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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4-32) 상실한 마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12. 12:12 Writer : 김홍덕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행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롬 1:28-29)


바울 사도는 본문에서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사람들을 그대로 내 버려두셨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이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을 <상실한 마음>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 싫어하는 마음이 상실한 마음이라고 표현한 것이 아주 핵심이라 생각이 됩니다.


사람이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는 것이 상실한 마음이라는 것은 사람은 그 마음에 하나님을 두어야 하는 존재라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후반부에 해당하는 12장에서 “너희 몸을 산제사로 드리라”고 하였는데 그것도 이 말씀과 같은 말씀이라 살 수 있습니다. 산제사로 드리라는 것은 사람을 산채로 불태워 제물로 바치라는 것이 아니라, 그 삶이 마음에 하나님이 거하시는 삶을 살아서 제물이 하나님께 흠향되듯 그 삶으로 하나님의 성품을 표현하는 존재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아주 핵심적인 말씀으로서 사람이라는 존재가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그 삶이 불의하게 되느냐 아니냐의 문제가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은 사람들이 가진 모든 죄의 문제가 바로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사람이 범하는 모든 죄 행위는 그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아니냐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모든 죄의 문제가 바로 그 마음에 하나님이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


하나님께서 사람들이 마음에 하나님을 두지 않으려 하는 것에 대하여 방치하시듯 하는 것은 하나님이 삐치신 것이 아닙니다. 그 마음에 이미 하나님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은 다른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의 하나님입니다. 자기 마음에 이미 세상과 사람을 볼 때 ‘이래야 된다!’라는 분명한 의를 가진 신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자기의 하나님>입니다.


사람들이 가진 자기 의의 기준, 그것이 세상에 있는 모든 범죄의 원인입니다. 세상은 절대로 자신이 죄인이라는 사람으로 인하여 시끄러워지는 일은 없습니다. 세계 평화를 외치는 사람이나, 자신의 주장을 주장하려고 사람을 죽이는 일이나 모두 자기 안에 자신의 하나님이 있어서 그 하나님이 가진 의로움을 주장하는 것이라는 것에서 같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세상은 ‘이것이 옳은 것이다!’ 주장하는 사람들로 인해 시끄럽고, 죄악이 넘치는 것입니다. 그것 외에는 세상에 죄도 없고, 잘못된 것도 없습니다. 그런 하나님, 사람이 선악과를 먹고서 스스로 선과 악을 판단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아니면 세상은 참 온전하고, 사람은 너무나 온전한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여호와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과 또 여호와 하나님께서 만드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다.’고 한 사람이 부족하거나 죄인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 상태가 죄인이라면 하나님은 온전하신 분이 아닙니다. 여호와 하나님은 절대로 그런 분이 아닙니다.


또한 모든 사람들이 가진 죄의 문제도 여기에 답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범하는 모든 범죄 행위는 그 행위 자체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 범죄를 자아내는 마음의 문제, 가치관과 안목의 문제입니다. 성경은 그 마음이 바로 하나님을 떠난 것이라고 말씀하고, 하나님을 그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는 것이라고 하였으며, 가장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라고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모든 죄는 사람이 스스로 옳다고 주장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 그것이 전부입니다. 그 마음으로 인하여 자신이 만든 것이 아닌 세상과 사람을 보고 이것이 선하다 저것이 악하다고 판단하고 있는 것, 그것입니다. 그 마음 하나로 인하여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죄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마음만 돌아서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순간, 어떤 삶도 죄인이 아닌 것입니다.


성경의 말씀을 상고해 보면, 우리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거하실 성전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또 사람은 질그릇이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그리고 가장 먼저 창조하실 때는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했습니다. 이 육신을 가진 형이하학적 모습, 실존하는 이 육신이라는 형식은 하나님이 거하시는 것이 존재의 목적이라는 것입니다. 그 상태가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고 의로움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렇게 사람의 삶과 육신 안에 하나님이 계신다는 것은 그 사람의 삶의 의미와 목적, 그리고 존재의 목적이 바로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시고 뜻하신 것이 그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께서 거하시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고, 그것이 바로 사람과 하나님이 하나가 되는 것이고, 그 상태가 바로 그리스도, 곧 하나님의 아들인 것입니다. 그러니 그것이 없는 마음은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이고, 그 상실한 마음에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이 아니라 자기가 스스로 하나님이 되려고 가진 선과 악에 대한 자기 의가 자리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 사도는 그렇듯 마음이 상실된 사람은 자기 마음에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 자신의 의, 자신의 기준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사람을 그렇게 보고 세상을 그렇게 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혈통이 어떠해야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하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자기가 어떤 혈통에 속해서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혈통이 의와 선의 기준이 되어 그 혈통이 아니면 불의하고 악하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떤 이는 자기가 가진 행함의 기준이 있어 그 행함이 있느냐 아니냐에 따라서 의롭거나 아니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기준은 신앙적 요소 역시 예외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앙적으로 어떤 것이 갖추어지거나 공로와 행함이 있어야 의롭다고 여기는 것이 그것입니다. 신학을 해야 설교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로마서 2장으로 넘어가는 첫머리에 ‘판단하는 사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판단한다는 것은 사람이 가진 기준으로 판단하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을 판단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의가 마음에 있는 사람은 사람을 볼 때, ‘신앙이 없으니 훈계해야겠다.’고 판단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앙 없는 사람이 하나님을 알도록 긍휼한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이 주신 육신으로 수고하게 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에 있어 사람을 외모로 판단하는 것은 단순한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을 외모로 판단한다는 것은 이미 그 마음에 판단하는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기준은 선악과,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하나님이 만드신 것을 판단하는 것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그 기준이 사람을 판단하고, 행함이 하나님 앞에서 의로움이라 하며, 무엇보다 세상의 모든 죄악의 뿌리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판단하는 마음이 있다는 것은 바로 하나님을 상실한 마음이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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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주이심을 믿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사실 하나님을 창조주로, 그리고 하나님은 실수를 하지 않으신 완전하시고 온전하신 분이라는 것을 믿고 있다면 신앙은 그 자체로 온전한 신앙이라 할 수 있습니다. 신앙이 하나님을 창조주로만 제대로 믿어도 온전하다는 것은 많은 신앙이 그렇지 못하다는 것이라는 설명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장조주로 믿는다는 것은 신앙의 근본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하나님을 창조주로 자신과 세상의 창조주로 믿는다면 신앙은 참 단순하고 쉬우며 또 온전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믿는 것이 어려워서 공부를 해야 한다거나, 살아가면서 이것과 저것 중에 어떤 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인지 고민하는 것과 같은 갈등이란 원천적으로 없어진다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을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 이유는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기도 하지만 자신들이 하나님을 분명히 창조주로 신앙하고 있지만 신앙은 늘 어렵고 선택의 문제가 숨 쉬듯 있으며 심지어 새벽 기도회부터 교회가 또 성경이 시키는 것을 열심히 하면서 살지만 늘 자신의 신앙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마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창조주이심을 믿고, 온전하신 하나님께서 실수 없이 세상을 다스리고 계시다는 것, 그것 하나만 온전히 믿고 있다면 세상은 정말로 평안 그 자체입니다. 아니, 온전하신 창조주께서 실수 없이 다스리시는 세상에 그 하나님을 신뢰하면서 살고 있는데 뭐가 문제입니까? 삶에 문제가 있다면 분명히 둘 중에 하나입니다. 하나님이 온전치 않거나 아니면 자신이 하나님을 잘못 믿고 있거나. 이정도 생각도 할 수 없다면 그것은 정말로 맹신이고 신념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 말씀과 이어지는 로마서 3장에서 하나님께서 의로운 믿음으로 보시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사람의 행위나 혈통에 관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의가 그 안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그러니까 행위나 혈통과는 무관하게 믿음만 있으면 된다는 것을 말씀하였습니다.


바울 사도가 그렇게 율법과 율법을 지키는 행위가 하나님의 의가 아니라고 말씀하기 위하여 지금 그 서론을 이야기해가고 있는 것입니다. 로마서는 기독교 신앙에 있어 이 신앙을 이론적으로 설명함에 있어 절대적인 위치를 가지고 있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그것이 신학적인 고증과 연구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로마서가 그렇게 절대적인 권위를 가진 것은 역설적으로 그만큼 사람들이 로마서를 통해서 바울 사도가 말씀하시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에게 있어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너무나 아쉽게도 행함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 시대의 많은 사람들이 달력의 시대로 신약시대 그 이후를 살아가고 있다고 자신들의 신앙도 신약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약의 시대에 살고 있다는 것은 이 로마서를 기준으로 본다면 행함이 아니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이 시대가 아니라 서기 3,000년 이후에 산다고 해도 그 사람의 신앙 안목이 행위로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된다고 여긴다면 그는 구약시대의 사람이고 율법 시대의 사람입니다. 


그리고 율법이라는 것도 모세 오경이나 십계명이나 또 옛날 유대인인들 혹은 이스라엘의 보수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의 신앙 규범을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성경을 읽고서 ‘이렇게 행동하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고, 또 심지어 그렇게 가르치는 사람은 복음서도, 바울의 서신서도 다 율법입니다. 성경을 읽고서 행동강령으로 여기는 것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거짓으로 바꾸는 사람의 정욕


그렇다면 사람들은 왜 그렇게 자신의 행동을 가지고 하나님 앞에 나가려고 하는 것일까요? 이것을 생각하기 위해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든 장면을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마귀가 아담을 유혹할 때에 하나님께서 선악과를 먹지 말라고 한 이유가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담을 속인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한 마디로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분으로 바꾼 것입니다.


그리고서(마귀의 말을 듣고서) 아담이 선악과를 보니 ‘보기에도 좋고 먹기에도 좋아 보였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먹었습니다. 사람 마음 안에 있는 정욕, 곧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마음이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선악과는 이 블로그의 창세기에서 또 따로 자주 언급한 내용인데 단순히 먹지 말라고 한 과일 하나를 먹은 불순종의 문제가 아닙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스스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분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자기가 옳다고 여기는 의의 기준을 가지게 된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람이 어떤 것은 선으로 또 어떤 것은 악이라고 판단하는 마음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드신 세상에, 하나님의 피조물로 살면서 세상의 일과 자신의 존재 정체성에 관하여 어떤 것은 선한 것이라 하고 또 어떤 것은 악한 것이라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과 같이 된 것이고 선악과를 먹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상을 살면서 자기 인생에 문제가 있다고 여기는 모든 것은 하나님을 불신하는 것입니다. 문제가 있다고 여기기 위해서는 반드시 기준이 있어야 합니다. 어떤 기준으로 보니 문제가 있고 잘못되었다고,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여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창조주로 또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처음에 이야기 한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실수도 않으시고 온전하시며 그 온전하심으로 이 세상을 창조하시고 경영하신다는 것을 믿는데 세상과 인생의 어느 부분이 하나님의 경영하심을 벗어나서 문제가 있다고 여길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의 눈을 피할 수 있거나, 하나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있다는 것입니까? 시편 기자가 동쪽 끝에도 서쪽 끝에도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셨는데 도무지 어디에 하나님의 경영하시는 공백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그 경영하심이 온전하다는 것 그것 하나만 믿으면 신앙은 정말로 온전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귀에게 속아서 하나님을 거짓말 하시는 분으로 만든 아담과 같이 그 마음에 선악과 곧 선과 악에 대한 기준을 가지고 하나님이 만드신 세상을 감히 피조문인 주제에 ‘이것이 옳다.’며 주장하고 그렇게 동의하지 않으면 하나님이 당신의 성품을 표현하시기 위하여 지으신 사람을 자기 맘대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이 하나님을 거짓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이 바로 사람 마음의 정욕입니다.


사람은 절대로 부족하지 않습니다. 세상도 절대로 문제없습니다. 사람을 부족하게, 또 세상을 문제투성이로 보는 것은 모두 그 사람의 기준입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에 죄악이 관영하다고 하시는 것은 그렇게 사람들이 하나님과 세상과 자신을 보는 그 안목, 스스로 하나님과 같이 되려하여 자기 기준으로 사람과 세상의 일을 ‘선하다’. ‘악하다’ 판단하고 규정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 넘쳐나는 것을 두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들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그 주장이 세상을 혼란스럽게 하고, 서로 위해하며 전쟁하고 다투고 죽이고 미워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생각이 의로우니 그대로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그렇게 안 되면 폭력을 쓰고 사람을 괴롭히기 때문에 세상이 시끄러운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자기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이어야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외모가 어떻고 혈통이 어떠하면 지식수준이 어떠하며 또 얼마나 교양이 있는지를 가지고 선하고 악한 것을 나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이 말씀하시는 사람에 대한 판단입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그것을 이야기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니며, 하나님의 정체성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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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24-32) 마음의 정욕과 간음

Category : 평교인의 성경 보기/로마서 Date : 2016. 9. 9. 19:32 Writer : 김홍덕

로마서 1장 24,25절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가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롬 1:24-25)


그런데 이 말씀은 뭐랄까? 해수욕을 즐기기 위하여 바다로 들어가다가 갑자기 물이 깊어진 것 같이 말씀의 강도가 확 깊어지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앞에서 문안 인사를 하고 로마에 가서 신령한 은사를 나누어주겠다고 덕담을 하던 바울 사도가 갑자기 돌변한 듯 심각한 책망을 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책망은 누구를 향한 책망일까요? 그것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유대인을 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또 그런 생각과 궤를 같이하는 생각인 육신의 어떠함을 믿음의 조건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의 그런 생각이 바로 마음의 정욕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람이 가진 육신의 어떠함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을 두고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워지는 것이라고 말하기에는 좀 과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더욱이 바울 사도는 이 말씀에 이어서 남녀의 간음 특히 동성애를 연상케 하는 말씀을 하고 있는 것이 더욱 그렇습니다. 사람의 겉모습을 가지고 믿음의 대상이 되느냐와 또 좋은 믿음은 육신의 어떠함과 연관이 있다고 하는 것이 마음의 정욕과 육신의 간음에 해당한다고 하는 것은 좀 과한 것으로 여겨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바울 사도가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은 결코 과한 것이 아닙니다. 사람이 가진 마음의 정욕과 하나님 앞에서 간음은 뿌리가 같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뿌리에서 난 생각이 교묘하게 하나님을 믿는 신앙과 결탁하면 사람을 외모로 보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 뿌리는 다름이 아니라 <“무엇이 본질이냐?”> 하는 것에 관한 것입니다. 어떤 것을 본질로 또 근원으로 생각하느냐에 따라서 모든 생각과 행동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가 언급하고 있는 신앙관은 무엇을 본질로 보기에 마음의 정욕이고 또 간음하는 것이며 또 사람을 외모로 취하게 되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눈에 보이는 이 육신의 삶을 본질로 보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볼 때도 사람의 외모, 즉 세상에 속한 육신의 어떠함을 그 사람의 정체성으로 보기 때문에 그 사람의 어떠함을 하나님을 믿는 마음과 동일하게 보게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렇게 사람의 외모, 혈통이나 지식의 정도가 예수님을 믿는 조건이나 자격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정욕이라고 했습니다. 육신의 외모를 본다는 것, 그것이 신앙의 기준과 자격과 조건이 된다는 것은 신앙의 본질이 육신의 일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즉 육신의 마음은 늘 자기 육신의 문제를 걱정하는 것이기에 육신의 일을 본질로 보는 것이 바로 마음이 가진 사욕과 정욕이라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행위나 외모나 혈통이나 지식이나 재산의 정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먼저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행위나 혈통이나 지식이나 가진 재산을 의로 여기시는 분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본질로 여기시지 않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이 하나님께서는 본질로 여기시지 않는 것을 본질로 여겨 그것을 믿음의 본질로 까지 여기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사용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혈통을 기준으로 판단하시지 않고 그 중심에 하나님께서 사람을 지으신 목적이 있는지를 보시는데, 사람이 혈통을 기준으로 구원을 받는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의도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즉 의롭지 않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안목이 간음과 상관이 있다는 것입니다. 간음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자기 짝이 하닌 것과 하나가 되는 것, 그것이 간음입니다. 남자와 여자를 순리대로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언급한 것은 하나님께서 만드신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는 것이 간음이기 때문입니다. 남자가 여자가 순리대로 서로를 대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려고 남자와 여자를 만드신 것인데 그 순리 곧 하나님의 뜻을 떠나서 서로를 대하는 것이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간음은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을 보지 않는 것도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남자와 여자는 서로를 대하는 순리가 있는데 그 순리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 목적과 의도대로 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남자와 여자가 서로를 순리대로 사용하지 않는 안목이나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대로 사람이 살지 않는 것이나 동일하게 자기 짝이 아닌 것과 연합하는 것이기에 다 간음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보실 때에 사람의 의모를 보시지 않습니다. 사람의 외모는 사람의 중심에 있는 것이 각양의 사람의 외모로 표현되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온 땅에 충만하시고 풍성하시기 때문에 혈통의 다양함으로 하나님의 풍성이 표현되고, 지식의 다양한 격차를 가진 사람으로 또 표현되며, 사람의 생김새와 살아가는 모양과 성격과 같은 그 모든 외모는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의가 그 만큼 다양하게 표현되기 위한 것이지, 그것이 구원의 기준이 된다거나 사람의 정체성, 곧 하나님께서 사람을 만드신 목적의 본질로 볼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을 그렇게 보는 것이 바로 순리대로 대하지 않는 것이기에 남자와 여자를 순리대로 대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 만큼 사람을 외모로 보는 것은 하나님 앞에 큰 죄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사람의 외모와 그 외모의 공로를 의로 여기사는 하나님을 보지 않는데 그것을 본질로 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그렇게 사람의 외모와 공로와 소유의 드림을 의로움으로 보시는 하나님으로 본다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이 여기는 것이기도 합니다.


이렇듯 믿음이란 사람의 행위나 혈통이나 지식이나 소유의 드림과 무관하다는 것을 아는 것은 신앙에 있어 절대적인 것입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 교회에 편지를 하면서 이렇듯 엄한 말씀을 하는 것은 믿음에 대하여 바르지 않은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서 영향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지금도 많은 신앙인들이 그 마음에 하나님을 믿는 순전함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도, 교회에서 방언과 같은 은사를 받은 사람을 보고 신앙이 좋다고 말하고, 또 장로를 선출할 때 재력을 보고 선출하는 것을 보면 자기 마음에 가진 신앙에 대하여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들게 됩니다. ‘나도 방언 같은 은사가 있어야 내 신앙이 온전한 것인가?’라고 생각하게 되고, ‘세상에서 성공해서 교회에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하나님이 복을 주신 것이구나!’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방언이나, 또 아니면 모태신앙이라는 것이나, 재력이나, 교회에 봉사하는 시간이나 노력과 같은 것은 하나님께서 의로움으로 보시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들은 다 사람 안에 있는 생각이 표현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에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생명)가 있어서 그러면 모르겠지만, 앞에서 말한 것과 같이 순전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가 그런 것이 신앙의 증거요 좋은 믿음이고 복이라는 생각에 그것을 얻는 것이 좋은 신앙이고 믿음이라고 여겨서 그렇게 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군인이어서 군복을 입는 것인데, 군복을 입으면 군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자신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자신의 육신이 어떠한 것에 무관하게 하나님은 자기 안에 있는 의를 의로움으로 여기신다는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바울 사도는 이것을 로마에 있는 성도들에게 전하려 했습니다. 그것을 <신령한 은사>라고 말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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