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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삼겹살, 안식일, 십일조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2. 16:23 Writer : 김홍덕

율법과 복음, 그 중에서 율법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하여 <삼겹살, 안식일, 그리고 십일조> 이 세 가지를 생각해봅시다. ‘율법에 대하여 설명을 한다면서 삼겹살은 왜 언급하지?’라는 생각이 드실 것입니다. 삼겹살을 언급한 것은 구약성경에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고 하신 계명(율법)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또 구약성경에서 십계명에 <안식일을 지키라.>는 계명이 있습니다. 그리고 또 <십일조를 하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삼겹살로 대표되는 돼지고기와 안식일과 십일조는 모두 구약 성경에서 지키라고 주신 계명입니다.


그런데 지금 이 시대에서 이 세 개의 계명을 대하는 것은 각각 다릅니다. 먼저 삼겹살, 아니 돼지고기. 지금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의 상당수가 돼지고기를 먹습니다. 이슬람과 전통 유대의식을 고수하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 일부는 말씀 그대로 지키고 먹지 않지만, 천주교나 개신교에서는 아예 교회 행사에 빠지지 않는 음식이 되었습니다.


두 번째 안식일. 안식일은 정확하게 말하면 금요일 일몰 시점부터 토요일 일몰 시점까지입니다. 그런데 이 역시 이슬람과 이스라엘 그리고 안식교도들을 제외하면 말씀 그대로 지키지 않고 변형해서 일요일을 안식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십일조. 앞에서 언급한 삼겹살이나 안식일과는 다르게 십일조에 관한 말씀은 하나님을 신앙하는 웬만한 종교에서는 그대로 지키고 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삼겹살과 안식일 그리고 십일조는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 모두다 구약시대에 주신 계명인데 하나는 문자 그대로 지키지 않고 다만 의미만 수용하고, 하나는 (시대에 맞게?) 변형해서 지키고 있고, 또 하나는 지금도 문자 그대로 지키고 있는데, 이 세 가지는 어떤 차이가 있고, 어떤 이유(기준)에서 각각 다르게 지키고 있는 것일까요?


간간히 이 질문을 신학을 전공한 사람들에게 해 봅니다. “구약시대에 주신 말씀 중에서 어떤 것은 의미만 수용하고, 어떤 것은 현실생활에 맞게 변형해서 지키고, 어떤 것은 문자 그대로 지키는데, 그렇게 나누는 기준은 무엇이냐?”고 질문해 봅니다. 하지만 어떤 경우도 이것을 명쾌하게 답하는 신학 전공자들(신학 수학을 기준으로 강도권이나 안수권이다 뭔가를 가진 그 사람들)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성경말씀을 지키는 통일된 기준이 있다면 종교나 교파가 분리될 이유가 없다.


만약 이것에 대하여 하나님을 믿는 마음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기준이 있다면 다른 것은 모르지만 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종파나 교파가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는 법에 대한 기준이 통일되고 명확한데 종파나 교단이 갈라질 이유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종교가 많고, 또 그 종교들 안에서도 교단들이 갈라진다는 것은 성경대로 사는 것에 대한 의견이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신데 이상한 일이지 않습니까?


여기에는 알고 보면 아주 불편하지만 나름 분명한 기준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람이나 교회가 유익이 되는 방향으로 해석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그것을 인정하기 어려운 것일 뿐입니다. 돼지고기는 맛있으니 먹는 것입니다. 성경을 지키는 것은 행동이 아니라 의미라는 것을 이때 도입합니다. 십일조는 내는 사람은 부자가 된다고 하니 그대로 지키려 하고, 또한 그런 사람들의 욕망은 교회 재정에 도움이 되니 그대로 지키자고 합니다. 그리고 안식일도 동일한 이유입니다. 지키기는 해야겠는데 세상이 일요일에 쉬니 그때 하는 것으로 타협한 것입니다.


좀 더 삐딱해 보일 수 있는 각도에서 볼까요? 아주 세속적인 관점(교회가 이미 세속화 되었으니)에서 본다면 종파에 관계없이 교회가 유지되는데 도움이 되도록 해석하는 모습이 아닌가 싶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돼지고기를 좋아하는데 예수 믿으려면 돼지고기 먹으면 안 된다고 말하기 힘든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이 줄 것이기 때문입니다. 또 토요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도 마찬가지 일 것입니다. 반면에 십일조는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교회 운영에 결정적으로 도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아주 부정적인 시각이라 하겠지만 아마 변명하기도 힘들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본질적인 이유는 <성경은 이렇게 믿어야 한다!>라는 주장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같은 성경을 봤는데 의가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 분인데 여러 가지 의가 나왔다면 이것은 뭔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본질적인 것입니다. 교회가 타락해서 사람 모으기 좋은 방향으로 성경을 해석하는 것은 좀 너무한 것이라 쳐도, 많은 종파와 성경을 학문으로 대한 사람들이 <성경은 이런 뜻이며, 신앙생활은 이렇게 해야 한다.>라고 주장하는 것이 다양한 것은 분명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성경말씀은 하나인데 보는 사람마다 그 해석이 다른 것입니다. 그래서 이슬람은 아직도 돼지고기를 안 먹고, 안식교인들은 일요일이 아닌 토요일(안식일)에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주장해서 모인 것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십일조는 또 이견들이 없는 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삼겹살과 안식일과 십일조를 다르게 해석하고 지키는 이유는 그 말씀에 어떤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성경을 보는 사람들이 가진 성경을 보는 자기 안에서 나온 기준(하나님의 기준이 아닌)이 다르고 여러 개라서 그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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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법이란 무엇인가?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2. 16:21 Writer : 김홍덕

로마서 이야기를 해 가다보니 <율법>에 관하여 많이 언급하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설명한 글이나 녹음파일에 기승전결이 뚜렷하지 않고 또 내용이 분명하게 전달되지 않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계속 들어서 율법에 대하여 한번 정리해 볼까 합니다.


율법에 대하여 나름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로 한 이상 좀 일목요연하게 쓰기 위하여 먼저 목차를 정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 목차에 따라 진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가급적 그러지 않으려 노력하겠지만 진행하는 과정에서 소제목이나 순서가 좀 바뀔 수도 있습니다.)


1. 삼겹살, 안식일, 십일조

2. 바벨탑

3. 선악과와 무화과

4. 돌로 떡을 만들어라

5.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6.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노라

7. 다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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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장 초반에는 아주 흥미로운 말씀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지겠는가?>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이 말씀은 유대인들을 향하여 육신의 할례가 유대인의 증거가 아니라 마음의 할례가 진정한 유대인이라고 책망하듯 말씀한 다음 유대인들의 나음에 대하여 말씀한 다음에 나온 말씀입니다.


이를 요약해보면 유대인들이 자기 육신이 유대인이라는 것을 신앙의 핵심으로 부각시키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서, 그렇다면 유대인이라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느냐 하는 것에 대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자들이라고 전했습니다. 그리고서 그렇다면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하나님께 영향이 있겠는가 하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선민의식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고,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 아주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씀을 간단하게 변환한다면 이런 질문이 나올 수 있을 것이라 생각이 됩니다.

  1. 사람이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하나님의 정체성이 훼손되는가?

  2.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누구의 유익인가?


1번 질문은 바울 사도의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유대인이든 이방인이든)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정체성이나 성품이나 경영에 변화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답은 당연히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그건 당연한 것 아냐?’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진다면 사람의 행동이 하나님의 의사 결정을 변하게 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성경말씀을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 신앙이라고,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지금도 성경을 읽고서 그 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성경을 읽고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지지 않는다, 하나님의 정체성에 변화가 없다는 것을 안다면 사람은 자기가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서 하나님의 마음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많은 사람이 성경대로 사는 것을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 또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파생된 질문이지만 두 번째,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이 누구에게 유익인가?’하는 문제입니다. 사람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은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절대적 영향 아래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하나님의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되는 세계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존재는 100% 하나님의 의도와 목적 안에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어디까지나 하나님을 위한 것이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마치 하나님이 자신을 위하여 어떤 것이라도 해 주시는 신으로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자기가 만든 하나님이기는 하지만 여호와 하나님은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믿어 유익하게 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되는 그 하나가 되는 것이 사람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어 누리는 유일한 유익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존재 정체성 전부이기에 그것이 모든 것이고, 모든 유익입니다.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기도하는 내용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기도들은 다 자기 육신의 삶이 세상의 기준에서 잘 되는 것을 구합니다. 부자가 되고, 고상한 사람이 되고, 시험에 합격하고, 좋은 배우자를 얻고, 자식이 잘 되는 것들이 그것입니다. 그리고 뻔뻔하게 그런 것이 잘 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니 그런 축복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는 하나님께서 자기 기도를 들어주고 싶은 마음이 들게 하려면 하나님께 잘 보여야 한다고 생각을 하고, 어떻게 하면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실까 생각을 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성경을 문자 그대로 행위로 지켜내면 될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생각한 그 생각대로 열심히 공로를 쌓습니다. 그것이 모두 율법에 관한 것이고, 형식이고 외식인 것을 망각합니다. 그리고서 더 나아가서 ‘하나님을 믿으려면 자기와 같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사람의 행동, 육신의 어떠함을 늘 단련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노력합니다. 


그것이 바로 바벨탑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각기 하는데 그 <이렇게>가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바벨탑을 쌓으려는 사람들의 언어를 다르게 하셨다고 하셨는데, 그 말씀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마다 하나님을 믿는 방법이 다 다른 것입니다. 같은 것을 두고 의미가 달라진 것입니다. 그것이 언어가 달라진 것입니다.


세례만 봐도 그렇습니다. 어떤 이들은 ‘침례’가 온전한 것이라면서 성경도 다 고쳐서 침례라고 기록하고, 어떤 이들은 ‘아니다 그저 물로 안수만 하면 된다.’고 하고 있습니다. 세례라는 언어가 달라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일들이 일어나는 것은 모두 사람이 자기 행함이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일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생각해낸 하나님의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어떠함이 하나님의 뜻과 정체성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는 것, 사람이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사람의 유익을 위한 것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도 신앙은 온전해집니다. 그렇지 못하고 사람들이 교회에 가서 육신의 일을 구하는 것은 그 안목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에 눈에 보이는 자기 육신의 일이 잘 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축복이고 하나님께서는 그런 것이나 하는 신으로 보이는 것입니다. 그런 신앙은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행함이 없으면) 하나님의 미쁘심이 폐하여진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되는 관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의 내용이고 본질이시고 육신을 가진 인생의 삶은 그 형식인 것입니다. 이것은 절대로 변개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방향은 하나님에서 시작하여 사람으로 나타나는 법입니다.


따라서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한다고 하나님이 변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든 것이 그렇습니다. 겉을 바꾼다고 속이 바뀌지 않습니다. 호박에 줄 친다고 수박되는 것 아니지 않습니까? 세상의 모든 것은 다 그 내용, 그 의(도)가 표현된 것입니다. 신앙적인 모든 행함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 안에 생명으로 있으면 그 생명이 본성대로 행동하게 되고 나타나게 되는 것이 성경의 모든 말씀인 것입니다. 이것 하나만 알면 성경이 다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말씀이 육신이 되신 예수님은 모든 것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 예수를 믿으려면 주일 성수해야 하고 십일조 해야 하고 성경 봐야 하고 항상 기뻐해야 한다고 그렇게 행동 강령처럼 신앙을 규정하는 것은 모두 내용이 아니라 겉에 보이는 육신의 것, 형식을 본질로 아는 것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그래서 당시의 유대인들도 로마의 성도들에게 할례를 받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을 했고, 오늘날은 교회가 ‘예수 믿는 사람은 이래야 한다.(If you believe Jesus, you have to do.)’라고 주장을 하는 것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이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이렇다는 것에서 떠나지 않으려 합니다. 그러면 큰일 나는 것으로 여깁니다. 그 큰일은 다른 것도 아닙니다. 육신의 삶에 불행이 닥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벌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육신의 일, 형식에 관한 것을 본질로 여기시는 신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당시의 유대인들을 경계하는 것이 바로 이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동일한 믿음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어떠함에 흔들리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처음 세상을 만드실 때나 지금이나 동일하십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이라는 육신(형식)을 가진 존재로 표현되는 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기본 관계고 정체성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는 육신의 혈통이나, 육신의 할례나, 또 십일조를 내는 행위나, 주일날 대예배에 꼭 가야한다고 하는 것이나, 담배를 피우지 않아야 한다는 것과 같은 것과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예수 믿는 신앙을 규정하는 기준을 삼으니 많은 사람들이 예수 믿는 것이 어려운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것> 그것만 전하면 행동은 알아서 바뀝니다. 생명이 거듭나면 당연히 거듭난 생명의 유전자와 본성대로 살게 됩니다. 그러니 사람이 행동으로 어떻게 속을 바꾸거나 하나님의 뜻과 의롭게 여기심을 바꾸려 할 것이 아닙니다. 그저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그리스도의 성품만 있으면 성경은 다 지켜지게 됩니다. 지킬 수밖에 없습니다. 성경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것인데 그 마음에 그리스도라는 생명을 가진 사람이 그 본성대로 사는데 어떻게 성경을 어길 수 있겠습니까? 그런 법은 없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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