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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를 마칩니다)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24. 07:00 Writer : 김홍덕

창세기는 세상이 시작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창세기를 이 우주만물의 시작, 그 물리적인 시작에 대한 말씀으로만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이 창세기는 그것을 말씀하시고자 우리에게 주신 책이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창조하신 것은 분명하지만 하나님이 그것을 역시나 자신의 피조물인 사람들에게 공치사나 하시자고 이 책을 주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세계, 한 사람에게 이전에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세계가 시작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천지창조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하여 말씀하신 책입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고서 ‘이 세상의 물리적 시작을 고찰하고, 이 신비한 우주를 창조하신 이가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에 그친다면 참 아까운 일입니다. 1억을 주고서 커피 한잔 사 먹은 꼴보다 못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창세기의 시작이 물리적 세상의 시작이라고 말하기에는 당장 창세기 1:2절만 해도 혼돈스럽습니다. 아직 빛도 창조되지 않았는데 땅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비단 그것이 아니라도, 물리적으로 어떤 시점을 시작으로 본다고 할 때 그 시작 전에 시간이 없었던 것이라고 이해하는 것은 어렵기 때문입니다.


이 창세기는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의 이야기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이 천지만물이고, 또 하나는 하나님에 관한 세상입니다. 이 두 번째 세상은 우리 사람들 사회에도 많이 있습니다. 컴퓨터의 세계, 인터넷 세상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어떤 안목과 관점, 그리고 가치관으로 모든 것을 조명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세계 역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보는 안목과 특히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서의 자기 자신의 존재 목적과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세계입니다. 창세기의 핵심은 바로 그 세계인 것입니다.


물리적인 세상이 언제 시작되었는지? 또 아담의 죄가 어떻게 나에게 유전되었는지? 와 같은 문제들은 성경의 형식만 보는 관점입니다. 책과 말 그리고 언어와 글자는 그 표현된 형식이나 문자가 본질이 아닙니다. 핵심은 그렇게 표현한 의도인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죽자는 이야기가 아니듯이 성경 창세기도 물리적인 세상의 시작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한 개인이 육신으로 나서 하나님을 바로 알지 못하고 살거나 자기가 가공한 하나님을 믿다가 온전한 하나님을 만나서 공동체에 대하여 자신이 인정할 수 있는 안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에 대한 하나님의 의와 경륜이 표현된 책이 바로 창세기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창세기를 대하는 올바른 자세는 객관적 사실로 믿는 것이나, 물리적 세상의 이야기나 또 혹은 아주 어리석게 이스라엘의 역사에 관한 것이라고 읽고 공부하고 이해했다면, 더 나아가서 그렇게 창세기를 껍질로만 보는 안목으로 하나님을 믿는 목적이 이 세상에서 성공하고 복 받는 것이라는 관점으로 아브라함이 이삭이 또 야곱이 어떻게 부유하게 되고 인생의 위험을 이겨 내었는지와 같은 것으로 본다면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하려면 바다에 빠져야 한다고 이해한 것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입니다.


성경 창세기는 야곱의 식솔들이 애굽에 정착하게 되므로 끝이 납니다. 그리고 성경은 그 애굽에서 이스라엘 백성들들이 종살이를 하게 되므로 그 고통이 심하여 하나님께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나타나서 출애굽하는 과정을 말씀하십니다. 이 과정은 창세기와는 또 다른 관점입니다. 창세기는 한 개인과 족장의 시대였다면 출애굽기는 민족과 나라의 시대이고, 창세기에는 율법이 없었지만 출애굽기에는 율법도 주어지고 심지어 출애굽 과정에서 걸어가는 대형조차 규정된 책입니다.


그렇게 이어진 출애굽기는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와 같이 하나님의 율법이 체계화되는 과정을 거쳐서 가나안 땅에 이르러서야 아브라함에게 또 야곱에게 약속하신대로 큰 민족이 되어 나라를 이루게 되는 과정을 보이십니다. 이러한 장대한 여정을 우리에게 성경으로 주신 것은 하나님의 의가 한 개인에게 새로운 세계 곧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는 시작으로부터 그런 사람들과 또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수용해가는 안목을 가지므로 공동체로서 살아가는 안목과 심령과 순종하는 마음을 주시는 여정을 말씀하심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의가 이 땅에서 나라가 되기를 하나님이 바라시기 때문입니다. 나라라고 하니 어떤 정치적인 색채를 띤 조직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그것이 아닙니다. 나라는 의가 다스리는 곳입니다. 민주주의든 공산주의든 어떤 의가 있고 그 의에 자신의 삶을 맡긴 사람들이 모일 때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하나님께서 열어주신 하나님의 세계, 곧 창세기의 모든 말씀이 자신의 삶이 된 사람들이 모여서 자신들을 그렇게 이끄신 하나님의 의를 서로 나누므로 하나님의 의가 영광을 받는 세계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 어떤 지역을 차지하고 설립되는 나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믿는 사람들의 공동체입니다. 따라서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 영토를 가지고 국가와 같이 되는 것이 아니듯 교회도 반드시 어떤 건물과 형식으로 모여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에 자신의 삶의 목적과 의미를 두는 사람, 그들이 인생으로서 취할 수 있는 방법들 중에 삶의 조건과 형편에 맞게 모이고 하나님의 의를 나누고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구하는 곳이 바로 교회고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그래서 이 창세기를 끝내면서 이제는 많은 경우 하나님의 나라 교회에 대하여 이야기를 해 나갈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창세기, 곧 자기 신앙과 삶에서 하나님의 세계가 열린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어느 듯 그런 분들을 자주 만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블로그도 개인의 시대에서 적지 않은 글에서 교회와 나라와 공동체의 글을 포스팅할 예정입니다.


이제, 이번 글을 끝으로 창세기에 대한 포스팅을 마칩니다. 창세기에 대한 첫 번째 글이 2013년 5월이었으니 3년이 넘는 세월 동안 올린 글이 오늘로 224번째입니다. 천지창조와 선악과에 대하여 많은 부분을 할애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최근에 서울에서 천지창조에 대한 말씀을 가지고 모임을 했었는데 3일째 정도까지 했었습니다.


창세기 다음으로는 구약성경의 한 권을 선택해서 계속 포스팅을 할 예정입니다. 책이 정해질 때까지는 <십계명>에 대한 포스팅을 완료할 계획입니다. 그간 저의 글을 꾸준히 구독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리며, 특히 저의 글을 통하여 하나님의 세계를 새롭게 보는 안목이 열리신 분들이 계셔서 큰 영광으로 여깁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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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11) 그리스도와 함께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3. 07:00 Writer : 김홍덕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은 그리스도와 같은 정체성을 가지는 것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것은 신앙 안에서 아주 의미 있는 말입니다. 그것은 신앙이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항상 그래야 하고, 또 그것이 모든 신앙의 기본과 또 전부라고 할 수 있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예수님께서는 이미 2,000여 년 전에 부활하셔서 승천하고 계시지 않는데 어떻게 함께 할 수 있을 것일까요? 이런 질문은 어떻게 보면 어리석은 질문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라는 것이 ‘예수님의 육신과 함께’라는 것이 아닌 것은 너무 상식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육신의 어떤 것을 구하는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양면성을 가지고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을 빼면 말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육신과 함께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예수님과 본성이 같고 정체성이 같다는 것입니다. 하늘을 나는 비행기에서 기내식으로 주는 사과는 과수원에서 재배되고 있는 사과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사과 한 알이 떨어져 있어도 그 사과는 사과와 함께 하는 것이고, 사과 안에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와 같이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것 역시 그것입니다. 예수님이 보이신 모습과 내 삶의 본질이 같다고 인정이 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있고 예수님 안에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예수님과 합하여(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 받았다는 것이 예수님과 같이 죽었다가 살아났다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이 바로 나의 죽음이고 예수님의 살아나심이 바로 나의 사건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신앙인들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는 것은 당연한 믿음의 과정이고, 예수님의 죽고 살아나심으로 자기가 구속을 받았다고 여기는 것은 신앙의 보편적 교리와 같이 여기지만 그렇게 그 보편적 교리와 같은 일이 자기의 사건이 되려면 절대적인 조건이 충족해야 한다는 것을 간과합니다. 그것이 무엇이냐 하면 자신도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것과 같은 죄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하고, 또 그 죽은 자리에서 살아나는 것이 자신의 것이 되려면 예수님과 같이 죽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과 같이 죽으려면 당연히 예수님과 같이 사형수가 되어야 하고, 또 그 죽는 죄목이 같아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예수님의 죽으심과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는 것이 드러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죽고 살려면 예수님과 같은 죄인이 되어야…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공하려는 마음이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신앙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신앙은 단지 일부의 신앙이 아닙니다. 거의 대부분이라고 할 수 있는 신앙인들이 하나님께 육신의 일을 구하고 있습니다. 말로는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한다고 하지만 결국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속내를 감추지 않습니다.


앞에서 예수님과 같이 죽고, 예수님과 같이 사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삶을 살려고 한다면 예수님이 죽으셨던 이유가 자기에게도 있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어떤가요? 예수님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죽으셨나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죽어야 하는 사형수였습니다. 그래서 그 당시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는데,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 예수님과 함께 죽고 예수님과 같이 다시 산다는 것이 자신의 일이며, 그 예수님의 정체성에 자신이 속했다고 주장하는 것을 어떻게 봐야할지 모르겠습니다. 그럴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롬 6:5)


그의 죽으심에 연합하려면 당연히 예수님께서 죽으실 수밖에 없으셨던 이유가 내 안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나의 삶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인이라는 것이 인정이 되어야 하고, 나의 정체성은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힐 수밖에 없다는 것이 인정되어야 비로소 예수님의 죽으심에 연합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세상의 일, 사업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서 도우신 은혜고 영광이며, 세상의 방식대로 경쟁한 시험이나 경쟁에서 이기게 하심도 하나님의 영광이며, 그렇게 영광을 돌리게 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며 하나님께 그렇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신앙이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한 신앙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더 어이없는 것은 하나님께 자신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사람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기도할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면 들어주실 것이라고 믿고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자신의 것이라는 증거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사람 지으신 목적 안에 들어가는 것



예수님과 함께,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예수님과 그 삶의 정체성이 동일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죽으실 수밖에 없는 정체성을 가지셨는데, 예수님과 함께, 또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사람들이 이것과는 반대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여기는 것은 정말로 어이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우리 주변에 있는 기성교회의 기본 신앙이 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진정으로 예수님과 함께 하는 존재가 되어 예수님의 죽으심과 또 살아나심에 참여하는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이유가 자기 정체성이 되어야 하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인생의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아멘’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당연히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죄인과 같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죄인이 된다는 것은 결국 섬기는 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패한 자요, 패한 자는 종이 되어 섬기게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정체성이 나의 정체성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예수님이 사형수가 되심과 같이 우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의 가치고나 앞에 패한 자가 되어 남이 하지 않는 육신의 수고를 감당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될 때 우리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 무엇인지 알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렇게 하나님 아들의 모습을 사람들이 알게 하는 것, 그것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그 목적 안에 거하는 것은 우리가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의 삶을 보고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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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 후반부에 아주 감동적인 고백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 아닌 야곱이 바로 왕 앞에서 한 고백입니다.

야곱이 바로에게 고하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일백삼십 년이니이다 나의 연세가 얼마 못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세월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창 47:9)


이는 요셉의 가족들이 애굽 왕 바로 앞에서 문안할 때에 바로 왕이 야곱의 나이를 물은 것에 대한 야곱의 고백입니다. 사람에 따라서 그 느낌이 다르겠지만 나름 신앙의 여정을 보낸 사람들이 읽으면 뭔가 애잔한 마음이 들게 하는 고백입니다.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야곱의 삶은 정말로 그러했습니다. 출생부터 쌍둥이 형 에서와 다툼을 했으나 이기지 못했고, 장자의 권한을 빼앗고자 아버지를 속이기까지 했지만 기껏 얻은 것은 이삭의 재산이 아니라 하늘의 이슬과 포도주 즉 하나님의 의를 얻을 뿐인데 형에게 쫓겨서 돌베개 베고 자고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도망가서 아내 라헬을 얻기 위하여 7년을 수고했으나 라반이 속이고 레아를 주어 또 7년을 일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부유케 되자 라반의 아들들과 다투고, 그리고 다시 본토 아비 집으로 죽을지도 모르는 여정을 떠나고, 그 마지막에 천사와 싸워 환도 뼈가 부르지는 일도 모자라 자신의 아들들이 그 형제를 팔아버리고 아비인 자신에게 죽었다고 하는 일에 이르기까지 험난한 세월을 보낸 야곱이었습니다.


그런 야곱의 여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결국 오늘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 곧 이 땅 위의 하나님 나라인 교회를 온전히 누릴 수 있는 심령을 가진 사람이 되기까지의 여정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즉 우리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결국 야곱이 보내는 그 험난한 세월 역시 우리의 세월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야곱의 여정이 다른 곳이 아닌 애굽에서 끝이 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의를 좇아서 산 세월, 하나님께서 후손으로 민족을 이루시겠다는 약속을 믿고 살아온 삶의 여정과 세월을 자신의 후손들이 어떤 나라를 이룰 수 있도록 비옥한 땅을 얻어서 정착하는 것으로 끝나지 않고, 인생 말년에 기근에 힘들어 하다가 결국은 애굽으로 이주하는 삶을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애굽으로 들어가게 된 야곱 곧 이스라엘 백성은 애굽으로 가서 그곳에서 정착하여 살다가 그 수가 너무 많아지므로 오히려 세상과 같은 애굽의 사람들이 이를 두려워하여 종으로 삼고 그 종된 세월을 이기지 못하여 하나님께 신원하므로 하나님께서 애굽에서 구하여 내시는 출애굽의 역사로 이어집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어차피 애굽에서 건져 내실 것이고, 또 이스라엘의 후손으로 큰 민족을 이루실 것이라면 애굽이 아닌 야곱에게 기근을 이길 기적을 주셔서 처음부터 가나안으로 안착하시게 하시면 될 텐데, 그랬다면 아들 요셉이 그 고생을 하지 않아도 되기도 한데 왜 이런 힘든 여정을 거치게 하셨을까요? 비슷한 여정으로 출애굽을 할 때 광야를 40년이나 거치도록 하셨을까요?


창세기, 그리고 아브라함에서 야곱까지의 여정은 왜 성경에 있는 것일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라면 이것은 남의 나라 신화나 역사 정도의 가치 밖에 없을 수 있고, 창조론도 진화론과의 논쟁에서 압도적으로 인정받는 것도 아닌데 왜 우리는 이 성경을 대하고 있는 것일까요? 그냥 단순히 남의 나라 이야기 속에 나오는 기적을 일으키는 신의 능력을 믿어 나도 그 능력의 도움을 받으려고? 아니면 상식적으로 믿기 힘든 내용을 믿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라서?


우리가 성경을 읽는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닙니다. 성경의 내용이 정말로 일어난 실제적 사건이라고 그 객관성을 믿는 것이 믿음이라면 사람은 어느 한 구석 의심을 하게 됩니다. 단순합니다. 자기도 그렇게 해 보면 됩니다. 물 위를 걸어보면 됩니다. 예수님이 나도 예수님과 같아진다고 하셨으니 해 보면 됩니다. 될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남의 병은 고사하고 자신의 두통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로, 공동체의 신앙으로



야곱의 여정은 하나님의 나라로 가는 여정을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여정에 관한 것이고, 한 사람이 하나님 나라의 일원 곧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다스리는 것에 동의하게 되기 위해서 그 사람 안에 있는 어떤 것들이 하나님의 경륜으로 처리되어야 한다는 것을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에서 야곱에 이르기까지 그 여정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여정, 한 개인으로서의 여정을 마치고 민족과 나라로서의 여정으로 전환하는 시점이 바로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는 시점입니다. 생각해보면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는 천지창조의 시작 전에 땅이 혼돈하고 흑암이 깊음 위에 있다고 했습니다. 즉 하나님도 인생의 목적도 알 수 없는 자리에게서 시작해서 아브라함과 야곱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이제는 한 개인의 신앙이 아니라 공동체의 신앙으로 전환되려 합니다. 창세기가 한 개인의 자아 안에서 시작되는 하나님의 세계에 대한 말씀이라면,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로 이어지는 말씀들은 한 개인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 민족의 이야기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개인으로서 하나님을 만난 사람이 이제 자기 외에 다른 사람과 함께 하나님을 만나가는 과정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다른 사람과 함께 신앙의 여정을 떠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렇게 많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함께 누리는 곳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즉 개인이 하나님을 만나는 시대에서 하나님의 나라에 속하게 되는 안목을 가지게 되는 여정으로 업그레이드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제는 사람이 단체로 신앙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을 한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공동체에 대한 안목이 열리는 것, 하나님은 믿는 신앙이란 너무나 다른 사람들을 서로 수용해가면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해서 그 다름을 서로 섬기면서 가는 것이라는 것이 열린 안목으로 전환되어 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야곱이 한 개인으로서 또 족장으로서 하나님의 경륜의 여정을 마치는 곳은 세상의 가치관이 의가 되어 다스리는 나라 애굽이었습니다. 이것은 한 사람이 하나님을 만나서 하나님 나라의 의를 보게 되는 세계로 전환되기 위해서는 세상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혼자서 굴속에서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죄를 짓지 않고 하나님을 잘 섬길 것 같지만 그 반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인생들이 서로 의지하게 살도록, 그리고 또 이 땅위에 하나님의 의가 다스리는 나라 곧 공동체에 이르기까지 경영하시는 뜻을 가지신 분인데, 단지 자기가 죄를 짓지 않으려고 사람과 세상과 접촉을 끊고 고고한 듯 홀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은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악이라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수도원이나 신부나 수녀 그리고 또 외딴 곳에 거할 곳을 짓고서 그야말로 서로 용납할 수 있는 사람들만 모여서 서로가 마음에 죄를 일으킬 수 있는 행동을 하지 않기로 규율을 정해서 그것을 지키려고 혼신의 힘을 다하는 신앙은 대우를 받을 것이 아니라 회개가 필요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교회가 세상과 등을 지려하는 것 역시 같은 것입니다. 


신앙을 가진 사람이 세상 사람과 함께 있으면 죄를 지으니 가급적 거리를 두고 살아야 한다면 그 사람의 신앙이 온전한 것입니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에게 휘둘리는 정도로 빈약하고 허약한 것입니까? 그렇게 휘둘린다는 것은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하는 것이지 세상과 어울려 살기 때문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이라는 것, 그리고 오히려 세상에 가서 종살이하듯 그들을 섬겨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의 여정이 애굽에서 마친 것은 민족으로서의 새 세계의 시작을 위한 경륜



야곱으로 인하여 애굽에 들어가게 된 이스라엘 민족은 그곳에서 처음에는 대접 받는 삶을 살지만 그 수가 많아지고 출산하는 능력이 애굽사람보다 월등하여 그 수가 많아지자 애굽의 두려움을 사게 되어 애굽 사람들이 이스라엘 민족을 종으로 삼고 노역을 시키게 됩니다. 그리고 그 노역이 가중되자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께 간구하므로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약속하신 것과 같이 애굽에서 올려지는, 즉 출애굽의 역사를 이루시게 됩니다.


이는 천지창조의 때에 셋째 날에 세상의 모든 물이 한 곳으로 모이므로 땅이 드러나듯, 하나님의 백성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드러나게 되는 여정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야곱이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어서 시작되는 또 다른 여정, 애굽에서 시작되는 여정은, 또 하나의 창세기와 천지창조와 같습니다. 


성경 창세기의 천지창조가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사람이 나오는 여정이라면 출애굽은 민족으로, 하나님의 나라로 시작되는 세계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개인의 신앙 여정의 상징인 야곱의 여정이 애굽에서 끝이 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훗날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이라고, 그 이후는 민족이 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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