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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11) 또 하나의 죄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1. 07:00 Writer : 김홍덕

육신을 어떻게 볼 것인지가 율법에 대한 개념을 흐리게 한 것



우리 율법으로 우리의 죄를 깨닫게 된다고 하는 것은 율법, 곧 행위를 지켜내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하나님 앞에서 죄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왜 죄인가 하면, 먼저 하나님의 법은 속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생명의 법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인가 하면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고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는 것이 생명의 본성과 같이 있어서 그것이 행동으로 표현되었을 때 율법을 지키는 것이 되는데 그와 반대로 노력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그런 시도, 곧 행동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는 노력을 하는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신 이 육신을 가진 삶의 목적을 잊고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으로 보니 이 육신의 모습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을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선악과를 먹은 것이고, 그런 마음 때문에 자꾸 뭔가 하려는 것입니다. 이 육신이 그대로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서.


사람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은 율법이 정죄를 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이 인생의 존재 목적을 잊고서 자기 스스로가 하나님이 주신 이 인생의 모습과 육신의 정체성을 부정하게 보고서 그것을 자기 기준으로 바로잡고자 생명이 표현되는 법인 율법을 하나님의 법과 다르게 해석하여 율법을 지켜서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기준을 가리려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죄인이 되신 예수님



그런데 한 가지 문제가 더 있습니다. 그렇게 율법으로 행함으로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는 것은 또 다른 죄를 낳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율법을 인하여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하나님의 법을 알지 못했다는 것을 시인한다는 것은 이제 죄를 씻고서 의롭게 된다는 의미인데 다시 죄인이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가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이 가진 가치관에서 벗어나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가지신 의의 세계 안으로 들어간다는 의미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세상을 배신하는 것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는 것은 거꾸로 세상에서는 죄인이 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가치관은 이렇습니다. 모두가 육신의 한계를 극복하고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는 것이 선한 것입니다. 그것이 성공이고 의로운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다보니 이 육신의 연약함을 인정한다는 것은 그 성공의 기준, 그 의의 기준으로 보면 죄가 되는 것입니다. 율법을 잘 지켜서 인생의 연약함을 극복하는(사실은 감추는 것) 것이 의로운 것인데, 그것은 의로운 것이 아니라고 인정한다는 것은 세상의 의에 대하여 반역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 반역이 예수님의 반역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십자가에 못 박으면 스스로 권능으로 내려와야 하고, 돌로 떡을 만들어야 하며, 높은 곳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육신을 가지는 것인데, 잘하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 모든 것을 버리고는 하찮은 인생의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돌아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그 반역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종교적인 규례를 잘 지켜내어야 하는데 지키기는커녕 지키지 않으면서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가난한 목수의 아들이요, 죄인들과 함께 먹고 마신 예수님은 그 어떤 모습으로도 하나님의 아들이라 여길만한 것이 없기에 흠모할 것이 없는 존재인데 그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아들의 모습이라며 세상에 보이시니, 육신의 능력을 극복하고 화려한 권능으로 높은 곳에 올라야 성공이라고 주장하는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예수님은 반역자 그 자체요 최고의 극형인 십자가에 처형되어야 할 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자신은 율법을 완성하기 위하여 오셨다고 하셨고, 자신을 안식일의 주인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즉 율법을 지켜서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가 자기 육신이 되신 분이기에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하나님의 법으로 율법의 모든 것이 완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되는 법, 즉 하나님의 의가 행동으로 표현되었는데 그 모양을 보니 율법과 같더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율법으로 죄를 깨닫고 의인이 된다는 것은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 기준으로 죄인이 된다는 것



다시 말해서 우리가 율법으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이심으로 율법을 지켜 의롭게 되려는 모든 인생들, 그리고 율법을 지켜야 비로소 의롭게 되는 것이 인생이고 성공이며 의라고 여기며 끊임없는 노력을 하던 인생들이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모습을 보이심으로 사람들이 예수님을 보고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보고서 사람들은 자기가 죄인임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달은 것과 같이.


그런데 그 예수님의 모습이 앞에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른다는 가치관으로 볼 때 터무니없는 괴변이었기에 예수님은 다시 죄인이 되신 것입니다. 이 죄는 하나님 앞에서 죄가 아니라 바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셨다는 것은 죄인이 아니신 예수님께서 인생들이 가진 육신으로 오셔서 육신의 실체를 보이심으로 육신을 가지고 의로워지려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셨기 때문에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지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께서 죄인이 아니심에도 이 땅에 오셔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는 육신을 가진 인생의 모습을 보이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는 것은 또한 우리가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 의로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죄인으로 못 박히셨다는 것은 우리가 또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기준으로는 죄인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율법으로 죄를 깨닫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므로 율법을 주신 의로움을 회복하고 의롭게 되는 것이지만, 그것은 역설적으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된다는 것이기에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이 세상의 가치기준으로 죄인이 된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죄인이 되는 또 다른 죄이기도 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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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굽으로 내려가기를 두려워 말라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창세기 Date : 2016. 11. 19. 07:00 Writer : 김홍덕

아들 요셉이 살아 있을 뿐 아니라 애굽의 총리대신이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야곱은 그것이 족하다고 하고 죽기 전에 가서 아들 요셉을 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요셉을 보러 떠납니다. 그런데 문제는 요셉이 애굽에 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세상의 가치관이 다스리는 제국으로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에 다시는 사람이 세상으로 나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애굽은 내려가는 곳



이러한 상황을 잘 표현한 말이 어쩌면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말일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올라간다. 내려간다.’는 말은 위도에 따라 하는 말이 아니라 가고자 하는 장소와 출발하는 장소의 규모를 가지고 이야기 합니다. 우리나라로 보면 서울로 가는 것을 ‘상경’한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애굽은 그 당시 주변에가 가장 큰 제국인데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말씀하시기를 <애굽으로 내려간다.>고 하신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법을 기준으로 보면 하나님의 사람인 야곱이 거하는 곳이 세상의 가치관이 다스리는 애굽보다는 훨씬 크고 높은 지역으로 보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애굽으로 가는 것을 내려가는 것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셨다는 것과 같은 개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니 하나님의 의가 있는 곳이 높고 큰 성읍이고 도시고, 세상의 가치관이 다르시는 곳은 그 성읍이 아무리 크고 화려해도 낮고 작은 도시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이제 다시 문제로 넘어 가보겠습니다. 애굽이란 하나님이 보실 때 낮은 곳이고, 하나님의 의가 없는 곳인데 왜 그곳으로 자기의 사람 야곱이 내려가는데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신 것일까요? 하나님을 믿는다는 많은 사람들은 지금도 교회나 신앙을 떠나서 세상의 가치관이 대접받는 곳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할 뿐 아니라 터부시하고 있고 심지어 다른 성도가 그렇게 가면 걱정이나 심지어 정죄까지 하는데 그것을 두려워말라고 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어떤 의미인지를 보겠습니다.


창세기를 보면 야곱의 조상 아브라함과 또 아비인 이삭도 다 애굽으로 내려 간 적이 있습니다. 내려간 이유도 다 같습니다. 기근 곧 흉년이 들어서 갔습니다. 흉년이 들었다는 것은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기본적으로 육신의 먹거리가 고갈되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만 성경에서 하나님의 사람들의 먹거리를 육신의 먹거리로 한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라는 말씀이 그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사람에게 흉년이 들고 먹거리가 줄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계시가 줄었다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런 하나님의 사람을 위하여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십니다. 내려가는 것과 애굽으로 올라가는 것은 다른 것입니다. 애굽으로 내려간다는 것은 가는 사람이 애굽보다 높은 하나님의 의안에 있다는 것이고, 행여 애굽으로 올라간다고 한다면 그것은 애굽으로 가는 사람이 가진 의보다 애굽의 의가 더 높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애굽의 의를 자기 왕으로 삼겠다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애굽으로 올라가는 것이지만 내려간다는 것은 애굽의 의를 왕으로 삼는 것, 세상의 가치를 자기 삶의 목적으로 삼는 것과는 다른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내려가기를 두려워말라고 하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창 46:2-4)고 하신 것은 애굽에서도 세상의 가치관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함께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른 말로 야곱은 세상에 살아도 하나님의 의가 삶의 목적인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야곱의 후손들이 애굽에서 나오는 일을 두고 애굽에서 올리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너와 함께 애굽으로 내려가겠고 정녕 너를 인도하여 다시 올라올 것이며…(창 46:4)



신앙은 세상이란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 같은 것



많은 신앙인들은 세상으로 나가는 것을 늘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교회 다니는 사람이 교회에 다니지 않는 사람과 어떤 사업을 도모한다고 하면 다들 두려워하고 터부시합니다. 주일이 아니라도 세상의 가치관에 빠진 것을 심히 두려워하고 정죄하기까지 합니다. 예전에 어떤 교회에서는 (그 교회가 평소에 주일날 돈 쓰면 안 된다고 하는 곳도 아닌데) 젊은 새댁들이 주일 예배를 다 마치고서 백화점에서 쇼핑한 것을 두고 세상 것을 좋아 한다며 뜨끔할 정도로 문제를 삼는 것을 본 적이 있는데 그런 것입니다.


이러한 문제는 사실 기독교 신앙 안에 상당히 넓게 퍼져 있습니다. 세상과 함께 무엇인가 하는 것을 엄청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가급적 기독교인들이 운영하는 사업체, 같은 교회에서 신앙생활 하는 사람들의 물건을 사려고도 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커지면 모여서 살려고 하고, 그런 생각은 많은 경우 사회에 대하여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하게 되고, 믿지 않는 사람을 아주 무시하고, 심해지면 모여 살면서 사회와 격리된 삶을 좋은 신앙이라고 여기게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예수 믿는 사람들이 세상과 접촉하고 세상과 연관이 있어지는 것을 경계하는 것은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유명한 복서인 알리는 전성기에 팔로 자기 몸통을 가리지도 않고 싸웠습니다. 상대를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정말로 세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면 경계하고 터부시할 것이 아니라, 세상에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세상을 구원할 수 있는 생명이 자신에게 있다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생명이 없으니 세상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이 블로그를 지속적으로 봐 오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그렇게 세상을 등지려고 하는 신앙은 옳은 신앙이 아닙니다. 신앙이란,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란 결국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리는 그림과 같습니다. 세상과 또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믿는 사람을 보고서 하나님이 계심을 알게 되고 고백하지 않는다면 어디서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겠습니까? 


그래서 신앙이란 항상 세상으로 내려가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세상의 가치관 아래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그 모습을 보고 하나님 아들이 어떤 존재이며, 자신들이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 살 것이 아니라 자기에게 깨달음을 주고 있는 하나님 아들의 영을 가진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서 하나님을 알고 또 다시 하나님 아들의 영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되는 것이 바로 십자가의 도이기도 한 것입니다.


아브라함도, 이삭도 또 야곱도 그리고 요셉도 다 애굽으로 내려가거나 팔려갔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은 애굽에 내려가서 아름다운 아내로 인하여 죽게 될까봐 누이라고 속이는 일을 부자가 동일하게 보여주었습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은 모두 기근으로 인하여 애굽으로 내려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것은 단순히 시대적 상황에서 도우시는 하나님의 역사하심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한 사람 사람이 어떤 과정을 거쳐서 교회의 시대를 맞이하고 또 교회의 일원으로 살아갈 정체성을 회복하는지를 설명하시는 것입니다.


기근이라는 것은 흉년이 들어서 먹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먹어야 사는 사람으로서는 더 이상 그곳에 있을 이유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말로 하면 먹을 것이 있는 곳에 가는 것이 자기 본성에 관한 일이라는 것입니다. 생명은 살고자 하는 것이 본성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심은 하나님의 본성에서 비롯된 것



예수님께서 하늘에서 이 땅에 오신 것도 어찌 보면 같은 맥락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늘에 먹을 것이 없었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라는 존재,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정체성은 하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세상에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아들이란 아버지가 가진 의가 형식을 가진 존재로 나타나는 것이 아들인데 형식이 없고 의만 있는 하나님의 영적 세계 안에는 아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존재는 당연히 그곳이 어디든 형식이 있는 세계이어야 존재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들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하나님의 큰 본성이시기도 합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자신이 위대한 영적 존재인 신으로 계신다는 그것으로 만족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만약 그렇다면 굳이 세상을 또 사람을 만드셔서 그 존재의 영광을 표현하려 하실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우리 사람이, 이렇게 글을 쓰고 보고 있다는 것은 세상이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런 존재가 실존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미 이렇게 인식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진 세계를 만드셨다는 의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게도 세상에서 하나님의 의가 표현되게 하시겠다는 목적이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형식이 없는 영적 세계에 기근이 들었다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우시고 늘 하신 말씀이 가서 복음을 전하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다른 이유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보이신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늘 나타나야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려면 당연히 세상이 있어야 하고, 애굽이라고 터부시 할 것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그림을 그리는 사람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삶을 세상에서 살아내는 것이 아들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예수님과 같이.



세상을 등지고 살 것이 아니라, 세상을 섬기듯 살아 하나님의 의를 전하는 것이 진정한 교회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그저 믿는 사람들끼리만 모여서 신앙 생활하는 것, 세상과 등지고 사는 것은 하나님의 법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도 아니고 올바른 신앙생활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라고 하셨지 애굽의 의를 네 주인으로 삼으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표현하면 가서 제자 삼으라는 것입니다. 


가서 제자 삼으라고 하니 선생과 같이 가르치고 모르면 책망하라는 것으로 착각하는데 그것은 십자가의 도를 모르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종이 되어 섬기는 법입니다. 그 섬김을 본 사람도 그렇게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는 것을 깨달아 그렇게 사는 사람이 되게 하라는 것이 십자가의 도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깨닫고 스스로 자기가 순종하는 삶을 사는 것이 바로 진정한 가르침을 받은 온전한 제자이기 때문입니다.


요셉은 그 형들에게 자신이 애굽의 총리가 된 것은 하나님께서 구원을 예비하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야곱에게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하셨고, 반드시 애굽에서 올리겠다고 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이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는 십자가의 도를 깨달으면 세상을 터부시하는 것이 아니라 그곳에 내려가서 종과 같이 섬김으로 하나님의 성품이 드러나게 하는 것을 위하여 지음 받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를 맛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세상 속에서 세상과 분리되려고 할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 내려가서, 그 세상을 종과 같이 섬기는 삶을 살아내기에 충분한 생명이 자기 안에 있는 것이 바로 하나님이 함께 하심이니 그 함께 하심으로 세상의 사람들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의 생명을 보고 그 생명이 자기가 온전히 주인 삼아야 할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고 세상에 속한 것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사람으로 살게 하기 위해서는 애굽으로 내려가는 것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즉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이 신앙에 아무런 지장도 없고 두려워할 일도 경계할 일도 터부시할 일도 아님을 알고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인 교회를 온전히 누리는 법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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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에 좀 오래 다닌 사람이라면 누구나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친다’는 식의 말을 들어보게 됩니다. 때로는 교회에 다니는 친구들이나 친한 이들끼리 장난 같은 것을 하면서 이것을 농담처럼 주고받기도 하고, 때로는 위로의 말씀으로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칠까요? 이 말씀은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정말로 바울 사도가 언급하신 것과 같이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를 더 지으면 되는 것일까요? 왜 이런 말씀을 하셨을까요?


이 말씀을 이해하려면 율법을 주신 이유에서부터 시작하면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실제로 바울 사도도 율법이 죄에 대하여 개입했다는 말씀과 함께 이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한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넘쳤나니(롬 5:20)


이 말씀에 앞서 바울 사도는 한 사람, 곧 아담으로 인하여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한 사람,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었다는 말씀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보다 앞서서는 법이 없으면 죄가 없다는 말씀을 했습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의 표현이 <율법을 더하여>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율법이 가입하였다 즉 율법이 더해지고 추가되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떤 의미냐 하면 아담이 가진 죄는 율법이 없었기에 죄가 되지 않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아담으로부터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모세의 때 까지도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왕노릇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롬 5:14) 


즉 모든 사람,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과 같이 자기 안에서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과 세상을 심판하여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판단하는 사망의 자리에 있었지만 이것을 죄로 알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그렇게 살라고 만드신 것이 아닌데 사람들이 그러고 있으니 하나님의 창조 목적을 떠나 죄와 사망의 자리에 있는 것인데 사람들이 스스로 가진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죄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상황에서 하나님은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여 하나님이 주신 육신을 부끄럽게 여기고, 그 부끄러움을 육신의 행실과 겉모양을 바르게 하면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가 된다고 생각하고 살고 있는 모든 인생들의 그 가치관이 하나님의 법에 맞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드러내시려고 모세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율법은 죄를 드러나게 하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라고도 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사람들이 아담과 같은 마음을 가졌기에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자기 육신의 행동을 제어하면 속사람이 바뀌어서 하나님 앞에 의로운 존재가 된다고 여겨 여러 모양으로 자기 육신의 삶을 통제하고 꾸미고 수련하고 절제하는 것을 보신 하나님께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은 그렇게 겉모습이요 형식인 행동을 바꾸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속사람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는 것이라는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 바로 모세의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의 여러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율법을 지키려고 하면 사람이 그것을 지킬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 앞에서 의로운 존재가 될 것인가 하는 것에 있어 이 율법은 생명의 법이기에 하나님이 율법을 주시는 그 의가 자기 안에 생명으로 잉태되어지면 그 생명의 법대로 사는 모양이 바로 율법을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했던 것이 모두 죄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가 되는 것은 사람이 행동으로 자신을 의롭게 하려는 생각을 가지는 것의 뿌리가 바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판단한 것과 같이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의 삶의 모양이 그대로는 하나님 앞에 의로울 수 없겠다는 스스로 내린 선악의 판단에 따라 이 육신을 의롭게 할 행위 규범을 좇기로 하고서 율법을 지키려 노력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율법을 주신 의를 알지 못하고 그 율법을 지켜서 의롭게 되려는 생각 자체가 죄의 열매인 것입니다. 죄는 당연히 율법을 지켜야겠다고 생각하게 한 자기 판단, 곧 하나님이 주신 이 육신으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질 수 없으니 이 육신을 행동으로 잘 다듬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 선악과를 먹은 생각인 것입니다.


사람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이 육신을 주신 목적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원래 아는 것이었는데 자기가 자기 육신을 부정하게 여기는 선악의 기준을 자기 것으로 삼고서 자신을 판단하므로 잊은 것입니다. 하나님을 표현하라고 주신 육신의 삶을 가지고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하니 터무니없이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것은 죄를 정죄하기 위하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사람을 만드실 때 가지신 그 목적이 사람 안에 있으면 사람이 어떤 모양으로 살게 될 것인지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 지으신 목적이 자기 인생의 목적과 의미가 되면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을 둘 수 없고,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할 수 없으며, 그 존재 자체가 안식이 된 존재기에 안식일을 지킬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신 것이 바로 율법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율법을 주신 의도하심이 사람에게 온전히 열리게 된다면, 자기 판단과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자기 인생과 또 하나님 만드신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면서 한편으로 자기 육신을 율법으로 단련하려 한 자기의 의가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그 사람은 당연히 자기가 하나님 앞에서 떠난 사람이었다는 것을 시인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 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라는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은혜가 넘치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는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일이 자기에게 일어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렇다면 사람이 할 수 없는 가장 크고 근본 되는 것이 무엇이냐 하면 사람이 스스로 존재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사람을 존재하게 하신 것과 존재하시게 한 목적을 가지신 이가 그것을 알게 하시는 것이 가장 큰 은혜인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이 하나님이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떠난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깨닫고 그 죄를 하나님께 고백한다는 것은 이제는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목적을 자기 존재의 의미와 삶의 목적으로 여긴다는 것이니 그것이 은혜인 것입니다. 스스로 존재하지 않은 자기 존재의 목적과 의미를 하나님으로부터 깨닫게 되어 자신의 것이 되는 것은 자기로서는 할 수 없는 것인데 하나님이 주신 것임을 순종하는 것이니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목적대로 자신의 죄가 드러나는 것을 보고 그 죄를 고백하면 사람이 하나님께서 자신을 만드신 원래 목적의 자리로 옮겨지게 되는 것이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입니다. 죄가 많다는 것은 지은 죄가 많다는 것이 아닙니다. 죄가 많다는 것은 고백이 많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생들을 고문해서 죄를 드러나게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사람의 죄가 은혜로 이어지려면 죄는 반드시 그 사람 스스로가 고백하고 시인하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더하여 죄가 드러난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시므로 그 율법을 인하여 자신의 죄가 드러날 때 비로소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법이 있어 죄가 드러나는 것이고, 그것이 율법으로 인하여 우리가 죄를 깨닫는 것이며, 그렇게 고백된 것이 많을 때 은혜가 넘친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많다는 것은 죄를 더 지으면 지을수록 하나님 앞에서 은혜가 넘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스스로 자신의 죄를 고백하는 것이 많으면 하나님의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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