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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과 아스닷(이방인 아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15. 07:00 Writer : 김홍덕

이번 글에서는 요셉의 아내 아스닷에 대한 이야기를 좀 해 볼까 합니다. 요셉의 아내 아스닷은 창세기 41장에서 므낫세와 에브라임 두 아들을 낳았다는 기사 외에는 성경에 달리 언급되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런데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하는 것은 그녀가 이방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방인 아내를 취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보통 좋아하지 않으셨는데 이 요셉은 그 이방인 아내에게서 난 아들이 이스라엘 지파가 되고 에브라임은 후에 북왕국의 왕족이 됩니다.




에서는 안 되고, 요셉은 괜찮다?



요셉의 아버지인 야곱의 형 이삭의 장자 에서(창 26:34)도 이방인 아내를 취했습니다. 이삭과 아내 리브가는 그 아들 에서가 이방인 아내 취한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습니다. 야곱은 에서의 동생인데 그 일을 모를 리 없습니다. 그런데 야곱 곧 이스라엘은 나중에 자기에게 손자가 되는 므낫세와 에브라임을 자기 양자로 삼기까지 합니다.


그렇다면 왜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취한 일로 좋지 않은 결과를 얻게 되고,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요셉은 이방인 아내, 그것도 애굽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았는데, 그 사이에서 난 아들들이 이스라엘 왕국의 지파로 편입되는 영광을 얻게 되었을까요? 특히나 애굽 제사장이라면 태양신이나 바알을 섬기는 신앙을 이끄는 제사장이고 그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단순히 이방인 여자 이상의 의미가 있을 텐데 말입니다.


요셉은 아내를 스스로 취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로의 꿈을 해석하므로 총리대신이 되면서 바로 왕이 그 나라 제사장 보디베라의 딸 아스닷을 아내로 주므로 혼인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강제로 결혼한 것이라고 하기는 어려울지 모르지만 요셉이 결혼을 하겠다는 뜻을 비친 것도 아닌 상태에서 바로 왕이 일방적으로 혼인하게 한 것입니다.


반면에 에서는 자기가 가서 자기가 좋은 대로 이방인 아내를 취하므로 그 부모 이삭과 리브가가 근심하였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선택한 사람 이삭의 염려는 곧 하나님의 염려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에서는 자신의 의를 가지고 이방인의 아내와 결혼했다는 것입니다. 즉 자기가 스스로 생각하기를 그래도 좋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결혼은 남자 안에 있는 의를 여자를 통해 표현하는 것



결혼이라는 것은 <내용과 형식>이란 주제로 쓴 글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남자는 내용인 의를 의미하고 여자는 그 의를 표현하는 형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남자와 여자가 결혼을 하여 아들을 얻으면 그 성을 남편의 성을 따릅니다. 생각해보면 아이는 여자가 임신하고 그 몸에서 자라다가 여자가 낳는데도 그 성을 남자의 성을 따릅니다. 그리고 그 아이는 남편 집안의 아이가 됩니다. 즉 남편의 혈통으로 대표되는 의, 그 내용이 여자인 아내를 통해서 표현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의가 사람의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또 그리스도가 신랑이 되시고 교회가 또 성도가 신부로 말씀하시는 것 역시 같은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혈통, 즉 그리스도의 정체성과 본성과 성품이 각 사람의 육신 가진 삶으로 표현되고, 그 사람들이 모인 교회 역시 그리스도의 성품을 표현하는 곳이기에 그리스도는 신랑이 되고 교회와 성도는 신부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에서도 요셉도 그 본성 안에 있는 정체성이 그 아내를 통하여 아들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에서는 이방인 아내를 스스로 선택했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가진 신앙 정체성이 세상의 형식을 통해서 자신이 가진 의를 표현해야겠다고 여겼다는 것입니다. 마치 오늘 날 교회가 세상의 법칙인 경쟁의 방식에서 성공한 사람을 목사로 청빙하고 또 장로로 선출하는 것을 의롭게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지만 요셉은 좀 다릅니다. 요셉이 이방인 아내를 얻은 것은 자기의 의가 아닙니다. 바로가 주선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상세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좀 추측해 본다면 바로가 자기 통치를 위임하는 사람에게 여러 가지 면에서 부족한 사람을 아내로 주지는 않았을 것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상황이 요셉은 약간의 시차가 있었을 수도 있지만 옥에서 막 풀려난 신분인데 바로 왕이 주선하는 것을 거절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


여자, 아내가 형식에 관한 것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요셉은 자기의 의사가 아니라 바로 왕, 곧 세상이 요구하는 요구에 의하여 아내를 얻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신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이시고 하나님과 함께 계신 분인데 굳이 연약하기 짝이 없는 육신으로 이 땅에 오실 이유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바로 왕의 애굽을 구해야 하듯, 죄에 빠진 육신을 가진 인생들을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것이 그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요셉이 자기의 의도와 무관하게 이방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과 예수님께서 굳이 그러시지 않아도 되는데 사람들의 구원을 위하여 연약한 육신을 입으실 수밖에 없었던 것이 오늘 우리와 어떤 상관일까요?




우리의 육신은 아내와 같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



그것은 우리가 육신이라는 아내와 같은 이 형식을 가진 이유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가진 이 육신의 사용법, 목적에 관한 것이기도 합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육신이 편하고, 보통 사람들이 육신으로 하기 힘든 일들을 많이 일들을 할수록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누구나 굶으면 힘든데 금식 기도를 하면 좋은 신앙이라 하고, 잠을 자지 않는 철야기도를 많이 할수록, 새벽에 일찍 일어나서 기도하면 좋은 신앙이라 하고, 또 누구나 어려워하는 공부를 열심히 해서 세상에서 성공하면 또 그것도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리고는 그렇게 좋은 신앙, 세상에서 영광을 얻은 결과를 가지고 대우를 받습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육신은 그렇게 사용하는 것이 아닙니다. 인생이란 그 어떤 분야에서라도 더 가진 것이 있게 된다면 그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그렇지 못한 자를 위하여 그 육신을 수고하여 섬기기 위한 것 그것뿐입니다. 신앙이 더 좋다면 신앙이 없는 사람들이 보고서 스스로를 돌이킬 수 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에 육신을 사용하는 것이고, 세상의 어떤 경쟁에서 이길 수 있다면 그 역시 이기지 못한 이들이 보고서 스스로 깨닫고 얻을 수 있도록 살아내는 것을 위하여 육신이 있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표상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하나님의 본체시자 아들이시고 하나님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에 대하여 알지 못하여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들이 스스로 하나님의 아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 수 있도록 그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신 것입니다. 그랬더니 그 모습을 보고서 사람들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이 자기의 존재를 설명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께서 아내와 같은 육신을 입으신 이유인 것입니다. 그리고 육신을 가진 삶에서 이 육신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즉 인생의 존재 이유와 목적과 그 의미를 보이신 것이 그것입니다.


요셉이 이방인인 여인을 아내로 삼은 것은 애굽에 닥칠 기근에 대비하는 자로서 세움을 받는 것의 일환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가 이방인, 그것도 애굽의 신께 제사를 드리는 제사장의 딸을 아내로 삼는 혼인을 하게 된 것은 세상의 가치관 안에서 그 존재의 이류를 찾지 못하는 기근을 해결하기 위하여 그 가치관을 형식으로 취하여 그 기근을 해결하는 모습을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 삶은 어떠해야 할까요?



이것이 우리 삶에서는 이렇게 표현될 수 있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회사에 다니는 사람을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회사생활과 교회의 일정이 겹치면 고민을 합니다. 그런 갈등에서 많은 경우 교회를 선택하면 좋은 신앙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신앙 이외의 문제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일요일에 회사 야유회로 등산을 간다고 하면 신앙을 떠나 산이 싫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어쨌든 회사가 아니라 교회를 선택하면 교회에서 칭찬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하고 있는 이 요셉의 이야기, 자기가 원한 것이 아닌데 이방인 아내를 맞이하는 것, 즉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그것을 표현하는 형식으로 이방의 것을 덧입게 되는 모습은 회사와 교회가 겹칠 때 회사를 선택할 수도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지입니다. 굳이 세상의 법에 의하여 죄인이 되실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보이시면 되었는데 굳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그러면 다시 앞의 예로 돌아가 본다면, 회사에 같이 다니는 사람은 교회 다니는 사람을 알 것입니다. 그가 교회에 가고 싶어 하고 또 좋은 신앙(평소에 그리 살아야겠지요?)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어지간하면 알 것입니다. 그런 그가 회사에 급한 일이 있고, 다른 직원이 힘들어하거나 어려워하는 일을 하러 교회를 뒤로 하고 나왔다면 그 모습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할까요?


어떤 사람은 ‘저 사람도 별 수 없구나! 먹고 살려니 신앙을 버리네.’라고 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어떤 사람은 ‘자기 신앙이 있을 텐데 우리 일을 도우러 왔구나! 저런 신앙이라면 나도 가질만하네.’라고 생각하기도 할 것입니다. 육신은 이렇게 사용하는 것입니다. 후자의 사람들, 그 사람들 마음에 ‘나도 저렇게…’라는 마음이 들게 하는 것 그것을 위해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이 원치 않게 이방여인을 아내로 삼아 자기 의를 표현해 낸 것이고, 예수님께서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진 모습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때에 제자들은 그런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마치 회사일과 교회일이 겹칠 때 회사에 일하러 간 사람을 이해하지 못했듯이.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백부장은 그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의 아들임을 알아보았습니다. 마치 교회 다니는 사람이 회사 직원들을 도우러 왔을 때 그것을 보고 ‘나도 저런 신앙이라면 가지고 싶다’는 마음이 든 사람처럼. 구원의 대상은 그런 사람들이고, 또 그런 사람 하나를 찾기 위해서 양 99마리를 버려두고 찾으러 나서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을 사용하는 것입니다. 아니 그렇게 이 세상의 형식을 덧입어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가는 삶이라는 것은 놀라운 비밀도 아닙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우리의 모습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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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로마서 5장에서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들이 죄를 범했다고 말씀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것은 바울 사도만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성경 전체가 모든 사람은 죄를 범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죄는 한 사람 곧 아담으로 인하여 세상에 들어왔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기독교 신앙 안에서는 아담의 죄가 곧 모든 사람의 죄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쉽게 인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론 사람들은 자신들의 행위가 늘 선하지 않기 때문에 ‘털어서 먼지나지 않는 사람 없다.’는 말을 늘 합니다. 자신도 어떤 것이든 죄를 짓고 산다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다만 인정하기 어려운 것은 아담이 죄를 범해서 자신이 죄인이 되었다는 것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죄를 짓는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런데 그게 왜 아담으로 인한 것인가?



먼저 사람들 누구나가 인정하는 부분을 보겠습니다. 사람들이 누구나 자신이 어떤 것에서든 죄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세계는 행위에 관한 것입니다. 그 행위는 육신에 관한 것인데, 사람들에 따라서 아니 많은 사람들은 그 육신 안에 깃든 생각이 가진 부정함도 다 죄로 여겨서 부정하고 악하게 생각하는 것조차 다 죄로 인정합니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자기가 죄가 있다고 여기는 것은 다 육신의 생각과 행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사람들이 그렇게 자기의 생각이나 행위가 때로 죄를 범하는 것이 왜 아담으로 인한 것이냐는 것입니다. 아담이 인류의 조상이라고 믿으면 그나마 다행인데 그것조차 아니고 이스라엘이나 유대인이 아닌 사람들에게 이것은 더 인정하기 힘든 것입니다. 아담과 자신이 무슨 상관이 있다고?


이러한 문제, 혹은 괴리가 생기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죄에 대한 기준으로 인함입니다. 어떤 것이 죄가 되려면 그것을 죄로 여기는 법이 있거나 양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법률적으로는 ‘죄형 법정주의’라고도 합니다. 법이 있어야 죄가 있다는 것입니다. 흔히들 말하는 괘씸죄는 사람들이 공동으로 생각하는 양심의 가치를 벗어난 탓이 큰데 그렇듯 꼭 법이 아니라도 사람들이 공동으로 인정하는 양심적 기준도 죄를 규정하기도 합니다.


죄가 되려면 법이 있어야…


어쨌든 죄가 되려면 법이 있어야 합니다. 기준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앞에서 우리는 사람들이 자기가 죄를 짓기도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 했습니다. 그 인정하는 죄는 다름이 아니라 육신의 행동과 마음의 생각에 관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육신의 행동이나 생각이 죄가 되려면, 행동과 생각에 대하여 죄를 규정하는 법과 양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분명히 행동에 관한 것입니다.(생각도 행동의 일부로 볼 수 있습니다.)




존재의 신이신 하나님은 행위를 죄로 보시지 않아…



그렇다면 하나님도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 죄들, 행동이나 생각들에 관한 것을 죄로 볼까요? 

결론적으로 말씀드리면 그것을 죄로 보시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행동이 아니라 사람의 정체성을 봅니다. 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 핵심입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 안에 있으면 그 사는 것이 다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고, 그렇지 않고 하나님의 목적은 모르고 인생의 목적이 자기 생각 안에 있다고 여기며 사는 사람은 그 사람의 행위가 아무리 선하고 양심적이어도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는 법과 기준은 존재의 정체성에 관한 것입니다.


이것은 선뜻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어렵다는 것은 당연히 인정이 안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사람들의 법에도 이런 기준이 있습니다. 법조계 사람이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으로 죄가 되려면 실질적 행위가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음으로 사람을 죽이고 싶은 마음이 아무리 강해도 죄가 되지 않지만, 별다른 마음 없이 한 행동이 사람을 죽게 만들면 적어도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살인과 같은 죄가 성립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단 하나 마음만 먹으면 죄가 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것, 간첩 행위를 기획하는 것은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헌법이 정한 국민으로서의 정체성을 버리고 반대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즉 우리나라에 살려면 우리나라 헌법의 의에 동의를 해야 하는데 그것은 반대하는 것만으로 죄가 된다는 것입니다. 존재가 우리나라 국민이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다른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제가 다른 글에서도 많이 예로 든 것인데, 간첩이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 간첩이 평소에 너무 착하게 살고 이웃 주민들에게도 친절할 뿐 아니라, 지역 사회에 기부도 하고, 또 지역 학교에 장학금도 내는 등 누가 봐도 정말로 법 없이 사는 사람, 누가 봐도 선하고 착하고 훌륭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다고 그가 죄가 없을까요?


만약 어느 순간 그 사람이 간첩이라는 것이 드러나면 그 사람의 도움을 받은 지역사회, 기부를 받고 장학금을 받은 사람들까지 다 큰 일이 나는 것입니다. 적어도 국가정보원이나 경찰에 불려가서 한 번은 조사를 받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정체성의 죄인 것입니다.


반대로 아들이라는 존재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딸도 좋습니다. 아들이나 딸이 어떤 행위를 하면 그 부모의 자식이 되고, 어떤 행위를 잘못하면 자식의 지위를 박탈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간혹 호적에 파버린다는 식의 경우도 있지만 그런다고 유전적인 부자관계가 끊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렇듯 부모와 자식의 관계는 행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존재의 법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적용하는 죄의 기준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행위가 아쉽지 않습니다. 사람이 하는 모든 행위보다 하나님의 말씀 한 번이 더 위력적입니다. 도토리 열 번 구르는 것 보다 호박 한번 구르는 것이 낫다는 말이 있는데 그것과 비교도 안 될 정도의 능력이 있으신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더욱이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셨는데 사람들의 한계를 모르실리도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께서 부족한 인생의 행동을 기준으로 죄를 삼는다면 살아날 인생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야박한 분이 아닙니다. 달리 긍휼의 하나님이시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죄는 존재의 목적 안에 사람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실 때에 분명히 사람이 하나님의 이미지, 곧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기를 바라심으로 지으시고, 지으신 다음에 보니 그 목적을 달성하기에 너무 잘 만들어져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이 하나님께 무엇을 가져오고 드리는 방향을 기대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통하여 표현되는 방향을 가진 목적으로 사람을 만드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을 어디에 두느냐가 죄의 기준입니다. 그래서 죄라는 말의 어원인 하마티어라는 말이 가진 ‘의미가 자리를 벗어난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냐 아니냐는 사람이 어떤 해동을 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어떤 존재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행동은 존재가 정해지면 그 존재의 정체성에 맞게 본성으로 나타나는 결과와 현상이기에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시고 사람의 죄를 판단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한 사람으로부터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고 하는 것입니다. 아담의 죄는 다른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만드신 자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려 하셨는데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스스로 자기 안에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세우고 그것으로 사람의 행위를 판단하려 하는 자리로 가 버린 것입니다. 


그것이 아담의 죄입니다. 바로 그 아담의 마음이 모든 사람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 인하여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주제별 성경 보기/짧은 이야기] - 우리는 왜 하나님 앞에 죄인인가?



그런데 그 아담의 죄가 모든 사람 안에 있더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세상에서 나고 자라면서 배운 것을 기준으로 자기가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스스로 규정하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창조주로서 하나님만이 하시는 일인데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것이고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아담으로부터 세상에 죄가 들어 왔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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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샤머니즘(Shamanism)인가?

Category : 김집사의 뜰/복음 담론 Date : 2016. 11. 13. 11:56 Writer : 김홍덕

샤머니즘은 

신(神)을 불러들이는 무당(巫堂), 곧 샤먼(shaman)을 중심으로 한 신앙 체계이다. 샤머니즘이라는 것은 이상심리상태에서 초자연적 존재(신령, 정령, 사령 등)와 직접 접촉ㆍ교류하고, 이 사이에 예언, 탁선, 복점, 치병, 제의 등을 행하는 인물(샤먼)을 중심으로 하는 주술ㆍ종교적 형태로 나타난다.(《종교학대사전》, 샤머니즘, 한국사전연구사(1998년판))

라고 인터넷 위키백과에 나와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들의 미신적 활동, 예를 들면 굿을 한다거나 부적을 붙이거나 가지고 다니는 등의 행동을 샤머니즘이라고 지탄한다. 그러니까 그런 행동들은 하나님을 진노케 해서 하나님께 벌을 받고 구원을 받을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하면서 구원을 받으려면 하나님을 믿고 교회에 나와야 한다고 말을 한다.


그런데 위에서 말하고 있는 샤머니즘의 사전적 의미에 보면 예언, 탁선(신이 내리거나 꿈에서 신이 나타나서 말을 했다고 하는 것), 복점, 치병, 제의(제사 의복?)와 같은 형태로 나타난다고 말하고 있다. 신과 접촉해서. 그래서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하나님이 아닌 다른 신과 사람이 접촉하는 것을 신접했다고, 귀신 들렸다고 하며 터부시 한다.


그렇다면 샤머니즘의 세계는 왜 그렇게 신과 접촉하려 했을까? 그러니까 신과 접촉하는 목적과 의도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자기 삶의 생사화복에 관하여 안정과 번영을 담보하기 위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살 동안 건강하고 부유하며 걱정거리 없는 삶을 바라는 마음을 가진 인간이 육신으로는 그 소망에 자기가 바라는 수준까지 이를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육신의 능력 이상을 빌어 자기 소망을 이루려는 마음에서 신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의 본질이라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육신이 도모하는 일, 그것이 좋은 것을 기대하는 것이나 불행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것 어느 것이라도 그것을 바라는 바를 어디엔가 기대하려 하려는 마음이 있는데, 그 마음을 정립된 신론(神論)에 의하여 인정된 신에게 의지하면 종교가 되고 그렇지 않고 무당과 같이 정통적이지 않지만 세습되어온 민간의 방식에 의존하면 샤머니즘이라고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참 명확한 것 같지만 엄청난 오류가 있다. 같은 문제를 어디에 의지하느냐에 따라 종교가 되거나 샤머니즘이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범주를 보자.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사람들이 문명적으로 발전하면서 종교학, 신학과 같이 신에 대하여 학문적인 정의를 내리고 연구하기 시작하면서 사람이 가진 문제를 그것에 의지하면 종교가 된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는 것은 그 뿌리도 결국 샤머니즘이라는 것이다. 종교가 정립되기 이전부터 사람들은 육신의 능력으로 해결하기 힘든 삶의 문제를 지속적으로 인간 이상의 존재에게 의탁해 왔는데 그 체계를 인간 스스로가 세우고 스스로 세운 체계 안에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의탁하면 선한 것이고, 그렇지 않고 사람들 스스로가 세운 종교적 논리 세계에 따르지 않고 종교적 논리가 수립되기 전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하면 샤머니즘이라고 규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이나 사람들이 스스로 세운 종교나 다 같은 조상이고 뿌리가 같고 같은 궤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가 되었던 샤머니즘이 되었던 사람이 그것에 바라는 것은 모두 육신으로 사는 인생 한 세상 자기가 바라는 일이들이 육신에게 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비는 것은 같은데, 그 마음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종교 안에 있으면 좀 고상하게 보이고 좀 더 확률이 높다고 여길 뿐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가 믿는 신이 더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증명하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것은 확률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세상은 이런 종교적 개념만 발전한 것이 아니라 과학이라는 것도 함께 발전했다. 그 과학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종교나 샤머니즘이나 다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교회에 가서 헌금을 했더니, 아니면 무당에게 복채를 주었더니 부자가 되었다거나 병이 나았다는 것은 과학적으로 볼 때 다 미신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려면 사회과학적으로 공부나 일을 열심히 해야 하는 것이고, 병이 나으려면 의학적으로 병원에 가야하는데 그렇지 않고 기도나 헌금이나 수행을 하는 것은 과학 입장에서 보면 도진개진인 것이다.


그러자 일부 종교, 특히 기독교는 발 빠른 움직임을 보였다. 창조과학회와 같이 신앙과 과학을 결합하기도 하는 것이다. 과학적으로 성경의 일을 증명해 보겠다고 나선 것이다. 그렇게 해서 자신들의 종교가 더 우월하고 세상 친화적(세상이 인정할 수 있는 여지가 높은)인 종교라는 것을 증명하려 노력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 마디로 확률을 높이려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어떤 신께 어떤 방식으로 인생의 문제를 의지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즉 사람들이 스스로 정립한 종교학이나 신학이라는 세계가 인정하는 방식으로 기도하고 예배드리고 예불하고 미사를 드리면 괜찮고, 그 범주가 성립되기 전 인생들이 의지하던 고전적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면 샤머니즘이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샤머니즘은 방식의 문제가 아니다. 무엇을 신이나 무당에게 의탁하느냐의 문제다. 그러니까 사람이 교회나 절이나 성당에 다니면서 하나님, 부처님, 천주님께 기도하면 종교가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든 부처님이든 천주님이든 간에 가서 인생이 가진 문제, 이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모든 신앙은 다 샤머니즘이라는 것이다.


특히나 여호와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라면 더 그렇다. 하나님은 자신의 정체성에 대하여 분명하게 말씀하시기를 “나는 스스로 존재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은 사람에게 물으시는 것이 언제나 동일하게 “너는 누구냐?”,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와 같이 관계에 관한 질문을 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니까 ‘너의 문제가 무엇이냐?’, ‘네가 너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나에게 제시할 공로와 소유가 무엇이냐?’와 같은 것을 물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것은 하나님의 관심은 우리 육신이 살아가는 문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 안에 사람이 거하느냐 아니냐를 보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즉 정체성과 관계를 보시는 분이시지 육신의 문제가 무엇이지, 그것을 해결하기 위하여 신인 나에게 무엇을 가져오는지를 보는 분이 아니라는 것이다.


반면에 무당으로 대표되는 샤머니즘을 보자. 병을 고치려면 복채를 내라는 것, 산신령이 노하시니 무엇이든 드리라고 하는 것이 샤머니즘의 골격이 아닌가? 이것의 출발은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에서 시작하고, 그 답을 위해 육신의 무엇을 드리는 것으로 구성된 퍼포먼스인 것이다. 존재가 아니라 공로와 소유를 드림으로 육신의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샤머니즘인 것이다.


그러면 종교들은 어떤가? 안타깝게도 샤머니즘과 다른 것이 없다. 동일하게 육신의 문제를 사삼들이 스스로 정립한 종교 안에 가지고 가서 종교가 정한대로 소유와 공로를 드리는 것이 그것이다. 십일조를 내면 부자가 된다는 것이나, 공양미를 내면 아비의 눈이 보게 될 것이라는 것이나, 가서 주기도문을 백번 외우면 죄가 사해질 것이라는 것이나 그 어느 것 하나 없이 모두 자기가 믿는 신이나 신앙을 위해 육신이 가진 무엇을 드리면 육신의 문제 무엇이 해결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단지 고상한 샤머니즘일 뿐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그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다. 그것은 육신의 문제가 하나님 앞에서 근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다. 또한 하나님은 육신의 행함을 보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고, 제사로 드리는 제물 태우는 냄새도 싫다고 하셨다. 한 마디로 사람이 자기 육신의 삶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또 의롭다함을 얻으려고 행함이나 소유를 드림을 원치 않으신다는 것이다. 그것은 오히려 하나님을 산신령 같은 잡신 취급하는 것이지 신앙이 아닌 것이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누구께 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비느냐의 문제다. 


그러므로 샤머니즘은 누구께 비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을 비느냐의 문제다. 인생이 존재하는 의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창조하신 목적을 알고자 하나님을 만나려면 하나님을 온전히 믿는 것이지만, 그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가서 취업이나, 사업이나, 결혼이나, 건강과 같은 것을 기도하고, 들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사려고 헌금하고 교회에서 봉사하고, 마음에는 분이 차지만 말을 곱게 하려고 애쓰는 것을 깨어 있는 것이라고 하는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그것이 바로 샤머니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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