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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16) 남을 판단하는 사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16. 09:18 Writer : 김홍덕

사람들은 남을 판단하고 남 이야기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하다못해 길가는 사람을 보고서도 이렇다 저렇다 말하기도 합니다. 그런 사람이다 보니 교회와 같은 공동체가 되면 사람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거의 일상이 됩니다. 이렇듯 사람이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일상이라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렇다면 왜 그럴까요? 남을 판단해서 좋은 일이 일어나면 그나마 좋은데, 대부분의 경우 그렇지 않음에도 그렇게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먼저 사람이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의 겉모습과 소유의 정도 그리고 지식의 정도와 같은 것은 모두 다 눈에 보이는 것이고 형식이고 DO와 HAVE의 세계에 속한 것이고 그 결과들인데, 그것이 사람과 세상의 본질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생각하기 때문에 사람도 그렇게 보는 것입니다. 사람의 정체성은 그 사람의 형식, 곧 외모와 가진 것과 지식의 정도와 교양의 정도와 같은 것을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것이 그 사람 자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그것이 본질인 존재가 아닙니다. 사람의 모든 행동은 그 사람이 가진 가치관의 표현입니다. 사람의 외모와 행동과 쌓은 능력은 그 사람이 무엇이 좋은 것이고 의로운 것이라고 생각한 결과 그렇게 살았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외모는 본질이 아니라, 그 사람의 가치관이 바로 그 사람의 본질이라는 것입니다.


또 다른 이유는 자기 정체성에 대한 혼돈입니다. 이 이야기가 무슨 이야기냐 하면, 사람은 하나님이 만드신 피조물인데,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문제이고 하나님 앞에 죄입니다. 아니 이것이 바로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범하는 유일무이한 범죄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세계와 그 피조물을 판단한다는 것은 결국 자신이 하나님과 같은 급이라고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당시의 교회들, 로마의 교회를 비롯한 당시 세계의 교회들에게 편지를 함에 있어 예수님을 믿으려면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들, 유대인이어야 하므로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그렇게 경계한 것은 바로 그것이 죄가 되기 때문입니다. 먼저는 사람의 외모, 곧 눈에 보이는 세계를 본질로 보기에 그것이 의로워질 때 하나님께서 의로 여기신다는 신앙관이기 때문이고, 무엇보다 그렇게 하나님의 세계를 자기의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 앞에 유일한 죄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이 자신도 하나님께서 만드신 피조물이라는 것을 망각하고 마치 자신이 세상과 사람의 정체성을 부여한 존재인줄로 착각해서 사람과 세상을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고 눈에 보이는 것을 그 정체성으로 판단하여 본질로 알고 그것을 주장하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이고 또 잘못된 신앙의 완결판입니다.


그런 신앙은 지금도 만연합니다. 교회에 다니고 싶은 사람들이 부담을 가지는 것들도 대부분 이러한 것들 때문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무엇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입니다. 담배를 피던 사람이 교회에 다니면 담배를 끊어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을 하면 갈등하게 됩니다. 왜 그런 갈등을 하느냐 하면 <하나님을 믿는 사람 = 담배를 피우지 않는다.>라는 공식 때문입니다. 기독교인의 정체성이 담배를 피우느냐 아니냐하는 행동을 기준으로 정의가 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에 다니면 십일조를 해야 한다.’라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자기의 수입 전체로도 최소한의 지출을 감당하기 힘든 사람에게 10%는 엄청난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행위가 아니면 하나님이 복을 주시지 않는다. 즉 하나님을 믿는다고 할 수 없다는 공식이 그것입니다. 이것 또한 사람의 정체성,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행동을 기준으로 규정된 것입니다.


이런 것들은 다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의 기준입니다. 사람의 외모와 행위와 같은 겉모습과 형식이 그 사람의 정체성이라고 판단하는 기준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을 꾸짓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앞에서 말씀 드린 것과 같이 하나님의 것을 하나님이 만드신 사람이 자기 눈에 보이는 것을 본질로 알고 판단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서 남을 외모와 겉모습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모든 죄의 근원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것입니다.


사람이 자신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사람의 다양한 겉모습은 어떤 기준으로 사람들을 분류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함을 표현하는 다양성이라는 것을 알면 사람의 겉모습이나 행위의 다양함은 아름다운 것이 됩니다.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아름답다는 것을 느낀다는 것입니다.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기 위하여 존재하는 존재라는 것 그것 하나만 알아도 사람의 다양함은 은혜이고 풍성입니다. 


하지만 이것을 모르면 그 다양함을 분류하는 어떤 기준으로 판단하고 갈라서 이쪽은 옳은 것, 저쪽은 부정한 것으로 나누고(이런 것을 이분법적 사고라도 함) 또 잘 나누는 것이 지혜고 또 그렇게 한 다음에 모든 것을 그 기준에 따라 분류된 옳은 것으로 만들려고 하는 노력은 모두 사람 안에 선과 악의 기준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즉 선악과로 인한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라는 존재는 하나님께서 그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존재한다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합니다. 그것을 알고 그 자리에 거하는 것이 회복이고 구원입니다. 반대로 그렇지 않으면 모든 것이 다 죄가 되는 자리입니다. 이 하나를 알면, 세상은 판단할 여가가 없을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풍성의 풍성으로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양한 사람, 여러 가지 모양으로 예수님을 믿는 모습들은 그것 중에서 어떤 것이 선한 것이냐를 구분하라고 주신 하나님의 시험이 아니라 하나님의 풍성하심이 그렇게 다양하게 나타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하나님의 풍성을 보는 사람에게 사람의 어떤 모습, 어떤 행위도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 모든 것은 다 은혜고 하나님의 풍성하심으로 다가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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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2:1-16) 하나님의 생각과 심판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13. 12:47 Writer : 김홍덕

예전에 아파트에 살 때 경비실에 잠깐 근무한 아저씨가 한 분 있었습니다. 그 분은 청소를 아주 열심히 했는데, 문제는 자기가 청소를 중요하게 생각하고 많이 하다 보니 주민들이 때로 청결치 못하게 만들어 놓으면 잔소리와 불만이 많았습니다.(그것 외에는 대체로 친절했음) 그래서 자기가 분리수거를 잘 정리해 놓았는데 보지 않는 사이에 누가 엉뚱한 것을 버려 놓거나 하면 욕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가지 않아서 그 아저씨는 해고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이유가 어이없게 청소를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열심히 청소했는데 어느 한 부분을 놓쳤는데 그 이유로 해고가 된 것입니다.(물론 청소와 관련하여 때로 욕하기도 한 것이 쌓이기도 했겠지만)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있습니다. 사람에게 어떤 것을 아주 중요하게 여기는 마음이 있는 것은 그 역량과 본성을 하나님의 의를 중요하게 여기도록 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자기가 생각할 때 ‘이것이 옳은 것이다.’라고 주장하는 것으로 그것을 채워서 살고 있습니다. 또한 많은 신앙인들에게 있어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은 종교적인 것이 많습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서 다툼이 있는 것입니다. 


같은 성경을 읽고서 어떤 이는 이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하고 또 어떤 이는 성경의 다른 것이 의롭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교회학교’가 중요하다고 하고, 어떤 사람은 ‘성가대’가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또 어떤 이는 ‘기도’가 중요하다고 하고, 어떤 이는 ‘성경공부’가 중요하다고 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과 의라는 한 뿌리에서 나온 것을 가지고 무엇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심지어 다투는 웃기지도 않는 상황을 만드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 사람이 어떤 것을 스스로 의로운 것이라고 여기는 기준이 죄의 핵심입니다. 그 의를 기준으로 무엇인 선하다, 무엇은 악하다고 규정하기 때문입니다. 스스로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하나님께서 경영하시는 일을 심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고, 그렇게 선과 악을 스스로 판단하는 것이 선악과를 먹은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사람 안에 어떤 의를 담아야 하는지에 따라서 사람의 정체성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마땅히 하나님의 의를 담아야 하는 인간이라는 그릇에 자기의 의로움, 자기가 가진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을 담는 것에서 신앙과 삶의 모든 타락과 문제가 생기는 것입니다. 성경이 말씀하시는 모든 죄가 바로 이것에 관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가 로마서에서 말씀하시는 것도 이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자기 기준, 하나님께서 죄로 여기시는 사람이 스스로 가진 의가 사람을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바울 사도가 이것을 경계하는 것입니다. 사람을 판단하는 것은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기준을 가지지 않고 있다면 애시 당초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왜냐하면 피조물이 창조주가 만드신 것을 어떻게 판단하겠습니까? 그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이 사람의 외모와 그 행동을 보고 사람을 판단한다는 것은 자기 안에 어떤 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어쩌면 사람이 가진 의(義) 중에서 가장 강력한 것(?)은 바로 사람이 스스로 하나님에 대하여 정의를 내린 것입니다. 그래서 예전부터 ‘신학생이 데모하는 것이 가장 무섭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뭔가를 주장한다는 것이 그렇게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 하나님을 믿노라 하는 사람들이 신앙 안에서 어떤 기준을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더 잔혹합니다.


그러므로 바울 사도는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피할 수 없다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글을 시작하면서 예로 든 경비 아저씨와 같이 사람들은 자기가 가진 의로움으로 자신이 심판을 받습니다. 사람이 자기 안에 어떤 의를 가졌다는 것은 그 사람이 그 의로움의 세계에 속한 사람, 그 의가 다스리는 나라에 속한 사람이라는 의미입니다. 그리고 사람은 행위로는 그 어떤 의도 완벽히 지킬 수 없기에 반드시 자기가 가진 의로움으로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의는 다릅니다.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자신의 의로 삼는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 제가 하나님을 믿습니다.’라며 입으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의가 사람 안에 있다면 사람을 볼 때 구분이나 판단할 이유나 원인이 없는 상태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심히 좋다고 하신 세상을 사는 사람,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다스리시는 세상을 하나님의 의와 마음으로 보는데 무슨 재주로 그것을 판단하고 심판하며 당을 나누고 구분하겠습니까? 오히려 그럴 수 있는 것이 이상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자신의 의가 되어 그 의에 의한 안목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 구분되고 판단이 되는 것은 오직 사람이 자기 의를 가지고 세상을 사는 것, 그것만이 불편하게 보일 뿐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리고 그 하나님의 마음은 그 마음이 육신이 되어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과 같이 그런 사람들을 위하여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달리는 십자가의 도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노라하며 사람의 외모와, 세상의 기준인 공로와 소유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특히 신앙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사람은 오히려 더 비참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오히려 하나님을 우상으로 바꾸는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신앙을 가졌으면 사람을 판단할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하여 십자가를 질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이요 그리스도의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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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들의 이단 논쟁

Category : 주제별 성경 보기/교회 Date : 2016. 9. 13. 10:51 Writer : 김홍덕

지진으로 나라가 떠들썩한 날 기독교의 한 교단 통합 측에도 자기들 안에서는 간과할 수 없는 일이 있었다. 그것은 이전에 이단으로 규정한 몇 개의 계파를 “사면”했다는 소식이었다. 그러자 비판의 목소리들이 들끓고 있다. 여론이 어떻던 상관하지 않는 지도자들의 나라라서 그런지 여기도 뭐 딱히 예외는 아니다.


신앙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한다면 가능한대로 비판보다는 대안이 훌륭한 것이지만, 그 훌륭함에 미치지 못함을 무릎 쓰고 이 일에 대해서는 입 한 번 대고 싶다. 도무지 뭐가 이단인지, 누가 이단인지, 그리고 이렇듯 이단 논쟁을 하는 가치관이 무엇인지.




신앙을 설계하는 사람들


이 사건을 페이스북에서 대하고서 가장 먼저 생각한 것은 <사람이 신앙을 설계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사람들에 의해서 어떤 것은 바른 신앙이 되고 어떤 것은 이단이 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하나님을 빙자하여 기독교라는 신앙을 설계하고 운영하고 있다는 것이 드러났다고 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마음에 감동을 주심으로 삶을 변화케 하고,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이 그 모습에서 하나님의 성품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와 같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신앙하는 것이 하나님을 믿는 근간인데, 사람들 마음의 동의는 고사하고 이론적, 상황적 동의도 얻지 못하고 오히려 뭔가 석연치 않은 기운마저 느끼게 하는 결정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그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러한 결정을 내리는 사람들(작자들이라고 하고 싶다)의 정체를 보자. 그들은 대부분 목사나 신학자 그리고 장로들일 것이다. 총회인지 노회인지 뭔가가 그런 부류들의 계모임이니 아마 틀리지 않을 것이다.




교회 타락의 상징, 목사


먼저 목사와 신학자, 그들은 아무 것도 아니다. 신앙이 학문이 되었다는 것에서 이미 교회 타락의 상징이다. 그리고 그 학문이 장벽을 가지고 있다. 바울 사도와 여러 사도들이 그렇게 사람의 어떠함이 사람을 구분하는 기준이 되면 안 된다고 했건만, 신학을 공부하는 공로가 있고, 또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 가르치는 교회에서 얼마나 역량을 보였는가를 기준으로 업적을 쌓아야만 설교 등 배타적인 권리를 가지게 되는 지극히 세상적인 법과 가치관으로 그 자리에 오른 사람들이다. 한 마디로 신앙과 세상의 가치관이 간음하여 낳은 자식들이 바로 목사라는 신분이다. 고멜이 낳은 로루하마(호세아가 고멜에게서 낳은 딸)와 같은 신분이라는 것이다.


목사라는 신분은 지극히 세상적인 가치관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운영되는 자리다. 신앙과 세상적인 가치관과 법이 혼음한 자식이다. 육신으로 하는 것에 대한 공로와 경력의 우월성으로 경쟁하는 것, 행위와 소유(지식과 경험)가 얼마나 더 많은가가 경쟁력인 신분이다. 다만 그 종목이 성경이니까 신앙적인 것이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우기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께서 계실 당시의 바리새인들도 지금의 목사들보다 훨씬 경건했지만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고 껍데기만 하나님을 믿는 회 칠한 무덤이라고 하셨는데, 지금의 목사들을 보고는 뭐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는 부류가 목사다.




이단을 논하기 전에 자기 정체성부터 돌아봐야


그런 그들이 이단을 규정했다 풀었다 하고 있다. 정하는 것도 용서하기 힘든데, 다시 풀고 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천국의 열쇠가 목사나 장로 또 신학을 했다는 신분과 함께 주어지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말했듯이 목사나 그런 신분은 그 자체가 이미 교회 타락의 상징적인 자리다.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있다고 하심이 이를 두고 말씀하셨다는 것은 틀림이 없다.


어떤 논리와 기준으로 이단을 삼고, 또 사면하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해적들이 아무리 서로에게 충성하고 그 안에서 법을 잘 지킨다고 그 논리가 정당화되지 않듯, 논리나 교리는 중요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것을 논할 신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러고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도적질한 것이다. 


세상의 가치관에 의하여 경쟁해서 목사가 되어서 하나님을 논하는 것 자체가 이미 위법이고 그것이 이단의 근본이다. 자신이 이미 신앙과 세상이 결탁한 것이 의로운 것이라고 믿고 가르치고 있는데 그들이 설사 맞는 소리를 해도 다 틀린 것이다. 해적에게 있어서 가장 먼저 할 일은 그 안에 기강을 바로 잡는 것이 아니라 나라에 투항하는 것이듯, 목사나 신학자들은 무엇이 이단이고 또 어떤 것은 사면한다고 논의할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정체성이 하나님 앞에서 바른 것인지 부터 돌아봐야 할 것이다.




세상에서 성공하면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는 생각이 이단의 뿌리


이단은 달리 이단이 아니다. 하나님의 법에 세상의 가치관을 결합하면 이단이다. 그것이 타락이고 죄다. 선지자들에게 책망 받던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을 버린 것이 아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과 세상의 가치관을 결탁했다. 하나님을 믿어서 세상에서 이기려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성전에 이방 신상을 두지 않았을 때도 하나님은 제사조차 싫어 하셨다. 매일 와서 하나님께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 육신의 삶에 관한 것을 구하니 그랬던 것이다.


지금도 교회를 보라. 모든 교회가 하나 같이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외치고 있다. 세상의 가치, 애굽의 가치관에서 이기게 하시는 분이 여호와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세상의 법에 져서 십자가를 지셨는데 그 십자가의 도를 믿는다는 교회가, 또 그것을 공부했다는 신학과 그 패륜적 지위인 목사는 오히려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이라고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이단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런 그들이 이단을 논하고 있다. 이단을 정하기도 하고 사면하기도 한다. 자신들의 간음의 자식이라는 것도 모른 체, 오히려 사람이 신앙을 설계하고 결정하고 조작하고 있다는 것만 드러낸 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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