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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23) 종과 아들의 차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7. 07:00 Writer : 김홍덕

빚(debt)



성경에는 <빚진 자>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빚’이라고 하면 재물에 관한 채무를 지고 있다는 것으로 한정하지만 이 ‘빚’이라는 단어는 옛날부터 ‘죄’와 ‘종’과 연관이 있는 단어였습니다. 그러니까 이 빚(debt)은 단순히 재정적인 채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어떤 세계에 있어 의무를 맡아 있다는 의미로 쓰이는데 그 빚 혹은 의무를 다하지 못하면 죄가 된다는 개념적 뿌리가 있다는 것입니다.


일례로 주기도문에 ‘우리가 우리의 죄를 사하여 준 것 같이’라는 말씀에서 나오는 ‘죄’는 실제로 debt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 말씀은 성경이 말하는 ‘죄(하말티어:자리를 벗어나다)’라는 말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정해준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것이 ‘죄’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든 인생은 하나님께서 만드셨기 때문에 우리를 만드신 하나님은 우리에게 어떤 기대하시는 바가 있고, 목적하신 바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빚’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하나님이 정하신 목적과 삶의 의미는 버리고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길로 떠나버렸기에 빌레몬서에 나오는 오네시모처럼 빚을 갚지 않고 도망간 것입니다.


그러므로 빚은 존재의 목적과 같은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나고 살고 있지 않다면 분명히 자신을 존재하게 한 이가 바라는 존재의 의미와 목적이 있다는 것입니다. 하다못해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이라 할지라도.(물론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목적은 아닙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모든 것이 다 존재하는 목적이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스마트폰은 우리가 전화를 하고 인터넷 서핑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고 삽니다. 그렇다는 것은 스마트폰은 그 제조자나 구매자에게 좋은 전화품질과 빠른 인터넷 사용을 제공할 목적을 가집니다. 만약 이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면 사람들은 ‘죽었다, 맛 갔다, 고장 났다.’고 합니다. 목적을 상실했다는 것은 죄를 지었다는 것입니다.



사망



죄는 곧 목적을 상실한 상태를 말합니다. 이는 옛날 전쟁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전쟁을 하는 군인이나 나라는 자신의 의를 관철시킬 목적을 가지고 있는 법입니다. 그런데 전쟁에서 지면 그 목적을 관철시킬 수 없게 됩니다. 그것 역시 죄가 됩니다. 그렇게 되면 국민으로서, 군인으로서의 모든 의미가 사라집니다. 곧 사망이라는 의미입니다. 목숨이 붙어있다고 해도 다 종이 됩니다. 전쟁에서 지나, 채무를 갚지 못하거나 종이 되는 것은 같은 것입니다. 그리고 종이 된다는 것은 결국 자기 존재의 목적을 상실한 사망의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목적을 상실한 사망은 외형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시계가 멀쩡해도 시간을 알려주어야 할 목적을 이행할 수 없게 되면 ‘죽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도 하나님께서 지은 목적을 상실하면 생물학적으로 또는 의학적으로 아무리 살아있다고 해도 그것은 곧 사망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고 있는 <사망과 죽음>의 본질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이가 가진 존재의 목적이라는 빚이 있는데, 이 빚을 갚는 것, 그 지은 이의 목적대로 살지 않는 상태가 바로 자기 존재 목적의 자리를 벗어난 죄인 것이고, 그 죄가 해결되지 않는 상태는 존재의 목적을 이행할 수 없는 상태, 곧 죽음이요 사망의 상태인 것입니다.


따라서 종이란 어떤 목적 아래에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사람이든 자연이든 또는 사람이 만든 물건이든, 그 모든 것은 다 자기를 지은 이나 만든 이나 소유한 이가 기대하는 목적 아래 있으면 그 목적이란 빚을 갚는 종이 되는 것이고, 그 목적의 자리를 떠나서 죄 가운데 있게 되면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누구의 종이 되느냐가 결정된다는 것입니다. 종은 어차피 자기 존재의 목적과 생사여탈의 권한을 주인이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주인이 자기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존재 목적이라는 관점에서 볼 때 사용하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을 이행하는 사람, 그 목적대로 사는 사람, 곧 하나님의 의로 사는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 그것은 곳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고, 그 목적은 사람이 하나님께 진 빚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앞에 우리가 빚을 진 것은 우리가 의도한 것에 대한 실패가 아니라, 우리는 의도하지 않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은 오히려 은혜인 것입니다. 나는 존재할 의사가 전혀 없었는데 하나님께서 존재하게 하시므로 하나님께서 가지신 목적이 나의 빚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은혜로 여긴다는 것은 대단한 것입니다. 빚을 지게 되었다는데 그것을 은혜로 안다? 이것은 상식적은 것은 아니지만, 반대로 이것을 은혜로 알지 못한다면 하나님을 믿는 것도 아니고, 입만 열면 감사한다고 말할지라도 감사가 무엇인지 모르는 것입니다.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것이 은혜가 아닌데, 살면서 얻게 되는 얼마 되지도 않는 육신이 입는 삶의 이익을 은혜나 감사로 여겨본들 그게 무슨 의미겠습니까? 육신이 시험에 합격했다고? 사업에 성공하고, 아프다가 건강해졌다고? 그게 감사한 일일 되려면 자기가 존재하는 이유와 목적이 하나님께 은혜인 것을 알고 감사할 때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박물관에 잘 칠해져서 전시된 자동차가 아무리 차체 관리를 잘 받는다고 한 들 진흙탕을 달리는 자동차보다 감사할리 없는 것과 마찬가집니다. 자동차는 달리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니 말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종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존재하게 하신 목적을 자기 삶의 목적으로 아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지으신 목적이란 빚을 갚기 위하여 사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존재로 산다는 것입니다. 


존재하지도 않았었는데 만유의 주재를 표현할 존재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 그것이 은혜고 그것이 자기 존재와 삶의 목적으로 알고 그 목적대로 사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종이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메기신 목적의 빚을 갚는 신실한 종이 되는 것입니다.



아들



우리가 하나님이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서 볼 때 그 목적에 빚진 자, 그리고 그 목적의 빚을 갚아나가는 종이라면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은 또 무엇일까요? 아들이면 아들이고 종이면 종인 것일 텐데 말입니다.


실은 이것은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대로 산다는 것이 바로 아들이기 때문입니다. 아들이란 아버지가 가진 의와 뜻과 생각이 형식을 가진 존재로 표현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든 육신의 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부모가 가진 생각, 생물학적으로는 자신의 유전자를 보전하고자 하는 것일 수 있지만 그것보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아들을 통해서 이루고자 하는 뜻이 있을 때 비로소 아이를 가지게 되고 또한 태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예전부터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던 일을 이어갈 아들을 얻기 원했습니다. 이는 오늘날에 와서 희석된 듯 보이지만 그렇게 보는 것은 사람의 일을 직업으로만 볼 때 그런 것이고, 그것이 아니라 아들을 얻으면 누구라도 자기가 하던 기업은 물론, 자기가 가진 생각과 의와 철학을 이어가 주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그 생각과 바람이 육신으로 표현되는 것, 다시 말해서 아들이 그 아버지의 뜻을 이해하고 그것을 준행하고 살 때 아버지는 기뻐하는 것입니다.


그와 같이 하나님께서도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와 뜻입니다. 그것은 영이신 하나님께서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타나내실 뿐 아니라 하나님이란 어떤 신이고 존재인지를 표현해야겠다는 의와 뜻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라 그것을 표현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그 생각과 뜻과 의를 표현할 수 있는 형식을 가진 존재를 만드신 것입니다. 그것이 세상 만물이고 그 중에서 제일은 사람인 것입니다.


우주의 광활함은 하나님의 광대하심이 표현된 것이고, 자연의 놀라움은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내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나타내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입니다. 형상이란 모양이 아닙니다.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만드셨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미지대로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사람을 보면 하나님을 알 수 있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게 아들입니다. 딱 보았을 때 그 아버지를 알 수 있는 존재가 아들입니다. 그와 같이 사람을 볼 때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 그렇게 하나님이 누구신지를 알게 하는 육신을 가진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 이 땅에 육신을 가지고 오신 것은 육신을 가진 모든 인생이 그렇게 그 육신으로 하나님의 이미지를 떠올리게 하는 삶을 사는 아들이 되게 하시기 위하심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보고서 예수님의 모습과 오신 목적이 나의 모습이고 나 역시 예수님과 같이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는 아들로 살 존재라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아들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는 것이 또한 아들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산다는 것이 결국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또한 하나님의 종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나님의 종이고 아들인 것은, 존재의 목적 안에서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대로 사는 존재의 정체성은 다름이 아닌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을 알고 그 안에서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종이기도 하고 또한 아들이기도 한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실패자로서의 종이 아닙니다. 이 종이기도 하고 아들이기도 한 삶은 진정한 은혜의 삶인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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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6:12-23) 다시 종이 되어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11. 26. 07:00 Writer : 김홍덕

너는 애굽 땅에서 종 되었던 것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를 속하셨음을 기억하라 그를 인하여 내가 오늘날 이같이 네게 명하노라 

종이 만일 너와 네 집을 사랑하므로 너와 동거하기를 좋게 여겨 네게 향하여 내가 주인을 떠나지 아니하겠노라 하거든

송곳을 취하여 그의 귀를 문에 대고 뚫으라 그리하면 그가 영영히 네 종이 되리라 네 여종에게도 일례로 할지니라(신 15:15-17)


위의 말씀은 안식년에 대한 말씀의 말미에 하나님이 주신 계명입니다. 요지는 무엇인가 하면, 이스라엘 안에서 7년째가 되면 그 전에 종이 되었던 사람이라도 다 자유케 된다는 것을 율법으로 주셨는데, 그 중에서 혹시 7년째가 되어서 자유할 수 있음에도 그 주인의 종으로 살겠다는 종이 있으면 그 종의 귀를 문에다 대고 뚫으면 그 종은 영원이 그 주인의 종이 될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왜 이 신명기의 말씀을 로마서와 연결해 보는가 하면, 로마서에서 바울 사도는 사람이 더 이상은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는 것을 선포하고 있는데 이것은 마치 안식년이 돌아와서 자유케 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 되려면 하나님과 그 사람은 이제 서로 안식하는 관계가 된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에 대하여는 오해하면 안 된다고 먼저 말씀을 드렸습니다. 죄라는 것은 자신이 시인할 때 은혜가 되는 것이기에 스스로 자신의 죄를 하나님 앞에서 시인하는 것이 있을 때 은혜가 된다는 말씀이기 때문임을 이미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죄가 많은 곳에 은혜가 더한다고 죄를 더 지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의지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내가 이제 하나님 앞에 죄를 고백하고 은혜를 입었으니 이제 죄를 짓지 않아야지!’라고 마음을 먹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죄를 시인하여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이제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지으려고 해도 죄를 지을 수 없는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마치 안식년을 맞아 자유케 된 사람이 다시 종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이.




그런데 바울 사도는 다시 종이 되자고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에게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너희 육신이 연약하므로 내가 사람의 예대로 말하노니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드려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드려 거룩함에 이르라(롬 6:17-19)


우리의 신앙생활은 정말로 이와 같다고 할 수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알지 못해서 평생 세상의 가치관에서, 애굽의 종살이를 하다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 복음을 알게 되고 그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을 때에 인생의 목적을 알지 못해서 죄의 종살이 하던 세월을 청산하게 됩니다.


그리고 어떻게 할 것인가? 여기에는 나름의 선택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자유를 누리고 하나님 앞에서 더 이상 죄인도 아니고 또 세상의 종도 아닌 사람으로 인생을 살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그렇게 하지 말고 죄가 아닌 의에 종으로 드리므로 거룩하게 되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이란 <구분>된다는 것에서 보면 다른 삶을 살기를 권면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주인의 문에 자기 귀를 송곳으로 뚫은 종과 같이 말입니다.


앞선 글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우리는 세상의 가치관 안에 살 때는 세상에서는 의인이지만 하나님이 보실 때는 죄인이 됩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나님의 의(義) 안에 살고자 하면 세상의 죄인이 됩니다. 예수님께서 세상의 가치관에서 죄인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것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그것은 세상의 의와 가치관 안에서 사는 것은 세상의 법을 좇아 사는 것이니 종으로 사는 것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의를 좇아 살게 되면 하나님의 의에 종이 되는 것이기도 한 것입니다.


어쩌면 이것은 선택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릅니다. 선택이 있다면 <세상의 종으로 사느냐? 아니면 하나님 의의 종으로 사느냐?>의 문제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바울 사도가 하나님의 의의 종으로 살자고 권면하는 것은 신앙의 가장 기본이라 할 수 있는 구원 받은 삶, 하나님을 믿는 삶을 살자고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하나님의 의로 자유함을 얻고서 하나님을 떠나서 다른 자유로운 삶을 산다는 것이 가능한일일까 싶기도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과 자유함을 얻고서 하나님을 떠나서 의롭고 자유로워질 수 있는 것일까? 하나님으로부터 의로움을 얻었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창조주요 주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인데, 하나님을 떠나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싶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온전히 자신의 주님으로 알게 된다면 주인의 문에서 귀를 뚫고 그 주인의 영원한 종이 되는 것과 같이 우리도 하나님의 의로움에 영원한 종이 되어 사는 것이 유일한 삶의 방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알고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지으신 목적이 우리가 그렇게 하나님의 의로움의 종이 되어 살라고 지으신 것이니 이것은 우리가 떠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 의의 종이 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하나님 의의 종이 되고, 하나님 의에 순종하고, 하나님 의에 자신을 드리려면 먼저 하나님의 의를 알아야 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경쟁할 때 손해가 날 것 같아도 성경에 기록한 말씀대로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 아닙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의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하나님의 의와 뜻이라고 생각하고 세상에서의 삶을 살아가면서 결정의 순간, 방법의 선택에 있어 성경에 있는 대로 결정하고 방법을 취하는 것이 하나님의 의로움이라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좀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의도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사람을 향한 하나님의 의도하심과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과 이 블로그에서 너무나 자주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곧 영이신 하나님의 성품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라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것은 또 어떤 것인가 하면,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보여주신 것이 바로 그것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좇아서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가려하지 말고, 오히려 그런 가치관으로 정죄하는 사람들이 가진 선악의 기준으로 죄인이 되어도 그들을 섬기는 것에 우리 몸을 사용하므로 하나님께서 이 연약한 육신으로 통하여 하나님의 의를 나타내시고자 한 뜻을 이루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오히려 그 가치관에 사로잡혀 세상의 종살이 하는 사람들을 섬기며 살면, 그들이 하나님을 보지 못하던 것이 보이게 되고, 왜 사는지 몰랐던 인생의 목적이 깨달아지며, 중풍병자와 같이 삶의 목적을 알고자 하는 머리의 생각대로 살지 못하는 육신의 삶이 목적을 아는 삶이 되고, 감각 없는 문둥병자와 같이 온 천하로 표현하신 하나님을 알지 못하던 사람이 하나님을 느끼면서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이유와 목적인 것입니다. 즉 우리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의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향하신 하나님의 의가 그것이라는 것은 우리가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인데 우리가 어디에 순종하고, 어떤 의에 종이 되어 살겠습니까?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의로움에 대하여 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존재의 목적에 대한 빚을 진 것이고, 종으로 사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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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 신앙에 있어 세상은 하나님의 적으로서 인식이 됩니다. 그래서 공중권세 잡은 자, 곧 마귀와 하나님이 싸우신다고도 합니다. 물론 그 실체는 하나님이 마귀와 fighting 한다는 의미라기보다 사람이 어디에 속할 것인지에 대한 다툼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을 세상이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이 가져간, 그리스도에 속한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과 세상은 적대적인 관계가 아닙니다. 물론 마귀도 하나님의 적이 되지 못합니다. 그 무엇이라도 인간이 그 개념을 정립할 수 있는 존재는 그것이 어떤 것이라도 다 하나님의 피조물이고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식할 수 있는 것 중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능력을 벗어난 것은 없습니다. 물론 인간 인식 너머에도 없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하나님과 세상이 대적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에 대한 인식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것으로서 하나님 의의 본질이 아니라 그 표현된 형식인데 사람들이 그것을 본질로 안다는 것입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의 삶의 모습과 법에 관한 것인데, 하나님의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지 않았는데 눈에 보이는 그 율법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의라고 생각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을 향하여 죄라고 말씀하시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정하신 자리를 떠났다는 것입니다. ‘죄’라는 말의 의미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하신 자리를 떠나서 보니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고 여겨서 사람들이 무엇인가를 자꾸 더하려 했습니다. 그 시작이 무화과 나뭇잎으로 자신을 가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서 본 사람의 모습은 하나님께 의로운 존재가 아니라고 판단되어서 더 좋은 것으로 입고 행하여 피라미드의 꼭대기로 올라 가려하고 그렇게 될수록 더 영광스럽다고 하고 더 의로운 것이라고 여기기 시작한 가치관이 바로 세상의 가치관입니다. 그러니 세상의 가치관은 하나님과는 반대가 되는 생각이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리를 벗어난 죄의 생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이 죄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은 하나님께서 그 의로움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만드신 것인데 사람들이 그것이 본질로 생각하고 보니 그대로는 부족해 보여서 자꾸 뭔가를 더하겠다는 생각을 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세상이고, 죄악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이 죄악 된 세상이 아니라 하나님 만드신 세상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안목, 그리고 그 안목이 만든 세상이 바로 죄악 된 세상인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 것



바울 사도가 말씀하고 있는 <죄에 대하여>는 바로 이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그 자리에서 벗어나서, 본질인 하나님의 의가 표현된 세상과 사람을 본질로 아는 안목으로 더 높은 곳에 이르고 육신의 한계를 극복할수록 더 의로운 것이라 여기는 세상의 안목을 의로 여긴 상태에서 사는 것이 죄이기에 그 자리에서 죽어야 하나님에 대하여 산다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안에서 죽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세상의 가치관이 자기 안에서 쓸모없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는 것은 당연히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는 죄인이 되고 죽을 수밖에 없어진다는 것과 같은 말입니다. 죄에 대하여 죽는다는 것은 세상의 가치관이 사망의 것이라고 깨닫는 것이고, 그렇다는 것은 바로 세상의 가치관으로 볼 때 세상의 가치를 버진 죄인이 되는 것이니 죽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시각은 다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죄악으로 여기고 그것을 버리므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죽은 자가 된 사람은 하나님이 볼 때 너무 온전한 사람인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을 버렸다는 것은 더 이상 사람이 피라미드의 꼭대기 높은 곳으로 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육신을 가진 인생을 더 가공하여 행동이나 소유가 늘어나고 세상의 경쟁에서 이기는 것이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원래 만드신 사람의 자리가 온전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인정이 되려면 온전한 인생의 모습이 무엇인지 전해준 것을 자시의 모습으로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십자가에서 발가벗겨진 모습으로 인생의 정체성이 무엇인지를 보이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서 자기가 이때가지 의로 여겼던 세상의 가치관으로는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그것을 깨달았다는 것은 예수님의 죽음이 바로 세상의 가치관에 의해서 사람이 자기 존재 자체가 하나님께서 지으신 온전한 존재라고 인정할 때 죄인이 되어 죽으신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된다는 것이 바로 예수님의 죽으심에 동참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인생으로서의 자신의 모습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같이 육신을 주신 하나님의 의와 뜻은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기기 위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형식으로서 자신의 삶이 주어졌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 자신도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에 대하여 산 것



바로 그것이 하나님께서 보실 때는 온전히 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인생이야 말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신대로 사람을 지으신 목적 안에 살고 있는 인생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산 시계가 시간이 맞으면 살았다고 하고, 시간을 알려주지 않으면 죽었다고 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목적 안에 있으면 산 것이고, 목적을 벗어나면 죽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보실 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예수님은 너무나 온전한 생명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인생을 지으신 그 모습 그대로를 보이시니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을 삼아서 죽는 모습이야 말로 진정으로 살아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가치관으로 죄인을 삼아서 인생의 본 모습대로 죄인 삼아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의 모습이야 말로 진정으로 살아 있는 생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니 본때를 보이시기 위하여 예수님을 살리는 퍼포먼스를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런 논리라면 십자가에 못 박은 자들을 혼내면 되는 것이고,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게 하시는 것이 더 상식적인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살리신 것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모습과 순종하시므로 보이신 사람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목적하신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리신 것입니다. 아니 그것이 바로 산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예수님을 보고서 그 보이신 모습이 바로 자신의 정체성이라고 인정하는 사람은 또한 예수님과 같은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그 모습이 자신의 모습이라고 인정이 되려면, 이전에 가치관, 곧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은 그 가치관으로 자신이 살았다는 것이 인정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앞에서 말한 죄에 대하여 죽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정이 되어 자신의 정체성을 바로 알아서 세상의 가치관으로 이긴 자가 의로워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고 하나님께서 인생을 하나님의 의와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으신 온전한 존재라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지으신 목적 안에서 진정한 생명이 있는 자이기에 하나님에 대하여 산 자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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