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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9-31) 의인은 없나니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6. 18:26 Writer : 김홍덕

바울 사도가 로마서 3장에서 말씀하시는 것은 <율법과 믿음>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습니다. 그 ‘율법과 믿음’, 혹은 ‘율법과 복음’이라 할 수 있는 이 논쟁에 있어서 “세상에 의인은 없다.”라고 선언을 하는 것은 어떻게 보면 좀 갑작스런 면도 없자나 있습니다. 하지만 율법과 죄는 불가분의 관계이고, 또한 모든 사람에게 있어 율법의 문제는 아주 중요한 신앙의 문제이기 때문에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법이 정해지지 않으면 사람들이 볼 때 불합리하고 억울해도 죄가 되지 않습니다. 이것을 아마 ‘죄형 법정주의’라고 말합니다. 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법이 없으면 죄가 없습니다. 앞에서 바울 사도가 율법이 없는 이방인들도 다 법이 있는데 그것은 이방인의 본성이 율법이 된다고 했습니다.(롬 2:14) 그런 면에서 보면 율법이라는 것이 모세의 법이나 구약성경이라고 한정지을 수 없는 것임이 분명한 것이라는 것도 알 수 있습니다.


문제는 <“율법이라는 것이 왜 하나님 앞에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것인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뜻 생각하면 ‘법이라는 것이 의로운 사람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 아닌가?’ 싶은데 말입니다. 그런데 율법이라는 것 이 사람을 죄인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무릇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것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롬 3:19)


그러면 법이라는 것이 의로운 사람을 보호하고 죄인을 제어하는 것이 그 목적인데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왜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가?’, 더 정확하게는 ‘사람이 죄인이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인가?’하는 것일까요? 이것은 사람의 본성과 또 그에 맞게 하나님께서 법을 주신 목적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 안에서 하나님께서 율법이라고 칭하시는 법의 정체성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먼저 율법에 관한 사람의 본성이라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서 선악과의 사건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사람이 타락하게 된 이유는 모두가 아시다시피 선악과를 먹었기 때문입니다.(이 선악과에 대한 상세한 내용은 본 블로그의 창세기와 선악과 관련 포스트를 참조해 주십시오.) 사람이 선악과를 먹게 된 과정에서 결정적인 사건은 마귀의 유혹입니다. 


마귀의 유혹은 하나님께서 아담(‘사람’이라는 뜻임)에게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은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하나님의 말씀과 같이 죽게 되어서가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과 같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셨다는 유혹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사람(하와 그리고 아담)이 그것을 보니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마귀의 말이 그럴싸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는 것입니다.(그런 마음이 바로 하늘에 오르려고 (바벨)탑을 쌓은 사건이 된 것입니다.)


그런데 마귀의 말을 믿고서 선악과를 먹고 보니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실제로 아담의 눈이 밝아지긴 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의 세계에 대하여 밝아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어떠함을 판단하는 눈이 밝아진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어떤 것은 선한 것이라고 주장하고 인정하고, 또 그 이편의 것은 악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기준이 자기 안에서 밝아졌다는 것입니다.(그래서 선악과입니다.)


그런 눈으로 아담이 자기 자신을 보니 벌거벗었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이 벌거벗고 있었다는 것이 문제가 된 것이 아닙니다. 아담과 하와는 선악과를 먹기 전에도 그냥 벌거벗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갑자기 문제가 된 것은 벗었다는 것에 대한 기준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기 전에는 벗었다는 것을 두고 부끄러운 것(잘못된 것 혹은 악한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는데 선악과를 먹고서 밝아진 눈으로 보니 그것이 잘못되었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담은 숨었습니다. 여기서 아담이 부끄러워서 숨은 것은 벗은 몸을 하와가 보는 것이 부끄러웠다는 것이 아닙니다. 자기의 모습 그 자체가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 앞에서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내가 숨었나이다.’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육신이 옷을 입지 않은 부끄러움이 아니라, 인간의 정체성과 본성이 하나님 앞에 불의한 상태라고 스스로 여겼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본성과 정체성과 육신을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자신 스스로 사람이 된 것도 아닌 사람은 자기의 모습이 부끄러워 숨겨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된 것은 팔이 하나 떨어져 나갔거나 갑자기 염산을 얼굴에 쏟아서 흉측해져서가 아닙니다. 단지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 그 하나의 차이 밖에 없습니다. 그러니까 단 하나, 사람이 자기 안에 스스로 가진 기준(피조물이 스스로 기준을 가졌다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이 자기를 부끄럽게 여기게 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을 죄 아래 두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사람이 한 일은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기를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나라나무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민족입니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율법을 받은 민족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율법대로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받는 민족입니다. 다시 말해서 무화과는 이스라엘 즉 율법을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스스로 가진 기준으로 자신을 죄 아래 두고 보니 그대로 둘 수 없어서 한 일이 율법으로 자신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행하면 자기가 볼 때 부끄럽게 여겨지는 인간의 본성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 안에서 불순한 욕망(하나님이 주신 것임에도 스스로 불순하게 여기는 욕망, 욕망은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어떤 의(義) 아래서 표현되느냐의 문제 - 다른 곳에서 설명하겠습니다.)을 이기려고 규칙(율법)을 정하여 금욕적인 행동과 수련을 하고, 또 QT나 기도나 예배나 금식과 같은 행위와 의식으로 자신이 볼 때 부정하다 여기는 인간으로서의 자기의 모습을 감추려고 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유대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사람이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바로 이런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이라는 존재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그 부끄러움을 가릴 어떤 행동이나 노력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은 다 율법 아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인간 정체성을 자기 안에서 어떤 선과 악을 구분하는 기준으로 보니 부끄러워졌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율법 아래 있다는 것은 모두 죄 아래에 있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은 자기 정체성의 자리를 떠난 것이기에 하나님이 정한 자리를 스스로 떠나서 그 정체성을 스스로 심판했으니 그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은) 죄인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떠난 것이기에 마치 시간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시계와 같이 하나님의 의 안에서 그런 인생은 다 사망 가운데 있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아담이 스스로 숨고 또 무화과로 자기가 부끄럽게 여기는 것을 가리려 했듯이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볼 때 부끄러운 인간의 정체성을 가리는 각종 규칙과 법을 정하고 그것대로 살려고 항상 노력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법과 규칙 그것이 율법인 것입니다. 그 율법은 자기 양심에서도 나오기도 하지만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을 율법으로, 그러니까 그것을 지키면 자기가 생각하는 인간의 모순과 부끄러움과 추함이 가려질 것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역설적으로 그렇게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라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십자가에 못 박았고, 또 초대교회 때는 율법을 지키고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이 율법을 지킨 가장 큰 이유는 자기 기준으로 볼 때 사람이 부정하고 부끄러운 존재라고 인식한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가진 기준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건방지게 심판하고선 그 추함을 가리기 위하여 율법을 도용한 것입니다. 아담이 무화과 나뭇잎을 따서 자기 부끄러움을 가린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자기가 자기의 기준으로 자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부끄러움을 감추기 위하여 또는 행동으로 그것을 만회하기 위함이라면 제 아무리 날고 기는 노력을 해도 되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그렇게 한다는 것은 자기가 자기 기준을 가진 자, 곧 선악과를 먹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율법을 지키는 것은 자기가 죄인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모습이 이 블로그에서 늘 말씀드리는 바와 같이 생명이 표현되어 율법을 지켜내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켜서 의(자기 자신이 선으로 삼는 의)에 이르려고 하는 것이기에 예수님과 사도들에게 책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을 지키는 이유가 자신이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교만하여 져서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정죄하고 그 부정함을 행동으로 율법을 지켜서 감추려하는 모든 노력은 다 죄인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모세의 율법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이것을 지키면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는 모든 기준이 전부 율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회적인 법이나, 자기 양심이나, 또한 사람이 ‘사람은 이래야지!’라고 생각하는 것이나, 또 신약성경의 말씀이라도 사람을 일단 부정하게 보고서 그것을 만회하는 수단으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면 모두 하나님 앞에서 의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의인이 없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목적과 정체성대로 인정하지 않고 자기가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판단하고서 ‘사람은 이래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신다.’고 여겨 양심에서 비롯된 것이나, 모세의 율법이나, 심지어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는 것까지 모두 다 의롭지 않은 것이고 율법 아래 죄인으로 있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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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하나님께 어떤 피해가 갈까요? 분명히 하나님과 사람은 불가분의 관계이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나님께 어떤 영향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하나님에서 사람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지, 사람에게서 하나님을 향하는 관계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냥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천지와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이시니 세상과 사람을 다시 만들면 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셨다는 것은 하나님께 사람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의미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사람이 어떻게 한다고 하나님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돈 많은 부자가 필요해서 휴대폰을 사지만 휴대폰이 고장이 나거나 말썽을 피운다고 부자가 거지가 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 사도가 유대인들이 율법을 가졌음으로 선민사상에 빠져서 율법의 증거인 할례를 부각시켜 자신들의 정체성을 차별화하고,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을 책망하면서도 그래도 유대인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맡은 민족이라는 장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그리고 다시 그 장점이라는 것에 대하여 유대인들이 아니면 안 된다고 생각할 이유가 없다는 것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음에 있어 자신들이 하나님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다. 아마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은 아니라고 펄쩍 뛸지 모르지만 이는 아주 명백한 사실입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기도가 무엇입니까? 자신들이 세상에서 성공해서 안 믿는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서 하나님을 믿을 것이니 자신들에게 축복을 해 달라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축복할 근거를 자신들이 마련하려 합니다. 바로 육신으로 말씀을 그대로 지키면 하나님께서 그 보답으로 세상에서 성공하는 축복을 주실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요약하면 자신이 하나님을 움직이는 조건 그 자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어떻게 해야 하나님께서 움직이신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마음을 움직이는 법>과 같은 소리도 합니다. 그 내용은 색깔은 다양하지만 결론은 하나님 앞에 어떤 행위의 공로를 드리는 것이나, 또 자신의 재화와 용역을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돌이키신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 때문에 그 뜻을 움직이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렇게 말하면 분명히 성경에는 하나님께서는 그 뜻을 돌이켜서 사람을 축복하신다는 말씀을 수도 없이 하고 있다는 것을 근거로 반문할 것입니다. 하지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하나님이라는 신의 정체성입니다. 하나님은 그 이름이 <여화와>이십니다. ‘스스로 있는 분’이라는 의미입니다. 이는 하나님은 존재의 신이라는 의미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마음을 바꾸시는 것은 사람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과 사람 어떤 존재로 관계를 맺게 되느냐에 달린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가장 핵심적으로 관심을 두는 것은 “너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아 너는 하나님을 어떤 분이라고 여기느냐?”라고 물으시는 것이 가장 궁금하신 분이십니다. “너는 나를 존재의 신으로 보느냐 아니면 행위의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의로 여기는 신으로 보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버지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아들에게 아버지는 아들의 공로로 만나는 존재가 아니고, 아버지 또한 아들을 아들의 수고의 정도를 보고 아들을 삼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나 지금의 교인들이나 모두 자신들이 어떤 종류의 믿음의 행위를 하는 것을 두고 그것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한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언제 그랬냐?’고 할 수 있겠지만, ‘기도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시지 않는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물질적인 축복을 주시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것이 다 그것입니다. ‘내가 어떤 <행위>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움직이시지 않는다, 즉 신실하게 대하시지 않는다.’고 믿고 생각하고 그렇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이것을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다 거짓말쟁이라도 하나님께서 신실하심이 변하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해도 하나님은 신실하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울 사도가 이것을 전했더니 사람들은 ‘그러면 우리 사람이 악해져도 괜찮다는 말이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놀라운 것입니다. 왜냐하면 지금도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복음은 행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나님께서 사람의 행위에 좌지우지 되시는 분이 아니라고 하면, 놀랍게도 ‘그럼 막 살아도 되냐?’고 묻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생각이 어찌 그리 똑같은지 놀랍다는 것입니다.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많다고 했으니 죄를 더 짓자.>고 하는 것과 같은데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런 논쟁 아닌 논쟁, 문제라고도 할 수 없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 생명이 되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모든 (행함으로 비치는)말씀이 생명의 본성으로 나타나는 것이라는 것을 알지 못함에서 비롯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언제나 <하나님에게서 사람을 향한> 방향이라는 것도 몰라서 그렇습니다. 이것만 알아도 사람이 그 마음에 ‘내가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저렇게 해 주실 것이야!’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 행위가 하나님의 신실함의 조건이라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에 대하여 말씀하시는 것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율법은 언뜻 보기에는 ‘이렇게 하면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실 것이다.’로 보이지만, 그 본질은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은 이렇게 살게 될 것이다.’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행위로 지키는 것이 아니라, 그런 법으로 살게 되는 생명이 되는 것에 대하여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에게서 사람으로 향하는 방향성과는 반대로, 또 자기 행위가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신실함이 온전해지고 하나님께서 자신을 의롭게 여기실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율법을 몸으로 지켜내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면 결국 사람이 알게 되는 것은 “아 이것은 행위로 지키라는 것이 아니구나!”, “아 이것은 행위로 지킬 수 없는 것이구나!”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존재의 자리에 있어야 하는데 자신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한 가치관을 가진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즉 자기 자리, 정체성을 벗어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자기 정체성을 벗어난 자리에 있는 것, 자기 존재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 죄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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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바벨탑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2. 16:25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이 성경을 보는데 이견들이 있는 것은 비단 삼겹살, 안식일, 십일조에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세례도 다릅니다. 장로와 목사에 대한 관점도 교파마다 다릅니다. 이렇듯 사람들이 성경을 보고서 그 의미를 해석하는 관점이 다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심각한 것은 그 다른 것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마다 주장하는 것이 다를 수는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침례로 어떤 사람은 물적신 손으로 안수하는 세례면 된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래야만 해!>라고 주장하는 순간 문제가 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의를 주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인데 당연이 옳은 것을 주장하고 관철시켜야지!!”라고 보통 말할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반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가장 온전한 하나님의 의를 가지고 오셨는데 왜 그 의를 주장하시지 않고 십자가에 불의하다는 죄를 지고 십자가를 지셨는가?”라고 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의를 말씀하셨을 때 다른 사람이 “그게 아니야!”라고 말할 때 죄인이 되셨는데, 지금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반드시 이래야 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장들이 충돌하여 교파가 갈라지고, 또 교회 안에서 말로 할 수 없는 다툼이 생기고 교회가 갈라서고 하는 것입니다.


창세기에는 사람들이 스스로 하늘에 오르려고 탑을 쌓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바벨 광야(땅)에 모여서 하늘에 오르려 탑을 쌓았습니다. 목적은 사람들이 흩어짐을 면하고 서로 하나가 되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이것을 아주 못마땅하게 여기셨습니다. 아니 사람들이 하나님께 이르려고 그렇게 엄청난 공사를 목숨 걸고 하겠다는데 왜 그것이 그렇게도 못마땅하셨을까요?


하나님은 결국 사람들이 바벨탑을 다 쌓을 수 없도록 조치를 취하십니다. 그 조치의 내용은 다름이 아니라 언어(말)를 나누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서로 말을 알아들을 수 없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을 사람들은 단순하게 영어, 불어, 독어, 한국어와 같이 언어 체계를 달리 하신 것이라고만 생각합니다. 하지만 정말로 의사소통이 안 되는 것은 같은 언어로도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일상에 늘 하는 말 “말이 안 통하네?”라는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물론 언어가 다르면 의사소통이 힘들지만 어지간하면 바디랭귀지로 소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데 못 알아듣는 것은 도리가 없습니다. 세례와 침례 서로가 옳다는 주장을 어느 한쪽이 알아들었다면 아마 세례 의식은 지금 통일되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도 통일되지 않았다는 것은 서로 말을 못 알아듣고 있기 때문입니다. 무엇을 말하는지를 알아듣지 못한 것이 아니라, 상대의 의에 동의하는 것, 곧 네가 옳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옳다고 주장하는 것이 굽혀지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의에 져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 섬기는 방법에 대하여 서로 굽히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언어가 달라진 것의 본질이고, 같은 성경을 보고 그 지키는 것이 각양각색이 된 이유인 것입니다.(예수님께서 지는 것이 죽고자 하는 자가 살 것이라고 하셨는데 말입니다.)


바로 이렇듯 성경을 볼 때 ‘이것이 옳은 것이야!’라고 주장하는 것, 여기가 율법이라는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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