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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3:9-31) 값없는 은혜의 시작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0. 19. 11:38 Writer : 김홍덕

율법은 가만히 두고 있으면 그 의미를 알기 힘듭니다. 하지만 율법이란 하나님의 생명이 본성이 된 사람의 삶의 모습이라는 것은 알지 못한 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의에 이를 것이라고 생각을 하고서 그것을 지키고자 시도한 사람은 무엇인가를 알 수 있게 됩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아 이것은 사람이 일점일획도 어김없이 지키는 것은 정말로 힘들구나!’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은 사람은 두 가지 반응을 보입니다. 하나는 ‘내가 부족하여 잘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더 열심히 해야겠다!’라는 사람과 ‘이걸 정말로 사람이 의지를 가지고 지킬 수 있을까?’생각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어떻게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명하셨으니 하나님을 무시한다면 몰라도 하나님을 주님으로 섬기는 사람은 이것은 지키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보고 듣고서 그것을 행동으로 지켜내려고 노력했는데 잘 되지 않으면 의심이 들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는데 과연 사람의 역량으로 이것을 지킬 수 있다고 생각하셨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니 사람의 능력은 누구보다 잘 아실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 외에는 알 수 없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하나님을 믿으려면 이렇게 하라고 계명을 주셨는데 사람이 해 보니 잘 안 된다? 그러면 뭔가 이상한 것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 순간 그것을 느끼지 못하고 더 열심히 해야겠다고 각오를 다지는 것은 다른 어떤 간절함이 있어서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 육신의 일을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 육신의 삶에 어떤 불편한 일이 생기지 않아야 한다는 간절함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있으니 하나님이 자기 삶을 주관하신다는 것은 알기에 하나님께 잘못하면, 하나님이 지키라고 한 것을 지키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벌이 육신의 삶에 미친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죽어서 지옥 간다는 대명제가 있지만 지옥에 가는 이유도 행위가 잘못되어 간다고 하니 같은 범주라고 봐야 할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인생이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기 소유의 인생이 복을 받아야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간절함 때문에 율법을 육신으로 지키기 힘들다는 것을 알지만 어쩔 수 없는 듯 그것을 지키려고 노력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는 다르게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셨으면 사람의 역량을 잘 아실 텐데 이 율법을 행위로 지켜낼 수 있다고 여기시고 우리에게 주셨을까?’라는 생각이 들면 은혜의 길로 들어선 것입니다. 그런 생각이 사람을 지혜롭게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만드셨고 그 사람에게 지켜야할 계명을 주셨는데 해 보니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렵다? 그러면 어딘가에 오류가 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컴퓨터를 조립해서 만든다고 생각해 보겠습니다. 인터넷을 찾아서 조립법을 인쇄해서 옆에 두고 알려준 대로 각 부품을 주문하여 받아서 조립을 했는데 잘 안 된다면 사람들은 필시 ‘어디가 잘못됐지?’라고 돌아봅니다. 잘 안 되니 어떻게든 되게 하려고 자기 고집대로 계속 밀어 붙이면 필시 다 망가지고 말 것입니다. 잘 되지 않으면, 매뉴얼이 잘못되었거나 뭔가 부품이 맞지 않거나, 어떤 것이 불량이거나 한 것이니 그것을 찾으려고 해야지, 자기 가진 것대로 해 놓고 정상 작동될 때까지 계속 전원만 넣었다 뺐다가 한다고 해결될 문제가 아닌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도 하나님의 율법과 또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 들고서 그것을 어떻게 해야 지켜낼 것인가 자기 생각대로 방법을 찾아서 열심히 했는데 잘 되지 않으면 뭐가 잘못된 것인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흔히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을 두고 사람들이 뭔가를 해 보려고 하니 하나님께서 사람이 지킬 수 없는 계명을 주어 죄를 깨닫게 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일정 부분은 일리가 있지만 한 가지 하나님은 그런 짓궂은 신이 아닙니다. 


정확하게 말한다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회복한 사람은 이런 행동을 하게 되어 있음을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니 계명을 지키라는 것은 그런 존재가 되라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은 계명을 들고서 자기가 가진 기준으로 그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 생각해보니 사람이란 존재가 너무 부끄럽고 연약해서 그냥은 하나님의 법을 지킬 수 없으니 행동으로 지켜내기 위한 각종 규칙과 법을 정하여 지키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잘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면 문제는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나 하나님의 계명이 잘못되었거나 그것을 지키는 사람들이 그 율법을 잘못 이해하고 있거나.


여기서 하나님을 온전한 신으로 믿는 믿음이 있으면 답은 하나가 됩니다. 그것은 사람이 율법에 대하여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됩니다. 율법은 몸으로 지켜 행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자기의 생각과 기준과 의로서 하나님이 주신 율법과 성경과 말씀을 보았다는 것을 포함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자신이 인정하는 것, 그것이 바로 자기 죄를 시인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고백이 율법으로 인하여 죄를 깨닫게 되는 고백인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율법을 자기가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보았다는 것,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하나님의 생명과 성품이 있는 사람의 삶의 모습인데 그것을 흉내 내어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 자신의 죄를 깨닫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실 때 정한 사람의 정체성의 자리를 벗어난 죄의 자리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율법 앞에서 자기의 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자기의 죄를 깨달은 사람에게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 은혜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기 자리를 벗어난 것을 알았을 때 그러면 어느 자리가, 어떤 정체성과 어떤 모습이 하나님께서 정하시고 의롭게 여기시는 사람의 자리인지를 예수님을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예수의 은혜는 율법 앞에서 율법을 지키려고 그렇게 노력하고 수고한 사람 앞에 어떤 행위도 필요치 않다는 위로가 있는 은혜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려고 자기가 세운 의에 기준에 맞는 행동으로 그렇게 노력했건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인생 앞에 사람이 수고하지 않은 하나님의 은혜인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기 위하여 그렇게 자기를 쥐어짜듯 수고한 것을 값으로 내어 놓았지만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만 드러난 인생에게 이제는 사람이 수고하지도 않고 값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는 하나님의 은혜가 주어진다는 것입니다. 율법 앞에서 자기의 의로 그것을 지켜 하나님 앞에 의로워지려고 애쓴 삶이 하나님 앞에 죄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그 값없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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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일을 지키는 문제는 하나의 종파(그것이 이단이냐 정통이냐를 떠나서)가 생길만큼 민감한 문제기도 하고, 또 기독교의 많은 교단들의 특징에서 주일(안식일이라고 주장)을 어떻게 보내는지에 대한 차이가 나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십계명의 제 4계명이 말씀하시는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이 지키는 것일까요? 그리고 거룩하게 지키는 것은 또 어떤 것이고, 한 가지 흥미로운 관점을 도출한다면 ‘왜 기억하여 지키라.’고 하셨을까요?


1. 무엇이 안식인가?

2. 무엇을 기억하라는 말씀인가?

3. 거룩하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4. 지킨다는 것은 어떤 것인가?



1. 무엇이 안식인가?



안식이라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사람이 안식한다는 것은 안식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사람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주일날 예배시간에 늦지 않기 위하여 서두르다가 가스를 잠그지 않고 렌지에 뭔가를 올려놓고 왔다고 한다면 안식이 되겠습니까? 그런 상황이라면 비록 몸이 안식일을 지킨다고 혹은 주일을 지킨다고 교회에 가서 앉아 있는다고 안식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물론 그런 상황은 흔치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극단적인 상황이 아니라도 사람의 몸이 교회에 혹은 쉬는 장소에 있다고 또 아무 것도 하지 않는다고 안식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안식을 누리려면 안식의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즉 사람이 안식에 적합한 상태가 될 때 비로소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떤 상태가 될 때 안식일까요? 그것에 답을 얻고자 한다면 사람에게 있어 가장 큰 고민, 그러니까 사람으로 하여금 안식할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일까요? 돈일까요? 아니면 건강? 아니면 자식이나 가족 문제? 물론 그런 것은 상황에 따라 큰 걱정이기는 하지만 인류, 인생이라는 존재, the Man이 공통적으로 가진 근심은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모두 a problem입니다.


모든 인생,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가지게 되는 공통된 문제며 그것이 해결되지 않으면 절대로 쉴 수 없는 문제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나는 누구인가?’ 혹은 ‘왜 사는가?’하는 존재 정체성의 문제입니다. 사람들이 평생을 들여 수고하는 것이 바로 이것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돈이 인생의 목표, 즉 자신에게 존재 의미를 부여한다고 여겨 돈 버는 것에 집착하고, 그와 같이 어떤 이는 명예, 어떤 이는 자녀 특히 아들에게서 그 의미를 찾으려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런 끊임없는 수고가 답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목적으로 또 삶의 의미로 살아간 많은 사람들이 죽을 때가 되어서 ‘인생은 허무하다.’, ‘인생은 무(無)다.’라고 푸념하고 후회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인생을 산 사람은 안식이 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살면서 자기가 삶의 의미라고 여긴 것이 일순간 채워져서 만족하는 순간들이 있지만 그것은 안식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안식은 다시 문제에 빠지거나 돌아가지 않는 온전한 안식을 말씀하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는 천지창조의 과정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사실 안식이라는 개념의 근본은 하나님께서 천지창조를 마치시고 칠일 째에 안식하신 것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목적이 달성되었기에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안식하실 수 있는 존재가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이었다는 것입니다. 바로 그 하나님의 창조목적이자 하나님께서 창조를 끝내고 안식하실 수 있게 한 창조는 다름이 아닌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묘한 연결 고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안식일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이유는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엿새 동안 세상을 만드시고 안식하셨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창조를 마치시고 안식하신 것은 바로 사람,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사람이 나왔기 때문에 안식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안식은 사람, 하나님께서 사람이라 인정하는 존재가 나왔기 때문에 목적이 달성되었고 일을 마치시고 안식하셨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께 안식을 줄 수 있었던 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그 존재의 영광(나타나심)과 성품을 표현하시려는 뜻을 세상이라는 형식을 표현하시겠다는 계획이 사람으로 온전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즉 세상으로 표현된 하나님의 성품이 사람을 통해서, 사람을 보면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누구신지 알게 하시겠다는 뜻이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안식은 곧 온전한 사람, 곧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가진 사람이 나올 때 비로소 안식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말씀(계획)이 육신(형식)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이 표현된 존재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고 안식하셨는데 그 일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과정을 기억하고 그 창조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존재인 그리스도의 성품을 가진 사람이 나와서 안식하심을 기억하고 안식일을 지키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누가 안식할 수 있는 존재, 누가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존재인지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만족하시고 안식하신 것은 다른 말로 하면 사람이라는 존재가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가져올 수 있는 존재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육신이 된 존재이므로 하나님께서 쉬신다면 그 존재도 당연히 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안식일을 지킬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어야 안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앞에서 우리가 어떤 사람, 아니 사람에게 어떤 근심이 해결되어야 안식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있어 삶의 의미, 인생의 목적, 이 육신을 가진 삶의 의미와 목적이 자기 안에 분명해진 사람이어야 안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분명하게 밝아져서 그것이 자기 생명이 된 사람은 바로 안식 그 자체입니다. 그러니까 안식할 수 있는 정체성을 가진 존재가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뜻이 자기 삶의 목적이 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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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노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8. 14:58 Writer : 김홍덕

우리는 앞에서 <심청전>의 이야기를 잠깐 했습니다. 심청전의 주제는 <효(孝)>입니다. 효를 이야기하기 위해 심청이는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심청전을 오늘날의 인권적인 관점에서 보면 분명히 인신매매입니다. 하지만 시대적 상황이나 심청전이 소설이라는 점을 고려한다고 해도 그것을 문제시 삼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적어도 심청전을 학교에서 배우고 읽은 사람들에게 심청이는 효도를 한 딸이지 인신매매의 희생자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이 심청전을 읽고서 ‘효도를 하려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하는구나!’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 효도의 내용이 심청이와 마찬가지로 부모님의 눈을 뜨게 하는 것이라도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심청전을 읽으면 그 전하고자 하는 의미인 <효>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심청전의 본질은 아버지가 눈을 뜨려면 딸이 바다에 빠져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효도하라는 것임을 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기 위해서 문자 그대로 바다에 빠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율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의 율법, 십계명과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에 나오는 율법들은 문자 그대로 지켜야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 모든 율법과 계명은 하나님의 의도하심이 있다는 것입니다. 심청전이 효도를 이야기한 것처럼. 그뿐 아닙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도 그렇습니다. 성경의 모든 말씀이 기록된 문자와 문장대로 육신이 행할 때 말씀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고자 한 것이 자기 안에서 자기 삶으로 표현될 수 있을 때 비로소 성경을 지키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겨 자기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것이 심청전이 자기 것이 되는 것과 같이.


그런데 사람들은 성경을 대하면서 문자 그대로 행하려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얼마나 잘 하느냐가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의로운지를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도승이나 신부나 수녀와 같이 사는 것이 주님의 종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렇게 몸을 제어하고 또 삶을 오로지 종교적인 의식 안에만 두는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행동과 삶이 자기 삶에서 많아질수록 하나님 앞에서 의롭고, 또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어디까지가 종교와 신앙의 세계이고 어디까지가 육신의 삶일까요? 그게 구분이 가능할까요? 그렇다고 그것이 구분되지 않으니 그렇게 사는 것은 의로운 것이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만약에 예수님의 오심을 두고, 하나님의 말씀이 제사장으로 오셨다고 했다면 분명히 신부나 수녀나 목사나 수도승과 같은 사람이 좋은 신앙일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그것이 육신의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삶은 어떤 경계 없이 모두가 다 하나님의 말씀을 표현하는 삶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모르면 육신의 삶과 신앙의 삶을 분리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보이신 것은 육신을 가진 사람의 삶, 그것 전부가 하나님의 말씀과 의를 표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보이셨는데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말씀의 어떤 부분이라도 그 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킴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또 그것이 말씀을 따라 혹은 지키는 것이라고 산다고 여기는 것은 어두운 신앙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주제가 효도가 아니라 바다에 빠지는 것이라는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이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우리가 율법과 성경의 말씀을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바울 사도는 로마서 3장에서 새로운 법, 곧 믿음의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율법 즉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면 분명히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는 분명하고 또 아주 쉬운 법이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창조하신 분이시니.


여기서 우리는 어쩌면 다 아는 뻔한 답을 이야기 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라고. 그러나 이것은 일반적인 생각과 같이 뻔한 답이 아닙니다. 앞에서 이야기 한 것처럼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문자 그대로 몸으로 지켜내는 것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새 법이 되시는 것은 예수님의 정체성을 인함입니다. 예수님의 정체성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고서 문자 그대로 행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의 방향성을 가지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율법이나 성경을 지켜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신 분이십니다.


그 예수님께서 오셔서 율법을 목숨과 같이 지키는 유대인들이 볼 때 어이없는 행동을 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물론이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이들의 상을 엎어 버리고, 성전을 헐면 삼일 만에 다시 세우겠다고 하는 등 율법을 작정하고 어기려한 사람과 같은 모습을 보이셨습니다. 더욱이 예수님은 한술 더 떠서 <나는 율법을 폐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고 하셨습니다.(마 5:17)


그럼 이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예수님은 율법을 잘 지키시지도 않으셨는데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시고 또 율법의 일점일획도 빠짐없이 다 이루어질 것이라고(마 5:18) 말씀하신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것은 율법이 의도한바 목적이 다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바로 그 율법의 완성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 예수님께서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자기 존재의 정체성이라고 믿고 순종하는 사람은 모두 율법을 완성시키고 다 지킨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예수님을 믿고 교회에 나가니 성경대로 살려고 노력해야 하고, 또 육신이 연약해서 잘 지키지 못하니 오늘도 내일도 어제처럼 계속 노력해서 성경을 지키려고 노력하고 있는 사람의 신앙이 온전한 신앙입니까? 그런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님은 율법을 다 이루신 분이고, 그분을 믿고 그분이 보이신 사람의 정체성이 곧 나의 정체성이고 나의 모습과 삶인 사람이라면 당연히 율법이 다 완성된 상태로 살아야 하는 것이지 율법을 또 성경을 지키고 따르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다면 아직 예수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완성되었는데 노력할리는 없는 것이니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시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그래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괜히 이 땅에 오신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예수님과 같은 존재, 같은 정체성을 가진 생명이 되기를 바라셔서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사람이 스스로 알지 못하는 자기 삶의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왜 율법의 완성일까요?


우리는 앞에서 심청전 이야기를 했습니다. 심청전을 읽고 부모님을 위해 바다에 빠진 사람과 심청전을 알지 못해도 부모님을 잘 공경하는 사람이 있다면 누가 심청전을 완성한 사람이겠습니까? 그건 아주 명확한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사람들은 성경을 볼 때는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의도는 외면하고 성경말씀을 문자 그대로 지키려고만 합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의 완성이신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모든 말씀의 목적이 바로 예수님으로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성경은 행동강령으로 보이기도 하고 또 그와는 색다르게 행동은 무관하게 믿기만 하면 된다는 것으로 보이기도 합니다만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신가?>입니다. 그리스도가 누구신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우리가 그리스도가 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은 바로 하나님의 의가 삶이 된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것을 위하여 만들어 졌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인생의 답이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길을 찾는다는 것이 인생에서 잘 살고 부자로 또 건강하게 사는 조건에 대하여 기록하였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렇게 성경을 대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행동으로 지켜내려 합니다. 그리고 그들의 목적은 인생 그 자체가 잘 먹고 잘 사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하여, 또 그것이 해를 당하지 않기 위하여 기도하고, 경건하려 애씁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고 여깁니다. 하나님이 우리 행동에 반응하시고 그 결과 복을 주신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이 모든 성경을 행위로 지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게 합니다. 


하지만 이런 생각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아닙니다. 누가 차에 기름을 넣어주기 위해서 차를 사겠습니까? 하나님도 사람의 육신이 먹고 입는 것을 풍족하도록 하실 목적으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차를 사는 것은 기름을 넣어주기 위함이 아니라 차를 통하여 나의 의도(이동)를 이루기 위함이듯,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것도 사람의 삶을 풍요롭게 하시기 위함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나타내시기 위함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나님의 의도대로 삶으로 하나님의 의와 뜻을 표현하는 인생이 바로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은 행동으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먼저 있어 그것이 표현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표현이 어떤 것인지를 성경이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리스도의 제조법이나 그리스도가 되는 법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설명,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설명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또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정체성이 자기 인생의 정체성이고 삶의 이유와 목적임을 아는 사람은 그 안에 하나님의 의가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의가 생명이 되어 그 생명의 본성이 표현되어 행동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하라”고 하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그러니 성경에서 무엇 무엇을 하라는 말씀의 본질적인 의미는 그런 행동을 하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마치 심청전은 효도할 마음이 있으면 바다에도 빠질 수 있다는 것이지 바다에 빠지는 것이 효도라고 말하고자 함이 아니듯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그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있고, 예수님께서 보이신 그리스도의 운명과 정체성이 자기 삶의 운명과 정체성이 된 사람의 삶이 어떻겠습니까? 그 사람의 삶은 이러나저러나 또 사나 죽으나 그 삶의 모양이 어떠해도 늘 율법과 복음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지 않겠습니까? 아니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고양이가 배타고 바다에 간다고 상어가 되지 않듯,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 사람의 삶은 삶 전체가 온전히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 삶이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고 그 삶이 율법과 모든 계명이 이루어진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사람도 율법을 완성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의도가 있어 율법으로 표현되는 행함이 삶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는데 당연히 율법을 완성한 삶이 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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