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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diot, a church is not forever!!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11. 11. 16:13 Writer : 김홍덕

교회는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신 하나님 나라의 이 땅위의 버전인 교회가 영원하지 않다니 그것이야 말로 정말로 멍청한 소리가 아닌가? 하지만 교회는 영원하지 않다. 아니 영원할 수도 없고, 영원히 보존하려 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the Church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라 a church에 관한 이야기다.


원론적으로 아니 성경적으로나 모든 면에서 교회는 영원하다. 하나님 나라의 이 땅위의 버전으로서 교회는 영원한 것이다. 교회가 영원하지 않다면 신앙도 다 소용없다. 이 영원한 교회는 어디까지나 the Church에 관한 것이다. 다만 사람들은 the Church와 a church에 대한 구분 없이 자기가 몸담은 교회가 영원해야할 것처럼 생각하는 것이 멍청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러면 the Church와 a church는 뭐가 다른가? 형편없는 영어능력의 소유자지만 이 정관사 the와 부정관사 a(n)의 차이는 분명하게 알고 있다. 영문법에서 깨달은 것이 아니라 성경에서 이 개념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the Apple이 있고 a apple이 있다. the Apple은 사과라는 종의 대명사다. 이때 the Apple은 실존하는 개체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다. a apple이 실존하는 개념이다. 모든 apples가 가진 생명의 본성, 그 정체성이 바로 the Apple이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the Church와 a church 역시 같다는 것이다. 모든 churches의 속성과 본성 그리고 정체성이 바로 the Church이다.


A church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 영원해서도 안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존재, 부정관사가 붙는 모든 존재가 영원하지 않음과 같다. 또한 the Church가 영원한 것 역시 그렇다.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사라지지만 그 정체성은 언제나 영원하다. 사람도 나고 죽기를 일상 같이 하나, 사람이라는 생명은 영원하고, 사과 역시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먹어치우지만 사과는 언제나 영원하다. 이것이 생명의 법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생명의 주님이시다.


우리 모든 사람은 사과를 영원하게 보존하려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짓인지 알고 있다. 그것은 영원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원하게 하려고 사과 한 알을 보존한다고 사과가 영원해지는 것이 아니다. 맛도 사라지고 수분도 사라질 것이다. 뭐 과학적으로 진공 상태나 특수하게 보관한다고 치자, 누가 사과를 그렇게 할 목적으로 재배하는가? 그냥 먹어치우려고 재배하지.


예전에 진시황제가 죽지 않으려 노력했다. 그 어이없는 노력이 얼마나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는지 역사가 알려주고 있다. 그렇듯 생명은 그 정체성이 영원한 것이지 그 개체가 영원한 것이 아니다. 이것에 생명의 법인데, 생명의 주님이 머리되신다는 교회들은 어이없게도 각 개교회가 영원하여야할 것처럼 애쓴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보라. 다 쓸데없는 짓이다. 교회는 언제나 생겼다 사라졌다 한다. 그리고 교회가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고 the Church가 영원하지 않게 되는 것도 아니다. 무엇이 본질인지 모르니 자기가 다니는 교회가 영원해야 할 것처럼 생각하고 노력한다. 본질도 생명도 하나님도 교회도 뭔지 모르는 멍청이들의 노력이다.


이 멍청함을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 있다. 먼저는 그렇게 a church를 지키기 위하여 양심도 버리고, 사람도 버리는 교회들의 가치관이 그것이고, 또 하나는 그런 교회에 말씀도 신앙도 없다고 느끼면서도 꿋꿋이 다니는 사람들이다. 나도 그런 사람의 하나였다.


A church를 지키기 위해서 양심을 버리는 모습은 가을 길 낙엽만큼이나 많다. 세습도 그렇고, 사회적인 문제를 일으키기고 그것을 지탄하는 세상의 소리를 ‘하나님을 모르는 소리, 사탄의 소리’로 일축하는 너무나 용감한 교회들도 그렇다. 때론 자기 교회 목사를 지키기 위해서 세상과 또 양심과 싸우기까지 한다.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지키기 위해서 사람을 버리기도 한다. 교회가 가는 길과 신앙이 다르다고 사람을 내친다. 신앙에 의문을 가진 사람들에게 바른 답을 해주지 못하는 실체를 들킬까 싶어 ‘보지 않고 믿는 믿음’을 강조하고 ‘의심하는 자’로 치부한다.


그렇게 교회를 지키려고 할 때는 지킬 것이 있기 때문이다. 재산이 있거나, 명예가 있거나, 아니면 랜드마크 수준의 교회에 다닌다는 자부심이 있거나. 하지만 잊지 마시라,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고 하심과 죽고자 하는 자가 살 것이라고 하심을. 그것도 인정이 안 되면 십자가를 기억하라.


십자가가 무엇인가? 하나님의 아들이 죽은 곳이 십자가다. 하나님의 아들을 지키는 것으로 우리가 구원을 얻은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죽으심으로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그 구원을 받은 사람들의 공동체, 그 구원의 의가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의 표상이 교회라는 것이라도 기억했으면 좋겠다.


십자가를 떡하니 걸어 놓거나 아니면 교회 종탑 위에 높이 세워두고서 십자가의 도는 버리는 이 어이없는 상황이 오늘 우리가 흔히 말하는 교회들의 모습이다. 이것이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이 아니면 뭐란 말인가?


그렇다면 교회를 찾고, 하나님을 만나려는 사람들은 어떻게 해야 할까? 멍청했던 필자와 같이 a church에 뼈를 묻겠노라며 두 번이나 긴 삶을 살 것이 아니다. 어떤 교회는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의에 합당하다. 그 기준은 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누군가 어떤 교회를 선택해야 하는지 궁금하다면 가서 평안한가를 생각하면 된다. 내가 평안하다면 누군가는 십자가의 도로 나를 섬기는 사람이 있는 교회다. 그런 교회를 찾아야 한다. 목사가 있어야 하고 장로가 있어야 하고 건물이 있어야 교회가 아니다. 그것은 다 회칠에 불과한 것이다. 내가 하나님을 찾고자 하는 마음을 이야기하고 궁금한 것을 듣기에 평안하면 된다. 그게 안식이다. 그래야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이다.


평안하지도 않고 가르쳐주는 것도 없는데, 그래도 건물도 있고, 목사도 있고, 장로도 있는 교회에 가야한다며 인생을 낭비할 이유가 없다. 그것이 바로 한 알의 사과를 영원하게 보존하려는 것이고 사람이 죽지 않으려 하는 것이고 a church를 영원하게 하려는 것이다. 생명을 낭비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생명을 알지 못한다는 것이다.


A church는 영원하지 않다. 아니 그것은 영원할 수 없다. 그것을 영원하게 여기면 오히려 영원한 the Church를 볼 수도 없고, 누리지도 못한다. 하나님의 의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하다. 그 하나님의 의가 영원한 이상, 유한한 삶을 가진 사람들은 그 영원함을 거치듯 사는 것이다. 한 알의 사과가 이 땅에 열매로 맺혀서 누군가의 양식이 되어도 그 사과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사과인 것과 같이, 교회도 우리 인생도 이 땅에 살면서 하나님의 영원하신 의의 본질 속에 살면 우리가 죽어도 영원한 생명 안에 있는 것이 하나님 앞에 있는 영원함의 비밀이다.


그러므로 a church를 지키기 위하여 사람을 버리지도 말고, 양심도 버리지 말자. 또한 자기가 다니는 a church가 영원할 것처럼, 또 자기 신명을 다해서 지켜야할 것처럼 여기지도 말자. 교회도 육신을 가진 인생도 하나님의 의와 나라와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소비되어질 때 온전한 것이다. 육신, 형식을 가진 만물의 본분이 그것이다. 물론 a church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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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5:1-11) 죄인을 위하여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11. 07:00 Writer : 김홍덕

예수님을 믿는 신앙에서 핵심적인 십자가 사건을 이 블로그에서 늘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 되는 것>이라고 이야기 해 왔습니다. 의인이 죄인을 위하여 죄인이 된다는 것은 그냥 그럴듯한 표현이 아닙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아들이란 어떤 존재인가 라는 답의 답이기도 하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 간다는 것이 어떤 것이냐의 답이기도 하고 무엇보다 우리 인생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도 로마서 5장에서 이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십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치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6-8)


많은 신앙인들은 옳은 것을 지키려 합니다. 세상에서 교회를 지키려 하고, 교인들이 모였을 때 신앙이 더 좋은 사람의 위신을 지키려 합니다. 그 신앙이 좋다는 사람이 설사 세상의 법에 의하여 시험치고 공부하여 된 목사라고 할지라도 말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교회가 지향하는 신앙에 맞지 않는 사람들을 떨치거나 훈계하거나 욕하거나 뒷담화를 하거나 따돌립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반하는 사람이니 멀리하고 터부시 합니다. 물론 의도적으로 교회를 붕괴시키려고 한다거나 능동적으로 다른 신앙을 전파하려 한다면 다른 이야기지만 하나님을 믿겠다는 마음이 있고, 그 신앙을 그 교회 안에서 성장시키고 지키며 나누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데 그 가치관이 다른 사람에게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그것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바로 십자가로 끌려가시는 예수님을 막으려한 베드로의 모습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는 죄인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기에 베드로는 막았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의 예는 결국 같은 것입니다. 의인을 더 의롭게 하고 죄인은 죄인으로 대하는 것이라는 것에서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막아선 베드로에게 예수님이 뭐라고 하셨습니까? “이것을 막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말씀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교회 안에서 의로운 것을 지키려고 사람을 버리는 것이나 예수님을 막아선 베드로나 모두 하나님의 뜻을 모르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모른다는 것은 십자가를 모른다는 것이고 그것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치 않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따라서 오늘날도 의로운 것을 지키려고 하는 것, 그것은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신 십자가의 도를 알지 못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교회는 거룩한 곳이니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와서 마구 사용하면 안 된다고 한다거나, 목사님은 의로운 분이니까 좋은 차를 타고 또 육신이 피곤하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이나 교회 세습과 같은 일을 하고선 그것을 지적하는 세상의 가치관 앞에 ‘하나님을 몰라서 그러는 일’ 혹은 ‘하나님의 일에 세상이 간섭하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십자가를 모독하는 것일 뿐 그 어떤 의로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많은 부분에서 현재의 신앙인들, 특히 소위 혹은 자칭 영적지도자라는 사람들이 가진 신앙관은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이나, 초대교회 시절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던 유대교에 뿌리를 둔 사람들의 신앙 가치관과 놀라울 정도로 같습니다. 아마 그래서 오늘도 하나님은 로마서가 성경으로 남아서 많은 사람들이 읽기를 바라실지도 모르겠습니다.


많은 것이 반대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마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으면 성경에 기록된 말씀과 같이 살 수밖에 없는 법으로 성경을 주셨는데, 성경을 학문으로 공부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그 생명의 법과는 반대로 교회의 높은 곳에서 서서 말하기를 ‘성경대로 살아가야 하나님께 의로워진다’고 말하고, 의로운 것을 지키기 위하여 신앙에 대하여 다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을 비난하고, 세상의 모든 가치는 거저 물리치기만 하는 것이 옳은 것이라고 가르치고 또 그것을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법은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의인을 위하여가 아닙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죄인들에 의하여 죽으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신앙인들이 입으로는 예수님을 믿는다고, 예수님을 본받겠다고 하고, 십자가를 지고서 죽겠다고 하면서, 정작 삶 속에서는 작은 일에서도 ‘네 생각이 틀린 것 같은데…’라는 말에도 자기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옳다하며 자기가 가진 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을 지키는 것인 양 살아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반대로 하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더욱이 자신이 하나님의 종이라며 대접받기까지 합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법과 의를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십자가에서 모두 드러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높이 달리신 것은 모든 인생이 그것을 보라는 의미입니다. 모든 인생에게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보이신 것입니다. 장대에 들린 놋뱀과 같이 말입니다. 그 하나님의 법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죄인들을 위하여 의인이 죄인이 되는 세계인 것입니다. 죄인의 구원을 위하여 의인이 그 육신을 죄인과 같이 사형을 당하는 것과, 죄인이 종이 되어 섬기며 사는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을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을 위하여 수고하고 살아내는 삶을 사는 것이 십자가의 도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도는 입으로만 하나님을 믿는 것이 무엇이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또한 세상의 법과 요구는 불의한 것이라며 회사가 또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이 일요일에 간절한 도움을 청하는 것을 외면하는 것도 십자가의 도가 아닙니다. 또 교회를 지키기 위하여 또 신앙을 지키기 위하여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친구와 가족을 버리는 것도 어리석은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하나 같이 십자가를 외면하고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런 것은 다 의인이 의롭기 위하여 죄인을 심판하고 또 의를 모르는 사람을 죄인으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지 죄인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를 내팽개친 것이 지금 많은 사람들이 의롭게 여기는 신앙생활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롬 5:9)


바울 사도는 우리가 죄인을 위하여 의인이신 예수님께서 죄인이 되어 흘리신 피로 인하여 의롭게 되었으니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으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생목숨을 버리신 대가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는 우리가 짓고 벌은 예수님께서 받으셔서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어떤 생명이 구원을 받는 것인지를 보이셨으니 그 생명이 자기 생명이요, 자기 정체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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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통한 구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10. 07:00 Writer : 김홍덕

야곱과 그의 아들들, 요셉을 애굽에 팔아버린 형들에게도 흉년은 피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습니다. 그러자 야곱은 아들들에게 애굽에는 곡식이 있다고 하니 가서 곡식을 사 올 것을 명하고 이에 아들들이 애굽으로 곡식을 사러 떠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들과 그들이 팔아버린 동생인 요셉은 만나게 됩니다. 하지만 요셉은 그의 형들을 알아보는 반면 그 형들은 요셉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 형들을 알아본 요셉은 자기와 한 어머니(라헬)에게서 난 베냐민을 찾지만 보이지 않자 그의 형들을 첩자로 몰아서 동생을 데리고 와야 한다며 시므온을 포로로 잡아 두고 곡식과 함께 가져온 돈도 자루에 넣어 보내는 등의 일들을 지나서 결국 야곱과 요셉은 만나게 됩니다.


야곱의 아들들은 요셉이 꾼 꿈을 연고로, 또 아버지가 요셉을 더 사랑한 연고로 미워하여 요셉을 죽이고자 했으나 유다의 만류로 죽이지는 않았지만 결국은 애굽의 상인들에게 은 20에 팔아버렸는데 그 요셉이 총리대신이 되어 만나게 된 것입니다.


야곱의 다른 이름은 이스라엘입니다. 야곱이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이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또한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은 이 땅에 살고 있는 유대인의 혈통을 가진 이들이 세운 나라가 하나님의 나라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을 다스리는 사람들이 속한 나라가 이스라엘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존재의 신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스라엘 백성, 곧 하나님 나라의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야곱의 이야기와 요셉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인 것입니다. 특히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우리가 혈통으로 이스라엘 백성이 아니듯, 이 말씀이 우리 육신의 일에 관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셉을 이야기하면서 하나님을 잘 믿으면 세상에서 성공한다는 식의 관점은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이야기를 그렇게 본다면 이스라엘 백성, 하나님 나라의 백성도 혈통이 유대인일 경우에만 해당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전 포스트에서 요셉은 그 형제들이 볼 때 요셉이 꾼 꿈과 같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해서 그를 제하여 버리려 했던 것과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그 꼴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느냐며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은 같은 일이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장면, 요셉이 그 형제들과 또 야곱을 만나는 장면은 부활에 관한 장면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 유대인들이었듯 요셉을 팔아넘긴 사람도 그의 형제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과 같이 죽은 줄로 알았던 요셉 역시 그 아비와 그 형제들, 곧 하나님을 믿는 백성들 앞에 나타난 것과 같은 것입니다.


창세기의 말씀은 문자적으로는 하나님께서 이 물리적인 세상을 만드시고 또 만드신 사람들의 역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인도하심을 기록한 책이지만, 창세기를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은 그 눈에 보이는 세계의 어떠함이 아니라, 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세계가 열리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나라의 일원이 되어가는 과정을 설명하는 책입니다.


따라서 아담에서 또 아브라함에서부터 야곱에 이르기까지의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이스라엘이라는 지구상의 한 나라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를 말씀하심이 아니라 오늘 이 성경을 읽는 한 사람에게 일어난 일, 한 사람이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에 관한 말씀입니다. 백성이 된다는 것은 곧 나라가 이루어진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야곱의 아들들이 요셉을 버림으로 요셉이 총리대신이 된 것은 한 사람이 자기 신앙 안에서 꿈꾸는 요셉의 이야기와 같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기준으로 볼 때 보잘 것 없어서 버린 것이 오히려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꿈을 꾸었을 때 그 형들은 그 꿈을 무시했습니다. 아니 무시할 뿐 아니라 그래서도 안 되고 그럴 리도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요셉의 꿈은 아버지와 그 형들이 요셉에게 절하는 것이었습니다. 절을 한다는 것은 경배한다는 것입니다. 경배한다는 것은 절하는 대상이 나에게 주권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셉의 형들은 사냥도 변변하게 하지 못하고 농사도 제대로 짓지 못하는 어린 요셉에게 자신들이 절한다는 것은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사람이 가진 가치 기준인 육신의 능력이나, 또 사회에서 존중받는 나이와 같은 기준들로 볼 때 보잘 것 없는 것, 아니 오히려 가치 없어 보이는 것들에게 경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패자가 된 것에 자신들이 경배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 터무니없는 동생 요셉을 죽이려 했고 결국 팔아 버린 것이었습니다.


이는 예수님도 마찬가집니다. 예수님 당시 제사장과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볼 때 어느 한 구석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기 힘든 몰골의 예수님이 스스로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니 어이가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면 자신들이 예수님을 경배(절)해야 하는데 그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죽여 버렸습니다. 요셉을 그 형들이 팔아 버린 것처럼 말입니다.


이는 오늘 우리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도 인생이 가진 보잘 것 없는 모습, 연약하고 세상의 도적적인 기준으로 볼 때 추한 모습의 이 인생이 어떻게 그 자체로서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겠는가 라며 그것을 가차 없이 버리고 세상의 기준이 말하는 성공과 또 고상함과 이김을 추구하고 그것을 하나님께서 도우실 것이라고 믿는 믿음으로 일관되게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신앙은 늘 부족합니다. 우리가 아는 일반 기성교회의 성도들을 보십시오. 언제나 하나님 앞에 부족하기 때문에 늘 노력해야 한다고 합니다. 언제 그 노력이 끝날까요? 끝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이 육신을 부정하게 보고 세상의 가치로 성공한 인생이 되려하다 보니 그 부족함을 채우기 위하여 평생을 소모합니다.


하지만 우리 인생은 우리가 하찮게 여겨 버렸던 것, 마치 건축자가 보기에 쓸모없어 보여서 버린 돌과 같은 우리 인생 이 자체가 우리 인생이 가진 끝없을 것 같던 존재 정체성의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입니다. 요셉의 형들이 자기들의 기준으로 보잘 것 없다며 버린 요셉으로 인하여 그들이 굶주림을 해결하게 된 것과 같이 말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언제나 자기 존재의 이유에 대하여 배고프고 목마릅니다. 그 결핍의 해답이 예수님이십니다. 그 예수님이 보이신 것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볼 때 도무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도 유대인의 왕이라 말하기에 터무니없어서 십자가를 지시고 달리신 것이 아닙니까? 


우리도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이 인생을 항상 부족하게 여겨 그것을 어떻게든 메우려고 노력하는 삶을 사는 것이 인생입니다. 인생이라는 그 정체성을 늘 감추고 버리고 이기려 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로 그 인간이라는 정체성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가진 끝없는 결핍인 존재 정체성의 배고픔과 존재 이유의 갈증을 해결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 기준으로 볼 때 버려진 요셉과 죽임 당하신 예수님과 같이 연약하고 부정해 보이는 우리 이 인생의 본 모습이 우리를 구원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요셉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큰 줄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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