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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셉을 인하여 야곱의 모든 가족들은 애굽으로 이주하게 됩니다. 이 이주 과정에서 요셉이 한 말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으므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이다 이 땅에 이년 동안 흉년이 들었으나 아직 오년은 기경도 못하고 추수도 못할지라 하나님이 큰 구원으로 당신들의 생명을 보존하고 당신들의 후손을 세상에 두시려고 나를 당신들 앞서 보내셨나니 그런즉 나를 이리로 보낸 자는 당신들이 아니요 하나님이시라 하나님이 나로 바로의 아비를 삼으시며 그 온 집의 주를 삼으시며 애굽 온 땅의 치리자를 삼으셨나이다(창 45:5-8)



요셉의 일은 오늘 나에게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온 것은 형들의 시기 때문이었지만 요셉은 이르기를 그 모든 일은 하나님께서 야곱의 후손들을 가뭄에서 지키시려 함이며, 그 일을 위하여 하나님께서 요셉을 보내신 것이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셉의 고백은 이 블로그에서 야곱과 요셉에 대한 글을 써 오는데 기본적인 골격이었습니다. 야곱은 이스라엘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조상입니다. 이 야곱과 요셉의 일은 오래전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나 신화가 아니라 오늘 하나님 나라를 사모하는 사람들의 신앙 여정이라는 것을 계속 이야기 해 온 것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은 비단 이 야곱과 요셉의 일뿐이 아닙니다. 모든 성경이 오늘 나에게 하시는 말씀으로 들리지 않는다면 굳이 성경을 묵상하고 신앙할 이유가 없습니다. 모르겠습니다, 성경을 공부해서 밥 벌어 먹는 것이 목적이라면 또 다릅니다만, 성경을 읽고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할 것인지, 하나님이 누구신지, 또 나는 왜 사는지와 같은 의문을 알아가고자 성경을 대하고 있다면 성경은 오늘 나의 이야기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요셉을 팔아 버린 것은 세상의 가치관



그러면 이 요셉의 이야기를 더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자신의 꿈을 이야기 하다가 미움을 당했습니다. 그 꿈은 다름이 아니라 아버지와 형들이 자신에게 경배하고 절을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꿈에 대하여 형들은 막내(12중 11번째 아들)에 가사에 별 도움도 안 되는 어린 동생이 자기들의 경배를 받을 것이라는 것을 우습게보고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형들이 그렇게 보는 것은 아주 합당한 관점입니다. 그들의 가치관이 잘못된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세상의 일반적인 관점에서는 그렇습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요셉은 아비와 형들에게 절을 받을 만한 일을 할 여지도 능력도 없는 그저 보살핌을 받아야 하는 어린 동생일 뿐이었습니다. 이것을 정리한다면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보잘 것 없는 동생이었다는 것입니다.


이 부분이 예수님과 아주 비슷한 부분입니다. 예수님을 일컬어서 성경은 건축자의 버린 돌(마 21:42)이라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건축물을 짓는 건축자의 관점에서 볼 때 예수님은 버릴 돌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관점으로 볼 때 하나님의 아들은커녕 죽어야 할 존재로 보였던 것을 말씀하심입니다. 요셉도 같았습니다. 형들이 요셉을 보는 관점이 그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예수님을 보잘 것 없이 여겨 십자가에 못 박았더니 그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살리시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보이신 모습이야 말로 하나님이 보실 때 정말로 살아 있는 생명이 있는 모습이라는 것을 보이심으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모습,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을 보고 그것이 육신으로 한 세상 살아가는 자신의 모습이라는 것이 깨달아진 모든 사람들 역시 하나님 앞에서 죽은 자와 같은 자리에서 구원을 얻게 하심과 같이 요셉도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곧 이 땅위의 하나님 나라의 구원을 위해 요셉을 먼저 애굽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요셉과 예수님의 모습은 우리 인생의 연약함이 곧 구원임을 보이시는 말씀



예수님과 또 요셉이 이러한 과정을 보인 것은 우리 모두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늘 세상의 기준으로 볼 때 보잘 것 없는 것을 버리려 합니다. 육신의 연약함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가끔씩 망상처럼 육신의 일반적인 한계와 정체성을 넘어선 능력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그렇습니다. 때로는 슈퍼맨 같은 능력이 있었으면 좋겠고, 때로는 흥부와 같이 갑자기 큰 부자가 되면 좋겠고, 또 때로는 투명인간과 같이 되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시간을 넘나드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들이 그런 상상을 해 보는 것은 그렇지 못한 육신의 한계가 한스럽기 때문입니다. 하늘을 날고 무슨 일이든지 큰 힘들이지 않고 쉽게 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해서 슈퍼맨이 부럽고, 마음에는 늘 갖고 싶은 것, 사고 싶은 것 넘치는데 그렇지 못한 경제 사정이 아쉬우면 부자면 좋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육신이 연약하다는 것, 또 맘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늘 버리고 싶어 합니다.


그런데 정작 구원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볼 때 너무 연약해서 버리고 싶은 인생의 한계 그것이 나를 구원한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 안에 있는 연약함, 야곱의 아들들, 그리고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이 볼 때 너무나 보잘 것 없어서 도저히 경배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죽여야 하는 동생 요셉과 가난한 목수의 아들 예수와 같이 연약함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으면서 육신의 능력을 초월해가는 것이 신앙이 좋은 것이라 여깁니다.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 없는 방언을 하거나, 육신이라면 누구나 먹고 자야 하지만 그것을 참고서 기도하는 것과 같은 것을 좋은 신앙으로 여깁니다. 그것을 좋은 신앙으로 여기는 것은 참 고상한 것 같지만 실상은 요셉을 팔아버린 마음이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마음이며, 아담이 자신을 부끄럽게 여긴 마음입니다.



육신의 연약함,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 구원을 위하여 예비하신 것



하지만 하나님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께서 괜히 인생을 그렇게 만드신 것이 아닙니다. 적어도 하나님의 생각과 뜻이 온전하다는 것을 믿고자 한다면 하나님께서 인생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것 역시 하나님의 온전하심이라는 것을 믿어야지, 인생이 가진 약점과 한계를 극복하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 이 인생의 연약함이 너무 좋은 것이고, 그 전지전능하신 하나님의 계획안에서 아주 아주 온전한 것이라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요셉이 그 형들에게 그 형들이 자신을 버렸던 그 마음의 근원이 바로 하나님께서 그 아비 야곱과 자손들을 구원하실 계획이었다고 고백함과 같이 우리 모든 인생들도 결국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의 연약함이 하나님께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신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이 육신의 연약함이 바로 하나님께서 인생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 합당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시기에 인생들이 볼 때 연약한 육신의 정체성이 너무 좋은 것이라고 생각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구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육신의 모든 한계를 십자가에서 보이시니 하나님께서 온전한 아들로 또 살아 있는 존재로 보셔서 죽음 가운데 두시지 않고 다시 살리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우리가 가진 육신의 연약함은 요셉의 형들이나 예수님 당시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과 같이 버리고 죽일 것이 아니라, 이 연약함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위하여 예비 된 것이라는 것을, 그것이 바로 나의 정체성이고 존재의 목적과 이유였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도록 이 말씀을 주신 것입니다. 다시 말한다면 이 연약한 육신, 하루에도 몇 번씩 그 가진 한계를 벗어버리고 싶은 이 육신을 가진 인생 그 자체가 하나님께서 그 성품과 영광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예비하신 것임을 우리가 순종하는 것이 진정 온전한 믿음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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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사는 세상이 시끄러운 이유는 알고 보면 단 한 가지 오직 이것 때문입니다. ‘나는 옳고 너는 틀렸다.’는 생각 그 하나 때문입니다. 그 하나가 사람들 사회에 성문법으로 정하여 규제하는 모든 죄악 된 행위를 표출하는 것입니다. 나는 옳은데 네가 자꾸 틀린 것을 옳다 하니 화가 나서 때로 죽이며, 전쟁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장에서 싸우는 사람이나 나라간의 전쟁이나 이유는 같습니다. <너는 악하고 나는 선하다.>는 그것 하나뿐입니다.


싸우는 것이 아니고 도적질과 같은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신이 행하는 것이 그럴 수밖에 없는 선한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야 도적질을 하는 것입니다. 자기 기준에 자신이 정당하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이래야겠다고 생각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의 판단이 옳다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스스로 선하고 악한 것을 판단하는 그 하나가 모든 인생의 죄와 문제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 유일한 문제 하나의 시작이 아담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 그것이 시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시간적인 시작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사람 마음 안에는 누구나 그런 본성이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고 그것이 아담을 시작으로 표출되었다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의 범죄가 우리 사람들 안에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우리 사람들이 그런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아시고도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인가? 그런 범죄를 지을 여지가 거의 100%인 사람을 만들어 놓고, 죄를 지으면 벌을 주시겠다고 하시는 고약한 분이신가 하는 문제가 있을 것입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전에 쓴 글 <에덴동산의 미스터리>를 참조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아담은 오실 이의 표상



그러므로 세상의 모든 죄는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자리를 사람들이 떠나서 생겨난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만이 창조주로서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한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실 수 있음에도 사람이 스스로 그 자리로 올라서려고 한 것이 자기 자리를 떠난 것입니다. 그것이 원죄고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로 인하여 사람들은 모든 갈등과 죄의 문제에 빠진 것입니다. 이 일이 아담으로부터, 아담이 그것을 보임으로 모든 사람이 그와 같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이 바로 아담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런 아담이 예수님의 표상이라는 것은 정체성에 관한 것이 아니라, 그 법입니다. 아담이 사람 안에 선과 악에 대한 판단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으로 죄가 드러나게 했듯이,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원래 모습을 보이심으로 모든 사람에게 은혜가 되셨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즉 아담은 죄를 드러나게 했고. 예수님은 구속을 드러나게 했는데 그 법이 모두 한 사람이 그것을 보이므로 모든 사람이 그와 같다는 것을 드러내었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그렇게 죄를 세상에 드러나게 했고, 예수님은 그렇게 세상에 은혜가 드러나게 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바울 사도는 이것을 은혜라고 또 선물이라고 또 은사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로마서 시작 부분에서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신령한 은사(롬 1:11)를 말하겠다고 했습니다. 은사를 말하겠다고 한 이유는 바로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주장이 옳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를 쓰고 있는 줄기가 그것입니다. 율법을 지켜야 하나님 앞에 의로워진다는 주장, 예수님을 제대로 믿으려면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그 주장에 맞서 온전한 하나님의 복음과 율법을 주신 의미는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것입니다. 그 맥락에서 볼 때 아담은 율법을 주장하는 자들과 같이 사람들의 죄를 드러나게 하고, 또 사람의 본성을 죄로 규정짓는 것이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그것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 은혜와 선물이라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논쟁이 가능한 것, 아니 이 논쟁의 핵심은 어떤 각도에서 보면 육신을 가진 인생이 그 중심에 있습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음으로 육신을 가진 인생을 선과 악으로 판단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였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이 어떤 목적과 의미를 가졌는지를 십자가에서 보이신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육신을 정죄하였고(부끄러워하였고) 예수님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구원의 은사를 보이셨다는 것입니다.


아담은 육신을 정죄하였고(부끄러워하였고) 예수님은 육신을 십자가에 드리심으로 구원의 은사를 보이심


이것은 로마에 있는 성도들, 그리고 또 오늘날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해당이 되는 말씀입니다. 아니 절실한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들 교회에서 장립집사, 권사 그리고 장로가 되는 과정에서 내는 헌금을 많이 비판합니다. 직분을 매매하는 것 같다고, 또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 보다 세상에서 능력 있는 사람이 직분을 가지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사회 윤리적 비판의 문제 이상의 문제가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의롭게 여기는가 하는 문제의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적인 요소, 신앙은 인정되지만 재정적인 측면이나 명예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것 보다는 신앙에 큰 문제가 없다면 기왕이면 다홍치마니 재력이 낫고 명예가 있는 사람을 항존직으로 선출하면 교회가 하는 일에 도움이 될 것이고, 그렇게 하면 하나님의 일이 잘 될 것 이라는 복선이 깔려 있기에 세상적 역량이 나은 사람을 장립집사, 권사 그리고 장로로 선출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임직식 때 헌금을 얼마나 하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무엇이 그 기준이냐 하는 것입니다.




오늘도 아담과 그리스도의 법이 공존



이것은 바울 사도 당시에 로마교회와 여러 교회에서 겪었던 문제와 동일한 것입니다. 당시에는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면 할례를 받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했습니다. 할례를 받는 것도 육신의 일이고, 율법을 지켜내는 것도 육신의 일입니다. 그와 같이 지금도 육신의 어떠함이 조금 더 나으면 하나님 앞에 좀 더 의롭다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육신의 어떠함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바로 아담으로부터 세상에 들어온 것이라는 것이 바울 사도의 말씀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이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하는)육신을 보니 자기가 먹은 선악과, 곧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니 부끄럽더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 꼴로는 안 되겠더라는 것이 아담의 생각이었듯, 바울 사도 당시에 유대인들이 로마교회의 성도들을 보고서 율법의 흔적이 육신에 없으면 온전하지 않다고 했고, 지금 이 시대는 기왕이면 세상에서 성공한 사람이 교회에서 중직을 맡는 것이 선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은 아담과는 반대였습니다, 아담은 선과 악을 판단하는 가치를 먹고서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부끄러워했지만, 예수님께서는 그 육신의 한계와 아담이 부끄러워한 모습으로 십자가에 달리심으로 이 육신이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유일한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신령한 은사요 은혜며 선물이라고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이신 우리 인생의 정체성은 우선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한 벌거벗은 모습이었습니다. 그것은 인생들이 숨기고 싶어 하는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 그것이 오히려 시인되고 드러날 때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고, 아담이 육신이 부끄러워 무화과 나뭇잎 곧 율법으로 가렸다고 말씀하신 사람들의 마음(율법을 육신으로 지켜내는 행동으로 부끄러움을 감추려는 마음) 손과 발에 못 박히므로 행동으로 인생이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인생들이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어떻게 정죄하는지를 보이고,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인생이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지를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으로 인하여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예수님으로 인하여 구속이 되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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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Category : 김집사의 뜰/덕이의 신앙 이야기 Date : 2016. 11. 15. 17:19 Writer : 김홍덕

몇몇 분들이 '덕이의 신앙 이야기' 연재를 요청하셨지만 다른 글들을 쓰기에 바빠서 죄송하게도 대응하지 못했습니다. 마침 이번 주는 대입 수능이 있는 주간이고 저의 둘째 아들도 이번에 수능을 칩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 이전 생각에 대하여 정리해 봅니다.


사설이 길게 느껴지실지 모르지만 이 카테고리는 지극히 저의 사적 이야기를 하는 곳이니 조금 더 이야기를 해 본다면(덕이의 신앙이야기와 금방 밀접하지 않더라도) 이제 블로그를 운영함에 있어 매일 7시에 글이 게시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하는 것은 블로그는 알람 기능이 없기 때문에 제 블로그의 새 글이 올라왔다고 여러분께 알려드릴 수 없기 때문입니다.(물론 페북 친구로 등록하신 분은 예외지만)


아울러 이 <덕이의 신앙 이야기>는 페북이나 다른 SNS로 발행하지 않고 저의 블로그에 직접 접속하시는 분들만 보실 수 있도록 간혹 연재할 예정입니다. 이렇게 말씀에 대하여 글을 쓰는 저도 여러분과 같이 인생의 희노애락을 가지고 있으며 아마 대부분은 여러분과 비슷하고 또 많은 것에서 여러분에 미치지 못하는 부족한 사람입니다. 그래서 가끔은 그런 마음들 이야기 하고 싶은데 이야기하는 것이 어려워서가 아니라 어디다 해야할지 모르겠네요... 그래서 늘 카페를 잘 운영해볼까? 하니면 이 블로그를 완전히 홈페이지로 만들까 생각한답니다.



정말로 사설이 너무 길었군요...


지금 생각해보면 제가 고등학생일 때는 세상에 저보다 더 어른이나 똑똑한 사람 없는 줄 알고 살았습니다. 저의 관심사는 오직 교회에서 잘난 인간으로 인정 받는 것 뿐이었고, 그런 저의 기준으로 볼 때 저의 바람은 충분히 충족되고 있다고 착각 아니 완전한 망상 속에 살았습니다.


이제 저의 둘째 아들이 수능을 치고 나면 저희 집의 애들도 어느 정도 다 자란 시대로 저의 삶이 접어 들겠군요. 그래서 오늘 저의 그 시절을 돌아보니 정말로 철도 없고, 아무 개념도 없이 살았습니다. 학력고사(지금의 수능)는 그저 다른 학교에서 치는 모의고사 정도로 생각했고, 학력고사로 인생에 어떤 영향이 미칠지에 대한 고민 같은 것이나 중압감 같은 것은 엿바꿔 먹은지 오랜지였습니다.


그렇지만 저는 내가 늘 하고 있는 이 신앙생활이 저를 인도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딱히 부자가 되어야겠다는 마음은 없었는데 그런 개념과는 독립적으로 하나님을 믿는 것이 전부라는 생각 안에는 그렇게 공부하지 않고 살아도 하나님께서 먹여살리실 것이라고 생각했는지 적어도 결과적으로 볼 때 삶의 겉모습은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않는 삶을 살았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지방의 한 대학에 입학하게 되었는데, 대학생활은 그야말로 더 개판이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교양 영어 교수님이 부친의 제자였는데, 동창회에서 저의 아버지를 만난 그 교수님은 다음 수업시간에 저를 호출했습니다. 하지만 그날 저는 대출을 시키고 교회에서 놀고 있었습니다. 대출한 친구는 처음 출석 부를 때 대답을 한 죄로 출석을 다 부르고서야 저를 부른 교수님께 불려 나가서 저희 아버지께 전해달라는 인사말을 듣고서 그날부로 저의 아바타가 되었습니다. 1년간.


그렇게 교회에 몰입했던 저의 생활은 교회 안에서 당연히 눈에 띄는 존재였고, 군에 갔다 온 선배들까지 위로 최대 7,8년 선배들이 있는 대학부에서 저의 존재는 뜨거운 감자 그 자체였습니다. 무엇보다 문제가 되는 것은 주둥이였습니다. 욕을 하고 다녀서가 아니라, 다들 예수 믿겠다고 모인 사람들에게 예수 믿는 것에 대한 지적과 예수 믿는 것에 대한 잘난 체에 쩔어 있는 저의 모습이 좋게 보일리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상당한 부분의 행위 규범을 지켜내는 저의 모습은 달리 역공할 수도 없어서 오히려 사람들을 약 오르게 하는 그런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당시 대구에 막 태동하기 시작한 IVF가 교회에 들어오게 되고 저도 초기에는 수련회도 같이 가기도 했는데, 왠지 저는 주일까지 겹쳐가며 수련회를 해대는 IVF를 용납할 수 없었고, IVF방식으로 대학부를 이끌어가는 세력에게 대항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특히 1학년 여름, 대구, 경북 및 울산지역 전체 IVF 수련회를 대구 가창의 한 수련원에서 가졌는데 그때 강사로 나선 간사라는 선배(지금으로 보면 그냥 고참)가 구원에 대하여 말하면서 '흔히들 천국에는 면류관 구원과 개털모자 구원이 있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고 강의하는 것을 듣고, 평소 교회에서 듣는 것과 다른 소리를 한다 싶어 강의 중간에 손을 들고서 '그러면 한 달란트 받은 자의 한 달란트를 뺏어서 다섯 달란트 받은 자에게 준 것은 어떻게 해석하냐?'고 물어 강사를 당황(답하지 못했음-정확히는 '성경을 그렇게까지 상세히 볼 필요는 없다'고 함)하게 하였고, 저희 교회 리더들이 저를 그 강의장 밖으로 끌어내기도 했었습니다.


저의 그 싸가지 없었던 대학생활이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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