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 글' + 2615

5.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7. 09:46 Writer : 김홍덕

많은 사람들은 율법이란 예수님이 오신 이후에 복음으로 대치된 것과 같이 생각합니다. 율법으로 인하여 사람들이 죄를 알게 되었는데 그 죄를 예수님께서 대속하셨으니 이제 율법 아래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구속 곧 복음 아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은연중에 ‘율법은 이제 적용되지 않고 폐기된 하나님의 법’이라는 인상을 남기는 것입니다.


그러나 앞에서 율법은 온전한 것이라고 했습니다. 율법이 온전하지 않다면 율법을 주신 하나님도 온전하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과 사도들은 율법에 대하여 ‘지나간 법’으로 여기거나 터부시해야할 것으로 여길만한 말씀들을 하셨는가가 궁금해집니다. 왜 그런 것일까요?


그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율법에 대하여 오해했기 때문입니다. 이 글에서 율법은 온전한 것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것이니 온전하다는 것 외에도,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것을 인함입니다. 그런 율법을 사람들이 예수님을 오해하듯 오해하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그리고 사도들이 율법을 오해한 율법주의자들에 대하여 책망하는 것입니다.


율법주의, 곧 율법을 오해한 것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율법이라는 것은 마치 생명의 본성이 그 생명이 살아가는 모양과 삶의 형태를 정한 법과 같은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유전자는 그 유전자의 법이 있습니다. 그 법에 의하면 사람은 날아다닐 수 없고, 물속에서는 살 수 없습니다. 반대로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직립보행을 하고 말을 합니다. 이것은 다 생명의 법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고 물에 빠지는 것을 경계합니다. 그래서 행여 사람이 물속에서 견디는 수영을 하게 될 때는 ‘수영하는 법’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아마 날게 된다면 그 역시도 ‘나는 법’이 될 것입니다.


율법도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이란 언뜻 보기에 다 ‘이렇게 해라’라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성경에서 율법을 주실 때는 분명히 그 앞에 <누가> 그렇게 하여야 하는지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십계명을 예로 들면 출애굽기 20장을 시작하실 때에 “나는 너를 애굽 땅에서 건져낸 여호와라”고 선언을 하신 다음에 다시 모든 계명 앞에 <너>는 이것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은 이렇게 하라고 하신 것은 어떤 존재가 그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반드시 먼저 그 율법을 행할 존재가 정립되고서 그 존재가 어떤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행동을 하면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이 먼저고 그 존재는 이렇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이는 그 존재의 본성은 이런 행동을 할 것이니 너는 그런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뜻입니다.


특히나 하나님은 생명의 주님이십니다. 이는 모든 생명의 주관자시라는 것이고, 또한 하나님은 모든 것을 생명의 법으로 이끄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과 계명도 생명의 하나님의 본성에 따라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생명으로 나면 그 생명의 본성대로 행하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생명이 되면 율법은 지켜질 것이니 율법을 지키라는 말씀의 본질은 그 율법을 지킬 수 있는 존재가 되라는 것입니다. ‘죽도록 사랑한다.’는 말이 죽자는 뜻이 아니라 사랑한다는 말이듯, ‘무엇 무엇을 하라’는 율법과 계명도 그 본질이 무엇인지를 잘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이나 지금 이 시대의 기독교인(성경을 경전으로 하는 대부분의 종교)이나 율법과 성경의 본질적인 방향성과는 반대로 하나님을 믿고 있습니다. 율법도 분명히 <너>라는 정체성이 정립되고 난 다음에 그 <너>가 생명으로서 어떤 행동을 하여야 한다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율법과 계명과 성경말씀대로 행하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라고 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율법으로는 의로워질 수 없다고 하는 것은 율법을 지켜서는 의로워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율법이 온전하지 않기 때문이 아닙니다. 율법은 비유컨대 생명이 가진 본성과 행동의 모습입니다. 물고기는 물속에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너는 물속에서 살찌어다.’라고 하셨다는 것은 너는 물고기라는 본성을 가지고 있으니 그 본성대로 정체성의 자리를 지키고 살라는 것입니다. 율법이란 그런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지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의가 있는 사람의 삶이 율법으로 표현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물속에서 생활하면 물고기가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어이없는 짓을 하면서 자기들이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그 행동이 부족할까 하여 하나님께서 주신 인간의 본성마저 극복하여야 하는 것으로 여기고, 자기 마음에 있는 본성은 감추고 겉으로는 고상하게, 또 열심히 성경을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는 그 모습을 보시고 <회칠한 무덤>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모양은 번듯하나 생명이 없고 죽음만 있다는 것입니다. 선덕여왕이 당태종이 보낸 모란 꽃 그림이 화려했지만 향기가 없다고 한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을 지켜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다는 것은 율법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율법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고 반대로 보는 관점을 가지고서는 하나님 앞에 의로워질 수 없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과 반대로 생각하니 당연히 의롭지 않기도 하지만, 하나님과는 다른 생각을 가질 수 있는 존재로 사람을 지으신 것이 아닌데 하나님과 다른 생각을 이끌어내고 그것을 수행하는 인간의 모습이 바로 하나님 앞에서 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에 대한 의를 알지 못하고 반대로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관점과 가치관과 믿음과 신앙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지 못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것입니다. 왼나사를 오른쪽으로 돌리면 뜻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율법이나 계명뿐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 말씀대로 살 수밖에 없는 생명이 되는 법을 좇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대로 육신의 행동이 따라하면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고 그리스도의 본성을 가지게 된다고 생각하는 것은 이루어질 수 없는 꿈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엉뚱한 꿈을 꾸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그릇과 같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의가 생명으로 잉태되어 그 생명으로 거듭나서 그 생명의 법대로 사는 것입니다. 그 삶의 모습과 모양과 행함이 바로 성경에 나오는 행함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 것은 율법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율법이나 계명이나 또한 예수님의 말씀이라도 그것을 읽고 듣고서 ‘어떤 존재가 되어야 저란 삶을 사는가?’를 생각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아니라 문자 그대로 지키는 것이 말씀대로 사는 것이라고 생각하면 절대로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없는 것입니다. 심청전을 읽고 효도를 하면 되는 것이지 바다에 빠지는 것이 심청전의 교훈을 따르는 것이라고 한다면 오히려 부모가 자식을 잃는 불효가 되지 않겠습니까?


행함과 행동은 어디까지나 생명이 있는 존재의 생명본성의 증거입니다. 생명이 없는데 행동을 하는 것을 예수님께서는 <노릇>이라고 하셨습니다. 그것으로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십계명을 지켜 의롭게 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을 애굽의 가치관에서 건져내신 신으로 믿음으로 하나님과 <너와 나>의 관계가 된 사람은 십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또한 그와 같이 예수님의 산상수훈을 읽고 그대로 행동하는 사람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보이신 십자가의 삶이 자기 안에 씨와 같이 심기고 그것이 성령으로 인하여 생명이 되고 그 생명으로 삶이 거듭남으로 자기의 모든 삶이 그 생명으로 표현이 되어야 예수님의 제자가 되고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입니다.


'주제별 성경 보기 > 율법과 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7. 다 이루었다.  (0) 2016.10.25
6. 나는 율법을 완성하러 왔노라  (0) 2016.10.18
4. 돌로 떡을 만들어라.  (0) 2016.10.16
3. 선악과와 무화과  (0) 2016.10.14
2. 바벨탑  (0) 2016.10.02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4. 돌로 떡을 만들어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6. 22:25 Writer : 김홍덕

‘율법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의 표면적 대답은 <하나님께서 주신 계명>이라고 답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이를테면 십계명과 레위기에 나오는 계명들과 같은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율법입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신앙의 어떤 부분에서 율법이라는 것은 뭔가 떨쳐내어야 하는 과거의 유산과 같이 여겨지는 것은 율법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그것은 오히려 율법을 대하는 사람들의 마음가짐, 하나님께서 의도한 것과는 다르게 율법에 매몰된 마음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들이 율법에 대하여 언급한 것이 우리에게 율법을 터부시 한 것으로 비치는 것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진다고 생각하는 유대인들을 대한 말씀을 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는데 그것은 그 당시 율법을 지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한 유대인들에게 한 사도들의 말씀이 오늘도 유효하다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단순하게 지금 이 시대가 달력의 시간, 곧 객관적인 크로노스의 시간으로 볼 때 사도들이 율법주의자들을 경계하던 시대에서 2,000년 이상의 간격이 있고, 또 하나님의 율법에 의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산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앞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율법이나 예수님의 말씀이나 그것이 가진 정체성을 가지고 율법이 무엇이고 복음이 무엇이냐를 논하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율법이나 복음이나 다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의를 전하신 말씀이고 단 하나 예수 그리스도의 정체성을 설명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성경의 어떤 부분을 율법이라 하고 어느 부분을 복음이라 하느냐가 아니라 성경을 보고서 행동으로 지켜서 의에 이르려고 한다면 신약성경도 율법이 되고 반대로 구약성경의 말씀도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의가 행동이 아니라 그 의가 자기 안에서 생명이 되어 본성으로 표현되다보니 행동으로 나타난다면 십계명도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아니 하나님의 말씀이 구약시대에 말씀하셨다고 오늘 나에게 복음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전부가 복음은 아니라는 것이거나, 사람이 감히 하나님의 말씀을 가려서 어떤 것은 율법으로 어떤 것은 복음으로 받는 상관 노릇을 한다는 것이 되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율법이 무엇인가?> 할 때 율법의 정의를 묻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계명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 성경에서 왠지 모르게 떨쳐야 할 것으로 이야기 되는 율법은 무엇인가 한다면 그것은 율법 자체가 아니라 성경을 읽고 또 듣고서 그것을 문자 그대로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것입니다.(이것을 구분하기 위하여 간혹 ‘율법주의’라고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을 행위로 지키는 것이 문제가 되는 것인가?’를 이야기 해 보겠습니다. 물론 이 이야기는 앞에서도 계속된 이야기입니다. 이것은 그만큼 중요한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지금 이 시대의 많은 신앙인들이 하나님을 잘못 믿는 결정적인 편견이라 할 수도 있습니다.


이에 대하여 이야기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금식 후에 시험을 받으신 부분을 한번 보겠습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기 시작하실 대에 금식하셨는데 금식하신 예수님을 마귀가 데리고 가서 시험을 하였고 예수님께서 그 시험에 대하여 답하신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든 인생의 정체성을 보여주려 이 땅에 오신 분이시니 예수님이 받으신 시험은 우리 모두가 받는 시험이기 때문에 이 부분을 보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받으신 첫 시험이 무엇이었는가 하면 그것은 <돌로 떡을 만들어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배고프니 돌이라도 먹을 것으로 만들라는 유혹이 아닙니다. 배고파서 마귀의 말을 들으면 마귀의 유혹에 넘어간다는 식의 논리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돌은 율법입니다. 이는 모세가 계명을 돌판에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성경에 ‘돌로 쳐 죽인다’는 사형 집행법은 다른 말로 율법에 의거하여 사형을 시킨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성경 곳곳에서 돌은 율법이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어서 잘 알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먹는다는 것은 그 먹은 것과 우리 몸이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즉 그것이 내 정체성과 삶의 일부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돌을 떡으로 만들라는 것은 율법은 사람이 먹을 수 있는 것, 곧 지킬 수 있는 것이라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가진 정체성의 배고픔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이 정체성의 배고픔은 바로 인생의 목적과 의미에 관한 것입니다. 한 마디로 <왜 사는지?>에 대한 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몸으로 지키면 알 수 있는 것임을 보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마귀에게 돌로 떡을 만들라는 시험을 받으셨다는 것은 우리 모든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켜내면 하나님의 의에 이르고 인생의 목적과 삶의 공허함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혹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특히 마귀는 시험을 할 때 조건을 달았습니다.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는 단서를 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돌을 떡으로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율법을 육신의 행동으로 지켜내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냐?’고 유혹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예수님께서 하신 답은 우리가 잘 아는 대로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이라는 신명기 8장 3절의 말씀으로 답하셨습니다.(마 4:4) 이것은 사람은 밥을 먹지 않아도 하나님의 말씀만 들으면 산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사람이 살았다고 하는 것, 생명도 살았고, 그 삶도 하나님 앞에서 살았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삶이 되는 것이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다시 설명을 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고 나타나는 것이라는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육신을 몸으로 잘 지켜내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했습니다. 행동으로 속을 바꿀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방향이 다릅니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의 삶으로 표현되었더니 하나님께서 그 삶을 살았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마귀는 겉에서 속으로 향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고, 예수님의 정체성은 안에서 밖으로 향하는 생명의 방향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금 율법과 복음을 이야기함에 있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을 이야기하는 것은 모든 사람이 예수님께서 받으신 시험과 같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기 위해서 돌로 떡을 만들어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유혹을 받고 있기 때문입니다. 율법을 몸이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육신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다 지켜 행하여 하나님의 의에 이를 수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겠느냐는 유혹을 지금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객관적 시간이 예수님이 오신 다음 세대를 살고 있기에 복음의 시대를 산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생각해 볼까요?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이 되려면 주일날 예배를 위하여 토요일에 일찍 자고, 말도 경건하게 하고, 주일날도 일찍 나와서 앞에 앉아야 한다.(have to do)’라고 하는 것이 경건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우리가 흔히 듣는 이 말은 행동을 경건하게 하면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영광을 받으신다(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행동을 경건하게 해서 하나님의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된 사람의 삶이 경건해 지는 것입니다. 돌로 떡을 만드는 것, 육신으로 율법을 지켜내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된 예수님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이가 율법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경계한 유대인들의 누룩, 사도들이 경계한 율법주의(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과 같은), 그리고 오늘날 성경(신약성경의 예수님의 말씀이라 할지라도)을 읽고 문자 그대로 육신으로 지켜 살아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모두 예수님께서 받으신 마귀의 첫 번째 시험에 넘어간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율법주의입니다. 예수님과 사도들이 경계한 것이 이것입니다.


율법은 부정한 것이나 터부시할 것이 아닙니다. 율법은 보는 사람의 관점이 중요한 것입니다. 율법은 행동으로 지키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잘 지켜야 하나님의 의에 이른다고 생각하는 것은 결국 의에 이르지 못합니다. 나사를 거꾸로 끼우는 것과 같은데 될 리가 없습니다. 사람이 돌을 먹을 수 없듯이 사람은 율법을 지켜서 의에 이르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생명이 되어 예수님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게 되면 모든 율법이 완성되는 것입니다.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

3. 선악과와 무화과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율법과 복음 Date : 2016. 10. 14. 17:18 Writer : 김홍덕

바로 앞글에서 ‘이것이 옳은 것이야! 그러므로 이렇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하는 것이 율법의 문제를 해결하는 시작점이라고 했습니다. 아마 이것은 많은 사람들에게 생소하고 의아한 논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옳은 것을 옳다고 하는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며, 더욱이 그것이 율법과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과 어떤 상관이 있는가 싶기 때문입니다.


사실 표면적으로 율법이 무엇인가를 따진다면 그리 어려운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십계명과 레위기를 비롯한 구약성경에서 명시한 하나님의 계명이라고 여기면 간단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시고 단순하게 시키는 것만 하는 것을 바라신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은 율법 그 자체가 본질이 아니라, 율법으로 정의된 사람의 행위 양식은 사람 안에 그런 행동 양식을 이끌어내는 본질적인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본질은 바로 하나님의 의,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과 의도입니다. 이는 예수님의 정체성으로 나타났습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되신 분이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의 말씀(의)이 육신으로 나타났다는 것입니다. 그런 예수님께서 예수님 자신을 율법의 완성이라고 하신 것이 그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율법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의가 사람으로 표현된 행위의 모습이지 행위가 속사람을 바꾸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하나님의 의도하심과는 다르게, 다른 방향으로 하나님의 의에 이르려고 했을까요? 여기가 바로 율법이 무엇인지를 풀어가는 입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담, 곧 사람을 만드신 소회를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하셨습니다. 엿새 동안 천지만물을 지으시는 과정에서 보시기에 좋았다고는 하셨지만 유일하게 사람을 만드시고는 심히 좋았다고 하셨고, 무엇보다 사람을 만드시고는 안식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 사람을 지으심으로 달성되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이 바로 하나님의 천지창조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에 대하여 다시 말씀하시를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사람을 만들자.”라고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하셨습니다. 영이신 하나님께서 눈에 보이지 않는 영으로만 계시는 것이 아니라 만물로 그 하나님의 어떠하심을 표현하고자 하심이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사람은 그 모든 만물이 창조된 목적이 수렴되는 집결체이자 모든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도 사람의 육신으로 오신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 지으신 창조물의 최종적인 목적물이 다른 것이었다면 다른 것으로 이 땅에 오셨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듯  이 사람은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히 좋았을 뿐 아니라, 하나님께서 세상을 지으신 목적에 너무나 온전하고 완벽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무한히도 자신이 부족하다 여기며, 수도승과 같이 사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더 온전하다고 생각합니다. 사람의 본성 안에 성욕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고 식욕을 주신 이도 하나님이시건만 하나님과 더 가까워지겠다고 하나님이 지으신 사람 안에 있는 본성을 제어하려 하고 그렇게 할 때 좋은 신앙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이 관점의 차이가 바로 율법을 행위로 지켜내려는 접근을 가져온 것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에 이르기 위하여 어떤 것을 도입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사람이 부족한 무엇인가를 메우려 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것은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너무 연약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것의 시작이 바로 선악과의 사건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사람(아담의 뜻이 사람임)은 본디 하나님께서 온전하게 만드셨습니다. 그런데 마귀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으면 하나님과 같이 된다는 것에 속아서 선악과를 먹었습니다. 그리고서 일어난 일은 사실 마귀의 말 대로 죽는 것이 아니라 눈이 밝아지는 일이 났습니다. 그리고 그 밝아진 눈은 무엇을 보게 하였는가 하면 사람이 자기 스스로를 보니 벗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즉 아무 것도 없더라는 것입니다.


사실 이 선악과에 대한 말씀은 그 하나만으로도 많은 이야기를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은 율법과 복음에 대하여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 관점에서 본다면, 사람이 눈이 밝아져서 보니 자신이 부끄러워 하나님 앞에 갈 수 없어 숨었다는 것을 주목해 봐야 합니다. 이 부끄러움은 아내 하와 앞에서 벗어서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다는 것입니다. 즉 사람이 그 밝아진 눈의 기준으로 사람을 보니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모습이라고 자신이 규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람이 눈이 밝다진 것은 오직 선악과를 먹은 것으로 인함입니다. 선과 악이 사람 안에 들어와서 하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악한 것만 먹은 것이 아닙니다. 선한 것도 같이 먹었습니다. 그러니까 무엇인 선한지 무엇이 악한지에 대한 기준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원래 그런 판단은 하나님만의 것인데 말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셨으니 하나님만이 가지실 수 있는 기준입니다.


대기업에서 중소기업에 제작을 의뢰하면 그 제품의 합부 판정 기준은 주문을 낸 대기업이 가지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에서 그것을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을 보고 사람이 어떻게 하면 선하고, 어떻게 하면 악하다고 판단을 하는 것은 중소기업이 자기가 만들었다고 설계한 대기업의 의사와 무관하게 자기가 합부를 판정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지금도 사람의 일과 세상의 일에 대하여 ‘이렇게 하는 것이 선하다.’ 다시 말해서 ‘이렇게 해야 한다!’라는 말을 합니다. 그리고 그것이 인생의 본분이고, 사람이 불의를 보고서 참으면 안 된다고 하면서 그것이 삶의 목적인양 살고, 무엇보다 삶의 모든 순간을 그렇게 살고 있습니다. 사람이 참지 말아야 할 불의는 오직 하나님의 지으신 사람을 스스로 판단하고 있는 그 불의함 하나 밖에 없는데 사람들이 그렇게 삽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 있습니다. 일단 사람이 부족하다고 여기고 있으니 이래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 <이래야>한다는 기준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그것이 양심이라고 하고, 어떤 이들은 법이라고 하며, 어떤 이들은 능력이라고 합니다. 능력이 있어야 세상을 잘 살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기준을 도입하거나 만듭니다. 그리고 더 높은 기준을 찾는데 그러다보니 당연히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기준으로 하면 모든 것을 아우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으니 이 세상을 사는 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주신 율법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그렇게 행동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워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참 고상한 것 같지만 그 출발이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만드시고 기뻐하신 그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는 것에서 시작했습니다. 그리고는 그 부정함을 바로 잡기 위해서 하나님의 법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서 사람의 부정함을 가리기 위하여 무화과 나뭇잎으로 가렸다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무화과는 이스라엘의 나무, 곧 율법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하나님의 법을 스스로의 기준으로 사람을 부정하게 여기고 그것을 보완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의와는 다르게 거꾸로 지켜내려고 하는 생각으로 율법을 오해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대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표현하는 삶을 살면 그냥 다 표현되는 행동 양식인데 그것을 거꾸로 지키려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율법은 그 자체가 문제 아니라 율법을 대하는 사람들의 가치관이 잘못된 것입니다. 


사람들은 율법을 지키려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지으신 사람의 모습 그대로의 정체성을 회복하여 스스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여 어떤 것은 선한 것으로 어떤 것은 악한 것으로 판단하여 행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의가 자신을 통하여 표현되는 것에 자기 인생의 목적이 있다는 것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을 이루기에 너무 만족한 상태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면 그 사람은 하나님의 사람 지으신 목적,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는 삶이 자연스럽게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그 본성을 표현하듯이 말입니다. 그것이 바로 아버지의 품성이 표현되는 아들이고,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의 정체성인 것입니다. 즉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삶이고, 율법을 완성한 삶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습니까? 사람이 율법을 행동으로 지키려는 것이 합당합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율법이라고 하니 먼 이야기 같지만, 신약 성경을 읽고도 사람들을 그것을 몸으로 지키려고 합니다. 구약 성경의 것은 율법이라 하지만 십일조는 지키고 삼겹살은 먹습니다. 그 어느 것 하나 앞뒤가 맞지 않지만 모든 것을 다 자기 기준으로 해석합니다. 그도 그럴 것은 사람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사람을 판단하는 기준도 자기 안에서 스스로의 생각으로 만든 기준들이니 그 습성과 궤를 같이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 사람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그렇게 율법을 오해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대한 유대인들처럼 말입니다.



'주제별 성경 보기 > 율법과 복음' 카테고리의 다른 글

5. 행함으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0) 2016.10.17
4. 돌로 떡을 만들어라.  (0) 2016.10.16
2. 바벨탑  (0) 2016.10.02
1. 삼겹살, 안식일, 십일조  (0) 2016.10.02
율법이란 무엇인가?  (0) 2016.10.02
,


👉 궁금하고 나누고 싶은 이야기 있으시면 성경은 내 이야기다 오픈 채팅방에 초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