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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의에 대한 이견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하나님의 은혜 아래에 있으면 죄가 없다고 하는데 사람들은 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죄인이라고 고백하고 기도할 때는 회개부터 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배워서 그렇게 살아가는 것은 성경에 대한 바른 이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성경 말씀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분명히 말씀하셨는데도 늘 자신을 죄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바로 육신의 행동에 관한 것을 기준으로 하나님의 의를 가늠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이 가진 육신은 늘 연약해서 자기가 선하게 살기로 마음을 먹고 다짐을 해도 예기치 않은 불이익이나 무시를 당하면 돌변하듯 하는 것이 인생인지라 그것을 보면 사람들은 자신의 상태로는 하나님께 의롭다 인정을 받을 수 없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대단히 경건한 것 같으나 오히려 하나님을 크게 모독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고넬료에게 가보라고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내용 그대로 “하나님께서 정하다고 한 것을 사람이 부정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께 주장하고 논쟁하겠다고 한다는 것은 하나님과 자신을 같은 급으로 보지 않는다면 그럴 수 없으니 그 또한 큰 죄악입니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는데도 자꾸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할까요? 물론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사는데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면 자신이 의로운 존재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데 왜 그렇지 못한가 하는 것입니다. 정말로 하나님 앞에서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겸손이나 경건함이라고 생각해서 일까요?


그것은 육신의 연약함을 인함입니다. 육신의 연약함에 대하여 하나님과 사람은 다른 각도에서 보고 있기 때문입니다. 




연약함이 있어 나타나는 하나님의 성품, 사랑



육신은 연약합니다. 하늘을 날지 못하고 물속에서 살지 못하는 것과 같은 연약함을 말할 것도 없고, 몸을 위해 먹는 것 조절하는 것과 같은 것도 의지가 약해져서 잘 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입니다. 그런 것이 뭐 어렵다고. 


하지만 역설적으로 그 연약함 때문에 우리는 서로 의지하고 사랑하게 됩니다. 생각해보면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일들, 대단한 의지력으로 뭔가 성취해낸 사람들을 볼 때 존경하는 마음은 들지만 사랑으로 감싸고 싶은 마음이 들지는 않습니다. 자기 의지로 잘 할 수 있는 사람에게 씻을 물을 떠 주고 씻겨 준다면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 자기가 할 수 있는데 왜 이러냐고 도리어 화를 낼지도 모릅니다. 


반대로 연약해서 하지 못하는 이들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을 수고하면 그 수고로 인하여 사랑이 무엇인지 알게 됩니다. 사람이 이렇게 연약한데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하신 것은 그럴 때 하나님의 성품인 사랑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연약함을 부끄럽게 여깁니다. 그래서 늘 감추려 합니다. 그것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으로부터 지속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연약함을 개조하려고 무단히도 애를 씁니다. 우리가 사는 주변에 널려 있다시피 한 강좌들, 학원들, 그리고 미디어에 자기 개발이나 연약함을 극복하는 것에 대하여 얼마나 많은 정보와 활동이 넘쳐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세상이 그것을 요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근원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기에 사람들이 아무리 세상을 재해석하고 세상을 아름답게 하고 또 위대하게 노력해도 하나님의 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근원이고 근본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연약하게 만드신 하나님의 의와 뜻이, 사람의 연약함을 극복하려는 세상의 노력보다 훨씬 중할 뿐 아니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을 떠나서도 연약함을 인정하고 사는 사람들에게 함부로 돌을 던지지 않는 것입니다.




불의와 불법 아래 있던 죄의 종



바울 사도가 우리가 원래 죄의 종이었다고 말씀하신 것은 바로 우리 모든 사람이 세상의 가치관에 따라 이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하고 감추고 개조하려는 자리에 있었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사람의 자리가 아닌데 사람이 그 자리로 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고 부끄러워 숨어 있는 아담에게 하나님은 “네가 어디에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내가 정한 사람의 자리에 있지 않고 어떤 자리에 네가 있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아담이 그랬기에 우리가 오늘도 그런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가 그렇기에 하나님께서 아담으로 그것을 설명하신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육신 가진 이 삶을 너무 연약하게 여깁니다. 그래서 이것에 대하여 대책을 늘 수립합니다. 언제나 육신의 연약함을 극복할 방법을 강구하고 노력하느라 인생을 다 소비합니다. 그것이 바로 죄의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종이란 늘 그 주인에게 종속되어 전전긍긍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흔히들 “돈(money)! 돈! 돈!” 하는 사람을 보고 ‘돈의 노예’라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사람들이 육신으로서의 자기 모습을 연약하게 여기고 늘 그것을 어떻게 하려고 애를 쓰는 모습이 바로 그것에 매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한 자리를 떠난 것에 매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죄의 종이요 죄 아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부정과 불법에 드렸던 것(롬 6:19)>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서 하나님과 다른 법을 가지고 사는 것이니 그것이 불법이라는 것입니다. 민주국가인 대한민국에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사는 것이 불법인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반문합니다. <그때에 무슨 열매를 얻었느냐?>고 그것의 답은 바로 창세기 1:2절입니다.

땅(흙-사람)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창 1:2)


(계속)





Discrimination against sin and righteousness



It is not the right understanding of the Bible that God teaches, learns, and learns that it is from repentance when he confesses himself as a sinner before God and praying always before God. That is because it does not recognize the Bible,


It is because people count God's righteousness on the basis of the act of the flesh, even though God has spoken clearly, that he always considers himself a sinner. In other words, the body of life is always weak, so that if you are willing to live a good life, and if you are willing, you will be unfairly disadvantaged or ignored. This is because it is exciting.


It seems to be very godly in some ways, but rather to blaspheme God. For what God said to Peter to go to Cornelius is to claim that "man is unclean what God said to be righteous." To claim and argue with God is a great sin, because it can not be done if we do not see God and ourselves in the same class.


Why do people say they are not God, but they are still sinners? Of course, it is not justified to live without knowing God. If you believe in God, you must have confidence that you are a righteous person, but why you can not. Is it really because we think that having such a mind before God is humility or reverence?


It is because of the weakness of the flesh. Because God and man are seen from different angles about the weakness of the flesh.





God's character and love appear in weakness



The body is fragile. Not to mention the weakness of not being able to fly in the sky and not living in the water, it is the person who does not do well because of the weakening of the will to control eating for the body. That's hard to do.


But paradoxically, because of its weakness, we depend on each other and love each other. When I think about it, I feel respect when I see people who accomplish something with something that ordinary people can not do, great willpower, but I do not want to wrap it with love. People who can do well with their will will not like it if they wash it and wash it. I may be angry if I can do this because I can do it myself.


On the contrary, if we labor our flesh for those who can not be weak, we will know what love is due to their hard work. The man is so fragile that God saw it very well because it is when the love of God is revealed.


But people are ashamed of their weaknesses. So I always try to hide it. It is the image of a man who continued from Adam who ate the fruit of choice. In addition, I try my best to remodel its frailty. I do not know how much information and activities are overflowing in the courses, the institutes, and the media overcoming self-development or weakness that we have been living around. All of that is because the world demands it.


But the source of this world is God. Because God created the world, no matter how people reinterpret the world, beautify the world, and strive with greatness, they can not go beyond God's righteousness. The righteousness of God is the source and fundamental. The righteousness and will of God, who made man weak, is far more than the world's efforts to overcome the weakness of man, but it can not be overcome. That is why we do not throw stones at people who accept the weakness even when leaving the Bible.




A species of sin under injustice and illegality



Paul's apostle told us that we were originally slaves to sin, that all of us were in positions to overcome, hide and remodel the weakness of this body according to the values ​​of the world. It is not the place of God's appointed person, but the person has gone to that place. To Adam, who is so embarrassed to eat the good and bad, God asked him, "Where are you?" God asked Adam, 'Where is I in the place of the man whom I have appointed?'


It was not Adam that we did today. We are all so God has explained it to Adam. Everyone feels very weak in this life with the flesh that God has made. Therefore, I always establish measures against this. I always consume my life trying to find a way to overcome the weakness of the body. That is to live as a servant of sin.


Slavery is always dependent on the owner and living a life of prejudice. Commonly called "money! money! Money! "And it is called" slave of money ". It is imperative that people look at their physical appearance as weak and always try to do it. God is bound to what he has left. I am a slave to sin and I am under sins.


This is what the Apostle Paul says is that it was given to injustice and unlawfulness (Romans 6:19). It is illegal to live in a different world than God in the world God created. It is like illegal to live in a democratic country, a person who espouses communism in the Republic of Korea.


And the Apostle Paul speaks. The answer is Genesis 1: 2, "What fruit did you then get?"

The earth (earth-man) is chaotic and empty, and darkness is on the deep ... (Genesis 1: 2)


(contin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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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이 말씀은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니 이제는 죄를 짓지 말고 착하게 삽시다.’가 아니라는 것을 간과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제 예수 믿으니 죄를 짓지 않기 위하여 힘쓰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이 말씀은 이제 죄를 지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의지적으로 죄를 짓지 않으려고 해야 하는 것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죄를 지으려고 해도 은혜 아래 있으면 그럴 수 없다는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다.


이 말씀이 주시는 의미,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사람은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는 말씀은 비단 이 한 구절의 말씀만이 아닙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의로운 것이고, 모든 죄를 사함 받는 것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의 모든 말씀은 그리스도를 믿고 그리스도와 같은 생명으로 거듭났다면 더 이상 죄를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존재가 된다는 것을 줄곧 말씀하시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아예 그것이 언제라도 기도를 시작할 때면 먼저 회개부터 하는 것이라고 말을 합니다. 어떤 순간, 하나님과 만나는 순간이 되면 그 이전에 하나님을 만나거나 종교적인 상태 안에 있다가 그렇지 못했던 동안 죄를 지을 수 있기에 기도할 때는 항상 회개부터 하고 시작하는 것이라고까지 말하고 가르치고 또 그런 줄 알고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성경에 대한 합당한 의문을 가져야…



사람들은 많은 부분에서 성경을 문자 그대로, 말씀 그대로 지키려고 노력합니다. 그래서 심지어 그렇게 하지 않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까지 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성경에서 가장 중요하게 말씀하시는 것, 예수님을 믿어 구원을 받으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고, 의인이며,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거하시므로 하나가 되는 존재가 된다는 것은 그대로 믿지 않고서 자꾸 이상한 논리를 더해서 늘 회개하고 죄를 짓지 않기 위해서 금욕적인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는 등 이상한 말들을 합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었는데, 하나님의 은혜 아래 있고,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고, 예수님보다 더 큰 일도 할 수 있다고까지 하신 말씀이 자신의 것이 되지 않거나 믿어지지 않는다면 적어도 한번쯤은 <‘왜 그럴까?’>라고 고민해 봐야 하는데, 그저 인생은 연약하고 육신도 약하니 그럴 수밖에 없다는 논리로 성경과 같지 않은 자신의 처지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시고 있는데, 오늘도 자신을 돌아보면 수많은 죄들이 있다고 여겨진다면 그 상충됨을 인하여 잠이 오지 않는 것이 올바른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왜 오늘 죄를 지었지?’라고 생각을 하던가, 아니면 ‘내가 사람으로 살면서 죄를 짓지 않을 수 없는데 하나님은 왜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라든지, 그게 아니면 ‘하나님과 나는 죄에 대한 개념이 다른가?’와 같은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셨는데, 나는 왜 오늘 죄를 지었지?’


바울 사도는 뒤 이어 나오는 로마서 8장에서는 죄를 짓는 정도가 아니라 ‘정죄함’ 자체가 없다고 했습니다. 죄의 여부를 떠나 누구도 예수 안에 있는 이에게 죄가 있다고 말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놀라운 은혜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인한 은혜인데, 그 은혜를 알고도 누리지 못하는 자신, 뭔가 그곳에 다다를 수 없는 자신의 모습을 마냥 연약해서 그렇다고만 하고 있는 것은 겸손이 아니라, 죄도 은혜도, 율법도 모르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생각하는 죄, 사람이 생각하는 죄



이렇듯 성경에는 분명히 예수님을 믿으면 더 이상 죄인도 아니고, 죄를 지을 수도 없고, 누구도 정죄할 수조차 없다고 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많은 신앙인들, 우리를 대속하신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회개하고 있는 것은 너무 안타까운 것입니다. 오늘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사람의 연약함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 헛수고 했구려!!”라고 말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많은 사람들이 성경에서 죄가 없다고 말씀하시고, 죄를 지을 수도 정죄함도 없다고 하시는 하나님을 믿으면서 스스로는 늘 죄가 있다고 여기며 회개하는 삶을 사는 것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생각하시는 죄와 사람들이 생각하는 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죄에 대한 생각 하나만 고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죄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은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이고,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이 다르다는 것은 법이 다르다는 것이고, 법이 다르다는 것은 의가 다르다는 것이며, 의가 다르다는 것은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과 사람이 죄에 대한 개념이 다르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생각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문제는,

그 다른 두 존재 사이의 관계입니다. 누가 주인이냐는 것입니다. 사람도, 죄도, 선과 악도, 법도, 의도, 정체성도 모두 하나님의 것이고 하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죄에 대한 생각이 다른 것, 곧 정체성이 다르다는 것은 사람이 자신을 지은 하나님과 다르게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그것이 곧 죄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보고 더 이상 죄를 지을 수 없다고 하시는데 사람이 날마다 회개하고 있다면 누구의 시각이 잘못된 것입니까? 그것은 당연히 사람이 죄에 대하여 또 하나님에 대하여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잘못된 생각, 하나님과 다른 그 생각이 바로 죄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신 스스로를 늘 회개하고 노력해야 하는 존재로 여기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바로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 가운데 있다는 것은 그것을 죄로 여기는 법이 있다는 것인데 바로 그 법이 율법이라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예수 안에 있는 사람인 스스로나 또 다른 지체를 죄 있다고 여기는 것이야 말로 온전한 죄 가운데 있는 것입니다.




죄에 대한 바른 견해



그것은 사람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많은 신앙인들은 ‘내가 주인 삼은 모든 것 내려놓고~’라고 찬양하고 기도하고 다짐도 하지만 자신이 자기 삶의 주인이라고 여기는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바로 육신을 가진 삶이 본질이라고 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본질로 여기시지 않는 것을 자기가 본질로 여기는 것이야 말로 그 존재에 대한 주관함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고 그렇게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져지는 자기 육신의 삶의 어떠함을 본질로 아는 사람은 ‘어떤 기도를 하는가?’로 알 수 있습니다. 교회에 가서 늘 하나님께 육신의 것을 기도합니다. 그것도 기술이라고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 제가 잘 되어야 하나님께 영광이 됩니다. 제가 세상 사람들에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으로서 성공한 모습을 보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려고 도모하는 일들을 도와 주십시오. 이것은 주님의 일입니다.’라고...... 하나님을 속이려 합니다.


반면에 은혜로 아는 이는 자기가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은 자기로서는 할 수 없는 일인데 하나님께서 가지신 목적으로 인하여 자신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 없던 존재였는데 생명으로 되었다는 것을 은혜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지 않습니다. 존재하게 된 목적을 본질로 아는 사람입니다. 그 목적이 바로 하나님의 의이므로 그 사람은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목적,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된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육신의 어떠함을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믿음이 온전하므로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위하여 주신 삶에는 당연히 그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부족한 것 없이 이미 주신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만들어지고 주인을 맞은 자동차가 그 주인에게 기름을 넣어달라고 기도할 리가 없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전히 은혜를 아는 이는 사람의 행위와 눈에 보이는 세계가 본질이 아니므로 그 행동으로 인한 죄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죄는 오직 하나 뿐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떠나는 것, 그것이 유일한 죄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목적을 아는 사람, 그 의가 자기 생명이 되고 삶이 되고 행동이 되며 삶의 목적과 의미가 된 사람은 하나님 안에 있으니 도무지 죄를 지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그런 사람도 육신으로 실수도 하고, 자기가 사는 세계의 법을 어길 수 있습니다. 그때는 그 법에 따라 육신을 드리면 됩니다. 수고하기도 하고, 벌도 받기도 하고, 희생하기도 하며, 또 때론 법의 혜택도 누리는 것입니다. 그것을 죄로 여긴다면, 그것을 하나님 앞에 회개할 죄로 여긴다면 그 사람은 예수님을 지금도 죄인으로 정죄하는 사람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는 그 당시 사람들이 가진 가치관에서 비롯된 죄에 의하여, 그 행동과 언행이 죄가 되어 십자가에 달리셨고, 그것을 피하시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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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에서는 자주 우리를 하나님께 드리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하나님께 드린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린다는 것을 신학교에 가는 것이나 선교사가 되는 것과 같은 것으로 여깁니다. 때로는 남들이 하기 힘든 일을 자청하는 것도 그렇게 여기기도 합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 지체를 하나님께 드리라고 하였는데, 그렇게 해야 하는 이유? 조건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시 산 자와 같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산 자는 다 하나님께 드려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지체를 드리라고 한 것입니다.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병기로 죄에게 드리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병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롬 6:13)


그렇다면,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는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요? 어떤 사람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산 자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인 것입니다. 모든 인생 중에서 먼저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산 자는 예수님이시기에 예수님께서 어떻게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사셨는지를 알아야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께 우리 지체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사셨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부활에 관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부활은 단순히 믿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일반적인 상식으로 본다면, 아니 상식이 아니라 과학과 모든 지식으로 볼 때 사람은 죽었다가 다시 살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는 그렇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하시니 그럴 것이라고 믿는 것이 부활을 믿는 것일까요? 그런 하나님께서 우리 자신도 부활시켜 주실 것이라고 믿는 것이 부활신앙이냐는 것입니다.



부활이 있으려면 먼저 어떤 죽음이 있어야 하는 것



부활이라는 것은 말 그대로 죽었다가 다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는 다시 살아나는 부활을 맛보려면 먼저 죽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죽지 않고 부활은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부활, 죽음에서 다시 사신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한다면, 예수님의 부활이 자신의 일이 되기를 바라고 믿는다면 절대적인 조건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예수님과 같은 죽음에 속한 자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예수님과 함께 죽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함께 살 줄을 믿노니(롬 6:8)


이것은 단순한 말씀이 아닙니다. 그냥 사람이 이 땅에서 교회에 다니며 육신으로 살다가 그 수명이 다하여 죽고 나면 하나님께서 부활을 시켜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까 육신의 수명이나 육신의 목숨이 끊어지고 난 다음에 다시 육신으로 혹은 영으로 부활시키신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경을 그렇게 보는 것은 심청전을 읽고 바다에 빠지는 것이 효도라고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떤 죽으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사람들이 지은 죄에 대하여 대신 벌을 받은 죽으심이 아닙니다. 대속했다고 하니 다들 그렇게 알지만 그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는 것은 십자가에서 우리가 어떤 존재인지를 보여주셨다는 것입니다.


십자가는 죄인의 형틀인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면서 까지 보이시고자 하신 것은 우리 인생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하는 죄를 지은 분으로 정의하는 세상의 법과 그 법으로 표현된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는 언제나 죄인이라는 것을 보이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보면 인생은 누구나 죄인이 되어 죽을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다는 것은 다시 십자가에 매달려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보이신 것과 같이 인생은 자기 스스로를 볼 때 세상에서 옳다고 하는 것으로 자신을 보면 언제나 죄인이 되는 존재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은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기 자신은 세상에서 성공하려고 하나님을 믿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오히려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바로 예수님과 함께 죽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이 세상에서 하는 일이 잘 되면 세상 사람들이 ‘저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니 하는 일이 잘 되고 또 착하게 사는구나! 그러니 나도 하나님을 믿어야지!’라고 생각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님을 심각하게 모독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은 자동차에 기름을 넣어주기 위하여 차를 산 바보와 같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육신은 하나님이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고, 그러기 위하여 거하실 형식으로 만드신 것이지 이 육신이라는 형식이 형식을 본질로 아는 가치관을 가진 세상에서 상대적으로 빛나게 되도록 후원이나 하시는 분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죽으신 그 죽음, 즉 세상에서 옳다고 여기고 성공이라고 여기는 가치관 앞에서 우리는 언제나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자신이 그런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이 예수님의 죽음에 함께 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그 죽음이 자기 인생에, 또 신앙의 여정에 있을 때 비로소 예수님과 같이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시는 것은 그 죽음을 당한 사람을 위한 것이지 육신의 수명이 다한 사람을 위한 부활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았다> 할 수 있는 삶이 되는 것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 (로마서 1:1-7) 부활의 능력으로


하나님께서 살리시는 자는 예수님의 죽음에 참여한 사람, 곧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 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가치고나 앞에서 자신이 죄인이 된다는 것을 인정하고, 세상의 가치관이 옳은 것이라고 여기고 주장하며 사는 사람들 앞에서 죄인이 되고 종이 되어 죽은 것과 같이 자기 육신을 섬기는 것에 내어주는 삶을 사는 사람의 삶이 바로 하나님이 보실 때 살아 있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이 옳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보고서 그것이 옳은 인생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는 삶을 살아내는 것 –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 우리 자신을 드리는 것


바로 이 부활, 이렇게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 앞에서 종이 되고 죄인이 되어 세상의 가치를 주장하는 사람들이 보고서 자기 인생의 존재 목적이 그것이 아님을 알 수 있도록 살아내는 일에 자신의 육신의 삶을 드리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 자기 지체를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죽으신 죽음으로 죽었다가, 하나님의 기준으로 볼 때 다시 살리신 사람이 되었을 때 비로소 하나님께 지체를 드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죽은 자 중에서 다시 산 자와 같이 하나님께 우리 지체를 드리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하나님께 우리는 드리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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