자신에게 말을 하라고 합니다. 이것은 참 재밌는 말입니다. 꿈의 해석은 여호와 하나님께 있으니 자신에게 말하라는 것입니다. 해석이 하나님께 있으면 하나님께 말하라는 것인데 그것을 자신에게 말하라고 한다는 것은 요셉은 자기가 하나님을 대신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앞에서 요셉이 예수님을 상징하는 인물이라고 말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들 앞에서 아버지가 일하시니 자신도 일한다는 말씀과 같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말씀을 자주 하셨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말씀들은 단지 요셉과 예수님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상징하는 요셉이 하나님께 있는 해석을 들으려면 자신에게 말하라는 것과 예수님께서 <내가 아버지 안에, 아버지가 내 안에> 계신다고 하신 말씀은 결국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면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이유도 없고, 요셉의 일을 읽고 묵상할 이유도 없습니다.


하지만 오늘 이 글에서는 두 관원장에 대한 말씀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술 맡은 관원장이 꿈을 이야기하기를 자기 앞에 포도나무가 있었고 그 나무에 세 가지가 있고 싹이 나고 포도가 열렸는데 자기 손에 바로의 잔이 있기에 포도를 짜서 포도주를 만들어 주었다고 했습니다. 이 꿈에 대하여 요셉은 포도나무의 세 가지는 사흘이니 이후 사흘 안에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될 것이라고 해석하였습니다.


먼저 꿈을 이야기 한 술 맡은 관원장의 해석이 좋기로 떡 굽는 관원장도 자기 꿈을 이야기 하였는데, 흰 떡 세 광주리가 자기 머리위에 있고 그 윗 광주리에 바로를 위하여 만든 각종 구운 식물이 있는데 새들이 와서 그것을 먹었노라 하니, 요셉이 해석하기를 세 광주리는 역시 사흘이나 당신은 사흘 안에 목이 잘릴 것이고 새들이 잘린 머리에 앉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삼일 째 되는 날이 바로의 생일이라 잔치를 베풀었는데 요셉의 해석과 같이 술 맡은 관원장은 복직이 되고 떡 굽는 관원장은 목이 잘렸습니다. 


창세기 40장에 나오는 이 꿈 이야기를 대하노라면 우리는 “왜 술 맡은 자는 살고, 떡 굽는 자는 죽었는가?”하는 것이 가장 궁금합니다. 하지만 성경에는 그들이 무슨 이유로 옥에 갇혔는지가 없기에 단지 꿈 내용으로만 그것을 이야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쨌든 바로가 옥에 가두었다는 것은 바로의 뜻을 거역했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이 주인이신 하나님의 뜻을 거역했듯이.


이 두 개의 꿈은 모두 “맡은 자”의 꿈입니다. 그리고 또 주인이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다 바로를 섬기는 관원, 즉 바로가 자기들의 주인인 사람으로서 바로의 것을 맡은 사람입니다. 먼저 삼일 만에 복직된 술 맡은 자는 꿈속에서 포도나무를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포도를 짜서 포도주를 만들어 바로에게 드렸다고 했습니다. 성경에서 포도는 예수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과실입니다. 그러니까 포도주를 빈 잔에 채웠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채웠다는 것입니다.


빈 잔은 우리 인생의 정체성과도 같습니다. 성경은 우리를 빈 그릇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 잔은 바로의 것, 곧 술 맡은 자의 주인의 것입니다. 그와 같이 우리 인생들은 하나님이 주인이신 빈 그릇과 같은 존재입니다. 그리고 그 빈 잔에는 포도나무에 짠 포도주를 담았다고 하는 것에서 우리 인생의 내용을, 빈 그릇과 같이 허망한 우리 삶의 속을 그리스도로 채운다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 인생들은 누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빈 그릇과 같은 자기 인생에 채워 주인이신 하나님께 드리는, 산제사를 드리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맡은 자로서 사는 법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삼일이라는 것은, 성경에서 숫자 3은 하나님의 수입니다. 그래서 삼일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의 세월이 지나면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비슷하지만 떡 굽는 자는 삼일 뒤에 목이 잘리게 됩니다. 머리를 잃어버린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당연히 죽었다는 것이고,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술 맡은 자는 주인의 빈 잔을 가지고 있었지만 떡 맡은 자는 이미 바로를 위하여 구운 떡이 이미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주인을 위하여 구웠지만 주인이 아닌 새들이 먹었다고 했습니다. 그것은 그 구운 것이 주인의 음식이 아니라 짐승들의 음식이라는 것입니다. 새가 먹었으니…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인생을 맡은 자들입니다. 그리고 이 인생은 그릇과 같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빈 그릇입니다. 주인이 있는 그릇이 비었다는 것은 곧 주인을 위하여 채워지기 위하여 비었다는 의미입니다. 고로 이 그릇에는 주인이 원하는 것, 주인을 위한 것을 담아야 합니다. 이 잔, 이 그릇은 주인을 위한 것을 담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원하는 것을 담을 때 온전한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하여 무언가를 하려고 합니다. 떡을 굽듯, 자기 인생을 연단하여 드리려고도 합니다. 바벨탑을 쌓은 사람들이 벽돌을 만든 것처럼. 하지만 빈 그릇인 우리 인생들은 그 빈 잔, 빈 그릇에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채워야 합니다. 인생은 하나님께서 거하시기 원하십니다. 인생은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그릇에 하나님이 계시므로 이 그릇을 보고 하나님이라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나님이 나타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그릇의 존재 목적입니다. 그리고 이 그릇에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대로 하나님의 영이 하시는 사람이 되면 그 인생을 <그리스도>라고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 주인의 잔치에 참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관원과 같이 우리는 다 우리 주인의 뜻을 어겨 옥에 갇힌 자와 같은 죄인입니다. 이 죄인의 자리에서 벗어나려면 그릇과 같은 우리 인생을 하나님을 위한 것을 채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에게 원하시는 바 하나님의 성품을 채우는 것, 포도를 짜서 나오는 포도주와 같은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채울 때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렇듯 이 두 관원장의 이야기는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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