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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과 새로운 법에 대하여 말씀해가고 있는 바울 사도는 율법은 사람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을 알게 한다고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모든 사람이 다 죄를 범하였다고 이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사람은 다 율법 아래 있었다는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 3:23)


앞에서 우리는 율법이 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은 율법이 사람을 정죄하기 때문이 아니라, 율법을 아무리 지키려고 해도 사람의 육신으로 그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드러난 행동양식에 관한 말씀인데, 그것을 거꾸로 율법을 행동양식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율법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는 것은 단순한 실수나 무지함 같아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의 의와 법과 방향에 따라 하지 않고, 자기가 생각하는 대로 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의롭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선악과를 먹고자 한 마음인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하나님과 같이 되라고 만든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 곧 이미지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한 형식으로 지음 받은 존재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의 존재 목적이자 육신의 삶의 본질이고 내용이고 의미며 의(義)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지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같아진다는 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얼핏 같은 것처럼 보이지만 전혀 다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아진다는 것은 사람도 하나님이 하시는 권능을 가지게 된다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들이 사람이 할 수 없는 신비한 능력을 행할 수 있으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바로 그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사람은 콜라가 콜라병에 담겨 하나가 되듯,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가 육신을 가진 사람과 하나가 되어 사람의 육신이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또 그 삶이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드러내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가 되는 것과 하나님 같아지는 것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두 정체성에 있어 하나님이 정하신 사람의 정체성을 사람이 버리고 오직 하나님만이 서하신데 사람이 어떤 것은 선하고 어떤 것은 악하다고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고 그 기준으로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 규정하고 주장하는 생각과 안목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특히 사람, 육신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하나님과 다른 안목을 가지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모든 죄와 잘못된 신앙의 뿌리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는데 어떤 인생들은 이 사람이라는 존재를 부끄럽게 여겼습니다.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아담이 그런 인생입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의 뜻은 다름이 아닌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죄인이 되었다는 것이나,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다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의 기준으로 인생을 부끄럽게 여겼기에 그것을 가리려고 무화과 나뭇잎, 곧 율법으로 자신을 감추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잘 감추어지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그 감추어진 외모를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이 사람의 모습이 얼마나 참담합니까? 하나님을 바보로 알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렇게 할까 싶은데 모든 사람이 그러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육신을 부족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다면 이미 하나님은 실수하는 신이고, 뭔가 엉성하게 만드시는 하나님이라고 비난하는 것과 같습니다. 또한 육신이 인생을 살아가는 모습이 그저 부족하기만 하다면 하나님은 자기 실수를 방관하는 방관자일 뿐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죄인이 아니면 도무지 누가 죄인이란 말입니까?


사람이 온전하시고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이 육신을 가진 삶을 스스로 부족하게 여겨 어떤 노력과 행함으로 그 부족함을 메우려 하는 것이 율법입니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을 경멸하는 죄인들인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율법이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행함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닌데, 율법이 왜 필요하겠습니까?


그래서 행함으로 율법을 지켜내려 하면 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의롭게 되려는 세계 안에 있으면 그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것을 알게 되면 자신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를 떠나서 반대방향에서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 자기가 하나님께서 만드신 이 인생을 하나님의 목적대로 보지 않고 자기 기준으로 보면서 ‘부족하다!’ ‘부족하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말하며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을 부족하게 여기는 것은 다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가리기 위하여 율법 곧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려 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무화과 나뭇잎이 아닌 어린양의 대속으로 옷 입히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으로 죄를 개달은 사람들에게 새로운 법이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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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깨닫게 하는 것은 사람의 무능을 나타내기 위함이 아닙니다.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하는 것은 또 다른 하나님의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복음이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입니다. 이 또 다른 하나님의 의에 대하여 바울 사도는 <율법과 선지자들에 의하여 증거를 받은 것>이라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증거를 받은 것이라(롬 3:21)


증거라는 것은 어떤 약속이나 보이지 않는 의가 있다는 것에 대한 증거입니다. 믿음장으로 유명한 히브리스 11장을 보면 증거와 약속이라는 것이 반복적으로 나옵니다. 히브리서 11장에 믿음의 많은 선진들이 증거를 받았지만 약속을 받지 못하였다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과 지금 이 로마서의 말씀은 아주 연관성이 있습니다.

이 사람들이 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증거를 받았으나 약속은 받지 못하였으니(히 11:39)


영화나 사극에서 보면 패물이나 칼 같은 것의 반쪽을 가지고 나머지 반쪽을 가진 사람을 찾는 장면이 간혹 나옵니다. 그런 장면이 시사하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니라, 각각의 반쪽을 가진 사람 사이에는 어떤 약속이 있었는데 서로가 그 약속을 하였고 지킬 것이라는 증거로서 반쪽이 된 증거물을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약속이 본질이고 가지고 있는 증표는 그 약속의 증거인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되면, 율법을 행함으로 지켜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한 모든 것이 무산되었으니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을 인정받을 법이 없어진 상황에서 주시는 새로운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그 법이 율법과 선지자들에게서 나타났기에 율법과 선지자들은 바로 그 새로운 법의 증거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 의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나타나는 모든 행위 규범과 사람이 지켜내는 행동 양식은 본질이 나타나는 증거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나님 의의 본질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나타나는 모든 행위 규범과 사람이 지켜내는 행동 양식은 본질이 나타나는 증거와 현상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입니다. 이는 마치 전투기에 조종사가 탑승하는 것과 같습니다. 모든 행위 규범의 본질, 그 모든 행위 규범으로 나타나는 본질적인 의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신으로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약속이고, 율법과 선지자들의 모든 것은 그 약속을 증거하는 부러진 칼과 같은 증표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과 선지자는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곧 예수님이 표현된 것이고 형식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은 그 자체로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몸으로 이행해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모든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라는 것은 예수님이 본체이고, 그 본체(질)가 드러나는 것이 바로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려고 하면 죄가 드러나는 것은 하나님의 법과 방향성과 반대인 방법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라고 자신이 믿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법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대로 ‘이것이 옳다.’라는 자기 의를 가졌다는 것이 드러난 것입니다. 하나님의 것을 자기 맘대로 주장했으니 당연히 죄인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으로 자기 죄가 드러났다는 것은 전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 됩니다. 율법 곧 본질이 아니라 본질이 나타난 증거를 몸으로 지켜 행하여 의에 이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사람은 바른 것을 알았기에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거나 적어도 이것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옳은 것을 알게 된 사람은 그것이 새 법이고 본질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그것이 아니면 최소한 옳은 것이 있다는 것을 알았고 그것을 알고자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은 육신으로 어떤 법을 지켜낸다고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은 법을 지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법이 자기 안에 있어서 표현되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증거란 약속, 눈에 보이지 않는 그 약속이 본질인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그 새로운 법인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차별>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육신은 그 모양도 능력도 혈통도 지식도 재산도 다 달라서 육신으로 어떤 기준을 삼는다는 것은 그 자체가 근원적으로 차별을 동반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차별이 없다는 것은 외모나 육신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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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으로 사람이 죄를 알게 한다는 것은 쉬운 표현으로 한다면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노력하다 보면 그것이 되지 않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면 분명히 그 사람은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의로워지는 것에 실패했으니 당연한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는다는 것의 본질적인 의미는 사람이 자기 안에 있는 법을 육신의 행동으로 지켜서 의에 이르는 세계에 있다는 것이 바로 죄의 상태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서 의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안 된다는 것, 곧 그것은 자기 정체성과 자기 존재의 목적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많은 경우, 너무 많아서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많은 경우 행동으로 의에 기준을 만족하기 위하여 노력하다가 되지 않으면 다 자신의 부족함이라 여겨 더 매진합니다. QT도 더 열심히 하고, 기도도 더 열심히 하고, 헌금도 더 많이 하려고 하며, 자기 안에서 나오는 각종 생각들을 잊기 위하여 허벅지로 바늘을 찌르듯 자기를 늘 각성시키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깨어 있는 것이라 생각하고, 또한 그런 모습이 신앙인의 모습이고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고 서로 격려하며 설교합니다.


하지만 미운 오리 새끼 이야기를 생각해봅시다. 백조인 미운 오리새끼는 많은 노력을 했지만 결국 오리가 되지 못했습니다. 그가 오리처럼 되지 못한 것이 노력이 부족해서일까요? 아닙니다. 근본적인 자기 정체성이 오리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가 의롭게 여기는 기준을 스스로 세우고 그것을 지켜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생각하면서 노력하지만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실 때에 그 육신의 능력으로 의롭게 되는 존재로 지으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그렇게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그 노력하는 의에 기준이 성경말씀이면 그것은 옳은 신앙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아주 미혹하는 것입니다. 마귀가 아담을 미혹할 때도 하나님을 언급했지 바알을 언급한 것이 아니고,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 성경을 지키지 않아서 그렇게 책망 받은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또한 지금 많은 교회들이 성경은 고사하고 상식적으로도 어이없는 일들을 하면서 모두들 ‘주의 일’을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영화 <밀양>에 나오는 유괴 살인범처럼 말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주신 것은 ‘성경대로 행하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가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인데, 성경을 가지고서 행동 지침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자신이 하나님 앞에 온전치 못하므로 의롭게 되기 위하여 뭐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중에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을 지키면 되겠지?’라고 생각을 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대하여 생각해보면, 성경은 <예수님(예수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은 누구인가?(어떤 존재인가?)>를 설명하는 하나님의 말씀이지, <예수 그리스도 제조법>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성경대로 살아서 예수님과 같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생명을 가진 사람은 예수님이 보이신 대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너희도 나처럼>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서 어떻게(How)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가를 생각하면서 읽고 그 방법을 찾아 지키려는 신앙은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제조법으로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교회에 와서는 너무나 하나 같이 “어떻게 할까요?”를 묻는 것입니다. 목사들도 입만 떼면 “이렇게 해야 한다. 저렇게 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 질문과 설교가 뭡니까? “성경을 어떻게 지켜내면(How to do?) 의로워지는가?” 아닙니까?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늘 <How(어떻게)>가 아니라 <‘Who’ or ‘What’(너는 누구냐?, 나를 누구라 하느냐?)>를 물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가 관심이 있으신 분이 아니라 사람이 자기를 어떤 존재로 보느냐만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여호와> 곧 ‘존재의 신’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런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행위로 의로워지려고 하는 것이 바로 율법의 신앙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될 리가 없는 것입니다. 미운 오리새끼가 오리가 될 수 없듯이.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는다는 것은, 

  1. 먼저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 것이고, 

  2. 그렇게 율법을 아무리 지켜도 의롭게 되지 못한다는 것은 자기 존재가 그것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며,

  3. 자기 존재가 그것이 아닌데 그렇게 행위로 의롭게 여김을 받으려 하였다는 것이 바로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떠난 죄의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이 그렇게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 이제 새로운 세계, 곧 새로운 법이 자기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믿음의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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