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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장에서 3장 8절까지는 유대인과 율법에 대하여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이는 표면적으로는 유대인이라는 증거가 있어야 복음에 합당하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그런 생각은 당시의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믿는 복음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하게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 시대의 그런 생각과 평생을 다투었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그런 생각을 심히 경계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그런 생각이 없을까요? 지금도 그런 생각은 넘쳐납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좀 다녀볼까 생각을 하다가도, 십일조, 주일 성수, 제사, 교회 봉사 등등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자신들이 교회에 다니는 증거로 삼는 많은 행위들을 할 엄두가 나지 않아서 그만두기 일쑤입니다. 또한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도 교회 안에서 그런 것들을 누가 더 잘하느냐에 따라서 교회 안에서 대우가 달라지는 것을 힘들어 합니다. 자신이 형편이 되어서 잘 따라갈 수 있으면 상관없지만 그것이 아니면 그런 것들은 아주 힘든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복음을 전할 당시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주장이 신앙을 가지려 할 때 너무나 큰 장벽이었듯, 지금도 교회에 다니려면 이런 저런 것을 해야 한다(have to do)는 것들이 또한 큰 장벽입니다. 그리고 이런 장벽들은 모두 사람의 행위에 관한 것이고, 육신을 가진 사람의 형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외모를 보시지 않는 하나님과는 전혀 다른 관점입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단순히 유대인이냐 아니냐 하는 것으로 당시의 유대인들과 논쟁을 하고 책망을 한 것이 아닙니다. 복음이라는 것은 사람의 외모와 행위와 그 공로에 관한 것이 아님에도 사람들은 자꾸 자신들의 행위와 공로와 소유의 드림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주장하는 그것과 논쟁하고 그것을 책망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뜻하신 바가 그 사람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뜻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으로 볼 때 산 것이고 생명이 있는 것입니다. 


바로 그 생명이 있기만 하면 육신이라는 형식은 그 생명을 너무나 자연스럽게 표현하도록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만 있으면 되는데 그것은 외면하고 자꾸 육신의 공로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하니 그것을 바로 잡으려 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의외로 단순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신앙생활을 어려워하고 엄청난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은 한 마디로 방향이 반대라서 그렇습니다. 마음에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생명이요, 자신의 존재 이유요, 삶의 목적이 되면 그것이 자연스럽게 예수님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심과 같이 자기 육신의 삶으로 나타날 텐데 그와 반대로 자기 육신을 다스리고 바꾸고 또 노력하고 힘써서 그 마음과 존재가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초대교회 당시의 유대인들과 또 지금의 많은 기독교인들이 그릇된 신앙으로 가고 있는 것이 또한 그것입니다. 방향이 반대입니다. 자꾸 행함과 육신이라는 형식을 바꾸어내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신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그들(유대인과 오늘날의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 그것이 표현되는 모습, 곧 사람의 삶이 어떠한지는 알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단지 그것을 행하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다시 이야기해 본다면, 먼저 성경의 모든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어서 나타난 사람의 삶의 모습에 대한 것입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은 예수님을 표현한 것이고,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니 당연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분명한 법이 있습니다. 사람 마음 안에(속사람에) 하나님의 말씀이 생명이 되는 것이 먼저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농부가 뿌린 씨앗이 땅에 떨어져서 생명이 되듯 하나님의 말씀인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 자기 안에 들어와서 그것이 자기 운명이고 자기 삶의 목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을 말합니다. 


그렇게 되기만 하면 성경의 모든 말씀은 다 지켜지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정체성으로 생명이 되어 사는데 그 삶이 예수님을 설명하는 성경과 같아지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단순한 하나님의 법을 반대로 접근하니 힘든 것입니다. 먼저 그 나라와 그 의를 구하면 되는데, 그 나라와 그 의가 표현된 형식과 행동을 몸으로 지켜내어 의에 이르려고 하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그것이 유대인들과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이 잘못된 신앙생활, 힘든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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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다니는 많은 사람들은 늘 신앙적인 의문이 있습니다. 오죽하면 신앙이 학문이 되어 신학이라는 것이 생겼겠습니까? 제가 늘 “신앙이 왜 학문이 되었느냐?”며 비판적인 질문을 하는 것은 신앙은 의문이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생명의 주(主)이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생명에 관한 것이기에 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생명이 자기 본성으로 사는 것을 학습하거나 의문스러워하지는 않습니다.


바울 사도도 이것에 대하여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오직 이면적 유대인이 유대인이며 할례는 마음에 할지니 신령에 있고 의문에 있지 아니함이라(롬 2:29 상)

진정한 유대인은 육신에 할례를 받았지만 늘 신앙에 의문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 곧 속사람에 유대인이라는 증거인 신령한 영이 있어 의문이 없다는 것입니다.


제가 군에 가기 전에는 ‘군에 가면 하루 종일 뭐하지?’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왜냐하면 군인이라는 세계가 제게는 없는 것이기에 그런 의문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군에 다녀 온 이후에는 그런 의문은 없어졌습니다. 제 안에 군대라는 할례, 곧 군인이라는 정체성이 증거로 있기 때문에 그것에 대하여 어떤 의문도 가지지 않는 것입니다. 아니 가지려해도 가질 수 없습니다.


할례라는 것은 다들 아시다시피 포경수술입니다. 남성의 성기 표피를 잘라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아들을 주시겠다고 하시면서 시간만 끌다가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다음에 얻은 아들 이삭의 후손이어야 아브라함의 후손이요 하나님께서 약속한 백성이라고 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라는 것은 껍질 곧 외모와 육신의 어떠함에서 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심입니다. 그것이 할례가 가진 본질적인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할례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않고,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서 그것이 아들로 나타나는 사람을 하나님의 백성,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할례입니다. 그런 사람의 증거가 바로 할례인데, 유대인들은 반대로 할례라는 형식의 증거가 하나님 앞에 의로움의 증거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육신이 아니라 마음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하신 것은 마음에 눈에 보이는 형식이 본질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마음이 있을 때 비로소 이면적 곧 본질적인 유대인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자기 육신에 할례를 받음이 곧 의로움이라는 착각에 빠졌고, 하나님은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신다는 의를 할례를 표현하셨는데, 오히려 외모가 할례를 받아야 하나님 앞에 의로운 것이라고 자기 맘대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듯 속에서 밖으로 향하는 믿음이 아니라, 겉을 바꾸어 속으로 향하고 본질이 바뀐다고 생각하는 믿음은 너무 의문스러운 것이 많습니다. 모든 본질은 속사람에게 있는데 속은 어떤지 모르면서 겉만 어떻게 하면 속이 바뀐다고 여기니 얼마나 의문스러운 것이 많겠습니까?


자꾸 군대 이야기를 해서 죄송하지만 내무반에 갓 들어온 신병이 처음 휴가 갈 때면 고참들이 군복을 2,3일씩 반복적으로 다려주고, 군화도 정말 공들여서 광을 내어서 입히고 신겨서 휴가를 내보냅니다. 그런데, 아무리 고참들이 며칠씩 수고해서 입히고 신겨도 별로 멋이 없습니다. 신기할 정도입니다. 하지만 말년 병장은 대충 군복 빨아서 뚝뚝 털어서 단추 풀어헤치고 입고 있어도 군인의 멋이 납니다. 그게 정말로 신기할 정도입니다. 군복 속에 있는 몸이 군인으로 내공이 쌓여서 그렇습니다. 속이 늘 겉보다는 우선입니다.


그렇듯 속에서 밖으로 나타나는 것은 수고도 필요 없고 의문스럽지 않습니다. 어린 병아리가 마당에 놀다가 꿩이 날아가면 놀라기는 해도 숨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매가 날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숨습니다. 왜 숨어야하는지, 아니면 엄마 닭으로부터 위험한 동물과 그렇지 않은 동물을 책으로 배워서가 아닙니다. 자기 본성이 그래서 그냥 아는 것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이 병아리를 볼 때 왜 그러는지를 알려면 의문이 있고 연구를 하는 것입니다. 사람 안에는 병아리의 유전자가 없기 때문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생명의 세계입니다. 율법과 성경의 모든 말씀과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 그 어느 것도 절대로 행동강령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그 말씀대로 행동하면 그 말씀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말씀이 자기 안에 이루어진 사람에게 나타나는 본성적 행동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속사람에 성령이 있으면 성령의 열매가 열리는 것입니다. 


사과나무에 사과가 열리는 것에 의문이 있습니까? 공부가 필요합니까? 그냥 사과나무기만 하면 됩니다. 어떤 경우도 배가 열리게 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도 마찬가집니다. 마음에 할례를 받음과 같이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사람들에 무한히 말씀하시는 그 의가 있으면 그 모든 말씀이 자기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과나무가 배를 맺을 수 없듯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은 다른 것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왜 의문이 있겠습니까?


그러므로 신앙생활을 하는데 의문이 있다면 단 한 가지만 생각해보면 됩니다. 그것은 ‘왜 생명의 세계에 이런 의문이 있는가?’하는 것 그것뿐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는 의문이 없습니다. 하물며 학문이 필요하겠습니까? 율법도 그렇습니다. 율법에는 의문이 없어야 하는 것입니다. 자기 안에 할례 곧 율법의 목적이 있는 사람은 율법에 대한 의문이 없습니다. 자기 안에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삶을 사는데 어디서 의문을 구할 수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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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7-29) 율법이란 무엇인가?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23. 15:40 Writer : 김홍덕

‘율법이란 무엇인가?’ 율법이란 십계명과 또 유대인들이 구약시대부터 지켜오는 신앙적 규범인가? 아마도 대부분은 그렇게, 혹은 그와 유사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정말 그럴까요? 정말로 율법은 구약시대의 규범일까요? 그리고 지금은 신약시대(예수님 오신 이후)이니 율법은 없고 복음만 있는 것일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율법에 관해서 이 시대 사람들이 읽고 묵상하게 하실 이유가 없으니 성경이 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필요도 없는 것을 지키라고 하시는 하나님은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은 오늘날도 엄연히 존재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율법은 어떤 조문은 율법이고 어떤 말씀은 율법이 아니라고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말씀하신 의도를 모르고 행동으로 지키면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의 말씀, 예수님의 말씀, 또 성경에 기록된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이 자기 육신으로 표현되는 방향성의 법을 가지는 것이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과는 달리 성경말씀을 육신으로 지켜내어 의에 이르려고 하면 예수님의 말씀도 율법이 되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따라서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말씀이든 예수님의 말씀이든 심지어 세상의 어떤 사상이라도 자기가 ‘이렇게 하는 것이 의로운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자기 육신으로 하여금 그렇게 행하도록 강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것이라도 사람이 자기 안에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께서 살았다고 여기시는 사람의 존재 목적이 아닌 다른 것을 의로 여겨 몸으로 행하게 하는 모든 것이 다 율법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십계명이나 모세의 계명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어떤 것을 ‘이렇게 해야 의로운 것, 혹은 바른 것, 혹은 선한 것’이라고 정의를 내리고 주장하고 그렇게 행하는 모든 것이 다 율법입니다. 


이것을 두고 로마서 2장 14-15절에서 바울 사도는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한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일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송사하여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로 나타나느니라(롬 2:14-15)


이러한 것으로 볼 때 모든 사람은 신앙을 가지고 있든 아니든, 하나님을 알고 믿든 아니든 누구나 다 율법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경이 말씀하시는 율법에 대한 정의입니다. 율법은 죄를 깨닫게 한다는 것도 그와 궤를 같이 하는 것입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안다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다 법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 앞에서 죄든 아니든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법은 바로 자신이 가진 선과 악의 기준, 곧 사람 스스로가 ‘이것은 선하고 저것은 악하다.’ 생각하는 기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업하는 사람이 자기 안에 생각하기를 ‘사업이 잘 되면 좋은 차를 탄다.’는 기준을 가지고 있으면 자기 사업의 형편과는 무관하게 좋은 차를 타려 합니다. 그래야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볼 때 사업이 잘 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가진 기준이 법이 되어 모든 것이 결정되고 결국 자신도 그 법 아래에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무리해서 좋은 차를 타기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에게 동일합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이 없으면 그 일로 화가 나거나 낙심하거나 하지 않습니다. 야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은 어떤 팀이 어떤 순위에 있든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하지만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있으면 늘 그 팀의 순위에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합니다. 응원한다는 것은 이기를 바라는 것이고, 그 바람대로 이기면 선한 일이 되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져서 순위가 내려가면 패한 일, 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탈무드에도 굴뚝을 두 사람이 청소했는데 한 사람은 얼굴이 검게 되었고, 한 사람은 검게 되지 않았는데 얼굴을 씻으러 간 사람은 자기 얼굴이 검게 된 사람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기가 눈으로 본대로 상황을 인식하고, 몸이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2장 17-29절에서 율법이 스스로를 심판하는 것에 대하여 길게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수치를 느끼는 것이나, 죄로 여기는 것이나, 또 자랑하는 것이나, 영광스럽게 생각하는 모든 것은 자기 안에 그에 대한 기준이 그렇게 여기게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 기준이 사람에게서 났느냐 아니면 하나님의 기준과 같으냐가 문제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만드신 사람은 업그레이드 된 적이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처음 만들어진 아담과 동일한 존재고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보는 기준이 자기 안에서 나와서 자기를 보니 부끄러워지게 된 것이 선악과로 인함이었습니다. 바로 선과 악을 판단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그랬다는 것입니다.


질그릇의 선택
국내도서
저자 : 김홍덕
출판 : 바른북스 2020.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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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보니 사람은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노력합니다. 아담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다고 했는데 무화과는 유대인의 나무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으로 가렸다는 것입니다. 이는 유대인들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육신인 자신의 부끄러움을 감추는 기준이 자기 안에서 나와서 열심히 노력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예수 믿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해야지!”라고 하면서 말입니다. 그 모든 것이 율법입니다. 그렇게 사람은 자기 육신의 연약함을 감추려 합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의 모습을 부끄러워하시지 않았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세상의 가치관, 곧 무화과로 몸을 가리는 가치관이요, 육신의 연약함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행함으로 감추려는 가치관으로 보면 누구나 죄인이 된다는 것을 발가벗겨진 체로 십자가에 달리셔서 보이셨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의 그 모습은 세상의 가치관, 율법의 가치관으로 보면 처형해야할 죄인이지만 의외로 바로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아들의 정체성이라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던 모습이고, 그 모습이 살아있고 생명이 있는 유일한 모습이기에 죽음에 두실 수 없는 법이 표현되어서 부활하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정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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